쏴아아 부서지는 파도소리만 무성하다. 시간을 조금 더 지체하면 학교에 지각을 할 시간이지만 애꿎은 모래알만 매만지고 있다. 걸어갈 때마다 도시락 가방에서 나는 달각달각 수저 부딪히는 소리가 싫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엄마는 늘 억척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순댓국 장사만 벌써 20년째다. 늘 푹푹 찌는 큰 솥 앞에서 걸핏하면 대낮부터 술 한 잔 걸친 공사판 아저씨들 앞에서 걸걸한 말을 하며 지낸 세월이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엄마는 늘 도시락에 머릿고기와 순대 그리고 새우젓만 싸주셨다. 나는 그런 엄마가 미워 일부러 도시락을 놓고 간 적도 있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신애는 점심시간이 오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엄마는 내가 일부러 놓고 간 것을 알아챘는지 복에 겨워서 저런다며 한 소리 했다.
모래알만 매만지던 나는 터덜터덜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국어시간이었고 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를 배웠다. 모래톱이야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건우의 이야기인지 나 자신의 이야기인지 모를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나룻배를 타고 통학하는 건우.
갯배를 끌고 나가 통학하는 나.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가진 섬마을에 사는 건우.
실향민들로 이루어진 아바이마을.
내가 살고 있는 아바이 마을은 분단의 아픔이 고스란히 적셔있는 마을로 어려웠던 전후시대를 살아오며 고단하고 억척스러운 곳이었다.
부둣가로 올라오면 생선 비린내가 자욱했고 쪼그려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움푹 파인 마음의 주름을 부서지는 파도에 쓸어내리는 그런 곳.
나는 창밖에 부서지는 모래성을 바라보았다. 아슬아슬 하얀 거품에 스러지지 않기 위해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는 모래성이다. 쏴아아 쏴아아 겁 없는 파도는 모래성으로 돌진하였고 결국 파도는 모래성을 집어삼켰다.
모래톱 이야기에서 건우는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분단으로 인해 고향으로 가지 못한 설움이 남아있는 곳. 파도가 그 설움마저 무너뜨리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쳤다. 무심하게 발로 도시락 가방을 톡 건드려본다.
‘달각’ 소리를 낸다.
윗동네에 사는 은서가 도시락 가방을 들고 내 자리로 왔다. 나란히 앉아 도시락 가방을 연다.
은서는 새하얀 쌀밥에 멸치볶음에 장조림을 싸왔다. 내 반찬은 어김없이 머릿고기에 순대 그리고 새우젓일까.
어쩌면 나도 멸치볶음에 장조림을 싸주지는 않았을까?
창밖의 갯배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왔다 갔다를 반복한다. 신기한 듯 갯배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이 갯배를 타고 오고간다. 신기한 듯 배를 타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드라마 때문일까 어느 날 부턴가 갯배는 헤어진 연인들의 아련한 추억의 공간이 되었고 짙은 녹색에서 희미한 푸른색의 느낌을 띄기도 했다.
반찬통을 열기도 전에 익숙한 냄새가 풍겼다.
도시락 가방을 두고 갔던 날.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내가 싫었던 건 엄마도 아니고 돼지 비린내도 아닌 ‘달각’소리였다는 것을.
옛날 강원도 삼척 산골마을에 금슬 좋은 젊은 부부가 살았어. 남자는 늘 아내를 위해 열심히 나무를 하고 산에서 토끼와 멧돼지를 사냥하였고, 아내는 남편을 위해 늘 따뜻하게 밥을 짓고 성실하게 살림을 꾸려나갔지. 마을 사람들도 젊은 부부가 성실하고 예쁘게 살아가는 것을 축복해 주었지. 그런데 이 둘은 혼인한지 만 삼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는 거야. 때 마침 저잣거리 주막에서 이 남자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
“칠복이 자네, 그 소문 들었나?”
“무슨 소문 말이야?”
“쉿! 목소리 좀 낮추게. 아주 괴기하고 흉흉하여 마을사람들 모두 쉬쉬하고 있다네. 그것이 말이야. 우리 마을 꼭대기에 큰 산이 하나있지. 그 산속에 큰 두 개의 동굴이 마주보고 있는데, 그 이름이 대금굴과 환선굴이라지? 그런데 이곳은 너무나 신비롭고 영험한 기운이 흘러 아무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는구먼. 그런데 대금굴에는 만병을 고쳐준다는 신비로운 샘물을 지키는 황룡이, 환선굴에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석순을 지키는 청룡이 있다고 하네. 그런데 이 샘물과 석순을 얻기 위해선 반드시 용의 머리를 잘라 동굴입구에 바쳐야 한다고 하질 않나. 그런데 그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용의 울음소리에 귀가 찢어질 지경이라고 한다네. 그런데 한번 동굴에 들어간 사람 중 나온 사람을 본 적이 없다네….”
“예끼, 이사람 할 일없으면 술이나 마시게. 쯧”
그런데 이 이야기를 유심히 듣던 남자는 곧장 이 이야기를 부인에게 전했어. 그리고는 오늘 밤 대금굴과 환선굴에 찾아가 꼭 소원을 들어주는 석순에 아이를 점지해 달라는 소원을 빌기로 했어. 부인은 끝까지 말렸으나 남자는 단호했어.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밤이 깊어지자 남자는 대금굴과 환선굴을 향해 산속으로 깊이 들어갔어. 드디어 동굴입구에 도착하였지. 큰 두 개의 굴에서는 왠지 우렁찬 울림이 느껴지는 것 같았어. 남자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칼을 쥔 손이 벌벌벌 떨렸지만 꼭 올해에는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힘을 내어 조심스럽게 동굴입구에 들어섰어.
칠흑 같은 어둠에 한치 앞도 자세히 볼 수 없던 남자는 언제 어디에서 용이 나타날지 몰라 신중히 한발 한발을 내딛었어. 동굴 천장에서는 물이 똑똑똑 떨어졌고 바닥에서는 남자의 발자국소리가 쿵쿵하고 울렸지.
그때였어! 그르렁 거리는 소리가 나며 동굴 그림자로 용머리 비슷한 것이 기어 나오는 것이었지. 남자는 두려움에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두 눈을 질끈 감고 청룡의 머리를 있는 힘껏 내려쳤어. 동굴이 크게 울렸고 두려움에 벌벌벌 떨던 남자는 청룡의 머리를 들고 냅다 뛰기 시작했어. 밖이 거의 다 옴을 느낀 남자는 실눈을 떠 용머리를 확인하였는데 자신이 밴 머리가 용의 머리가 아닌 용머리 형상을 한 석순이었던 거야. 당황한 남자는 그만 동굴에 고여 있던 물을 밟고 발을 헛디뎌 동굴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지.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는 수일이 지나도 남자가 돌아오질 않자 남자가 떨어진 동굴로 향해 달려갔어. 도착한 곳에는 남편의 짚신 한 짝과 용머리 석상만 있을 뿐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 그곳에서 눈물을 흘리던 아내는 남편을 따라 가기로 결심을 했어.
그 마음이 한이 되어 지금도 동굴 입구에는 청년의 아리따운 아내인 미녀상과 천장에는 젊은 부부의 사랑을 담은 하트모양의 무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해. 그리고 남자가 떨어지며 놓친 용머리 석순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그 때의 일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고 하지.
먼 옛날, 동해안 바닷가 마을에 효은이라는 처녀가 살았다. 그녀는 양반집 규수로 일찍 어미를 잃고 홀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성품이 곱고 어질어 집안 노비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하니 남녀 가릴 것 없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녀를 예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효은의 아버지가 옆 마을 아름다운 처자와 결혼을 하였다. 효은의 계모는 성질이 사납고 야박하여 베풀 줄 모르는 욕심쟁이였다. 아버지는 계모의 꼬임에 빠져 밤낮 가리지 않고 술을 마셨고, 계모는 몸치장에 혈안이 되어 가산을 탕진하였다.
몇 년 후, 아버지가 죽자 계모는 집안의 노비들을 팔아넘기고, 효은에게 노비의 옷을 입혀 밤낮으로 집안일을 시켰다. 마음씨가 고운 효은은 군말 없이 집을 청소하고 밥을 해다 바쳤다. 효은은 알뜰하여 어떤 물건도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모든 가재도구를 아끼고, 늘 닳아 해질 때까지 사용했다.
하루는 효은이 낡은 빗자루로 마당을 쓸다가 가시에 엄지손가락을 찔렸다.
“이런, 빗자루가 못 쓰게 되었구나.”
하얀 손가락에서 떨어진 피는 마당과 빗자루 위에 뚝뚝 떨어졌다. 피가 묻은 물건을 써서는 안 된다는 미신에 따라 효은은 빗자루를 빈 곳간에 넣었다.
오래된 물건에 사람의 피가 묻으면 괴기한 일이 생기는 법. 밤이 되자, 피가 묻은 빗자루에 푸른빛이 돌더니 도깨비로 변하였다. 그곳에는 이미 여러 도깨비가 살고 있었다.
“당신들은 어디서 왔소?”
빗자루 도깨비가 물으니 도깨비들 저마다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아씨가 고운 손 얼어가며 개울에서 빨래할 때 쓰던 방망이요.”
“나는 아씨가 아픈 팔 부여잡고 떡을 칠 때 쓰던 절굿공이요.”
“나는 아궁이 옆에 놓여 아씨 발 등에 불 떨어질까 걱정하던 부지깽이요.”
“나는 아씨의 고운 머리 빗어주던 얼레빗이라오.”
모두 효은의 피가 묻은 물건들이 도깨비로 변한 것이었다. 도깨비들은 저마다 사정이 달랐지만 착한 효은을 걱정하는 마음만은 똑같았다.
“좋소. 오늘부터 우리가 아씨를 도웁시다.”
도깨비들은 밤새 질통에 물을 길어놓고, 깨끗이 집안을 쓸고 닦았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아침이 되자 효은은 깨끗해진 집안을 둘러보며 어리둥절했다. 도깨비들의 선행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흘에 한 번꼴로 산 짐승을 잡아다 놓았으며, 밤중에도 아궁이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다. 풍족해진 밥상에 계모가 웬 횡재냐 물었으나, 효은 역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집은 활기를 되찾았고, 효은의 표정은 나날이 밝아져만 갔다.
“아씨의 표정이 밝아진 것 같아 다행이오. 하지만 손끝에 물 마를 날 없으니 전처럼 모습이 곱지는 않소.”
어느 날, 도깨비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가 효은의 방 문 앞에 비단옷과 노리개를 가져다 놓았다. 아침이 되자 효은은 문 앞에 놓인 옷을 보고 감탄하였다.
“곱기도 곱다. 이렇게 빛깔이 고운 옷은 난생처음 보는구나.”
옷을 입은 효은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그 모습을 본 계모가 시기하며 달려왔다.
“요망한 계집. 어디서 이런 물건을 훔친 게냐. 자고 나면 손 쓸 것 없이 온 집안이 깨끗해지고, 먹을 걱정 안 해도 풍족하니. 이제 집안에 너는 필요 없다.”
계모는 옷을 찢고 효은을 동구 밖으로 내쫓았다. 마을에서 쫓겨난 효은은 오갈 데 없어 헤매다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도깨비들은 화가 나 밤마다 심술을 부렸다. 황소를 지붕 위에 올려놓고, 솥뚜껑을 솥 속에 넣어 두었다. 개똥을 퍼다 마당에 쌓아놓고, 질통의 물을 전부 마셔버렸다. 그러자 계모는 기겁하여 집을 두고 줄행랑치다 효은이 죽은 절벽에서 발을 헛디뎌 목숨을 잃었다.
계모가 죽고 나서도 도깨비들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밤이 되면 우물물을 마르게 하고, 파도를 높게 했다. 마을의 쌀을 훔쳐 산에다 버리고, 말려놓은 물고기나 궤를 훔쳐갔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도깨비들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도깨비 고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도깨비 고사는 별신굿이라는 풍어제로 발전했고, 지금도 동해에서는 이 제사를 지내는 곳이 남아있다.
회사를 나가지 않는 날임에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이 떠졌다. 평소였으면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소리에도 밍기적거리며 이불속으로 몸을 숨겼을 그녀다.
그녀는 사뿐히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질끈 묶으며 커튼을 걷었다. 아침햇살이 눈부셔 살짝 미간을 찌푸렸으나 금세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상쾌한 아침이다.
아침을 먹기 위해 찬장에서 우연히 인스턴트 미역국을 집어 들었다. 그때 울리는 문자소리. 휴대전화를 열어본 그녀는 오늘이 자신의 생일임을 알았다. 모 카드사에서 온 고객축하 문자다.
수지님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참 친절하게도 모르는 이의 생일을 축하해준다. 그녀는 생각했다. 때로는 가족이 카드사보다 못하다는 걸.
우연히 집어든 인스턴트 미역국을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윙하며 돌아가는 늠름한 전자레인지를 뒤로하고 그녀는 잠시 골똘히 생각을 했다. 생일엔 왜 미역국을 먹을까. 우리 엄마도 나를 낳고 미역국을 먹었을까. 그녀는 웬일인지 엄마 생각을 했다.
그녀는 엄마와 마지막으로 연락한 적이 언제인지 떠올린다.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마 떠오른다고 해도 악을 쓰며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소리 소리를 질렀을 때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가 미웠고 이후 가족과 등을 지며 살았지만 그녀라고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적이 없었을까.
온몸이 부서지게 아플 때 엄마가 끓여준 따뜻한 미역국에 밥 한 그릇 말아 후루룩 말아 먹으면 금세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아쉬운 대로 끓여먹은 것이 이 인스턴트 미역국이었다.
전자레인지가 임무를 마쳤다는 소리를 낸지도 모른 채 그녀는 식탁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애꿎은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렸고 혹시나 연락이 온 곳이 없나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지만 없다. 그녀는 다시금 창밖을 내다보았다. 얇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연락해볼까 생각했다.
멋쩍은 듯 연락을 하면 뭐라고 할까. 엄마도 나를 보고 싶었다고 할까.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어쩌나.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먼저 손 내미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하긴 그게 쉬웠다면 우리나라도 진즉에 통일을 하더라도 열두 번은 더 했겠지.
잊고 있던 미역국이 생각나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전자레인지를 열어 미역국을 꺼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시나 엄마일까?
아니어도 상관없다며 마음을 다독이고 문자를 확인했다.
엄마다.
생일축하한다우리딸
미역국은먹었니 인스턴트미역국먹지말고 집으로와
미역국끓여놨어
이게 뭐야. 띄어쓰기도 하나도 안 하고. 무심하게.
하지만 그녀도 안다. 엄마가 문자를 보내기 전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을 것을.
그동안의 앙금과 미안함과 서운함이 섞인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말 한마디면 될 것을. 서로 그리워했다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표현만 해도 이렇게 쉽게 풀어질 것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것을,
그녀는 황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벌써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조개를 넣고 끓여 비릿한 미역국.
그러면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이렇게 말할 것이다.
조개 말고 쇠고기 넣은 미역국이 더 좋댔잖아!
그리고는 말없이 서로의 손을 꼭 잡을 것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옛날, 어느 마을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잠잘 때, 밥 먹을 때 빼고는 입을 쉬는 일이 없었다. 목소리는 또 얼마나 우렁찬지 가까이 있으면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하고 다니느냐. 옆집 똥개가 새끼 낳은 일부터 아랫동네 아낙이 바람난 일, 나라님 흉보기, 어제저녁 밥상의 반찬, 죽다 살아난 할아버지 이야기, 조상님 묏자리까지 인간세상 일은 다 관여하고 다녔다. 남의 일이라면 상대 가리지 않고 이리저리 말을 나르는 탓에 피해 본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하루는 마을 사람들이 훈장님 댁에 모여 앉아 불만을 토로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귀가 따가워 일할 수가 없소.”
“그가 안 해도 되는 말을 옮긴 탓에 나는 아직도 마누라와 전쟁 중이라네.”
“이대로는 안 되겠소. 이제부터 우리 모두 그의 얘기를 들어주지 맙시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도 못 듣는 척했다. 들어주는 이가 없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마을을 떠날 결심을 했다.
“좋아. 말을 하면서 전국 팔도를 유랑하는 거야. 내가 직접 들을 사람을 찾아서 이야기하고 다니자.”
그는 그렇게 봇짐을 꾸려 여행을 떠났다. 세상은 넓고 말할 사람은 많았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말을 지어내고 옮기며 행복하게 몇 년을 보냈다.
전국방방곡곡을 다니던 어느 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정동진에 도착하였다.
“풍광이 아름답구나. 신선이 따로 없네. 이제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만 있으면 되겠어.”
이야기할 사람을 찾아 바닷가를 걷던 그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소리를 향해 다가가자, 파도가 바닷가에 선 나무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그래서 토끼가 용왕님에게 뭐라고 했느냐면…….”
파도의 목소리가 신기하여,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파도의 이야기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이야기보다 재미있는 게 아닌가.
‘아니,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가 있었단 말이야? 전부 들어 말하고 다녀야지.’
그는 바위에 쪼그려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파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가 다리가 저렸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슬쩍 다리를 펴다가 솔잎을 밟고 말았다.
“어머나, 깜짝이야.”
솔잎의 소리에 놀란 파도가 저만치 바닷속으로 도망쳤다. 그는 파도를 향해 외쳤다.
“파도야. 도망치지 말고 더 이야기해다오. 뒷내용이 궁금해서 자리를 뜰 수가 없구나.”
하지만 파도는 그를 경계하며 말했다.
“안 돼요. 제가 했던 말은 용궁의 비밀이랍니다. 오로지 해안가의 나무만이 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용궁의 비밀이라니, 더없이 탐나는 이야기였다. 용궁의 비밀을 전국 팔도에 말하고 다닐 생각에 잔뜩 들뜬 그는 파도를 향해 외쳤다.
“내 그 이야기를 위해 기꺼이 나무가 되마.”
그러자 그는 다리가 땅에 박히고 피부는 점점 딱딱해졌다. 손에는 싹이 돋았고 머리칼은 초록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소나무가 되자 입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말하는 데에 눈이 멀어 영영 말할 수 없게 되어버린 그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에게 입이 없으니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소나무가 되어 아직도 정동진 해변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 가족에게 계획된 마지막 여행이었다. 여섯 살짜리 딸아이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지 못해서인지 김밥을 싸 가자고 성화였다. 잠이 많아 아침마다 깨워서 유치원에 보내기가 그렇게 힘들었던 아이가 나보다도 일찍 일어나 고사리손으로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남편은 아직 자고 있는 것 같았다. 딸아이가 아빠를 깨우겠다며 쪼르르 건넛방으로 달려갔다.
“마지막으로 민주가 가고 싶다고 했던 섬이나 다녀오자. 텔레비전에서 본 이후로 벌써 열 번도 넘게 조른 것 같아.”
나는 목소리가 떨려오는 것을 꾹꾹 참으며 말했다. 사소한 일로 시작된 다툼이 어느새 산불처럼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그게 무엇 때문이었더라, 아마 설거지나 빨래 같은 아주 사소한 문제였던 것 같다. 각방을 쓰게 된 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하루 종일 말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은 날도 허다했다. 다른 건 다 괜찮았다. 우리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점점 더 소극적인 성격이 되어가는 민주를 두고 보기가 힘들었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는지, 먼저 이혼을 제의해 왔다. 이상하게도 그때 내게는 딱히 이혼을 거절할만한 구실도, 이유도 떠오르지 않았다.
섬에 다녀온 뒤에 이혼 서류 같은 것들을 정리하고, 민주에게도 엄마 아빠의 결정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번 여행은,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마지막 여행이 될 터였다.
서울에서는 두 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장고항에서 고작 십 분. 배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섬이라기에 민주가 멀미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장고항에서 섬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국화도. 생각할수록 기억하기도 쉽고 참 예쁜 이름이었다. 고작 여섯 살밖에 안 된 민주도 텔레비전에서 한 번 본 섬 이름을 기억하고 한 달이 넘게 국화섬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을 정도니까 말이다. 국화도는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송이의 국화처럼 작았다. 민주가 옷소매를 잡고 늘어지며 외쳤다.
“엄마, 나 토끼섬!”
토끼섬이 뭔가 했더니 도지섬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남편이 민주를 안아 올려 목마를 태워 주었다. 민주는 신이 나서 토끼섬, 토끼섬 하고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른다. 국화섬은 세 개의 섬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세 개 중 가운데에 있는 가장 큰 섬을 이르는 말이기도 한다고 했다. 위성을 거느린 행성처럼, 썰물 때에는 도지섬과 매박섬으로 가는 길이 모두 열린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도지섬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아주머니 한 분이 도지섬에 가는 것을 만류하신 것이다.
“지금 가면 안 될 텐데. 지금 밀물이라 들어가면 못 나올 수도 있어요. 잠깐 물놀이하면서 썰물 때까지 기다려 봐요.”
밀물이었다. 민주가 토끼섬 못 가냐며 울먹이다가, 끝내는 울음을 터뜨렸다. 남편도 나도 당황하여 일단 민주를 달랬다.
“민주야, 아주머니 말씀대로 좀 이따 썰물 때 가면 되잖아. 응?”
민주는 밀물이 싫다며 막무가내였다.
울다 지친 민주를 남편이 안아 재우는 동안 머리를 식힐 겸 산책을 나왔다. 나는 그때야 안내문을 제대로 들여다보았다. 도지섬은 지대가 높아 밀물 때에만 길이 끊기고, 매박섬은 지대가 낮아 썰물에만 길이 열린다고 한다. 남편과 나, 그리고 민주도 밀려오는 파도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한다. 나는 도지섬이 될까, 매박섬이 될까. 나는 왈칵 울음이 쏟아져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민주는 국화섬처럼, 도지섬과도 매박섬과도 매번 이별을 되풀이하며 살게 될 것이다.
뒤따라 나온 줄도 몰랐던 남편이 달려와 나를 일으켜주었다. 왜 우느냐고 묻는 남편에게 나는 조금 전의 민주가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보, 밀물이야.”
“당신, 그것 좀 내려놓을 수 없어요?”
한 달 전, 오랜 직장 생활을 마치고 쉬게 되신 아버지는 저녁을 먹자마자 또 통기타를 잡으셨다. 퇴직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얼큰하게 취하셔서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의 등에 난데없이 업혀 있던 바로 그 기타다.
“기억 안 나? 내가 왕년엔 기타로 아주 날렸잖어, 민정이 엄마!”
“그건 왕년 얘기고!”
어머니의 반격에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 말 그대로였다. 예전엔 아주 잘 치셨다지만,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기타를 연주한 적이 없는 아버지의 솜씨는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랜만에 기타를 잡았다는 사실이 마냥 좋으신 모양이었다. 내게 부탁하셔서 MP3에 가곡들을 잔뜩 다운로드 받으신 것은 물론이고, 7080 콘서트 프로그램 시간을 미리 적어두었다가 꼬박꼬박 챙겨보시기도 하셨다.
“어휴, 얘. 난 네 아빠 기타 소리 때문에 죽겠어, 아주.”
말씀은 항상 그렇게 하시지만, 나는 어머니는 아버지가 기타 치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것을 은근히 좋아하신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는 대학 캠퍼스의 잔디밭에서 기타를 치고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에 반했다고 하셨다. 옛날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 상징처럼 등장하는 바로 그 모습, 바로 흰 티에 청바지를 입고 장발을 한 채로 잔디밭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모습 말이다. 문학소녀였던 어머니는 소설처럼 아버지에게 첫 눈에 반했고, 매일 먼 발치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존재를 눈치 챈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거셨다고 했다.
“왜, 낭만적이고 좋은데.”
“다 늙어가지고 낭만은 무슨. 예전처럼 잘 치는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저걸 듣고 있자니 고역이다, 야. 저 양반, 내일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것도 까먹은 건 아닌지 몰라.”
어머니의 말에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독립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맞는 부모님의 기념일인 만큼, 올해는 꼭 내 손으로 챙겨드리고자 다짐했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여보, 민정이 엄마. 이리 좀 와 봐. 티비에 지금 누군 나오는지 알아?”
나는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지만, 어머니에게도 익숙한 이름인 듯 어머니가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가셨다. 서로 어깨를 기대고 앉아 노래를 따라 부르시는 모습이 정겨워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대체 어딜 가는 거냐?”
“가 보시면 다 알아요.”
저녁 식사 때 자르실 요량으로 아버지께서 사 오신 케이크를 그대로 조수석에 싣고,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미사리로 향했다. 서울 근교에 라이브 카페촌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 기억 나 어제 부랴부랴 검색을 해 보았더니, 꽤나 유명한 곳인데다가 생각보다 가까웠다.
서두른다는 것이 예약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버렸기에, 조정 경기장에 차를 세웠다. 운이 좋으면 모터보트 경기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데, 오늘은 시간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잔디밭과 꽃나무로 꾸며진 경정공원과 산책로, 솟대가 데이트코스로는 아주 그만이었다.
나는 아버지 몰래 어머니에게 예약된 카페의 전화번호와 약도를 건네 드렸다. 어머니는 초대 가수의 이름을 듣고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셨다.
“네 아버지 알면 아마 여기서 춤을 추실 거다.”
“그럼, 방해꾼은 이만 빠질게요. 한 삼십 분 있다가 이 길 따라서 쭉 걸어가시면 돼요.”
공연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카페 앞으로 두 분을 모시러 갈 것을 약속한 나는 혼자 자전거를 빌렸다. 공도교까지 이어지는 자전거 도로를 따라 갔다 오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한강변을 따라 자전거로 달리는 동안 종종 팔짱을 꼭 끼고 걷는 어르신들이 보였다.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는 노래 가사처럼, 추억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요즘 들어 남편이 수상하다. 대중가요에서였나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더니 20여년을 가까이 살 맞대고 살았는데 의심의 불씨는 생각보다 빠르게 번져나갔다. 남편은 오로지 한 길밖에 모르고 살았다. 가정과 직장. 성실하나로 친정 부모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뚝심 있게 밀어부처 결혼까지 골인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요즘의 남편은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얼마 전 만난 고등학교 동창애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았기 때문이다.
“얘, 남자는 다 똑같더라. 우리 남편은 아니겠지. 우리 애 아빠는 그럴 리가 없어라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딴 주머니 차고 다니는 게 남자라니까. 글쎄 세훈이 엄마 알지? 그 집도 이번에 이혼한다고 난리잖아.”
“어머, 왜?”
“왜긴, 여태 뭐 들었니? 딴 주머니 찼다니까. 글쎄 뭐라더라? 등산모임에서 둘이 눈이 맞았다나? 아무튼 뒤돌아서면 딴 생각하는 동물이 남자라는 동물이라더니. 세훈이 아빠 병수발 다 받아낸 게 세훈이 엄마인데 건강 생각한다면서 다닌 등산모임에서 바람이 날 줄 누가 알았겠니?”
“어머, 어머. 세훈이 엄마 어떻게 하니.”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위자료나 왕창 뜯어내고 갈라서는 거지. 간통죄로 안 처넣은 게 다행이라나 뭐라나.”
동창애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언행이 점점 거침없었다. 동창애의 언행처럼 나의 의심도 거침이 없었다. 남편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둥, 셔츠 옷깃을 살피는 등의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던 행동들을 내가 하고 있었다. 남편의 휴대전화에는 모르는 번호들이 적혀있었고 퇴근하면 바로 퇴근하던 남편은 요즘 새벽에나 들어왔다. 어딜 다녀오는 것이냐고 해도 답이 없었고 술을 마신 것 같지 않은 것이 회식도 아닌듯했다. 자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보니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슬쩍 거실에 나와 서 있는데 남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때다 싶어 문자를 열어보니 오늘도 수고 많았다고 집 앞까지 데려다 줘서 고맙다는 등의 문자가 와있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음에 더 서글퍼졌다.
날이 밝았다. 새하얗게 밤을 지새우니 두 눈이 퀭했다. 어쩐지 잠을 한 숨도 못잔 나보다 남편의 얼굴이 더 퀭해보였다. 속으로는 두 집 살림 하려니 힘들기도 하겠지라며 비꼬았으나 아직은 내색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렇다 할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남편이 씻으러 들어갔을 때 어제 밤에 문자를 보낸 사람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어떤 여편네가 받겠지라는 생각을 했건만 멀쩡한 남정네가 전화를 받았다.
“저, 혹시 김영훈씨 아세요?”
“네? 김영훈이요? 누구시죠? 전 그런사람 모르는데.”
“네? 어제 김영훈씨한테 수고 많았고 집 앞까지 데려다 줘서 고맙다고 문자 보내시지 않으셨어요?”
“아~ 대리기사요?”
전화를 받은 남자의 입에서는 대뜸 남편을 대리기사라고 불렀다. 큰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멀쩡히 직장 잘 다니는 남편이 왜 야간 대리운전을 뛰고 있는가. 왜 나에게는 일언반구 아무런 말도 없이 투잡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씻고 나온 남편이 채 옷을 다 꺼내 입기도 전에 따져물었다.
“당신 뭐야? 당신 밤에 대리기사 뛰어? 도대체 왜? 당신이 왜!”
“당신 내 휴대전화 뒤져봤어?”
“지금 그게 문제야? 왜 대리기사를 나한테 아무런 말도 없이 하고 있냐고 왜!”
나는 남편에게 울부짖으며 악을 썼다. 그간 남편을 의심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남편이 왜 힘든 시간을 홀로 보내게 내버려두었나 하는 자책감이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만 한 사정이 있었으니까.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곧 그만 둘 거야.”
남편은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고 자리를 회피했다. 하루종일 넋이 나가 멍청하게 소파에 앉아있는데 친정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얘, 나다. 김서방한테 고맙고 미안해서 어쩌니. 내가 손 벌릴 곳이 없어서 너네한테까지 손을 다 벌리고. 김서방 덕분에 다행히 급한 불을 껐다고 전해줘. 너도 마음고생 많았지? 조만간 집으로 와. 맛있는 저녁 해 줄 테니까.”
“엄마, 그게 다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이야기 해봐.”
“어머, 너 몰랐니? 내가 얼마 전에 급한 목돈이 좀 필요해서 전화했는데 김서방이 받더라고, 그래서 너랑 잘 상의해서 돈 좀 구할 수 있겠냐고 했지. 그랬는데 넌 모르고 있었니?”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괜히 친정 부모님 걱정할까봐 내 통장 하나 건드리지 않고 혼자 그 목돈을 구하려 대리운전까지 했던 거다.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 남편은.
자정이 넘어서야 남편은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들어왔다. 나는 말없이 남편을 꼭 안았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런 내게 남편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이 정도도 못하면 어디 쓰겠냐고 한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나는 남편과 다시 하나가 되어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