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얼마만이야? 가을빛을 닮았다기엔 너무 화려한 차림의 여자가 말했다. 십 년 만인가. 단풍은 여전하네. 곱다 고와.
내장산에 단풍을 보러 온 인파는 엄청났다. 색색들이 색동옷을 갈아입은 단풍과 노랑, 빨강, 분홍색의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제법 어울렸다. 내장산의 단풍은 철이 되면 으레 빨강, 노랑으로 물이 들었고 그렇게 매년 물이 드는 단풍을 사람들은 매번 놀라워하고 감동스러워했다.
“단풍 처음 봐? 뭘 그렇게 입을 헤 벌리고 봐?”
“옛날 생각이 나서 그런다, 왜! 알록달록 예쁜 게 꼭 내 20대 때를 보는 것 같아서”
“이 기지배 공주병 또 도졌나보다.”
그녀는 젊었을 때 한 미모 했다는 말을 자주했다. 실제로 그녀는 나이보다 젊어보였고 지금도 예전처럼 아름다웠다. 20대의 그녀는 단풍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이 바닥에 닿기 전에 손으로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단풍나무 아래에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적도 있다. 그렇게 떨어지는 단풍나무를 하나 주워 어여쁜 글씨를 썼다. 그리고는 책속에 고이 넣어 보관을 했다.
빨갛던 단풍이 진한 갈색빛이 돌 때 쯤엔 코팅도 해서 보관하던 감성적인 그녀였다.
“조금만 천천히 걷자. 응?”
여자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여전히 친구들은 조잘거리며 그녀를 앞질러갔다. 거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어느 순간 친구들의 모습이 사라져갔다. 여자는 여전히 조금만 천천히 걷자고 말했지만 친구들이 그 말을 들었을 리 없다.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었잖아. 바람이 조금만 불어주면 좋겠는데.’
그녀는 단풍나무 아래에 서서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 옛날 책 속에 꽂고 다니던 단풍나무를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단풍은 여전했다. 늙지도 않고 젊지도 않은 알록달록한 색채를 풍겼다.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고 단풍만큼 알록달록한 모습으로 산을 찾았다.
산을 오르기 위함인지 단풍을 보기 위함인지 몰랐지만 사람들은 즐거워보였다.
바람이 불었다.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떨어지는 낙엽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바람이 한 차례 더 불었고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헬기가 높이 떠올라 있었고 사람들은 헬기를 향해 손을 흔들어댔다.
9시뉴스에서 단풍을 찍는 듯했다. 아니 단풍을 보러 온 사람들을 찍는 것일 수도 있다. 여자도 찍혔을까? 아니면 먼저 올라간 친구들의 모습이 담겼을 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떨어지는 단풍을 코앞에서 잡아챘다. 구겨지지 않게 잘 보관할 수 있을까. 단풍에 그녀는 이렇게 적을 것이다. 사람들이 많은 오후, 단풍이 내게로 왔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단풍이다. 여전히 고운 빛을 띠고 있다. 내년이면 어떤 빛을 낼까.
바람이 불면 알록달록한 잎이 떨어진다. 잎이 떨어지면 갈색빛으로 늙을 것이다. 노랗고 빨갛던 단풍도 갈색으로 색을 잃으며 늙을 것이다. 그녀처럼.
오래된 수탁의 아침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삐거덕 하는 문을 열고 조용한 걸음걸이의 소녀 설화가 나왔습니다. 마을에서 설화라는 소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효녀로 소문이 나있었지요. 설화는 아픈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해 마을일을 돕고 바느질 삵을 받아 근근이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번 돈으로는 반찬은 가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쌀을 사기도 힘들었답니다. 소녀 설화는 마을일을 도와드리며 반찬 조금씩을 얻어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소녀가장이 된 설화의 착한 심성과 딱한 사정을 아는 마을사람들은 집에 있는 반찬을 조금씩 바가지에 담아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의 반찬을 따로 담을 수 없어 그만 한 바가지에 나물들이 전부 섞여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도 반찬들을 얻었다는 기쁨에 한달음에 달려간 설화는 나물들이 섞인 바가지에 밥을 넣어 숟가락으로 비벼 상을 차렸습니다. 부모님께 이렇게 밖에 상을 차리지 못했다는 죄송스런 마음이 들었지요. 설화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처음 보는 생소한 밥에 두 눈이 휘둥그레 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먹어보니 그 맛도 맛있고 다른 찬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어서 더 잘됐다고 설화를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설화가 막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낯선 행색의 웬 남자가 설화의 집 앞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행색을 보니 이 동네 사람은 아닌 듯싶었지만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되어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우선 물을 먹여 목을 축이게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는 고마운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달리 내 드릴 것이 없던 설화는 금방 얻어온 반찬들과 산에서 캐온 나물들을 섞어 고추장과 함께 내드렸습니다.
“소녀, 집안 살림이 누추하여 이런 것 밖에 내 드릴 것이 없사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남자도 생전 처음 보는 밥상에 잠시 놀랐으나 고추장에 쓱쓱 비벼 맛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맛도 맛이지만 밥에 들어간 나물들이 모여 이만한 영양가를 내는 밥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밥의 이름이 무엇이냐? 혹, 밥을 이렇게 만들게 된 경위를 내게 알려줄 수 있겠느냐?”
“이 밥에 이름은 달리 없사옵니다. 사실….”
설화는 집이 가난하여 이웃사람들에게 얻은 반찬이 우연히 섞여 밥과 함께 먹은 것이라고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허허. 그것 참 딱하면서도 놀랄 일이구나. 사실 나는 궁에서 시찰을 나온 암행어사니라. 아까는 잠시 현기증이 나 쓰러져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너를 만난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런 천한 음식을 내 드렸으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니다. 밥과 함께 갖가지 나물들을 비벼먹는다... 비빔밥이 좋겠구나!”
“네? 비빔밥이요?”
“그래, 이 마을이 전주이니 전주비빔밥이 좋겠구나.”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암행어사가 다시 설화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왕실의 수라간 나인이 되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이 드시는 음식을 손수 차릴 수 있다는 생각에 승낙한 설화는 궁으로 들어갔습니다. 궁에는 수많은 음식들이 있었습니다. 설화는 갖가지 좋은 재료 중에서 나물과 고기를 가지런히 밥 위에 올려 수라상을 만들었습니다. 맛을 본 임금은 이름을 음식의 이름을 물었고 설화는 그 때 암행어사가 지어준 이름을 대었습니다.
맛의 우수함과 영양까지 두루 갖춘 전주비빔밥의 시작은 우연함이었지만 궁중음식으로 사랑받으며 전주의 제일가는 음식으로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백설공주가 한입 베어 물고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던 독사과. 세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그녀가 또 모르는 사람이 내민 사과를 덥석 받아 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빛깔이 좋았던 것일까 향이 치명적으로 달콤하였을까? 마녀가 백설공주에게 사과를 내민 것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주었던 것처럼. 그래서 다들 사과를 할 때 손을 내민다고 하나. 손을 내밀면 아니 사과를 하면 받아줄 수밖에 없는 것일까?
승희는 딸에게 명작동화 백설공주를 읽어주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딸아이가 그 다음 이야기를 말해달라고 보채지 않았다면 그녀의 머릿속은 수만 가지 질문들로 가득 채워졌을지도 모른다.
승희는 정신없이 떠올리던 생각들을 더듬어보았다. 사과를 내민다. 사과를 받아준다. 그것이 백설공주의 목숨을 앗아갈 뻔할 만큼 치명적이든 아니든. 사과하고 싶은 사람에게 정말 사과를 내밀면 사과를 받는 사람도 문득 이런 생각을 하며 받아줄 수 있을까? 유치하다.
삼 년 전 승희와 다툰 그녀의 친구 A와의 일이 떠오른다. 전혀 관계없는 세계 명작 백설 공주를 읽으면서 왜 A가 떠오른 걸까. 그녀와 A는 쌍둥이처럼 생각이 잘 맞곤 했다. 그래서 대학 캠퍼스 시절엔 늘 A와의 추억이 가득했다. 그런 그녀들이 다시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기로 다짐하던 그 순간, 4년간의 우정이 모래성이 쓰러지듯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하지 말아야 하는 걸 알면서도 승희는 A에게 못된 말을 쏟아 부었고 A도 울부짖으며 다시는 만날 일 없을 것이라며 관계를 끝내버렸다.
둘은 울고 있었고 서로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에게 서운했던 마음이 물밀 듯이 몰아쳐 오면서 폭풍우처럼 상대방의 가슴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후 승희는 결혼을 했고 귀여운 아이도 낳았다. 간간히 또 다른 친구를 통해 A의 소식을 들었으나 관심 없는 척 했다. A도 승희의 소식을 들었겠지만 감감무소식인걸 보니 그녀의 마음도 아직 인가 보다.
딸아이가 자꾸만 보챘다. 이번엔 밖에 나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복잡한 생각들을 했던 승희는 몸이 천근만근이라 나가기 싫었지만 딸아이는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승희는 하는 수없이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볼 심산이었다.
“엄마! 사과다 사과. 오늘 우리가 책에서 읽었지? 사과!”
목요일이었지. 오늘은 우리 동네 장이 열리는 날이다. 딸아이는 그새 과일을 파는 곳을 본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신이 나서 과일아저씨가 하는 말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아주 달고 맛있는 장수 사과입니다. 당도가 높고 몸에 좋은 장수사과입니다.”
승희는 순간 사과를 보내면 A가 받아줄까요? 라는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질 뻔했다. 순간 얼굴이 달아오른 승희는 사과 한 박스를 주문하는 걸로 질문을 대신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사각사각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아까 시식용 사과를 집어 들더니 여전히 사각사각 잘도 베어 먹는다.
누군가에겐 큰 상처가 될 만한 일을 그런 유치한 사과를 보낸다고 해서 받아줄 수 있을까?
나 같으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받아줄 수 있을까?
사과를 보내본다.
빛깔 좋고 치명적인 달콤한 향이 나는 사과를 받아든 A. 상처가 아물지 않는 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백설공주처럼 한 입 베어 물어본다.
딱 한잔만 더 마시고 들어갈게. 누군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듯이 건넨 혼잣말이다. 벌 써 몇 병째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그는 되뇌었다. 마지막이라고. 남은 소주잔 이거 딱 한잔처럼 마지막이라고. 남자는 중얼거렸다.
남자는 어두운 실내 포장마차에 있었고 홀로 앉아있었다. 남자가 벌인 네 번째 실내 포장마차 사업장이었다. 매번 반짝 장사가 되다가 나중에는 파리만 날리는 쪽박집이 되기 마련이었다. 봄이 되면 꼭 가게를 빼줘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돌아서는 건물주의 당부가 있던 날이었다. 그렇다고 남자가 성실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늘 좋은 재료를 위해 새벽시간을 아끼지 않았고 대박 집과 쪽박 집을 나름대로의 계산에 맞춰 비교도 해본 그였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무언가 승부수를 걸어야만 했다.
남자는 귀여운 딸아이와 예쁘고 상냥하던 아내를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딱 한잔만 더 하고 들어갈게, 마지막이야.
반짝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신 남자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식탁에는 콩나물국이 놓여있었다. 아내가 왔었나보다 생각했다. 남자는 하나부터 천천히 다시 시작해보기로 한다. 그동안 무엇이 문제였는지 재료인지 인테리어인지 품목선정인지. 무의식중에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틀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내가 아침상을 다 차려놓고 나간 터라 더 이상 꺼낼 반찬이 없었음에도 남자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우연히 슬라이스 치즈가 눈에 띄었다. 술을 마시고 난 다음날 아침 느끼한 치즈를 먹는다는 것, 다른 날 같았으면 쳐다도 안보고 아내가 끓여놓은 콩나물국을 후루룩 마셨겠지만 남자는 치즈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냉장고에 있어 차가운 치즈는 입안에서 쉽게 녹지 않았다. 중얼거렸다.
‘치즈가 따뜻했으면 좋겠어’
남자는 그 순간 낙뢰가 하늘에서 번쩍 치듯 치즈 하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의 사업 아이템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치즈 생각뿐이었다. 좀 더 체계적인 사업 구상을 하기 위해 남자는 임실로 향했다. 남자에겐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니까.
치즈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 그곳엔 치즈의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치즈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음식부터 맛과 발효과정까지. 남자는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치즈 하나면 누구나 만족시킬 수 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년 봄이 되면 꼭 방 빼주셔야 해요.’
건물주가 이번엔 아내를 찾아간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귀여운 딸아이와 상냥한 아내를 생각했다. 남자는 성실하게 치즈로 만들 수 있는 음식들을 떠올렸다. 치즈의 맛을 끝까지 살리며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차별화 된 음식들이 무엇인지를.
남자는 아이들을 위한 치즈 그라탱부터 미니 피자 그리고 치즈의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인 치즈케이크를 디저트로 만들기로 했다.
“다음 달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지요.”
건물주가 웃으면서 재계약을 하러왔다. 남자는 더 이상 어두컴컴한 방에서 홀로 마지막을 되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귀여운 딸아이와 상냥한 아내와 함께 식탁에 앉아있을 것이다. 오늘도 그의 가게에서는 고소하고 부드러운 냄새가 난다.
결혼을 앞둔 여자의 목소리는 한껏 흥분과 설렘이 적절히 섞여 있었다. 그녀에게 세상은 핑크빛일 테고 파스텔 톤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상견례와 결혼 날짜까지 한 큐에 끝내버리고 요즘은 친정엄마와 혼수를 보러 다니고 피부숍을 다니며 생애 한번 있을 아름다운 날을 위해 온 신경을 쏟았다.
서른둘의 나이. 요즘으로 치면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라지만 먼저 결혼한 친구들의 훈수 덕에 그녀의 머릿속은 적잖이 복잡해졌다. A는 근사한 카페를 통째로 빌려 피아노를 치며 영화의 한 장면처럼 프러포즈를 받았다더라. 친구 B는 청담동으로 시집간다더니 몇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몇 세트를 받았다더라 하는 말들이 자연스레 들렸고 친구들은 며칠 굶주린 하이에나들처럼 여자의 결혼에 관심을 기울였다.
여자는 신경 쓰지 않고 남자친구에게 내색하지 않기로 마음먹고도 내심 신경이 쓰였고 기대가 되었다. 여자라면 누구나 그럴 거라며 자신은 속물이 아니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남자친구에게 대뜸 나 어디서 어떻게 프러포즈해줄 거냐. 몇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줄 거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무엇보다 남자친구의 형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여자의 얼굴엔 점점 그늘이 드리웠다.
오늘 예쁘게 입고와. 일 끝날 때 맞춰서 데리러 갈게.
남자친구의 문자다. 여자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예쁘게 입고오라니, 왜? 혹시 프러포즈하려고 그러나? 그렇담 뭘 입어야 하지? 야외에서 하면 좀 쌀쌀할 텐데 겉옷을 준비해갈까? 눈물을 흘려야 하나? 여자는 30초간의 짧은 순간에 몇 가지 생각들을 흘려보냈다.
귀여운 것. 조금 무뚝뚝하긴 했어도 예쁘게 입고 오라는 힌트까지 주다니. 여자는 한껏 들뜬 마음을 즐겼다. 언제 또 이렇게 행복하겠느냐며 이 순간을 즐기자고 생각했다.
여자는 자신이 아끼던 옷을 꺼내 입고 싱글벙글 하며 남자를 기다렸다. 남자는 칼같이 여자를 데리러 왔다.
“어디 가는 거야? 어디로 가는 건데? 응? 왜 예쁘게 입고 오라고 했어? 어?”
여자는 남자의 차에 타자마자 콧소리를 내며 남자에게 질문을 쏟아 부었다. 남자는 가보면 안다며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았고 여자의 기대감은 극도로 높아졌다.
그런데.
남자는 카페를 빌리지도 근사한 곳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지도 않았고 무릎을 꿇으면서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심히 스윽 건네는 반지케이스 하나.
이게 뭐야. 여자는 기쁨과 감동의 눈물을 준비해왔으나 서러움으로 흘릴 줄은 몰랐다. 여자는 기쁨도 감동도 하지 않은 채 말없이 반지케이스만 바라보았다.
“실망했어?”
그걸 말이라고. 여자는 이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차마 내뱉지 않았다.
“어떤 반지인지 궁금하지 않아?” 라고 말하며 반지케이스를 열었다.
붉은빛이 선명한 반지다. 루비인가. 동시에 남자가 말한다.
“루비 아니야. 빨간색을 띄는 희귀 다이아몬드도 아니고.”
“내가 하늘에 떠있는 별을 따다 달래 달을 따다 달래. 그냥 말 한마디 아니 말 한마디가 어려우면 꽃이라도 아니 꽃도 어려우면 노래라도. 그만하자.”
“알아. 네 마음. 섭섭하겠지 속상하겠지. 그런데 반지 꽤 의미 있는 거야. 이게 1월 탄생석으로 만든 거거든. 당신 생일이자 우리 결혼기념일이 될 1월.”
여자는 애써 침착하게 반지를 바라보았다.
“다음번 결혼기념일에는 근사한 카페도 빌리고 백송이 꽃도 준비하고 피아노도 배워서 노래도 불러줄게. 더 예쁜 반지와 함께.”
좀 전에 남자가 내민 보석은 가넷이었다.
“피자, 햄버거, 치킨 이런 거 자극적이고 식욕당기지. 거기에 적당한 알코올까지 더해지면 더 좋고.” 남자는 비꼬듯 이야기한다. 남자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내뱉은 말이었다.
아내는 그렇게 이야기 하지 말라며 노여워했다.
“남의 새끼는 칼로리에 온갖 영양 다 계산해가면서 먹이고 정작 내 새끼는 피자, 햄버거, 자장면 이런 거나 먹이고. 이게 말이되? 어?”
남편은 그동안 꾹꾹 눌러 담은 분노를 아내의 얼굴을 향해 쏟아 붓기 시작했다. 아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간 지나온 일들을 단편적으로 본다면 남편이 던진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여자와 남자는 맞벌이 부부다. 남편은 대학병원 의사로 늘 병원 아니면 서제에 있었고 수술이 있을 때면 특히 더 예민하게 굴었다. 수술이 있고 늘 환자를 대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도 누구보다 심할 것이라는 걸 아는 아내였기에 아내도 그동안 남편에게 잔소리 한번 심하게 하지 않았다.
아내는 학교에서 아이들 영양식단을 책임지는 영양사로 근무하고 있다. 아내는 누구보다 체계적이고 영양이 가득한 음식플랜을 짰다. 아내가 짠 음식대로 조리되어 나오는 음식들을 학생들은 남김없이 먹었다. 키가 크고 뼈가 튼튼해질 수 있는 친환경 유기농 영양만점 식단이었기에.
끝내 아내는 눈물을 보였다. 남편은 아내가 울고 있는 줄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아내를 달래줄 마음이 당시에는 조금도 들지 않아서 일 것이다.
식탁에는 이미 시킨 지 오래되어 퉁퉁 불어터진 자장면이 놓여있었고 자장면을 사이에 두고 남편과 아내는 식탁의 각각 모서리에서 뾰족한 모서리보다 더 뾰족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몇 달 전부터 학교급식의 안전과 영양실태에 대한 감시가 심해지면서부터 아내는 더욱 꼼꼼하게 영양식단을 짜야했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신경을 덜 쓰기 시작했고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집에 갈 때 뭐 사갈까? 라고 한 말이 시작이었다. 그러면서 의례적으로 저녁은 할머니한테 먹고 싶은 거 시켜달라고 하라고 말하던 아내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전히 아내는 훌쩍였고 자장면 그릇을 가지러 온 배달부의 초인종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남편은 진료일정을 미루고 아이와 함께 여행을 다녀오자고 말했다. 그러니 아내에게도 학교 일정을 조율하라고 말했다. 아내도 알겠다고 수긍했다.
그렇게 떠난 곳은 완주. 완주에 도착하니 와일드 푸드 체험이라는 것이 진행되고 있었다. 모처럼의 여행이라 그런지 아이는 신이 났고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아 끓여 먹어보기도 하고 잠자리채로 곤충들을 채집하고 튀겨먹어 보기도 하며 모처럼 가족 같은 분위기를 냈다.
아내는 아이와 남편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기분도 좋아졌다. 남편과 아이를 위해 저녁상을 준비했다. 남편이 잡아온 물고기에 소면을 넣어 끓인 철렵국을 만들기로 했다.
‘아!’ 외마디 비명이 차마 목구멍으로 나오지 못하고 턱밑에서 머물렀다. 다행히 뜨거운 뚝배기 그릇을 들고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가벼운 국자가 아내의 손에서 툭 하고 떨어졌다. 아내는 얼마 전 손목이 시큰거리며 가끔 끊어질 듯한 고통을 호소하며 정형외과를 찾은 적이 있다. 의사는 직업으로 인해 온 질병으로 진단을 했고 아내는 며칠 째 음식을 하는 것도 무거운 그릇을 드는 것도 벅차했었다.
남자는 떨어진 국자를 집어 들었다. 남자는 순간 의사의 직감이었는지 아내에 대한 마음이었는지 아내의 손목에 이상이 있음을 감지했다.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어. 의사 남편 두고도 써먹지도 못하냐, 바보같이.
내일 우리 병원에 와, 다시 검사받자.
그리고 이렇게 무거운 국자는 내게 줘. 철렵국은 내가 끓이는 게 훨씬 맛있다고.”
“이렇게 나오니까 좋다. 공기도 좋고 이곳에서 나는 음식들로 바로 요리하고. 영양이고 식단이고 따로 짤 필요가 없네. 여기 내려와서 살까?” 아내는 웃으며 말한다.
할머니 손에서는 매운 내가 난다. 할머니 댁에 가서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면 할머니는 아이고 예쁘다 내 새끼 하면서 내 볼을 쓰다듬는다. 그때마다 매운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기 때문에 안다.
엄마, 일 좀 그만하시라니까. 엄마 고집도 참. 근데 저번에 담근 고추장은 잘 됐나? 하며 은근슬쩍 장독대로 향한다. 그럼 할머니는 말없이 빛깔 좋은 고추장을 아낌없이 담아주신다. 말은 일 좀 그만하라고 하면서 매번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가질러오는 엄마는 할머니가 정말 일을 그만두시길 바라는 것일까.
할머니는 늘 손끝이 아리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마당에 널려있는 고추들을 만질 때면 더욱 그러셨다. 고추를 만지면 손끝이 아리구나. 아린 다는 뜻이 무언지는 몰랐지만 만지지 않았다. 엄마는 마트에서 파는 고추장은 쳐다도 안 봤다. 내가 우연히 마트에서 할머니네 동네에서 나오는 고추장이라고 말했을 때에도 엄마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우리 동네 유명한 고추장 장인이셨다. 도심에서 수도 없이 맛의 비결을 물었지만 할머니는 고추장을 만들 때만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어느 날인가 할머니가 엄마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고 그때까지도 할머니에게 또 잔소리를 했다.
“거봐, 그러니까 내가 일 좀 그만하시라니까. 이게 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래.”
…
“노인성 치매이신 것 같습니다. 정밀한 검사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의사는 전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엄마와 할머니는 이미 충격에 의사가 말하는 뒷말이 그저 소음으로만 느껴져 미간을 찌푸렸다.
“그…. 그러니까. 치매라고요? 저희 엄마가요? 얼마나 진행된 상태인가요?”
“아, 의사 소견상 치매인 것 같으나 아직 정밀한 검사를 …”
할머니는 소신 있게 자신의 소견을 이야기하는 여의사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일어났다.
항상 정갈하고 깐깐하게 한 길만을 고집하였던 할머니였기에 의사의 입에서 나온 치매 진단을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였다. 아니 할머니 자신이었다. 어쩐지 그런 할머니에게선 고추의 매운 냄새가 아닌 미묘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치매로 인해 가꾸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할머니조차 가장 아끼는 고추장처럼 발효되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고추장 다음으로 장독대를 제일 아끼셨다. 그곳에서 고추장의 맛이 깊어진다고 하셨으니까. 할머니 댁에 가면 마당에 담장을 끝으로 수십 개의 장독이 늘어서 있다. 언젠가 할머니께 이 장독대에 다 고추장이 들어있느냐며 팔짝 뛰며 신기해한 적이 있다.
할머니는 의사에게 진단을 받으시고는 장독을 하나씩 깨뜨리기 시작하셨다. 지나온 세월에 대한 분풀이였을 것이다.
엄마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할머니는 울지 않으셨다. 그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괜찮아 보일까 싶어서였을까.
장독을 세 개쯤 깨뜨리시던 할머니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으셨다. 그리고는 깨뜨린 장독에서 흘러나온 고추장을 맨손으로 매만지셨다.
“손끝이 아리구나.”
할머니의 기억은 점점 감퇴되었다. 하지만 할머니 손에서는 여전히 매운 내가 났다.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마을 어귀에서부터 들려왔습니다. 오늘은 정월 초사흗날로 마을의 큰 행사가 있는 날이지요. 매년 이맘때가 되면 마을에는 큰 풍어제가 열립니다. 부안의 이 마을은 고슴도치를 닮은 섬으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물고기도 잡는답니다. 그래서 고기도 많이 잡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용왕님을 즐겁게 해주는 굿을 하지요.
징과 꽹과리 소리가 크게 들리고 제사에 쓰일 음식과 물건들을 원당에 준비하느라 아침부터 마을이 시끌벅적합니다. 그런데 유독 민수네 집만 조용합니다. 민수는 아픈 어머니 옆에서 물수건을 적셔 어머니를 간호하고 있고, 민수 아버지 홀로 풍어제를 조용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곧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야 할 텐데 어머니는 풍어제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사실 이 마을의 풍어제는 마을 이름을 딴 위도 띠뱃놀이로 이 마을 굿은 여성들이 적극 참여하여 무녀와 함께 한복을 입고 고깔을 쓰며 신명 나게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합니다. 민수의 어머니는 혹시나 자신이 참석하지 않아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아픈 몸을 하고도 노심초사하였습니다. 민수의 아버지는 아내를 안심시키고 본격적으로 열리는 띠뱃놀이에 참석하러 발길을 재촉하였습니다.
단장한 무녀가 등장하고 차례대로 아홉 가지의 굿이 펼쳐졌습니다. 민수도 아버지의 뒤에서 고개만 내밀고 굿을 구경했지요. 드디어 용왕굿이 시작되고 마을의 부녀자들이 고깔을 쓰고 풍물패를 이루며 흥겹게 반주를 하였습니다. 부녀자들은 고수레용 밥을 만들어 바다 곳곳에 뿌렸고 마지막으로 짚으로 만든 띠배에 액운을 담은 짚으로 만든 인형을 태워 띠배를 띄워 보냈습니다.
그렇게 마을 굿이 끝나고 얼마의 시간이 흘러 민수의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러 바다에 나가는 날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풍어제를 제대로 지내지 못한 마음에 눈물을 보였고 민수의 아버지는 애써 위로하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마을 사람들이 탄 배가 도착하기로 예정된 날이 밝았습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심상치 않은 먹구름이 부둣가를 짙게 드리웠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 파도는 금방 사납게 철썩대었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민수의 아버지가 탄 배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민수의 손을 잡은 어머니의 손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루 이틀, 그렇게 배의 소식이 끊어진 지 만 사흘이 꼬박 지나도록 어머니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였지요. 그리고는 자신이 굿에 참석하지 않아 용왕신이 노한 탓이라고 하였습니다.
민수는 소식이 끊긴 아버지도 걱정되고 다시 몸져누우신 어머니를 위해 작은 띠뱃놀이를 하여 용왕님의 화를 풀어드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굿을 구경해 둔 덕분이었지요. 작은 고사리 손으로 종이배를 만들었고 소의 여물로 주려고 남겨놓은 지푸라기를 가져다가 종이배에 칭칭 감았습니다. 그렇게 만든 작은 띠배에 용왕님께 드릴 선물로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장난감 인형과 딱지를 넣고 용왕님께 직접 쓴 편지도 넣었지요. 그리고는 아버지가 타고 간 바다를 향해 작은 띠배를 띄워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두 손을 꼭 잡고 기도를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일기예보에서는 앞으로 닷새 동안은 태풍이 계속되어 밖으로의 외출을 삼가라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일기예보를 보시고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자리에 누우셨지요. 민수는 아직 편지가 용왕님께 도착하지 않았나 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날이 밝고 민수는 눈을 뜨자마자 밖으로 나가보았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하늘은 구름이 싹 걷히고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하였습니다. 아이의 순박한 마음과 간절함이 용왕님께 정말 전달되었던 것일까요?
저 멀리 만선을 뜻하는 깃발을 드높이 올린 배 한 척이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물고기가 많이 잡혀 하루만 더 기다렸다 돌아오려고 하였는데 풍랑이 심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아이의 착한 마음으로 다시 행복을 찾은 위도에는 지금도 아이가 떠내려 보낸 종이 띠배가 바다를 맴돌고 있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고 전해진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