여기 토끼 같은 여자와 거북이 같은 남자가 있다. 지금까지 토끼와 거북이를 생각해보면 둘은 결코 친해질 수 없는 경쟁상대로 인식되어오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토끼와 거북이는 1:1 무승부이다. 토끼는 거북이에게 간을 빼앗기지 않았으므로 1승을 거두었고 거북이는 달리기에서 토끼를 제치고 결승점에 도달하였으므로 결론은 무승부이다.
그런데 이 둘의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수씨하고 민주씨 잠깐 내 자리로 와볼래요?”
팀장의 부름이다. 민주는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네! 라고 대답하며 재빨리 쪼르르 팀장의 자리로 달려갔고 현수는 민주보다 한 박자 늦은 대답고 걸음으로 팀장의 자리로 갔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프로젝트에서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 어려운 건 아니고, 음. 보자. 그러니까.”
팀장도 부장님께 듣고 온 업무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부장이 넘겨준 업무자료를 이리저리 넘기며 쓸데없는 단어로 말을 이어붙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팀장은 말을 이었다. 이 둘이 해야 할 일이 정리가 된 모양이었다.
“이번 테마는 갯벌이야. 갯벌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우리 회사 이미지를 잘 부합해서 진행해보도록 하라고. 체험이나 코스, 맛 뭐 다양하잖아? 잘 할 수 있지?”
팀장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비교적 간단했다. 그런데 프로젝트 업무를 맡은 이 둘의 조합이 문제였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둘이었지만 한 편으론 그리 나쁜 조합도 아니었다. 토끼 같은 여자는 아이디어가 좋았고 간간이 분위기도 잘 띄우는 사람이었다. 거북이 같은 남자는 조용하고 남들보다 한 박자 느렸으나 성실함만큼은 누구도 따라오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가 이 둘에게 떨어졌다. 팀장은 아이디어가 좋은 여자와 성실한 남자를 붙여놓기로 한 것이다.
회사의 여직원들은 어떻게 저렇게 답답한 사람이랑 일을 하냐며 민주의 하소연을 들어주었고 남직원들은 꾀만 부리면서 일하는 것보다 현수씨처럼 일하는 것이 정석이라며 각자의 편을 들어주었다.
둘은 시장조사도 해야 했고 갯벌에도 다녀와야 했음으로 온종일 거의 붙어있다시피 해야 했다. 민주는 매번 너무 꼼꼼하고 느린 성격의 현수가 답답했고 현수는 계획 없이 밀어붙이기만 하는 민주가 못미더웠다. 둘은 거의 각자 스타일대로만 기획안을 만들기 시작했고 팀장은 다시금 그 둘을 불러 세웠다.
“도대체 이게 뭐야? 둘이 같이 조사한 것 맞아? 누가 기획안 따로따로 작성하래?”
“팀장님 그게 아니고.”
“아니고 맞고 간에 오늘 둘이 사천 내려갔다와. 거기 갯벌에서 뒹굴든 치고 박고 싸우든 알아서 해. 제대로 된 기획안 가져오기 전까지 서울 올라올 생각도 하지 말고, 알겠어?”
팀장은 민주의 말을 매정하게 끊은 채 톡 쏘아 붙였다.
민주와 현수 둘은 하는 수없이 사천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둘은 도착하기 전까지도 한 마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착한 곳. 둘은 사전조사를 위해 섬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토끼가 하늘을 나는 듯한 모양의 섬이었다. 마을에 거주하는 할아버지께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가 내려져 있는 곳이라고 했다.
정신없이 섬을 둘러보다보니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둘은 말없이 떨어져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이 섬이 토끼와 거북이에 관한 섬이래요. 마치 우리를 닮은 것 같네.”
“이번 내기에서는 누가 이길 것 같은데요?”
“아직도 둘 중 누가 이길 것 같은 게 중요해요? 참. 이번 경기에서는 누가 이기고 지고 할 게 없다고요. 아까 팀장님 말 기억 안나요? 둘이 머리 싸매고 함께 해야 한다고요.”
토끼 같은 여자와 거북이 같은 남자는 서로 마주보고 싱긋 웃었다.
창밖에는 바닥이 하얗게 변할 만큼 꽤 큼지막한 눈발이 하얗게 나렸다.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또 저 노래다. 지겹지도 않냐고 물어보려다 가자마 눈을 하고 흘기는 것이 무서워 관둔다.
“그래, 창 밖에 봐봐, 당신이 요즘 그렇게 목청껏 불러 마다않는 겨울이야. 근데 원래 넌 여름이 더 좋다고 하지 않았어? 사람들도 활기차보이고 무엇보다 보기만 해도 뼛속까지 시린 얼음골 폭포 보는 거 좋아했잖아. 겨울은 너무 추워서 싫다며.”
“응, 여름도 좋아. 그런데 난 우리 아이는 겨울에 태어났으면 좋겠어.”
아내는 갑자기 태어나지도 아니 계획에도 없던 아이이야기를 꺼냈다. 아내는 당황한 내 표정을 본체만체하곤 아이 그리고 겨울이야기를 독백처럼 떠들어댔다.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좋지.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하니까.”
오늘은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만 떠들어 댄다고 핀잔을 주려다 꾹 참는다. 아내는 가끔 나로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러니까 논리에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전형적인 이과남자라며 이과생이 문학과 정서를 이해할 수 있겠냐며 소설책을 읽고 있는 내 손이 민망해 질 정도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물론 오늘도 괜히 덤볐다가 본전도 못 찾을 것이 뻔했기에 잠자코 아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여름은 시원한 곳으로 찾아가니까 우리가 매년 얼음골로 피서를 가는 것처럼. 그리고 민소매도 마음껏 입을 수 있고. 그러니까 여름은 시원한 거고 겨울은 흰 눈이 온 세상을 감싸니까 왠지 따뜻해보여. 연말엔 기부도 많이 하니까. 안 그래?”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겨울 겨울 그런다. 흰 눈이 그렇게 보고 싶었어?”
“아니. 아주 시원하고 달콤한 사과 때문에.”
사과? 네가 사과를 좋아했던가? 연애만 4년 그리고 결혼 2주년까지 총 6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네가 사과를 특별하게 좋아했다는 것을 몰랐다. 내가 무심했던 건가 생각해보지만 특별히 그렇지도 않았다.
“사과? 겨울하면 넌 사과가 생각난다고? 군밤이나 군고구마도 아니고?”
“그래. 사과! 아. 생각하니까 먹고 싶다.”
아내는 해맑은 표정으로 사과를 떠올렸다. 절로 군침이 도는 모양이었다. 아내는 특별히 과일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다. 그저 철이 되면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과일들 중 하나를 골라 집어 의무적으로 섭취하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사과? 먹고 싶으면 사다줄까? 이렇게 추운데. 눈이 펑펑 오는데?”
괜히 맘에도 없는 말을 던져본다. 그것도 암묵적으로 가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말이다. 설마 다녀오라고 할까.
“정말? 그래 주면 좋고. 아참, 그냥 사과 말고 꼭 얼음골 사과로!”
오랜만에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낸다. 싫은 티를 팍팍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주면 좋다는 대답아 날아온 걸로 보아서는 어지간히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알겠어. 추우니까 요기 따뜻한 이불 속에서 조금만 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오리털 점퍼를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큼지막한 눈발이 내렸지만 앞이 안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호호 나오는 겨울이었다. 아내는 이 한겨울에 이름만 들어도 등골이 서늘한 얼음골 사과를 먹고 싶다고 하는지.
과일 가게 앞에서 서성일 필요도 없이 사과를 찾았다.
“어머, 색시가 아기를 가졌나 보네, 얼음골 사과를 찾는 거 보니. 아삭하고 달콤한 게 태기가 있을 땐 그런 게 땡기는 법이거든.”
“아기요? 에이. 아니에요.”
“그래? 난 또. 아무튼 야무진 놈들로만 골랐으니 얼른 가져다 줘요.”
아기라고? 에이 설마. 갑자기 걸음이 빨라졌다. 아내가 혹시 숨기고 있던 건가? 그래서 아까 아이 이야기를 꺼낸 건가? 머릿속이 흰 눈송이만큼 하얘졌다. 빠른 걸음으로 집 앞에 도착했다. 턱 끝까지 숨을 몰아쉬고는 문을 열었다.
“사과 사왔어! 아주 시원하고 아삭한 얼음골 사과”
아내는 이불 속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파란 눈에 오뚝한 코. 검은 머리에 흰 피부를 가진 내 이름은 레이나이다. 아빠는 한국계 독일 사람이었고 엄마는 한국 사람이다. 나는 아빠를 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아빠가 있다. 새아빠. 새아빠는 재미교포 2세다.
엄마는 이국적인 취향을 가졌나보다.
어렸을 때 나는 누구보다 애국가를 힘차게 불렀고 누구보다 빨리 외웠다. 조회시간에 국기에 대한 경례도 열심히 했다. 그래서 운동회 날 개회식에 대표로 조회대에 올라 애국가 제창을 하기도 했다. 나는 내가 노래를 잘 불러서 그런 줄 알았으나 나중에 알기로는 신선한 문화적 느낌에서랄까 그래서 나를 쓴 모양이었다.
새아빠는 내게 친절하고 상냥하다. 항상 나를 존중해 주었고 내 앞에서 엄마와의 애정표현도 잘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난 새아빠가 엄마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엄마는 내가 친아빠에 대해 궁금해 하는지 안 궁금해 하는지도 묻지 않았다. 돌아가셨는지 일찍이 이혼을 하신건지조차도 모르고 지냈으니까. 내가 먼저 물어봤어야 하나 아니면 엄마가 먼저 말해줬어야 하나. 이건 마치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묻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다들 내가 우리나라 말을 능숙하게 하는 것에 대해 신기해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고 바보 같다고 생각했으나 아주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외국인이 영어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는 것같이 느껴졌을 테니까.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일 년에 한 번씩 남해로 나를 데려갔었다. 그곳에는 공교롭게도 미국마을 그리고 독일마을이 있었다.
그곳에는 아빠를 닮은 사람도 새아빠를 닮은 사람도 많았고 나는 그들속에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엄마는 내가 열세 살이 되던 날 처음으로 친아빠 이야기를 해주었다. 친아빠는 참 멋있는 사람이었다고 했고 특히 오뚝한 코가 제일 멋있었다고 했다. 내가 아빠를 닮아서 다행이라고 하면서.
엄마는 나중에 내가 다 자라고 나면 이곳에 내려와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짓궂게 미국마을에서 살 것인지 독일마을에서 살 것인지를 물었다. 엄마는 내 콧잔등을 가볍게 치며 다랭이 마을에서 농사지으면서 살겠다고 하기도 했다. 거짓말.
어렸을 적 나는 엄마와 외할머니가 싸우는 걸 몰래 엿본 기억이 있다. 할머니가 엄마에게 못된 소리를 하기에 엄마가 무엇을 잘못했나보다 생각을 하긴 했으나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친아빠가 아직 돌아가신 건 아닌가 보다 라는 일종의 정보만 얻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 정보를 듣고 난 후에도 나는 엄마에게 친아빠에 대한 유무를 확인하지 않았다. 친자식이 아빠를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나는 그것이 마치 엄마를 힘들게 하는 못된 짓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아빠라는 단어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처럼 쉽게 내뱉지 못하며 자라온 것도 있다. 그래서 인지 아니면 엄마가 다시 만난 사람도 외국인이어서 그런지 나는 아빠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않는 새아빠가 고마웠다.
나는 사실 엄마보다 새아빠와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내게 새아빠는 아빠가 보고 싶지 않느냐고 먼저 물었다. 나는 그저 새아빠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보고 싶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보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할까.
나는 엄마가 아빠와 왜 헤어졌는지 궁금했다. 언젠가 아빠를 만나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어디에 계신지 내가 만나볼 수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아빠에게.
내가 아빠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이 독일 사람이고 코가 오똑하며 예쁘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가끔 엄마 몰래 혼자 남해를 찾아오곤 한다. 독일 마을에 내가 알지 못하는 우리 아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흰 벽에 주황색 지붕을 한 어느 따뜻해 보이는 집에 나와 닮은 오뚝한 코를 가진 독일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언젠가 나와 닮은 외국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아주 반가운 얼굴을 하고 손을 흔들어 줄 것이다. 이렇게 예쁘게 잘 자라고 있다고.
비슷비슷하게 생긴 건물을 높이 올려다보려니 핑하고 현기증이 났다. 퇴근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행인이 많았다. 지수는 선배가 소개해 준 도자공방을 찾는 중이었다. 공방 이름과 간단한 약도가 적힌 메모지를 들여다보다가 비슷비슷하게 생긴 건물을 한번 더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고약한 냄새를 풍기던 은행나무에 손을 짚고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대었다. 여기가 아닌가 싶을 때 지수의 눈에 들어온 자그마한 공방 하나.
지수는 회사에서 맡게 된 ‘우리 고장 바로 알기’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내야 했다. 입사 후 처음으로 맡은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지수는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다. 도자기라니 말만 들어도 지루하고 따분했다. 지수는 학창시절 여학생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한 십자수니 비즈공예니 하는 것들에 눈길 한번 준 적이 없었다.
또각거리는 신발을 다시 한 번 고쳐 신은 지수는 자그마한 공방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널찍한 실내에는 갖가지 도자기와 사기그릇, 앙증맞은 실내 인테리어 장식품까지 단정하게 놓여있었다. 문에 걸린 종이 딸랑거리자 상냥하고 단정해 보이는 여자가 나왔다.
어서 오라는 여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자기 만드는 법 좀 배우러 왔다며 용건을 말했다. 지수의 급한 성격이 여기에서 나왔다. 여자는 친절히 지수를 안내했다.
지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조심스럽게 흙을 만졌다. 반죽된 흙을 쓰다듬듯이 만지는 지수를 보고 여자는 주물러 보라고 했다. 지수가 공들여 받은 네일아트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쉬워 보였던 물레를 돌리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정신집중을 하지 않으면 금세 틀에서 벗어나기 일쑤였다.
‘하아, 따분해.’
지수의 속마음이라도 들리는 걸까 여자는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대꾸했다.
“많이 따분하죠? 처음 하시는 분들은 다들 그러시더라고요. 영화나 텔레비전으로는 쉬워 보이죠. 그런데 정신 집중 안 하면 틀 하나 잡는 것도 어려운 게 바로 도자기에요.”
지수는 정신을 집중했다. 손의 감촉을 느끼고 흙이 전해주는 소리와 느낌에 신경을 기울였다. 질척거리지만 부드러운 그 촉감을 손끝 감각으로만 느끼려 했다.
‘아, 살아있는 것 같아.’
지수가 빙긋 웃자 여자도 따라 웃었다.
오늘은 첫날이니 흙의 감촉을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자가 말했다. 특별할 것 없다고 그저 프로젝트만 잘하면 그뿐이라고 여겼던 지수에겐 적잖이 놀라운 일이었다.
지수는 공방에 들어올 때 보았던 사기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투박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지수는 틈틈이 공방에 들렀다. 지수는 가만히 도자에 손을 대보았다. 가마에서 갓 나온 도자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따뜻함이 남아있었다. 흙의 기운일까 만든 이의 기운일까, 도자기는 여전히 투박했지만 따뜻했다.
조용하고 단순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진중함과 무게감이 좋았다. 옛것이지만 촌스럽거나 싱겁지 않음을. 단순하지만 그 속에 묻어있는 화려함이 좋았다.
“지수씨, 뭔가 바뀐 것 같은데. 머리했어?”
회사선배가 지수 옆을 스치며 툭 던지듯 말했다.
“아니요? 딱히 바꾼 건 없는데…….”
지수는 말끝을 흐렸으나 달라진 것이 무언지 내심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제가 공방에서의 마지막 날이었고 공방 여자와 대화를 나눈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다.
“지수씨 제법 실력이 늘었어요. 성격도 많이 차분해진 것 같고.”
“그래요? 호호. 제가 원래 성격 급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웠는데, 여기 다니면서 많이 차분해 진 것 같긴 해요. 흙 만지는 것도 그렇고 물레 돌리는 것도 그렇고. 물레를 돌릴 때면 잡생각이 싹 사라지니까요.”
“선물이에요. 그때 한참 바라보고 있길래.”
여자는 지수에게 작고 아담한 사기그릇 세트였다. 사기그릇을 바라보느라 지수는 고맙다는 말도 잊었다. 손을 대어보았다. 여전히 투박하지만 따뜻했다.
차마 그리움을 말로 다 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의례적으로 어떤 장소를 찾아가곤 한다. 그곳에서 보고 싶은 사람의 흔적을 더듬어보기도 하고 음성을 떠올리며 추억의 끝을 걸어보곤 한다. 항상 후회는 무언가 지나고 난 후에 스며드는 것이라 했던가. 준서는 문득 부모님을 만나러 그곳에 간다.
그곳은 늘 조용했다. 먼발치에서 동그랗고 작은 무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약간 허무하기도 했다. 두 분이 나란히 사이좋게 누워계시는 곳이지만 준서의 눈에는 잔디가 무성한 작은 언덕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맨손으로 무덤가에 자란 잡초를 몇 개 뜯으며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 저 왔어요. 저 준서 왔어요.”
혼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어색한 것인지 듣는 사람이 눈앞에 보이지 않아서인지 준서는 퍽 어색해했다. 마치 연극무대에서 독백을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준서는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부모님과 제법 자주 마찰을 빚었다. 그래서일까 준서는 꽤 긴 방황을 했고 준서의 부모님도 많이 지쳐있었다. 외아들이라 오냐오냐 곱게만 자랐을 것 같다는 다른 사람의 시선과는 다르게 준서의 부모님은 꽤 엄하셨다. 교수였던 아버지는 아들의 방황이나 조금의 일탈도 용납하지 않으셨고 그럴수록 준서는 더 엇나가기만 했다.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생각과 어머니의 방관은 준서를 더욱 힘들게 했다.
준서는 차라리 이럴 거면 부모님이 없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품었다는 것이 몇 년 후 뼈저리게 아픈 말로 남을 줄은 준서도 몰랐을 것이다.
종이컵에 소주를 조금 따르고 절을 올렸다.
“저 곧 결혼해요. 듣고 계시죠? 좋은 사람이에요. 저한테도 잘해주고 마음도 넓어요. 저 이런 유별난 성격 다 받아주는 사람이면 어머니 아버지도 이 여자 인정해주실 거라 믿어요. 부모님 없이 결혼한다고 생각하니까 문득 서글퍼져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렇게 여기 누워계시니까 정말이지 그 때는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결혼을 하고 아이도 태어나면 부모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전 아버지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늘 어머니를 외롭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렇게 옆에 나란히 누워 손 잡아주고 계시죠?”
준서는 부모님이 가지런히 누워계신 이곳을 자주 찾지 않았었다. 옛날에는 삼년상이라고 해서 부모가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에 대한 효를 다하고자 여막에 거처하며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올리고 호랑이한테 잡혀가서도 묘성을 쌓기 전까지 죽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던데 준서는 어쩐지 이곳이 낯설었다.
이렇게 부모님께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는 것도 새삼 놀라울 일이었다.
곧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될 준비를 해서일까 준서는 새삼 부모님의 곁이 그리웠다. 호통을 쳐도 쓴 소리를 해도 좋으니 곁에만 함께 있어주기를 바랐다.
산소에 오기 전 준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올리는 편지를 썼다. 어버이날에도 써보지 않았던 서툰 편지로 준서는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그리고 산소 앞에 조심히 편지를 놓아두었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편지였지만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진실 된 편지였다.
편지를 놓아두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왠지 부모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낯설 것만 같았던 이 길이 낯설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이곳을 찾고 부모님을 뵐 때도 낯설지 않을 것이다.
자영업을 하기 때문에 평소 쉽게 가게 문을 닫을 수 없었던 남자. 그래서 주기적으로 떠나는 휴가도 한번 제대로 떠나본 일이 없다. 그렇게 쉼 없이 달려온 3년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사업이었기 때문에 남자는 지난 3년간 아내와 아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이게 다 처자식을 위해 뼈 빠지게 버는 돈이라고 생각해왔으니까 미안하긴 했어도 조금은 당당했다. 그런 남편을 아내도 적잖이 이해해주는 눈치였다.
생전 가게로 전화를 안 하는 아내인데 웬일인지 가게로 다 전화를 했다. 아내의 말이 빨랐고 약간은 울먹였다.
“전화가 왔었어요. 방금. 민준이 담임선생님한테.”
“담임선생님한테? 왜? 민준이 뭐 사고친거야?”
“아, 아니. 학교에서 청소년 우울증 상담검사 같은 걸 받았는데. 결과가….”
평소 전화는커녕 부모님 모시고 오라는 소리 한번 듣지 않았던 터라 심장이 덜컹했다. 차라리 친구와 싸우거나 숙제를 안 해왔다는 전화였으면 좋았을 걸. 담임선생님의 전화는 뜻밖에도 아이가 학교에서 받은 청소년 우울증에서 우울증 수치가 높게 나왔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좀 더 자세한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전화였다.
우울증. 학교 다니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나? 아니면 학교에서 친구들과 관계가 좋지 않나? 그런 것도 아니다. 아내의 말대로라면 담임선생님께선 아이들과의 문제는 없어 보인다고 했으니까.
누구를 위한 3년의 시간이었나 생각한다. 남자는 가장으로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는데 아이는 아빠의 빈자리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었나보다.
모처럼 가게 문을 닫고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월성계곡으로 떠났다. 병원을 가보기 전 일단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담임선생님의 소견이었다. 아이는 즐거워보였다.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아니 아내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아이에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정 상태는 어떤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방송을 타서인지 계곡에는 때 늦은 피서객이 몰려들었다. 아빠와 즐겁게 물놀이를 하는 아이도 보였고 튜브를 타고 물살을 즐기는 아이들도 보였다. 멀리서 고기 굽는 냄새와 옥수수를 먹는 아이들이 보이며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내 아이의 머릿속도 아니 마음속도 한가롭다고 느껴지면 좋을 텐데 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물은 시리도록 맑았고 푸른빛이 맴도는 풍경은 봄의 화사함만큼이나 밝았다. 저마다 하하 호호 웃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방갈로 마다 퍼져나갔다.
하루를 아이와 꼬박 즐겁게 놀아본 것이 얼마만인지 남자의 머릿속은 금세 까마득해졌다. 내심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는 해맑게 방갈로를 뛰어다녔고 여느 때와 같이 즐거워보였다. 은근슬쩍 학교에서의 생활을 물어보기 좋은 시간이었다.
“학교 다니는 것이 힘들어? 친구들과 사이는 어때? 공부하는 것이 지치니?”
“아빠,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물어보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빨리 대답해봐. 응?”
“음. 아빠! 우리 다음에는 또 어디가요?”
그거 아니? 거제도 해금강에는 많은 생명들이 잠들어 있다는 걸 말이야. 이건 너에게만 해주는 이야기니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돼. 쉿! 너와 나만의 비밀이야.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믿고 믿지 않고는 너의 결정이야. 하지만 듣고 나면 믿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이야기일거야!
해금강에는 여러 바위들이 있어. 부처바위, 신랑신부바위, 조도령바위, 토끼바위, 늙은 사자바위, 미륵바위 등등……. 얼마나 많은지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도 없을 지경이라니까. 그런데 말이지. 정말 신기한 게 뭔지 아니? 사실 이 바위들은 다 살아있다는 거지. 그런데 왜 잠들어 있는 걸까? 그건 바로 십자동굴 밑에 사는 바다괴물 때문이야. 얼굴이 네 개나 달려 있는 아주 못생긴 괴물이지. 십자동굴 위에 절벽들이 커다란 덩어리처럼 보이지? 하지만 바다 속에서 바라보면 네 개로 나눠져 있어. 바다괴물이 네 개나 되는 자기 몸을 억지로 가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처럼 보이는 것뿐이지.
처음에 바다괴물도 얼굴이 하나인 아주 아름다운 바다선녀였대. 그런데 왜 그렇게 끔찍하게 바뀌었냐고? 자신이 아름답다는 걸 알고 바다를 우습게 보았기 때문이지. 결국 바다는 크게 화가 났고 거센 파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깎아내려 끔찍한 모습으로 뒤바꾸어 버렸대. 그때부터 그 선녀는 바다괴물로 불리게 됐지.
바다괴물은 끔찍한 얼굴이 되어버린 뒤로 항상 혼자였대.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어도 그 모습이 너무나 무서워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돌이 되고 말았어. 하지만 바다괴물은 외로움을 너무 많이 타서 도저히 혼자일 수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모두 돌이 되어 버려도 자기 옆에 누군가를 두고 싶었대. 혼례를 올리는 신랑과 신부도, 크게 하품을 하던 늙은 사자도, 담뱃대를 물고 연기를 내뿜던 조도령도, 절벽 위 숲에 사는 토끼도 전부 다 말이지.
이를 두고 보지 못한 근처 절의 부처가 바다괴물을 찾아갔대. 못됐다고 소문난 무서운 괴물을 무찌르려고 말이지. 그런데도 바다괴물은 정말 기뻐했어. 자기의 끔찍한 얼굴 때문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손님이 찾아온 거였거든. 열심히 단장을 한 거야. 하지만 못생기고 끔찍한 얼굴을 바뀌지 않았지. 바다괴물은 너무나 슬펐어.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지. 부처는 돌이 되지 않기 위해 밤에 괴물을 찾아갔어. 계속해서 울어대던 바다괴물은 부처를 보자 기뻤대. 자신의 얼굴을 보고도 변하지 않는 건 부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부처는 그런줄도 모르고 바다괴물을 힘껏 내려쳤어. 그러자 바다괴물의 몸이 네 개로 나누어져 버리고 말았지. 그리고 그 순간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어. 그때 부처는 바다괴물의 얼굴을 보고 만거지. 결국 부처조차 바위가 되고 말았대.
괴물은 돌이 되어버린 부처를 보고 슬퍼서 계속해서 울었어. 자기 몸이 네 개로 나누어진 줄도 모르고 말이야.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대. 괴물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된 거야.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려고 죄 없는 생명들을 돌로 만들어버린 일에 대해서 뉘우쳤지. 그리고 그때 해가 떠올랐어. 바다괴물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얼굴이 정말 궁금했어. 끔찍한 모습으로 변한 이후에는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거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못생긴 얼굴을 봤대. 너무나 놀라 자기도 모르게 네 개로 변한 얼굴을 하나로 감싸 가려버렸대.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는 이유로 돌로 굳어버리고 말았지.
정말 신기하고도 슬픈 이야기지? 괴물이 돌이 되고 난 이후에 흙 한줌 없는 기암괴석 절벽위에는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대. 천년의 세파에도 청청히 계속해서 살아 남았대. 이 천년송은 지금 해금강의 수호송이 되었어.
하지만 정말 안 된 일이지? 바다괴물과 바위가 되어버린 생명들이 말이야. 지금부터 내가 말하려는 비밀은 바로 이거야. 그때 해와 달이 떴던 일월봉 기억나니? 일 년에 한번씩 일월봉 위로 해와 달이 뜨고 진대. 그러면 바다괴물은 아름다운 바다선녀로 잠에서 깨어난대. 그리고는 자신 때문에 돌이 된 신랑신부와 부처, 토끼, 늙은 사자, 조도령을 깨워 함께 하루종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하더라. 무엇을 하고 놀길래 그렇게 즐거운지 누구나 궁금해할 정도로 말이지. 너도 궁금해지지? 이 비밀을 알게 됐으니 너도 일 년에 한번, 해와 달이 뜨고 질 때 그 십자동굴로 찾아가보렴. 혹시 모르니? 잠에서 깬 그들이 너를 맞이할지 말이야.
돌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승우.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지 아니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는지 모를 만큼 표정이 복잡 미묘하다. 이곳은 돌탑을 구경 온 사람들과 돌탑에 빌기 위해 오는 사람 이렇게 두 부류로 나뉜 듯했다. 조용히 돌탑을 바라보는 승우 옆으로 단체 관광객들이 이 돌탑에 대해 아는 지식이 많은 양 가타부타 떠들어 댔고 그 말 중에서는 거센 태풍이 휩쓸고 갔어도 이 돌탑만큼은 쓰러지지 않았다고 한다며 놀라워했다. 돌탑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저 높이 올라간 돌만큼이나 굳건했다. 기이한 현상일까. 그도 그럴 것이 돌탑 바로 옆에는 지난 태풍으로 인해 쓰러진 나뭇가지가 그 현상의 미스터리함을 더했다. 승우는 돌연 생각에 잠겼다.
평소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살아온 승우였다. 학창시절 누구나 한 번쯤 떠들어대는 귀신 이야기조차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눈 하나 깜박 않고 넘겨오던 그였다. 그럴 때면 친구들은 재미없는 녀석이라고 웬만한 과학자들도 너보다는 덜 이성적일 것이라며 치를 떨기도 했다.
아마 그의 어머니가 지극히 미신을 믿어서일지도 모른다. 그의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점쟁이를 찾았고 운세를 보러 다녔다. 그렇게 극성을 떨던 어머니가 차마 집안에 굿판을 벌일 수 없었던 것이 승우 때문이리라.
아들인 승우가 수능을 칠 때에도 사법고시 시험을 칠 때에도 어머니는 극성을 떨었다. 마음 깊이 기도를 드렸고 지금 승우가 서 있는 이곳, 마이산 돌탑을 찾았다.
돌탑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성적인 아들의 명석한 두뇌 때문이었을까 승우는 원하는 학교에 붙었고 사법고시도 한 번에 붙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쓰러지셨다.
‘그렇게 찾아다닌 점쟁이는 엄마가 쓰러지실 것을 알았을까. 알았으면 귀띔이라도 해줄 것이지. 그럼 그렇지. 그런 미신들 다 소용없으니까 그렇게 누누이 믿지 말라고 말했건만.
그렇게 돈 갖다 바치고 시간 갖다 바치면 뭐해 정작 엄마는 이렇게 쓰러져 있는데.
내 말 들리지 엄마? 엄마 이젠 눈 좀 떠봐. 아들 왔어.’
심장박동을 알리는 그래프는 전혀 미동도 없었다. 승우는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힘껏 잡으면 그래프가 조금은 더 힘차게 움직이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래프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일정한 선을 이루며 그래프를 그려나갔다. 엄마의 손을 잡고 있던 승우의 손에도 조금씩 힘이 빠졌다. 손을 잡고 있는지 손을 대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손에 힘이 빠졌다.
승우는 돌탑을 찾기 전에 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실을 들렸다.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운세를 이야기하던 엄마는 이상하리만큼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다. 얕은 숨을 몰아쉬며 아기같이 쌔액쌔액 거렸다. 곧 깨어나시겠지. 승우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이곳에 누워있고 엄마가 나를 지켜보는 입장이었다면 엄마는 어떻게 했을까. 의사의 말을 믿었을까 아니면 점쟁이 말을 믿었을까.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해도 점쟁이는 굿을 한번 한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다고 엄마를 꾀겠지. 아니 엄마의 지갑을 꾈 것이다.
승우는 다시금 돌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여전히 관광객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탑을 바라보았고 저마다 소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며 돌을 찾아다녔다. 승우도 그 무리에 묻어 매끄러운 돌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누군가가 올린 돌 위에 살포시 올려보았다. 쓰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리고는 여전히 미신은 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돌탑이 거센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았다니까. 엄마도 저 거센 돌탑처럼 흔들릴지언정 쓰러지진 않을 것임을 믿었다.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를 되찾을 것임을.
승우의 돌이 오르기 전 바로 밑에 있던 누군가가 올린 돌, 그것이 엄마가 그 전에 올린 돌일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