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되자 남자와 여자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함께 맞는 크리스마스가 처음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떨리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둘은 처음보다 서로에게 더욱 소중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캐럴송이 나오자 남자와 여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시 한 번 함께 보낼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며 설레는 데이트를 꿈꾸기 시작했다.
“삼청동 어때? 삼청동은 언제 가도 마음이 편안한 것 같아.”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제안했다. 크리스마스 당일이었다. 남자는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볼을 꼬집어주고 싶어졌다.
“삼청동은 걸으면서 구경할 때 제일 재밌대.”
남자가 여자에게 말하자 여자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마스 당일 해질녘, 남자와 여자는 삼청동으로 갔다. 삼청동은 ‘차 없는 길’인 감고당길 등에서 시작해 좁은 길과 큰길가를 번갈아 걸으며 구경하는 방법이 있다. 풍문여고에서 시작해 돌담길로 된 감고당길을 걷다 보면 정독도서관 사거리가 나온다. 정독도서관을 지나쳐 더 좁은 안쪽길로 걷다 보면 떡꼬치와 식혜를 먹을 수 있는 풍년방앗간과 기타 크고작은 로드숍을 볼 수 있다. 삼청동은 사람들 사이에‘핫 플레이스’로 떠오르면서 유명 외국 화장품 가게 등이 입점하기도 했는데, 그렇다 해도 삼청동의 묘미는 묵묵히, 그러나 아기자기한 매력을 풍기며 영업 중인 크고 작은 가게들일 것이다. 이곳을 걸으며 남자와 여자도 그런 생각을 했다.
“저것 좀 봐. 크리스마스 장식을 팔고 있어.”
둘 다 똑같은 생각을 했던 걸까. 한 로드숍은 관광객을 겨냥한 크리스마스 소품을 거리에 내놓고 팔고 있었다. 신이 난 여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가게로 가자, 남자도 덩달아 환한 얼굴이 돼 함께 구경했다. 오랜만에 본 겨울 소품이 마음에 든 여자는 딱히 살 마음은 없었지만 오랫동안 요모조모 살펴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삼청동에는 식당이 곳곳에 많은데, 맛집도 많대. 청와대 방면으로 우리 걸어볼까?”
해가 져 어두워지자 남자가 먼저 말했다. 비록 데이트지만 행여나 여자가 추울까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를 앞으로 이끌었고, 여자도 설레는 마음으로 남자의 뒤를 따랐다. 만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서로를 향한 둘의 마음은 이럴 때 더욱 깊어지는 것 같았다.
“전구를 보니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
밤이 되자 삼청동 거리에는 겨울 전구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고, 따뜻한 전구를 보자 남자와 여자의 마음도 한결 더 포근해지는 기분이었다. 불켜진 전구 덕분에 삼청동 거리는 온통 노랗게 빛났고, 여자와 남자의 마음에도 노란 희망이 비치는 기분이었다. 그 희망은 바로, 서로 믿고 의지한 지금까지의 시간이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믿음과 기대에서 비롯된 거라고 둘은 생각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식당이 있을 거야. 그곳에서 우리 크리스마스 만찬을 즐기자.”
남자의 말에 여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조금 추위가 느껴지려 했다. 아침부터 무척 추운 날이라고 누군가 그랬는데, 하루종일 밖에 있어도 춥지 않았던 건 옆에 있는 남자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야. 들어가자.”
남자가 여자를 식당으로 이끌었다. 레스토랑의 매니저로 보이는 준수한 남자가‘예약하셨나요?’라고 물었고 남자는 정돈된 말투로 ‘네’라고 했다. 여자는 그런 남자가 더욱 든든하게 느껴졌고 믿음직스러웠다. 이윽고 둘만의 식사가 시작됐다.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은 아마 ‘더욱 깊어진 사랑’이 아닐까, 하고 여자와 남자는 생각했다.
“종소리 울려라. 종소리 울려. 기쁜 노래 부르면서 빨리 달리자.”
겨울, 서울 명동. 북적이는 사람들 무리 속으로 징글벨 노래가 울려 퍼졌다. 바람결에 실려 온 노래가 겨울의 귓가에도 들려왔다. 뭉클, 뜨거운 눈물 같은 것이 겨울의 눈에 맺혔다.
“명동 와봤어?”
지금 겨울의 옆에는 수현이 서 있었다. 겨울의 옆에 서 있는, 모델 몸매의 복학생 선배 수현. 수현과 겨울은 말하자면 ‘밀당’ 중인, 하지만 아직 사귀고 있지는 않은 사이였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였고, 수현은 아마 고백을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겨울은, 조금 달랐다.
“너 미쳤어? 요즘은 3학년 때부터 취업 준비 해야 돼. 우리 언니가 그랬어.”
내년이면 대학교 3학년. 친구들은 복학생인 수현과 사귀는 것을 걱정부터 했다. 더군다나 수현은 인기가 많아 여학생들 사이에선 ‘한국대 김수현’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렇게 인기 많은 수현이 자신에게 잘해준다는 사실이 겨울은 사실 겁도 났다.
“명동에서는 굳이 맛집에 안 가도 돼. 여긴 군것질이 맛있거든.”
겨울이 수현의 별명을 떠올리고 있을 동안, 수현이 다짜고짜 노점상에 멈춰 서서 오뎅꼬치를 사들었다. 겨울이 쑥스러워 하며 망설이자, 수현이 대뜸 손에 꼬치를 쥐어주었다. 아주 잠깐 둘의 손이 스쳤다. 겨울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수현은 그런 겨울이 귀여운지 싱긋 웃었고, 겨울 역시 그걸 봤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마음을 들키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얼른 먹고 우리 남산 가자.”
사람들이 많은 거리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수현은 더욱 대담하게 겨울을 이끌었다. 겨울은 그런 수현이 결코 싫지 않았다.
옆에 수현이 있어 떨리긴 했지만, 오랜만에 온 명동은 볼거리가 많았다. ‘유커’라 불리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았고, 거리 곳곳의 휘황찬란한 불빛이 시선을 끌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맞게 꾸민 조형물과 조명이 눈을 황홀하게 했다. 가게마다 새어 나오는 캐럴송은 가뜩이나 들뜬 마음을 더욱 설레게 했다.
“많이 먹어. 이따 놀랄 수도 있으니까.”
명동에서도 가장 번화가라고 불리는 제일은행 사거리에서 수현이 대뜸 말했다. 놀랄 수도 있다는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하지만 그건 겨울도 마찬가지였다. 겨울 역시 수현이 놀랄 만한 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말은 겨울의 마음 속에서 이미 수십번도 더 연습된 상태였다.
‘수현오빠, 우리 이제 각자 갈 길을 가요. 전 이제 취업 준비에 집중하려 해요. 오빠도 마찬가지일 테니, 우리 각자 취업이 되면 다시 만나요.’
준비한 말을 다시 한 번 마음 속에서 되뇌자 다시 눈물이 나오려 했다.
“어디 아파?”
겨울의 표정이 폭설에 갇힌 마을처럼 어두워지자 수현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 그냥. 추워서요.”
겨울이 나지막이 답했다. 문득 정말로 추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현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겨울의 볼을 꼬집기라도 할 듯 한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겨울의 마음이 다시 더욱 아파지기 시작했다.
“남산에 가기 전, 잠시 들를 데가 있어. 가자.”
수현이 겨울을 다시 이끌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손목을 붙잡힌 겨울은 수현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 사이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일본어와 중국어 설명이 쓰인 화장품 가게를 지나고, 목도리와 장갑 따위를 늘어놓고 파는 가판대를 지나고,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나는 보세 옷가게를 지났다. 피켓을 들고 단체 관광중인 중국인 관광객 무리를 스치고, 다정한 커플들 사이를 지나, 수현이 멈췄다. 명동 중심가의 트리 밑이었다. 주변에는 구세군 종소리도 울려 퍼졌고, 때마침 트리 주위에서 방송이 나왔다.
ㅡ크리스마스에 명동을 찾아주신 여러분, 모두 소원은 비셨나요?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에 겨우살이 나무 밑에서 키스를 하면, 사랑이 평생 유지된다는 속설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겨우살이 나무는 아니지만, 이곳 명동 트리 아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소중한 시간을 보내보세요.
그러자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들린 건 여자들의 ‘꺅’ 소리였다. 분위기 탓인지 감동을 받은 듯 한 여자들의 즐거운 비명소리가 명동을 메웠다. 드문드문 ‘오오’하는, 중저음의 남자들 목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그때였다.
“겨울아, 내 마음을 받아줄래. 우리, 아직 불안한 청춘이지만, 지금 이 순간 소중한 우리의 20대를 함께 보내자.”
겨울은 자신 앞에 무릎 꿇은 수현을 내려다봤다. 모델처럼 키 큰 수현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전율이 손등을 타고 온몸에 퍼졌다.
“네 마음은 어떠니?”
수현이 겨울을 올려다 보며 물었다. 겨울과 수현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저는... 저는.”
겨울의 입술이 떨렸다. 마음 속에 연습한 말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저는... 저도, 좋아요.”
겨울은 연습한 말 대신, 마음이 시키는 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수현이 겨울에게 다가와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눈꽃처럼 번졌다. 크리스마스에, 겨울과 수현은 마주보고 웃었다. 크리스마스에 겨우살이 나무 밑에서 입맞춤을 하면 영원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머릿속에 오래오래 떠올랐다. 수현과 겨울은 남산타워로 말없이 걸었다. 그리고 사랑의 자물쇠를 채우며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그곳에서 복숭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퍽 힘든 일이었다. 도로변에는 복숭아밭이 있고, 봄이면 도화잎이 날렸으며, 여름이면 복숭아 축제가 열렸다. 그리고 우리는 폐교 운동장을 빌어 열리는 그 축제에서 맛볼 수 있는 복숭아 막걸리를 사다가 자취방에 쟁여두곤 했다. 복가난한 대학생들이었던 우리에게는 딱 그 만큼이 행복이었다. 복숭아향이나 복숭아 빛깔, 복숭아 맛까지. 우리는 많은 것들을 복숭아에 빗대어 표현했으며, 특히 나는 복숭아를 닮은 너의 발그레한 두 뺨을 좋아했었다.
휘어진 가지 끝은 종종 울타리를 넘어왔다. 한밤중이면 우리는 술기운을 빌어, 그리고 세상 모든 대학생의 권리라는 패기를 빌어 복숭아 서리를 감행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가 서리한 복숭아들은 항상 시거나 떫었다. 내가 복숭아를 훔치는 이유는 혹시나 주인이 나타날까봐 잘 익은 복숭아처럼 상기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네가 재미있었기 때문이었지만, 너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내 말이 맞지? 울타리를 넘어 오게 놔둔 것들은 맛없는 복숭아라니까.”
“아무렴 어때.”
나는 정말로, 아무려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었지만 너는 금방 토라진 얼굴로 길가에 주저앉으며 맛없는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문다. 다리를 까딱이며 맛없고, 조그맣고, 게다가 못생기기까지 한 복숭아를 오래오래, 아주 조금씩 먹어치웠다. 나는 그동안 모난 성격에, 키가 작고, 결코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네 옆모습을 조금씩 훔쳐보고 있었다. 딱 이 부분에서부터 나는 조금씩 혼란스러워진다. 너는 긴 머리를 하고 있던가, 안경을 쓰고 있었던가. 너는 나보다 어렸던가, 아니면 동갑내기였던가. 마침내 네가 복숭아씨를 퉤, 하고 뱉어냈을 때, 낡은 슬리퍼를 신고 있던 너의 복사뼈 언저리가 마치 곧 싹이 돋을 것처럼 신비롭게 보였던 것만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어느 날 너는 갑작스레 사라져버렸다. 사고가 났다고 했던가, 아니면 병에 걸렸다고 했던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휴학을 했다고 하던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거짓말처럼 덜 신경질적이며, 키가 더 크고, 더 예쁘장한 아이와 함께 아주 가끔씩 복숭아를 훔쳐 먹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졸업을 맞이한 나는 자연스레 그곳을 떠났다. 몇 년 동안 머무르던 자취방을 정리하고, 기념처럼 가지고 있던 빈 막걸리 병들을 내다 버렸으며, 백 리터짜리 쓰레기봉투 가득 담겨있던 것 중에는 분명 너와의 추억이 서린 물건들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렴 어때. 짐정리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고, 나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복숭아, 조치원 복숭아요!”
귀갓길에 트럭으로 복숭아를 내다 파는 노점 상인의 고함소리를 듣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무려 2만원 어치의 복숭아를 사 들고 돌아왔으며, 복숭아를 다 먹어치운 주말 즈음에는 조치원으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타고 있었다. 복숭아가 생각보다 맛있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복숭아씨들을 곧바로 내다버리지 않고 싱크대 한 구석에 모아두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나는 그동안 두 번의 연애를 더 했고, 한 번의 이혼을 감행했으며, 첫 번째 이직을 앞두고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지쳐 있었고, 다시 말하자면 네가 보고 싶었다. 물론 대학교 캠퍼스에 간다 한들 그곳에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저녁 즈음에야 학교 정문 앞에 하차했고, 절반 정도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후배들을 불러내어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셨고, 급기야는 몇 년 새 더 견고해진 울타리의 귀퉁이를 부수고 복숭아밭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학창시절에 단 한 번도 검거되지 않았던 복숭아서리범이 지금 밭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유다.
‘알 만한 사람이 도대체 왜!’하는 성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쩌면 그곳에서 자라는 복숭아나무들 중, 너의 복사뼈에서 자란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알 만한 사람이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어떻게 해도 너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나는 가끔 사람들의 발목 언저리를 내려다보곤 한다. 혹시나 낡은 슬리퍼 위로 드러났던 너의 바싹 마른 복사뼈, 금방이라도 싹이 돋아오를 것 같은 어리고 단단한, 못생긴 복사뼈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항상, 굽 높은 하이힐 위로 자리한 동그란 뼈들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모두 매끈하게 다듬어진 아름다운 모양이다. 나는 가끔씩 그것이 서럽다.
오늘도 입단속 철저히 하거라.
상궁마마님의 낮고 지엄한 목소리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이곳은 말 한마디도 새어나갈 수 없는 지밀이다. 나는 지밀나인 중 하나로 나이가 가장 어리다.
문과 문 사이를 두고 나오는 말소리. 상궁마마님들이 하는 이야기. 왕후와 상궁이 나누는 이야기. 그리고 생과방이나 소주방에서 새어나오는 잡다한 이야기 등이 떠도는 곳, 비밀이 만들어지나 절대 새어나가지 못하는 곳 중 하나가 된 곳이다.
“월이 너 그 이야기 들었니?”
“또 무슨 이야기? 도대체 이런 이야기들은 어떻게 떠도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전하께서 궐에 이야기꾼이라도 들였단 거냐?”
“쉿, 마마님께서 입조심 하란 말 못 들었어? 전하라는 단어도 입에 함부로 올리지 못 하는거 모르니?”
“답답해서 그래. 답답해서.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는 많은데 도무지 말할 곳이 없잖아. 그나저나 아까 하려던 이야기는 무어냐?”
“아, 그게. 전하께서 사모하는 여인이 있는데 그 여인을 위해 매일 밤 가야금을 탄다고 하더구나.”
“뭐? 중전마마 말고 사모하는 여인이 따로 있다고?”
“쉿, 목소리 좀 낮춰. 네 덕에 제 명에 못 죽겠다. 왜 가락국에서 온 악성 우륵이라는 자 있지? 그 자가 가야금을 잘 탄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그 자를 통해 노래를 전한다나 뭐라나.”
“게 거기서 무엇을 속닥거리는 것이냐?”
참모의 불호령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저 잡언이었습니다.”
“입 함부로 놀렸다가는 다들 알지? 쓸데없는 말 흘리지 말고 일이나 해야 할게야.”
가야금이라. 우륵이라는 자를 통해 노래를 띠운다. 전하께서 꽤나 로맨틱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가야금에서 참으로 기묘한 소리가 난다고 생각했다. 그저 기교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튕기고 뜯는 그 음정 하나하나에 무언가 있었어.
드르륵 문이 열렸다. 지밀나인 두 명과 김상궁과 조내관만이 동행하여 우륵을 만나러 간다는 명이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전에 생과방에서 나눈 이야기 때문이었다.
입을 함부로 놀릴 수 없었던 월야는 입을 꾹 다물고 김상궁의 뒤만 바짝 쫒았다.
구슬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하께서는 꽤나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눈을 감으시고는 구슬픈 가락에 귀를 기울였다. 흐음 하고 전하의 입에서는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우륵이라는 자가 전하의 심정을 너무 잘 꾀고 있었던 것일까. 노랫가락에 온 신경을 쏟느라 숨 한 번 크게 쉴 수 없었고 침도 함부로 삼킬 수가 없었다. 고개를 빳빳이 들 수도 없었기 때문에 좀 더 가락에 집중할 수 있었다.
확실히 궐 안에 있는 악사들과는 다른 음색이었다. 무언가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전에 생과방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거짓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여인을 위해 올리는 곡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 하마터면 감탄사를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처소로 돌아온 뒤 날이 밝고 나인들 몇 명이 소주방에 모여 있었다.
“얘, 너 어제 우륵이라는 자의 가야금 가락 들었다며? 어때? 정말 전하께서 여인을 위해 띄우는 가락이더냐?”
“글쎄요. 저는 모릅니다. 그저 가락만 들은 것이었지요.”
“얘가, 자세히 좀 말해봐.”
“정말이어요. 가락이 구슬프고 또 구슬펐지요. 그것이 여인을 위함인지 나라를 위함인지는 모르겠어요.”
“아이 재미없어. 됐다 얘, 가봐.”
언젠가 전하의 용안을 뵙는 날. 전하의 마음이 잘 전달되었을 것이라 말씀드려야 겠다는 것뿐이었다.
청주는 마치 머나먼 이국의 낯선 땅과 같았다. 심지어는 자동차를 타고 얼마나 걸리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 미지의 곳이었다. 나에겐 천안 즈음이 아래지방의 마지노선과 같았기 때문이다.
청주로 가야해. 당장 다음주부터.
청주는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청주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대문짝만한 간판, 전화 부스, 심지어는 쓰레기통에까지 온통 직지라는 단어가 새겨져있었다. 직지? 직지 혹시 직지심체요절할 때 그 직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이라 학교에는 온통 한층 들뜬 표정의 신입생들이 모여 있었고 저마다 각기 다른 지역에서 모였겠지만 청주라는 공간에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큰 유대감을 가지고 있는듯했다. 그들도 보았을까? 직지라는 단어를. 그리고 손으로 直指의 한자어를 그려보았을까?
마치 자신의 마니또를 찾기라도 하듯 학생들은 두리번거리며 자기와 성격이 맞을 만 한 친구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우연히 옆자리에 서있던 친구 사실 재수를 했을지도 모르는 잠정적 친구에게 먼저 말을 붙였다.
“청주는 교육의 도시잖아. 그런데 직지를 손으로 쓸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뭔 소리야. 뜬금없이.”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사람을 본 것 마냥 이상한 눈총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청주를 들여다보면 직지라는 글씨밖에 안보여. 그게 내가 본 청주의 첫인상이야.”
“너도 참 별나다.”
모르는 이에게 최대한 좋은 말로 대꾸를 해준 것이다.
알지모르겠지만 청주는 교육의 도시로 유명했다. 한때는 괜찮았던 대학교들이 밀집되어 있었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교육을 이어나가기 위해 청주를 찾는다.
교양과목으로 듣는 한자수업. 나는 가장먼저 直指를 손바닥에 끼적여봤다. 이거 맞지? 속으로 말했다. 왜 나는 한자수업시간에 직지를 그리고 있을까? 그저 교수님이 갑작스럽게 발표를 시켰을 때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망신을 면하기 위해서? 아니면 내 머릿속에 자리 잡혀 있는 청주 이꼬르 직지가 멍자국처럼 아직은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일까?
언젠가 꼭 가봐야겠다. 4년 동안 설마 한번 안 가보겠어? 공강시간도 있는데. 4년 동안 나는 직지에 대해 혹은 고인쇄박물관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수없이 많은 간판, 전화 부스, 쓰레기통에 새겨진 직지를 보면서도 익숙함에 대한 본능 때문인지 직지에 대한 처음의 궁금증이 타오르지 않았다.
어느덧 4학년 2학기. 청주에서 겪었던 많은 일들, 수 없이 지나간 도로, 자유를 갈망하며 걸어왔던 젊은 날.
드디어 마지막 방학이다. 방학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방학이다. 그저 놀다가 2월 달 졸업식에만 참석하면 길고도 짧았던 4년 동안의 대학생활이 종지부를 찍는 날이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사람들은 어떠한 이유나 명분을 가지고 술을 마시려 하기 때문에 종강이라는 명분은 젊은이들이 취하기에 더 없이 좋은 핑계거리였다.
부어라 마셔라. 거나하게 취했다. 주량이 세지 않은 나였지만 4년 동안 미운 정 고운 정 쌓였던 곳에서의 마지막이라고 하니 왠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야, 황준수 너 그때 기억 나냐?”
“뭐? 그때라고 하면 어떻게 알아 인마.”
“아, 왜 우리 학교 처음 오리엔테이션했을 때. 대강당에 다 모여 있었을 때 네가 나한테 물어봤던 거. 청주가 교육의 도시인데 직지를 한자로 쓸 수 있나 없나 물어봤던 거 말이야. 나 그때 너 진짜 또라인줄 알았는데. 그게 벌써 4년 전이네. 세월 빠르다.”
아참. 그랬었지. 잊고 있었다. 직지를. 아니 직지에 대한 호기심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집에 버스를 탔다. 창밖너머로 직지의 고장 청주라는 간판이 화려하게 빛났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가을이건만 남자는 한여름처럼 땀을 뻘뻘 흘렸다. 너무 오래 걸어온 탓일까 걷는 것도 사는 것도 힘에 부치다고 느껴지는 하루였다. 남자의 머릿속엔 오직 하나.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남자에게 유일한 피붙이라고는 남동생 하나였다. 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어릴 때부터 안해본거라곤 결혼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의 동생은 남자의 구속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더욱 엇나가기 일쑤였다. 남자의 동생은 12살 무렵 소년원에 들어갔다 나온 전적이 있다. 남자는 그런 동생을 때려도 보고 협박도 하고 회유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는 그저 동생이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남자의 직업은 정원관리사였다. 말이 좋아서 정원관리사였지 남의 집에서 청소, 빨래 등의 허드렛일과 함께 곁다리로 정원까지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집주인은 남자의 일하는 방식과 일처리의 결과에 만족하였다. 청소를 하라고 하면 청소를 하였고 정원관리를 하라면 정원관리를 했다.
“내가 이래서 자네를 믿어. 청소를 하라면 하면 그만이고 빨래를 하라고 하면 빨래를 하는 게 그게 어려운가? 지금까지의 사람들은 그게 참 안됐는데. 자네만 된단 말이지. 암. 그래서 좋아.”
남자는 집주인 남자의 말에 달리 어떤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정원을 정리하다 떨어진 나뭇잎들만 쓸어 모았다. 집주인의 말을 보면 남자는 지극히 단순한 일차원적인 일을 하였다. 명령이 떨어지면 그 명령대로 수행했다. 컴퓨터에 0이라는 숫자를 입력하면 0의 결과값을 나타내는 식이었다. 말하자면 집주인은 남자의 노예근성이 마음에 든 것이다.
남자는 처음 이 집에서 정원관리사로 일할 때 월급의 반을 줄이는 대신 남자의 동생과 함께 지낼 방 하나만 비워달라는 것이었다. 집주인은 그러마했으나 실제로 남자의 동생이 집에 들어온 것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주인은 남자의 월급의 반을 올려주지 않았다. 남자가 달리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주인은 달에 한번 남자를 곤욕스럽게 했다. 밤늦게 친구들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남자는 조용히 집을 나온다. 하룻밤을 떠돌아 다녀야했다. 남자의 방에서 보란 듯이 자신의 친구들을 재우고 밤새도록 술을 퍼마셨다. 남자는 그래도 아무런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방을 우리에게 내어준 전제로 월급의 반을 깎지 않았냐고 한번은 따져물을 법도 하건만 남자는 그러지 못했다. 남자의 동생이 언제 들어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남자에게서 동생의 전화가 왔다. 받아보았더니 경찰서로 와달란 전화였다. 동생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른 모양이다. 그저 그 죄질이 가볍기를. 오늘 안으로 합의해서 나올 수 있기를 이러한 말만 수없이 되뇌며 도착한 경찰서 안은 공간이 주는 압박만큼이나 무거웠다. 남자는 분위기만으로도 동생의 죄질이 가볍지 않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동생이 이번에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말을 담당 형사로부터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방화가 일어난 곳에 남자의 동생과 그 무리들이 있었는데 남자의 동생이 그동안 저질러온 전적이 화려하여 피의자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형사에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형사도 그런 남자에게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그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불리한 진술에 거부할 수 있다는 말뿐이었다.
남자는 동생을 바라보았고 동생은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형사에게 물었다.
“만약 지금 들어간다면 언제 나올 수 있나요?”
형사는 적잖이 놀란 눈치로 아직 혐의가 인정된 것이 아니고 범인이라고 자백한 상태도 아니기 때문에 형이 얼마나 될지는 모른다고 했다.
형사의 말에 개의치 않은 남자는 한 번 더 물었다.
“죄질이 무거운 만큼 오래 있다 나오게 되겠지요? 그렇담. 저는 이제 좀 쉬어도 되는 건가요?”
형사는 남자가 꽤나 충격을 받아서 실언을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물 한잔을 권했다.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저 한가로이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 예쁘게 꾸며놓은 정원을 바라보며 한가로이 산책을 하는 것. 남자는 집주인을 떠올렸다.
아직까지 남자가 들어오지 않은 것을 알면 집주인이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형사에게 집에 좀 다녀오겠다고 했다. 언제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지 않은 채.
엄마는 오늘도 추억에 젖어든다. 엄마는 서재에 들어가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나올 줄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종종 엄마가 서재에 들어간 시간을 알차게 이용한 적도 있다. 엄마가 서재에 들어가서 무엇을 보는지 살그머니 다가가 빼꼼 열린 문을 통해 본적이 있는데 아마도 사진첩을 보는 듯했다.
흑백사진은 지나간 추억을 곱씹는데 유난히 적절함을 선물한다. 똑같은 장면임에도 그것이 아주 선명한 컬러사진이었다면 가슴으로 느껴지는 아날로그적 감성은 아주 현저히 떨어졌으리라 생각한다.
엄마는 오늘도 똑같은 그 사진이다. 나는 언젠가 엄마에게 그 사진이 도대체 무엇인데 그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냐고 물은 적이 있다. 엄마는 내 머리를 톡 치면서 쪼끄만 넌 몰라도 된다고 하셨다. 엄마는 정확히 이야기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왠지 알 것 같았다. 그 사진속의 주인공이 엄마의 첫사랑이라는 것을.
엄마가 집에 없을 때 몰래 서재에 들어가 그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촘촘히 돌로 쌓은 긴 다리에 엄마로 추정되는 소녀와 엄마의 첫사랑으로 생각되는 소년이 서로를 향해 걸어오는 장면이었다. 엄마는 행복해보였다. 단정하게 양 갈래로 땋은 머리와 나풀거리는 치마는 엄마에게도 좋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적절했다.
따사로운 햇볕이 눈부시게 내리쬐고 바람이 나뭇가지를 못살게 구는 오후다.
우리가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이렇게 글을 적어 내려가는 이 시간에도 나는 네가 그립구나. 물에 참방참방 돌을 던지던 너.
너는 그날의 햇살보다 더욱 눈이 부셨어. 그런 네가 돌다리 너머에서 내게로 뛰어오고 있노라면 심장이 콩닥거려 너도 몰래 뒤를 돌아 숨을 고른 적이 있단다.
이름만큼 아름다운 너. 우리가 다시 만날 때 내가 이 편지를 건네면 너는 두 볼이 발그레 질까?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구나.
지금도 네가 그리운 -가.
손발이 오그라드는 연애편지다. 엄마의 연애편지를 훔쳐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진과 함께 꼬깃꼬깃하게 접어둔 누런 종이는 엄마의 주름살만큼이나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밖에 인기척이 들리는 것을 보니 엄마가 오셨나보다.
“너 왜 거기서 나와?”
“응? 아니, 책 좀 볼게 있어서. 근데 엄마, 엄마 오늘 좀 예쁘다.”
“간지럽게 왜 이래? 용돈 떨어졌어?”
“치, 엄마는~ 그냥 엄마에게도 햇살 같은 날이 있었던 것 같아서.”
“무슨 소리야? 당최 알아듣질 못하겠다. 싱거운 소리 그만하고 어서 손 씻고 와. 음식 준비해야지.”
엄마는 아빠가 그리울까? 아빠는 엄마를 그렇게 그리워했는데.
사진 속의 아빠는 웃고 있었다. 그 옛날 다리 위에서 엄마를 바라보고 있던 아빠는 엄마만큼이나 행복한 웃음을 띠고 있다.
지금 아빠가 생전에 좋아하던 전과 나물 그리고 밥을 앞에 두고 또 다른 사진 속 아빠는 웃고 있다.
제사가 끝나고 나는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우리 진천갈까? 그 다리 나도 걸어보고 싶어.”
아버지의 산사랑은 끝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산에 가지 말라는 것은 집에서 박제인형처럼 지내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바람만 쌩하고 불어도 엄마는 산이 위험하다며 아빠를 말리려 들었고 아빠는 좁은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고양이처럼 또 산으로 가셨다.
엄마는 아빠가 아무래도 산에 우리가 모르는 좋은 것을 숨겨두었나 보다고 혀를 끌끌 찼지만 아빠가 왜 이토록 산에 매달리는지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종종 내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빠가 어렸을 적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꽤 큰 인삼밭에서 농사를 지으셨다고 했다. 그런데 해마다 인삼도둑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셨다는 것이다. 애지중지하던 인삼을 어떤 놈이 훔쳐갔는지 걸리기만 하면 온몸을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줄 것이라며 씩씩대셨다고 했다. 그날 아침이 되었을 때도 어김없이 인삼 한 뿌리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꼭 한 뿌리씩만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마음먹은 할아버지는 그날 조그만 오두막에서 꼼짝없이 인삼도둑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이상한 짐승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던 할아버지는 무서움에 덜덜 떨면서도 인삼도둑을 잡고자 기다란 몽둥이를 들고 꼭꼭 숨어있었다. 그런데 그때 자박자박 거리는 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졸음이 확 깨었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자박자박 자박자박’ 사람의 소리인지 짐승의 소리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았던 할아버지는 오두막에서 내려와 냅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진했다.
“잡았다 요놈!”
“악!”
깜깜한 어둠 속 사정없이 내리친 몽둥이를 온몸으로 받은 건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그렇게 잡고 싶었던 인삼도둑이 짐승도 아닌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이었다니.
불빛을 비춰보니 아버지는 그만 정신을 잃었고 이마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에구머니나 하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도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고 아버지를 둘러업고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자초지종을 물었다. 한참 뜸을 들인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사실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것아, 그게 얼마짜린데 도대체 그동안 그걸 다 어디에 빼돌린겨? 엉?”
“아부지, 잘못했어요. 빼돌리려고 빼돌린 것은 아니고 다 좋은 곳에 썼다니까요.”
“이놈이! 바른대로 말 못해? 몽둥이찜질 한 번 더 당해야 말할 것이여?”
“아아, 아부지. 실은 저 윗동네 민자네 어무니가 많이 아프다 해서 내 몇 개 가져다준 것밖에 없다니까요.”
“뭐? 민자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양반네 가져다 바쳤다 이 말이지?”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나 보다. 사실 우리 엄마 이름이 민자고 엄마는 아빠의 첫사랑이다. 첫사랑을 위해 간 큰 도둑이 되기로 했던 어린 소년.
아빠가 요즘 산에 다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 할아버지 때문이다.
그 옛날 우리 아빠가 엄마를 위해 인삼도둑이 되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할아버지를 위한 거짓말도둑이 되기로 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도둑이 될 수 있다는 것. 아버지는 오늘도 함박웃음을 띠며 산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