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많고 많은 커플들은 전국 방방곡곡 어디를 가도 상관이 없겠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더 멋있고 더 로맨틱한 장소를 찾곤 한다. 결혼을 앞둔 남녀는 더욱 그럴 것이다.
“가을여행으로 어디가 좋을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고 쾌청했으나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눈이 부시지는 않았다. 눈을 살짝 찡그리며 가을여행지를 생각하고 있는 젊은 여자를 향해 남자는 말했다.
“어디긴 어디야, 가을하면 낭만, 낭만하면 갈대 아니야? 갈대를 보러가자.”
낭만을 입에 달고 사는 남자는 이번에도 또 낭만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무슨 또 낭만이냐고 했겠지만 이번에 제안한 가을갈대를 보러 가는 것은 꽤 솔깃한 제안이었다.
별다른 준비가 필요 없이 순천으로 가는 차에 올라탔다.
“노을이 짙게 내릴 때면 더 죽여줄 텐데. 안 그래?”“그럼 멋있긴 하겠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곧 5시 반이야.”
가을이라곤 했지만 아직은 늦더위가 가시지 않아서일까 둘은 약간 거리를 두고 걷고 있었다. 각자가 생각하는 가을 낭만을 떠올리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사진 찍는 것이 취미인 남자는 순천만 갈대밭의 이곳저곳을 담기에 바빴다. 바람에 스러지는 갈대의 모습이며 빛을 받아 반짝이는 갈대의 모습까지. 남자친구는 주로 풍경사진을 찍었다. 그 사이에 간간히 여자의 모습이 함께 담긴 사진들도 있었으나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여자도 남자의 취미를 존중하고자 남자가 사진을 찍을 때에는 달리 말을 걸지 않았다.
‘찰칵’
“어!”
남자의 외마디 감탄에 여자는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연히 굉장히 잘 나온 사진을 건진 것이 분명하다는 직감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남자는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백발의 두 노인이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온 신경을 할머니에게 쏟고 있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 손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제는 힘이 많이 빠져 손에 힘줄이 솟아나도록 힘을 주지 않으면 할머니 손을 놓칠 것 같아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셨다. 할머니는 꽃분홍색 스웨터를 입고 계셨는데 표정이 마치 소녀 같으셨다. 볼에 분칠을 하지 않으셨는데도 발그레 하게 꽃이 핀 것 같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꽤 먼 거리에 계셔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시는지 들을 수는 없었지만 해가 저무는 노을빛을 받은 갈대밭 사이로 서로를 향해 웃음 지으시는 노부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 분이 어떤 말씀을 나누고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지 알 것만 같았다.
“와, 정말 멋지지 않아?”
“응. 그렇다. 아마 두 분의 귓가에는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올 거야. 왜냐면 이렇게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함께 손을 잡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 자체에 감사함을 느끼고 계실 테니까.”
어쩐지 저렇게 늙어갈 수 있다는 것이 참 행복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까지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스럽게 바라봐 줄 수 있을까. 너의 늙음이 나의 늙음과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따뜻하게 보듬어 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말없이 서로의 손을 찾아 손을 뻗었다. 맞잡은 두 손이 어쩐지 따뜻했다.
“우리도 나중에 저렇게 아름답게 늙을 수 있을까? 난 말이야. 늙는다는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 그리고 정말 로맨틱하다. 나는 로맨틱이라는 단어는 젊은 이 삼십대 사람들에게만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정말 로맨틱하다.”
바람이 살짝 귓가를 스치는 날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밝지도 어둡지도 않게 내려앉은 노을 때문이었을까. 여자는 감성에 젖어있었다.
“우리도 지금처럼만 지낸다면 저렇게 아름답게 늙을 수 있다고 생각해. 이렇게 로맨틱하게. 그럼 지금 이 노부부 사진에 제목을 한번 지어볼까?”
“음. 생각났어. 더 로맨틱!”
오늘은 하늘이가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입니다. 달력에 색연필로 크게 동그라미도 그려놓았지요. 바로 하늘이의 외국 펜팔 친구 데이빗이 오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는 설레는 마음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친구가 도착하면 무엇을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 잠을 설친 것이지요. 아침 일찍 일어난 하늘이는 분주하게 친구를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우리나라와 하늘이가 살고 있는 보성을 함께 알려줄 수 있는 좋은 것이 없을까 생각하던 하늘이는 좋은 방법이 생겼다며 싱글벙글 입니다. 드디어 만난 하늘이와 데이빗. 하늘이는 곧장 녹차 밭으로 데이빗을 데려갔습니다. 데이빗은 녹차를 먹어본 적이 있다고 말했지요.
“데이빗! 녹차를 마셔본 적 있다고? 티백에 담겨져 있는 녹차를 말하는 거지? 오늘 우리가 마실 녹차는 좀 달라! 기대하라고~”
한껏 신이 난 하늘이는 데이빗을 데리고 녹차 밭을 구경한 뒤 조그마한 다실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아주머니가 계셨고 사람들은 조용하게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늘이와 데이빗도 조용히 자리에 앉았지요.
“반갑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녹차 밭에 오신 여러분과 차를 함께 나누어 마시게 되어 기쁘네요. 오늘은 다기를 이용하여 차를 우리는 법, 그리고 차를 마시는 예절 등 다례에 대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볼 거예요.”
하늘이가 외국인 친구 데이빗을 위해 준비한 것은 바로 다례체험이었습니다. 보성녹차의 진중하고 진한 맛을 좀 더 세심하게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지요.
선생님께서는 다기의 이름과 함께 오늘 마실 차는 올해 수확한 햇차로 우전이라고 불리는 녹차를 이용하여 차를 마시는 예절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선 두 손으로 뜨거운 물을 사발에 붓고 다관 뚜껑을 열어 조금 식은 물을 다관에 따릅니다. 그리고 찻잔이 따뜻해 질 수 있도록 뜨거운 물을 부어두고 차 우릴 물을 준비합니다. 한김 나간 따뜻한 물을 다관에 붓고 여린 녹차를 조금씩 덜어 넣습니다. 녹차가 우러나는 동안 찻잔을 데우던 물을 퇴수기에 따라버려주세요.”
다실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정숙한 분위기로 차를 우리고 예를 지키는 모습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하늘이와 데이빗은 더욱 진지한 모습이었지요. 차를 우리는 방법은 계속 되었습니다.
“자! 앞에 손수건처럼 보이는 다건을 이용하여 다관을 받친 후 팽주(차를 우리는 사람)는 자신의 잔에 먼저 따라보고 색과 향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팽주는 각각의 잔에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세 번에 나누어 차를 따릅니다. 잔 받침이라 불리는 차탁에 잔을 올려 큰 손님부터 드린 뒤 가볍게 목례를 하고 세 번에 나누어 차를 입안에 굴리며 색과 향 그리고 맛을 차례로 음미합니다. 어때요? 어렵지 않죠?”
하늘이와 데이빗도 천천히 차를 음미해보았습니다. 그동안에는 향과 맛을 느끼기 전에 꼴깍꼴깍 마셨던 것을 약간 후회하며 말이지요.
하늘이도 보성에 살면서 녹차를 수없이 마셔왔지만 녹차가 이렇게 진하고 무거운 맛을 내는지 몰랐습니다. 그동안에는 그저 텁텁하고 흔한 차라고만 여겼었지요. 무엇보다 외국에서 온 데이빗이 어설프지만 진지하게 차를 우리고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내심 뿌듯하였습니다.
하늘이는 늘 즐겨 마시는 녹차이지만 늘 티백이나 가루로 물에 타 마시기만 하여 가볍게만 생각하였는데 실제로 예를 갖추어 먹어보니 느낌이 달랐습니다. 훨씬 고소하고 단 맛이 느껴지며 진한 맛과 향이 입안에 가득 맴돌았지요.
데이빗도 굉장히 즐겁고 색다른 추억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렇게 여린 잎에서 이런 진한 향을 낼 수 있다면서 놀라워했지요.
오늘은 데이빗과 하늘이 둘에게 여린 잎이 남긴 진한 향은 더욱 진한 추억으로 한 잔의 녹차와 같은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여자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남자는 한참을 그 시간에 멈춰있었다. 낮인지 밤인지 문 밖에 신문은 켜켜이 쌓여만 갔다. 술로 하루를 시작하고 또 술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남자가 마시는 것이 술인지 눈물인지 모를 만큼 슬픔을 잊기 위해 슬픔을 들이켰다. 얼마나 그 시간에 갇혀 있었던 건지 옆집 사는 사람이 쌓여있는 신문과 상해버린 우유들을 보고 초인종을 몇 번 누르고 간 적이 있다. 인기척을 낼 마음의 여유가 없던 남자는 그냥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몇 차례 경비 아저씨와 옆집 아주머니가 남자의 집 앞을 다녀간 뒤로 남자의 근황을 염려하는 사람은 없었다.
남자가 여자를 처음 본 것은 병원에서였다. 대학병원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동네에서는 꽤 큰 크기의 종합병원에 근무하던 여자의 직업은 간호사였다.
오토바이를 타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면서 무릎을 크게 다친 남자는 여자가 근무하는 종합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실로 꿰맨 무릎에 소독을 하러 여자가 남자의 병실에 찾아왔다. 하얀 얼굴이라 그런지 단정한 간호사복이 잘 어울리는 여자는 순백의 천사처럼 보였다. 남자의 상처를 소독할 때면 마치 엄마처럼 상처부위를 호호 불어가며 소독약을 발랐다.
남자의 생활은 꽤 거칠었다. 어울리는 사람들은 험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생활도 거의 해가 저문 밤에서야 시작되었다. 그런 그를 변화시킨 것도 여자였다. 사랑을 시작하게 되면서 거칠었던 생활도 점차 안정을 찾고 특별할 것 없이 잠잠하게 사랑을 키워나갔다.
그날도 어김없이 여자를 병원에 데려다 주는 길이었다. 매일같이 여자를 데려다 주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날따라 꺼림칙한 느낌에 잠깐 짬을 내어 여자를 데려다 주었던 것이다.
악. 짧은 비명과 함께 여자가 붉은 피를 쏟으며 자리에 쓰러졌다. 종종 어지럽다고 했었는데 그저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여긴 여자의 몸이 병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렇게 여자는 남자의 곁을 떠났다.
실로 오랜만에 남자의 집 앞에 인기척이 들렸다. 남자는 여전히 문 밖을 신경 쓰지 않았으나 강제적으로 문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철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집 주인의 허락도 없이 현관문은 스르륵하고 열렸다.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거야? 연락을 해도 답이 없더니만.”
남자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친구의 방문 아니 무단침입이었다. 남자는 그 와중에 원래 집 주인 허락 없이 문 열어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가. 너랑 실랑이 할 힘도 없어.”
“어후, 술 냄새.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건데. 뭐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니야. 밥이라도 챙겨먹어야지 이 술병들 좀 봐.”
“만사 다 귀찮으니까 가라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알아서 하긴, 너 이렇게 사는 거 하늘에서 보고 좋아 할 것 같냐? 이젠 충분해 너도 돌아와야지.”
남자의 어깨가 들썩였다. 소리도 채 새어나오지 않은 울음이었다. 아주 작은 흐느낌으로 남자는 슬픔을 삼켰다. 남자는 여자가 이렇게 아팠던 것이 모두 다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남자의 슬픔을 바라보던 친구는 남자를 억지로 차에 태웠다. 그리고는 회산백련지에 남자를 데려다 놓았다.
“자. 이제 네 모든 슬픔 여기다 다 남기고 가. 그분도 편하게 보내주고. 이젠 편하게 보내줄 때 된 것 같다.”
하얗게 핀 연꽃이 꼭 그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담담한 눈빛으로 넓게 펼쳐진 백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녀를 조금씩 놓았다.
넓게 펼쳐진 저수지에 유독 하얗게 핀 백련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제는 놓아 보겠다고. 희고 아름다웠던 당신을 잊지는 않겠지만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겠다며.
해가 중천에 떴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여전히 이불속에서 꿈틀거렸다. 아침밥은 칼같이 먹어왔던 생활습관 때문에 우리 집 아침 식사는 늘 6시 반이었다. 평소와 같이 6시면 주방에 있어야 할 아내가 어쩐 일인지 오늘은 여태 방안에 있다. 주말 아침이라 그런가 싶어 내버려 두었으나 시계바늘이 7시를 막 넘어가니 배도 고프고 해서 아내를 깨우기로 했다.
“이봐, 이제 그만 일어나. 어? 지금 몇 신줄 알어? 나 배고파.”
“아이 참. 당신은, 밥통에 밥 있고 냉장고에 반찬 있는데 그것도 하나 못 꺼내 먹어서 이러는 거예요? 나 좀 쉬자고요. 제에발.”
“여태 누워있었으면 됐지 뭘 더 누워있으려고해? 빨리 밥 줘,”
“몸살이 왔는지 지금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오늘 아침만 좀 넘어가자고요.”
아내는 다시 이불을 똘똘 말고 애벌레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사람이 무슨 몸살이냐고 물어보려다 괜히 불똥이 튈까 말없이 냉장고로 향했다. 아내말대로 밥통에는 밥이 있고 냉장고에는 반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주말이라 애들도 다 약속 있다고 나가버리고 아내와 단 둘이 있는 집에서 혼자 아침을 먹으려니 괜히 서글퍼졌다.
꺼내던 반찬통을 다시 냉장고에 집어넣고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봐. 몸살 났을 땐 낙지가 최고야, 낙지 사줄 테니까 먹으러 가자고.”
“당신이 웬일이래?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큰일 난다던데 아픈 게 내가 아니라 당신 아니야?”
“이 사람이, 사준대도 뭐라 그래? 싫으면 관둬.”
“누가 싫대요? 가요. 가자고요.”
아내는 힘이 없다더니 목포로 내려가는 내내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멋이라곤 하나 없던 양반이 오늘은 왜 이러냐면서 싱글벙글이다. 평소 무뚝뚝한 성격에 아내에게 살가운 말 한 번 못하긴 했어도 무신경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아내는 참 별 거 아닌 것에 감동스러워했다.
채 정돈이 안 된 옛 부두를 지나 재래시장이 줄줄이 늘어선 항구를 찾으니 바다 냄새와 생선의 비릿한 냄새가 풍겨와 코끝을 간질였다.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시원했고 낯선 항구도시는 언제나처럼 반가웠다.
바닥에 야트막히 물이 고여 있고 장화를 신은 장사꾼들은 싱싱한 물건이 많이 들어왔다며 손짓했다. 다른 것은 볼 것도 없이 세발낙지를 쓱 둘러보는데 주인이 흥정을 걸어왔다.
"뭣 찾으신다요?"
"저거, 저 세발낙지는 얼마요?"
"아 세발낙지 좋지요. 6마리에 3만원인데 특별히 큰 놈으로다 7마리 넣어드릴랑게 여서 드시고 가시쇼.”
"비싸네."
"뭐시 비싸다고 했싼다요? 크기는 이래봬도 한 마리만 자시면 힘이 벌떡 벌떡 솟는 당게요."
"한마리만 더 주면 안 될까요?"
"아따 사장님도 차암. 에이, 그렇게 허요."
흥정을 마치고 자리에 앉으니 매콤한 양념장에 돌돌 말은 낙지 호롱구이와 갈낙탕이 차례로 나왔다. 주인의 걸쭉하고 호탕한 말만큼이나 음식도 푸짐했다. 나무젓가락에 돌돌 말린 호롱구이를 베어 물던 아내는 음식을 채 삼키기도 전에 실웃음을 터트렸다.
“풋. 당신 오늘 이상하네.”
“낙지 먹다 말고 뭐가 또.”
“당신이 흥정을 다하고. 내가 알던 사람 맞나 싶어서. 크큭”
“싱겁긴. 식기 전에 얼른 먹어. 한 마리만 먹어도 힘이 불끈 솟는다는데 어때, 기별이 좀 와?”
“글쎄~ 한 마리 더 먹어봐야 알겠는데?”
아내가 배시시 웃는다. 세발낙지가 힘만 불끈 솟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부간의 사랑도 불끈 솟게 만드는 힘이 있나보다.
올 여름이 몇 십 년 만에 온 폭염이라더니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이마에 땀이 맺혔다. 시원한 빗줄기라도 내리면 좋으련만 하늘을 구름한 점 없이 맑고 태양은 지글거리며 만물을 비추었다. 장마가 왔어도 두 번은 왔을 시기인데 뉴스에서는 마른장마라며 비는 내리지 않고 습하기만 한 날씨가 당분간은 더 지속될 전망이라고 했다.
하릴없이 모여 있는 남자 둘이라니. 누가 보면 한심하다며 혀를 끌끌 차고 갔겠지만 이 남자들의 공통점은 솔로라는 것이다. 현기는 일병 말에 여자친구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상병이 현욱은 자그마치 삼일 전에 커플지옥에서 솔로천국으로 들어온 따끈따끈한 복학생이다. 간만에 쉬는 날짜가 겹친 남자 셋은 딱히 만날 사람도 갈 곳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현기는 목뒤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아! 이럴 땐 그저 마루에 시원한 대나무 자리 하나 깔고 대 자로 드러누워 낮잠 한 숨 자면 그만인데.”
“맞아, 죽부인 하나 껴안고 자면 며칠 못 잔 잠 몰아서 잘 수 있을 텐데. 크큭”
“으이구, 죽부인도 여자로 보이냐? 한심한 자식. 그나저나 우리 이렇게 쉬는 날도 겹쳤는데 방에서 할 일없이 뒹구는 것 밖에 할 게 없냐? 어디라도 갈까?”
“대나무 죽부인 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담양 대나무 숲에나 놀러갈까? 거기 영화 촬영도 많이 했잖아, 대나무 밭에서 무림 고수들의 싸움이랄까. 한판 할래?”
원래 여행은 갑작스럽게 가는 것이 제 맛이다. 어디로 갈 것인지 장소가 정해지고 함께 갈 사람만 있으면 그뿐이다. 배낭하나 둘러메고 출발한 담양 여행길에 들뜬 둘은 연신 종알대었다. 귓가가 따갑도록 수다를 떨다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다.
숨을 한번 들이 쉬어 마시니 공기가 시원하고 차가운 것이 청량감이 돌았다. 담양하면 떠오르는 대숲에 들어서니 빼곡히 서있는 대나무들로 인해 뜨겁게 내리쬐던 햇볕이 잠시 누그러졌다. 바람이 불때마다 대나무들은 스스스 하며 울어댔다. 눈을 감고 들어보니 빗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현욱의 말에 차분하게 명상하는 것도 잠시였다.
“이야. 대나무 죽이네. 판다가 있을 것만 같아.”
“저기 있네. 판다.”
현기가 가리키는 곳에는 모형으로 만들어놓은 판다 조형물이었다.
“사진이나 찍을래?”
“남자 둘이? 미쳤냐? 사람들이 보면 욕해.”
“뭐 어때, 이것도 기념인데 찍자 찍어.”
친절해 보이는 아주머니께 사진 좀 찍어달라고 부탁 한 뒤 대나무 숲에서 포즈를 취해보았다. 앞에는 아기자기한 판다 모형이 있었고 지나가던 여자들의 시선이 조금 따가웠지만 상관없었다. 남자들이라고 다정하게 사진 못 찍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나.
자 하나, 둘, 셋! 찰칵!
푸른빛으로 가득한 대나무들 사이로 한 줄기 햇볕이 새어 들어오니 아늑함과 함께 비밀스런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무더운 여름의 더위는 잠시나마 사라지고 답답하기만 한 가슴은 뻥 뚫렸다.
또 한 번 바람이 불었다. 스스스스.
“눈 감고 팔은 딱 벌리고 소리를 들어봐.”
“눈 감고 팔을 딱 벌리고? 소리를 들어?”
현욱은 현기의 말대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스스스스. 마치 대나무 잎 하나하나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렸다.
“비가 오는 것 같아.”
“그렇지! 시원한 초록비가 내리는 것 같지?”
“짜식. 초록비는 무슨, 배고프다 국수나 한 그릇 먹으러 가자.”
“낭만이라고는 국수처럼 말아먹고 온 자식. 같이 가!”
달려 나가는 현욱의 뒤로 현기는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대나무 소리와 바람 그리고 초록빛이 가득한 곳에 현욱의 모습이 담겨있다.
사진 제목은 초록비가 내리던 날.
딩동, 초인종이 울리고 문을 열어보니 웬 택배하나가 할아버지에게 와있었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엔 할아버지의 오랜 고향친구의 이름이 적혀있다. 웬일인가 싶어 상자를 열어보니 고향에서 보내온 홍어다. 상자를 열자마자 코끝까지 전해지는 냄새를 보아하니 잘 삭혀진 홍어임에 틀림없다. 홍어를 지긋이 내려다보던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의 유년시절을 떠올리시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전라남도 나주이다. 영산포 하류에서 단출한 살림에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았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어부셨다. 아버지는 늘 배를 타셨고 아버지가 배를 타러 나가실 때면 집에는 늘 아들 혼자였다. 아버지는 작은 돛단배를 타고 나가시면 하루 이틀은 물론이고 길게는 열흘이나 한 달 동안도 못 들어오신 날도 있다. 바람이 불고 풍랑이 치면 더욱이 그랬다.
어린마음에 아버지에게 배 타지 않으면 안 되냐고 울고불고 떼를 써 보았지만 아버지는 단호했다. 우리 두 식구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배를 타고 나가야 한다고 했다.
사실 아버지가 열흘 동안이나 소식 없이 배를 타고 나가도 돌아오는 날이면 배에 잡히는 것은 고작 두세 마리가 전부였다. 다른 선원들과 잡아온 물고기들은 이미 다른 동네에 팔고 남은 작은 물고기라도 챙겨 온 것이다. 그나마도 오랜 시간 바다에 있어 상해버리기 일쑤였다.
하루는 아버지가 배를 타러 나가러 그물을 손질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 오늘은 꼭 일찍 오셔야 해요. 아버지랑 먹으려고 남겨둔 생선이 있단 말이에요.”
“알겠다. 오늘은 꼭 일찍 들어오마.”
알겠다며 빙긋 웃어 보이시던 아버지는 그날도 그 이튿날도 들어오시지 않았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매일 나루터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강가를 바라보았다. 그 때 배 한척이 들어왔고 그 배에는 아버지가 타고 계셨다. 기쁜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가 아버지와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와 함께 먹으려고 항아리에 담아두었던 생선을 열어보았다. 그런데 항아리에서는 이미 코를 톡 쏘는 진한 향이 나며 생선이 푹 삭아있었다. 할아버지의 실망한 모습을 본 아버지는 원래 이 생선은 이렇게 냄새가 날 때 먹어야 제 맛이라며 아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왜 싱싱할 때 먼저 먹지 않고 기다렸어. 이 아비가 언제 올 줄 알고….
매일 놀아주지도 못하고 넉넉하게 맛있는 반찬도 만들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생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코끝이 찡해졌다. 그 모습을 본 아들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도 이렇게 기다려준 아들을 실망시키기 싫었던 아버지는 삭혀진 생선을 크게 한입 물었다. 그런데 특이하게 톡 쏘는 맛이 나며 상한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다음날이 되어도 색이 변하지도 않고 먹고 하루가 지났음에도 배가 아프다거나 탈이 나지도 않아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그 때의 아버지는 분명 아들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에 하늘도 감동하여 탈이 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할아버지는 홍어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어보았다. 여전히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생각해보면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도는 것이 잘 삭혀진 홍어의 속성 때문이겠지만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전히 홍어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에 코끝이 찡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할아버지에게 홍어는 아버지의 또 다른 마음이다.
올해 초, 친구 기원이가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 둘레길 입구로 거처를 옮겼다. 오래된 된 농가주택에 사는데, 이따금 구더기가 출몰한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온몸이 오싹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야, 온갖 곤충이 득시글거리는데, 살만하냐?”
내 질문에 녀석이 답했다.
“좋아. 행복해. 야, 너 전부 다 때려 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언제든지 와. 재워줄 테니까.”
“빈 몸으로 가도 되냐?”
“당연하지. 아무 것도 필요 없어. 아니다, 올 때 원두 좀 사 와라. 너무 시지 않은 걸로 200g 정도. 갈지 말고 홀빈으로.”
하여간, 구례에 된장남 하나 자리 잡았다.
당분간 잠잘 시간도 없이 바빠서 구례 생각은 아예 접고 있었다. 그런데 기원이가 내려가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나는 본의 아니게 휴식을 맞았다. 까놓고 말하자면 타의에 의해서. ‘이른바 경영악화에 의한 퇴직권유’였다. 앞날이 막막하긴 했는데, 지금까지 일에 시달린 시간이 너무 길어 지금은 무작정 쉬고 싶었다. 나 뭐하지. 사 년 동안 쉴 새 없이 달렸더니 노는 방법도 까먹은 터였다. 그때 갑자기 기원이 녀석이 생각났다. 그래, 일단 여기를 벗어나 보자. 아, 까먹지 말고 원두 사가야지.
서울에서 네 시간 정도를 달려 구례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러 터미널 밖으로 나오니 사방이 불빛하나 없이 깜깜했다. 암, 이래야 정상이지. 네온사인 불빛대신, 하늘에 총총한 별이 보였다. 새삼 ‘내가 지리산 가까이에 오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소속도 없이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구나. 자유인의 몸으로 지리산 입구에 오다니!
그러나 센티했던 기분도 잠시, 나는 구례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멘붕의 순간을 맞았다. 기원이의 집에 가려면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산 밑까지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기원이가 일러준 버스를 탔는데 당최 안내방송이 나오질 않았다. 심지어 버스는 안개 가득한 산 아래를 달려 꼬불꼬불 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겁이 나서 운전석으로 달려갔다.
“아저씨, 연파마을 나오면 얘기 좀 해주세요.”
아저씨는 대답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참을 더 가서야 내릴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기원이 녀석이 마중 나와 있었다. 나는 녀석을 붙잡고 하소연했다.
“이거 뭐 안내방송도 없고, 어쩌라는 거야! 지리산 미아 되는 줄 알았어! 흐엉엉.”
나의 투정에 기원이가 씽긋 웃었다.
“야, 여긴 서울 아니잖아. 서울 방식은 잊어. 구례에 온 걸 환영한다.”
다음날, 눈을 뜨자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손님 왔다고 기원이 녀석이 밤새 사랑채에 불을 무지막지하게 지핀 모양이었다. 그래도 펄펄 끓는 방에서 땀 좀 뺐더니 찜질방에 다녀온 것처럼 기분이 상쾌했다. 문을 열자, 차갑고도 청량한 기운이 방으로 들어와 잠이 확 달아났다. 그 때 본채 부엌문이 열리며 기원이가 아침상을 들고 나왔다.
“너 아침 먹고 혼자 화엄사나 갔다 와. 스쿠터 빌려 줄 테니까. 뭐, 종교? 나 성당 다니는 거 알지? 내가 죽겠는데 신이고 뭐고 가릴 때야? 너도 호신불 팔찌 하나 사다 차면 마음이 편해질지도.”
기원이 말만 듣고 무작정 스쿠터에 올라탔다. 세상에. 어제만 해도 도시에서 신세한탄하며 매연 속에서 혼자 얼쩡대고 있었는데, 오늘은 스쿠터를 타고 산길을 오르고 있다. 역시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야.
이 산길은 언제 끝나는 걸까 지루해질 무렵, 화엄사에 들어섰다. 시원한 계곡을 따라 걷다 보니 작은 문 한 채가 나왔다. 이게 바로 일주문이로군. 생각보다 작고 아담하다. 지리산 화엄사라고 쓰인 현판을 보니 내가 오기는 왔나보다 싶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금강문과 천왕문이 나오고, 비로소 사찰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보에 보물에 천연기념물까지 온갖 귀한 것이 자리하고 있다기에 꽤나 화려할 줄 알았는데, 웬걸. 단정하면서도 질서가 느껴졌다. 여백과 규칙이 공존하는 곳에 들어서니 숨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화엄사는 다른 절과는 다르게 북동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구조다. 지금까지 가본 사찰과는 조금 다른 구조에 어리둥절하며 경내에 들어가니,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사찰건물 중의 하나인 대웅전과, 목조건물로는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각황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황전에서 화엄사 전경을 바라보자니 대웅전 뒤로 드러나는 지리산의 능선에 말을 잃고 말았다. 산 속에 사는 영험한 노인이 담배를 피우는 듯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것들이 드리워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마구 자아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기가 크다던 각황전 앞 석등, 동·서 오층석탑을 둘러보고, 대웅전 앞 계단에 앉아 잠시 머리를 비웠다. 이렇게 아름답고 고요한 공간에서 시끄럽게 머리를 굴리면 뭐하나. 공간과 자연에 잠시 몸을 맡기고 이곳에 있는 동안은 바람처럼 지내자. 구례는 그렇게 지내는 곳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공간이니까.
화엄사를 나서기 전, 기원이가 말했던 호신불 팔찌를 사러 갔다. ‘호신불 팔찌 있어요?’라고 물으니, 보살님이 ‘무슨 띠세요?’ 하고 되묻는다.
“80년 원숭이 띠인데요.”
내 말에 보살님은 책자를 하나 들춰보더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안 좋은 말이라도 적혀있나 싶어 얼른 들여다보았다.
‘80년 원숭이 띠, △(세모)’
“젊은이, 잘 왔어. 화엄사 호신불 팔찌는 특히 더 영험하다우.”
속는 셈치고 믿어보자 싶어 팔찌를 샀다. 생각보다 비쌌다. 손목에 차고 만지작거리는데, 어라, 나무 알 사이에 틈이 있다. 조심스레 벌려보니 작디작은 불상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아, 정말 이래서 호신불 팔찌구나.’
나는 헛웃음을 치며 스쿠터 시동을 걸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간만에 친구들을 만나 수다 좀 떨었다. 고등학생일 때부터 줄기차게 보던 얼굴들이기는 하나, 기혼자 다섯 명이 한꺼번에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요즘은 늦게 하는 결혼이 대세라는데 내 친구 녀석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스물다섯 먹던 해부터 줄기차게 시집을 갔다.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일곱, 스물여덟, 이렇게. 다들 아홉수를 피하려고 작정을 한 건지 마의 스물아홉 이전에 전부 유부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뒤 나 혼자 독신녀로 남아 저 독한 유부녀들을 상대했다. 친구들은 남편 얘기, 아이 얘기, 아니면 또 다른 애인 얘기에 여념이 없는데, 나는 뭐 일거리 말고는 할 만한 얘기도 없었다. 남자아이돌들을 좋아하긴 하나, 친구 녀석들한테 얘기해봤다 정신 못 차렸다며 잔소리나 들을 테고. 그래서 친구들이 수다 떨 동안 조용히 쭈그린 채로 음식에 심취하거나,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리액션을 해주었다. 아, 가끔 야한 이야기를 할 때는 집중해서 들었다.
그러다 서른다섯 겨울, 드디어 나도 결혼이란 걸 하게 됐다. 상대는 나보다 세 살 많은 회사원. 평소 핥던 아이돌처럼 얼굴이 잘나지도, 몸매가 뛰어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래도 같이 있으면 말이 통하고 편안해서 살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준비하던 무렵, 친구 녀석들이 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동준씨, 기력은 좀 있어?”
나는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친구 녀석들은 서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눈치만 봤다. 그 중 미경이가 총대를 메고 입을 열었다.
“아니, 너네 애기도 낳을 거라면서 신랑 기운이 좋아야 2세를 낳지.”
순간 얼굴이 좀 붉어졌지만, 미경이 말이 맞다 싶었다. 우린 만나기만하면 서로 죽겠다며 피로를 토하고,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고개를 젖힌 채 잠들기 일쑤였다. 이래가지고 어디 자식 보겠나 싶어 걱정이 됐다. 그때 혜진이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입을 열었다.
“우리 다음 주에 광양에 어른 물 받으러 갈 건데, 너도 갈래?”
“어른물이라니, 물중에 어린 물도 있고 늙은 물도 있나?”
“야야, 알아듣게 설명을 해줘야지. 광양에 고로쇠물이 유명하다잖아. 미경이 남편이랑 우리 남편이 요즘 영 골골거리고 지루해서 우리 다음 주에 물 받으러 갈 거야. 고로쇠물이 기력 회복에도 좋고 비뇨기 계통에도 아주 좋다더라고. 너도 갈래?”
결혼준비도 중요하지만, 결혼 후의 생활을 생각하니 갑갑해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이나 나나 나이 마흔이 다 되어 가는데, 신혼도 즐기고 아이도 가지려면 역시 몸관리가 필수지! 가구랑 전자제품 들어오는 날짜를 어찌저찌 계산하다보니, 결혼 일주일 전 딱 반나절 정도 시간이 비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바로 광양으로 향했다.
약수통 하나 들고 룰루랄라 가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과 전혀 달랐다. 왜 난 백운산 중턱을 오르고 있는가! 왜 아무도 나에게 산으로 올라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단 말인가! 물먹으러 사람들이 이런 산중까지 올라오다니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정도 걸어 들어가니 평지와 함께 고로쇠나무들이 등장했다. 나무마다 하얀색 물통이 꽂혀 있었고, 나무에 꽂혀 있는 호스를 통해 고로쇠 물이 한 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겉보기엔 그냥 맑은 물인데 이거 한 말에 오만 원씩이나 한단말야? 아깝다. 이 돈이면 족발을 아주 그냥 원 없이 먹을 수 있는데.”
“아서라, 너는 그게 예비 신부가 할 말이냐? 이리 와서 어른 물 한 잔 마셔봐. 고로쇠 물로 끓인 백숙도 죽여줘.”
혜진이의 닦달에 고로쇠 물 한 모금 먹고, 백숙 한 점 뜯었다. 신기하게도 물이 달았다.
“야, 어른 물 생각보다 달고 맛난다. 어른은 쓴물만 먹고 살아야 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단물 먹어도 되는 거야? 어른 좋네.”
그 후로도 나는 한참동안 닭 한 점 뜯고 고로쇠 물 마시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처음에는 한두 잔만 주고, 동준씨 갖다 줄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약수통이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 동준씨만 기력 차리란 법 있나? 애는 내가 낳는 데 내 몸부터 챙겨야지. 고로쇠 물에 푹 빠져 입맛을 다시는 날 보고 미경이가 말했다.
“지금 많이 마셔 둬. 너 이제 시집가고 나면 쓴 물 배터지게 먹을 테니까.”
나는 약수통 바닥에 남은 고로쇠 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잔에 부었다. 그리고 잔 바닥까지 핥아 마셨다. 캬, 어른 물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