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만 간다 하면 심통을 부리는 아들 녀석이 유달리 좋아하는 절이 있다. 바로 부산에 있는 해동용궁사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맞는 첫 여름방학을 기념하여 온 가족이 함께 바다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들렀던 곳이 바로 해동용궁사다.
나라고 해서 불심이 깊어 절에 가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불자이셨지만, 나는 전형적인 무교다. 내가 절을 좋아하는 것은, 교회와는 또 다른 빛깔의 화려한 색채들과 그윽한 향내의 조화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용! 용 있는 절! 용 사는 절!”
“어휴, 진형아. 조용히 좀 하자. 지금 가고 있잖아.”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차 안에서 소리를 질러 대는 진형이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남편이 옆에서 ‘이제는 진형이가 당신보다 더 절을 좋아하게 되었다’며 웃었다. 사실 나는 오랜만에 비키니도 입어보고 싶고, 바다 절벽 위에 자리한 펜션에서 여유를 즐기고 싶은데 주객이 전도 되어 버린 기분이다.
남편이 취향이 워낙에 유치한지라 진형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함께 <드래곤볼>을 보았는데, 진형이는 여기 나오는 용신을 제일 좋아했다. 어린 아이가 보기에는 폭력적인 면이 없지 않은 만화영화라 걱정했었는데, 주인공이 지구를 구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커다란 용신이 멋있단다.
그리고 그 때부터 용 모형만 보면 사 달라고 떼를 쓰곤 했는데, 그런 진형이를 해동용궁사로 유인하기 위해 ‘그 절에 사실 용이 살고 있다’고 말한 것이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결국 다른 일정을 모두 제쳐 두고 용궁사를 제일 먼저 찾았다. 일부러 평일을 골라 왔는데도 주차장에 차들이 넘쳐나는 것이, 혹시 다른 엄마들도 다 나와 같은 거짓말을 해서 아이들을 데려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엄마, 빨리 좀 와! 엄마는 느림보야! 무천도사 같아!”
그게 누군지 묻기도 전에 진형이가 저만치 달려 나간다. 노점상에서 파는 씨앗 호떡 하나를 들려주어 겨우 진형이를 진정시키고 용궁사 가는 길을 올랐다. 같이 좀 말려 주면 좋을 텐데, 남편은 용을 외치며 방방 뛰고 있는 진형이가 그저 귀여운 모양이었다. 용궁사 가는 길에 있는 십이지상 앞에서 원숭이띠를 찾아 사진을 찍어 주니 또 좋아 죽겠단다. <드래곤볼>에 나오는 주인공도 원숭이라던데, 자기가 만화영화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가 보다.
두 번째로 오는 길인데도 이렇게 난리 법석인데, 초행길은 오죽했겠는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경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용을 찾고 있던 진형이가 없어져 울상이 돼 있는데, 대웅보전 앞에 서 있는 진형이가 보였다.
무엇을 보고 있나 했더니, 대웅보전 앞에서 꿈틀대고 있는 커다란 비룡상과 비룡이 쥐고 있는 여의주였다. 용이 좋다, 좋다 노래를 부르더니만 막상 눈앞에 있는 용을 보니 무서웠던지 뒷걸음질을 치던 진형이가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내가 진형이한테 가기도 전에 지나가던 어르신 한 분이 얼른 진형이를 일으켜 세웠는데, 진형이는 감사하다는 인사 대신 ‘드래곤볼!’하고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드래곤볼이라니! 얼굴이 새빨개진 나를 제외하고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심지어는 남편까지도 저만치 서서 큰 소리로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그 당혹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백팔계단 초입에 선 득남상의 코와 배에 사람들의 손때가 잔뜩 묻은 것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용궁사에 들러, 나도 옥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내려 주십사 하고 득남상의 배를 쓰다듬어 본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낳은 아이가 용궁사에서 용을 찾겠다고 신이 나 있으니, 정말이지 인간사란 알 수 없는 일이다. 남편이랑 진형이가 앞서 나가서 빨리 오라고 마구 손짓을 해 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진형이가 조금 더 자라 용신을 믿지 않게 되면 거짓말에 대한 책임을 물어오지는 않을까 불안해졌다. 아무렴 어떠랴. 지금 이렇게 즐거우니. 용궁사에서 날아올랐다는 용님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환승을 위해 모란역에서 서울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거리 너머로 시끌시끌한 장터가 눈에 띄었다. 오늘이 4일이니 모란장이 선 모양이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기일 전후로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이곳을 지나지만, 모란시장이 눈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는 줄곧 모란시장 얘기를 하셨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종종 나를 데리고 시장 구경을 가셨다는 것이었다. 너무 어렸을 때라 그런지 내 머릿속에는 모란시장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인지 나도 모르는 새에 길을 건너고 말았다.
집 근처에 대형 할인점이 생긴 뒤로 전통시장에 발을 들여놓는 것도 처음이었다. 고무줄 바지와 중국제 그릇들, 가짜 골동품, 싸구려 길거리 간식 등 식재료를 제외하고는 없는 이곳에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지를 물었더니, 어머니는 웃으며 ‘다 사람 보러 가는 거지, 뭐.’ 하셨다. 구수한 음식 냄새와 함께 할아버지들의 사투리,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을 보러 온다더니, 정말 동네잔치 같은 느낌이었다. 개고기로 유명한 모란시장이지만, 장날이라 그런지 애완 강아지며 고양이, 토끼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사람이 신기한지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 귀여워 그 앞에 한참을 서 있는데, 갑자기 시끄러운 뽕짝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서 보소. 품바 왔네, 품바!”
노점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던 할아버지 몇 분이 일어서시더니 음악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하셨다. 말로만 듣던 품바 공연이 펼쳐진 모양이었다. 색동옷을 입고 연지곤지를 찍은 아저씨들이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것을 구경하던 나는 어머니와 함께 모란장을 방문했던 기억 중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홉 살짜리의 눈에 비쳤던 품바 공연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넋을 쏙 빼놓을 만큼 시끄러운 것이었다. 저만치서 들려오는 흥겨운 가락에 얼마나 넋이 빠졌던지 나는 그만 어머니의 손을 슬그머니 놓고 공연단 앞으로 달려가고 말았는데,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었으면 될 것을 또 어머니를 찾아 이리저리 헤맸었다. 삼십여 분을 헤맨 끝에야 울음이 터졌고, 근처에서 사탕을 파시던 할머니 한 분이 나를 얼른 안아 올렸다.
“왜 그러냐, 아가. 엄마 잃어버렸누?”
나는 고개만 끄덕거리며 엉엉 울었다. 우는 애 달래는 데 옛날 얘기만 한 게 어디 있겠는가. 할머니는 ‘옛날 옛날에 말이야’ 하며 이야기의 서막을 여셨다. 옛날 옛날에 북에서 온 사람 하나가 북한의 산 이름을 따서 ‘모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었다.
“모란봉도 모란봉이지만, 제 어미가 그리워서 어미 모 자를 쓰려고 했다고도 한디야. 딱 이 자리에서 너처럼 ‘엄마, 엄마’ 하며 울었단 거야.”
다 큰 어른이 엄마를 부르며 우는 모습이 우스워 울음을 그친 나는 할머니가 물려주신 사탕을 빨며 얌전히 어머니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찾아낸 어머니는 내게 매운 꿀밤 한 대를 먹이면서도 사탕을 봉지 가득 담아 손에 들려주셨다.
품바 공연이 끝나고 휑해진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줄곧 모란시장 얘기를 하셨다.
“거기 말이야, 오리도 팔고 병아리도 팔고 네가 좋아하는 커피 사탕도 팔았지.”
내가 어머니만큼 자란 다음에도 어머니는 가끔 비닐봉지 가득 커피 사탕을 사 오셨다. ‘어휴, 엄마는 왜 자꾸 시장 물건을 사오고 그래.’하고 나는 가끔 어머니에게 되려 짜증을 내기도 했다. ‘다 사람 보러 가는 거지, 뭐.’ 하며 멋쩍게 어머니의 모습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 이름은 성춘향이다. 나이는 열 살이다. 나는 학교나 학원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도 금세 주목받기 일쑤이다. 아마 이름 때문이겠지. 나는 한동안 누가 내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 싫었다. 성춘향이라고 하면 무엇인지 나를 통해 춘향전의 춘향이를 떠올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아닌 소설속의 인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은 데 말이다.
언젠가 할머니 댁에 친척들이 모두 모인 적이 있다. 나는 언니, 오빠들이 많이 신 나게 방방 뛰어다녔으나, 할머니께서는 춘향이가 단정하고 단아하지 못하고 그렇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녀서야 되겠냐고 꾸짖으셨다. 난 춘향이라는 이름 때문에 늘 조심조심하여야 했고 상냥하게 웃어야 했다. 특히나 내가 남원사람이라서 더욱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가끔 잠자리에 들 때면 이런 생각을 한다. 정말 소설에 나오는 춘향이도 조신하고 얌전하며 단아했을까.
나는 일기 속에 춘향이를 만나보고 싶다고 적었다. 춘향이를 만나면 꼭 한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자리에 들면서 되뇌었다. 지금의 춘향이가 과거의 춘향이를 만나는 상상을 말이다. 생각만 해도 키득키득 웃음이 새어나왔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춘향이의 꿈속이다. 그곳은 조선시대였다. 춘향이도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춘향이는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춘향이의 이름을 불렀고 춘향이는 대답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뒤를 돌아본 것이 자신 하나가 아닌 또 다른 사람도 있었던 것.
그리고 춘향이를 부른 사람도 열 살 성춘향을 부른 것 같지 않았다.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보니 웬 도령이 한 처자에게 춘향이라고 부르며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순간 어린 춘향이는 자신이 정말 과거의 춘향이를 만나러 온 것임을 짐작했다. 놀랍고도 신기한 마음에 춘향이는 몰래 과거의 춘향이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인기척을 느낀 과거의 춘향이는 어린 춘향이의 손을 탁 잡았다.
“얘! 너는 뉘 집 자제이기에 나를 이리도 졸졸 쫓아다니는 것이냐!”
“아... 그게.. 그게 아니라.”
놀란 춘향이는 쉽게 말을 잇지 못하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혹시 언니가 그 성춘향이에요? 내 이름도 성춘향이라고 해요. 나는 저 먼 미래에서 왔어요. 나이는 열 살이에요.”
“뭐? 언니? 그리고 먼 미래?”
과거의 춘향이는 이 꼬마 춘향이가 하는 말을 도통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미래에서 온 춘향이가 말을 이었다.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에요. 먼 미래의 이곳 남원 땅에서 왔다고요. 그리고 중요한 건 난 언니가 참 보고 싶었어요. 내 이름도 춘향이니까.”
과거의 춘향이는 이름이 같다는 것에서일까 여전히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미래에서 왔다는 춘향이가 궁금해졌다.
“그래? 미래에서 왔다고! 믿을 수 없지만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꾸나. 그런데 왜 날 찾아온 거지?”
둘은 졸졸졸 흐르는 시냇가 앉아 어느덧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지요.
“난요. 누가 내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 싫었어요. 이름을 말하면 먼저 웃음부터 터졌고 그다음으로는 내 얼굴을 보면서 언니를 떠올렸을 테니까요. 사람마다 자신의 머릿속엔 춘향이라는 사람이 다 다른 모습으로 있나봐요. 마치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첫사랑처럼요. 그리고 모두들 자신이 생각하는 언니의 모습을 나한테서 보길 바라는 것 같았어요. 얌전해야 하고 조신해야 하며 심지어는 이몽룡을 만나야 되겠다고 놀리기도 하였지요.”
과거의 춘향이는 미래에서 온 춘향이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지요.
“그런 것 신경 쓰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그저 춘향이라는 이름의 너. 너 자신을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어. 그러다보면 사람들도 다른 사람이 아닌 너를 기억하게 될 거야. 춘향이라는 이름의 다른 너를 말이지. 새로운 춘향이를 네가 만들어 나가는 것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어린 춘향이의 손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길에 어린 춘향이는 잠에서 깬 줄도 몰랐지요. 눈을 떠보니 옆에 자던 곰돌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춘향이의 학교에서 자신의 이름의 뜻과 자기소개로 발표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서둘러 학교에 간 춘향이는 꿈속에서 만난 과거의 춘향이의 말대로 자신의 이름을 사랑하게 되었고 당당하고 자신 있게 말했지요. 이제부터 과거의 춘향전을 이을 새로운 춘향전이 시작되었다고.
반만년의 무게를 담고 오랜 세월의 흐름은 무상한 듯 고요히 흐르는 푸른 한강 위에 돛단배가 유유히 흐른다. 노를 젓는 사공도 없이 뉘엿뉘엿 흘러가는 강물 따라 흘러내려 간다. 저 멀리 보이는 포구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웅성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푸른 한강에서는 한가롭게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있다. 강나루에는 신록이 짙어져 버드나무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아차산의 푸름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나는 아차산에 올라 광나루를 내려다본다. 언젠가는 이란 경치를 벗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작은 텃밭에서 상추, 고추, 가지 등을 가꾸면서 낚싯대 하나 등에 메고 패랭이 하나 쓰고 그저 느긋하게 낚시를 즐기고 싶다. 광나루에 앉아 낚시 던져놓고 그저 여유롭게 낮잠이나 자는 삶이 얼마나 한가하지만 여유로울까.
나는 현재의 최고 명문가인 안동 김씨의 후원을 받고 있다. 나는 그를 위해 그의 집인 청풍계(淸風溪)를 여러 번 그려줬다. 내가 그린 청풍계 그림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사람들은 신선의 솜씨라며 나를 칭송한다. 여기에 성상께서도 나를 후원해 주고 계신다. 나는 성상을 세제(世弟) 시절부터 그림 스승이었을 정도다. 하지만 나의 예술혼은 채워지지 않는다.
수십 년 전 우연한 기회에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그림을 본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어찌 이런 그림을 단 3일 만에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사람의 솜씨가 아니다.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자신이 사는 곳을 그려냈구나.”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마음을 뺏기고 어찌하면 나 역시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수없이 고민하고 수없이 그리기를 수십 년. 수백 장의 화선지에 검은 묵과 종이의 여백을 살려 수없이 그리고 찢기를 반복하고 있다.
내가 이곳 광나루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아차산과 한강이 어우러지는 아리따운 경치와 함께 이곳은 권문세가들의 별장이 있어 자연과 인간의 건축물이 잘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더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모습과 우리의 시대를 한 폭의 그림에 그리고 싶다. 마치 신선이 사는 몽유도원도처럼...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그리고 내가 사는 현재를 그리고 싶을 뿐이다. 아차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나루터에 묶인 두어 척 나룻배와 한강을 가로질러 쉴 새 없이 다니는 돛단배, 그리고 그 안에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선비들이 가득 타고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풍류를 즐기고 있다. 나는 그리고 싶다. 우리가 사는 이곳을 신선이 노니는 곳처럼 말이다.
그렇게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해 나는 전통적 수묵화법이나 채색화를 나 나름대로 해석해 나만의 필묵법을 개발했다. 세간 사람들은 수많은 그림을 그렸고 내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는 선비나 직업 화가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겸재파 화법이라 부른다고 한다.
나는 이제 나만의 화법으로 '광진'을 그리고 있다. 광진은 도성 안에서 살곶이다리를 거쳐 광진길을 따라 이르게 되는 강나루로, 여기서 배를 타야 강 건너 삼전도로 갈 수 있다. 이상향의 존재하지 않는 산수를 그리는 것이 아닌 실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산수를 하나의 붓으로 백색 화폭에 담아 꿈을 꾸는 것 같은 환상을 자아내고 싶을 뿐이다. 그것의 나의 ‘광진’인 것이다.
어젯밤부터 내린 비가 그치고 이제 막 밝은 빛이 얼굴을 내미는 봄날입니다. 마당으로 민지가 작은 모종삽을 들고 나왔지요. 민지는 앞니 두 개가 빠진 개구쟁이 여덟 살입니다.
민지네 집은 경주에서도 아주 유명한 집이에요. 바로 민지의 할아버지 아니, 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쭉 경주에서 터를 잡고 대대로 경주에서 살아왔기 때문이지요. 민지네 할아버지는 경주의 토박이로 터줏대감 할아버지로 불리고 계시지요.
어쩐 일인지 민지는 아침부터 소란입니다. 마당에서 이리저리 삽을 들고 아빠를 재촉하지요. 오늘은 아빠와 작은 귤나무를 심기로 한 모양입니다. 어디에 심으면 좋을지 고민을 하던 민지는 작은 텃밭 옆에 한 곳을 가리켰지요. 민지와 아빠는 나무를 심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민지의 삽이 흙 속에 쑥 들어가자 덜거덕 하는 소리가 나더니 무엇인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민지는 조심스럽게 흙을 파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자기 같은 물건이 땅속에 박혀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민지는 놀란 마음에 다급히 아빠를 불렀고 아빠는 조심스럽게 물건을 꺼내었습니다. 마당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자 민지의 할아버지가 마당에 나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마당에서 나온 청동으로 만든 접시를 살펴보았습니다. 심상치 않은 물건임을 감지하신 할아버지는 나라에 신고하셨고 민지네 집에 문화재 조사를 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민지는 어리둥절하여 아빠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어요. 아빠는 민지를 무릎에 앉혀두고 집 마당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민지야. 우리가 발견한 청동 접시 말이야. 저번에 민지도 가봤던 박물관 있지?
그곳에 전시될 거야. 그곳에 우리 집 주소도 적힐 것이고 발견자로 민지 이름도 적힐 거야. 어때? 신기하지?”
유물 그리고 문화재에 큰 관심이 없던 민지는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지요. 그래서 그날로 아빠를 졸라 경주에 있는 세계문화유산과 문화재를 둘러보기로 하였습니다.
민지는 사실 경주가 신라 천 년 역사를 품고 있는 도시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수학여행도 서울에서 경주로 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었지요. 그런 민지가 아빠에게 먼저 경주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을 구경 가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민지는 먼저 별을 관측하였다는 신라인들의 과학지식이 엿보인 첨성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분황사를 지나 오릉까지 구경하며 스탬프를 찍고 신라 시대의 과학의 집결지인 불국사와 석굴암까지 둘러보았습니다.
그렇게 신라인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살아있는 천 년 역사의 고장 경주를 경험하고 온 민지는 그날 집에 도착하자마자 곯아떨어졌습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역사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 탓에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잠든 민지는 꿈에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민지가 빙그레 웃습니다. 꿈에서 신라인이라도 만난 것일까요? 아니면 마당에서 발견한 유물이 박물관에 전시된 상황을 본 것일까요?
그동안 민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경주의 문화재와 역사에 대해 너무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너무 가까이 있어 소중한 의미를 알지 못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직접 유물을 발견하고 세계문화유산에 대해 깊이 느끼고 나니 자신이 경주에 살고 있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뿌듯하게 느껴졌습니다. 잠든 민지가 한 번 더 빙그레 웃습니다.
어머니는 시장에 갈 때면 줄곧 나를 데리고 가셨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사람구경 많이 해보겠노 하면서 고사리 손을 꼭 잡고 시장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셨다. 작은 아이의 눈에 비친 시장은 없는 것 없는 만물상자 같았다. 엄마는 시장에 오시면 항상 마늘 한 접을 사셨다. 요즘 마트에는 깐 마늘이며 다진 마늘이며 편하게 나온 것들이 많은데 엄마는 항상 흙 묻고 주렁주렁 매달린 통 마늘을 사오셨다.
집에 오면 신문지 하나 깔고 구부정한 자세로 마늘을 까셨다. 그러면서 매우신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는 엄마에게 슬퍼서 우는 것이냐고 물은 적이 있고 엄마는 아니라고 했다. 그냥 눈이 매워서 그런 것뿐이라고 했다. 엄마의 구부정한 등허리가 흐느낌에 들썩였다.
엄마의 시집살이는 마늘만큼이나 매웠다. 아빠는 엄마와 할머니 사이를 방관하였고 할머니는 그런 엄마를 쥐 잡듯이 잡았다. 엄마는 할머니가 이러는 것이 할아버지 때문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져 계셨기 때문이다. 중풍으로 쓰러지신 것이 엄마 때문도 아니었는데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이후로 엄마를 못살게 굴었다. 할아버지가 쓰러지시는 바람에 할아버지 뒤치다꺼리까지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엄마를 더욱 못살게 굴었다.
서슬이 퍼런 눈매로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을 따지고 들었고 서방 기 빨아먹는 것이라며 욕도 서슴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나는 쪽방 구석에서 귀를 막고 있었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한 소리를 듣고 나면 나에게 시장에 가자고 했다. 시장에서 엄마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손을 꼭 잡으면 엄마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도 살 것이 마땅치 않으며 한 바퀴를 더 돌곤 했다. 애호박과 마늘, 부추를 사고 난 뒤 마지막으로 마늘 한 접을 또 샀다.
엄마는 주방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마늘을 깠다. 하나 두 개를 까다보니 또 눈이 매운 모양이었다. 엄마의 구부정한 등이 들썩거렸기 때문이다. 나는 마늘이 엄마를 괴롭히는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동그마니 몸을 말고 앉아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마늘 깔 때마다 울면서 왜 시장갈 때마다 마늘을 사?”
“마늘이 몸에 좋으니까 그렇지.”
“마늘이 몸에 좋아? 그렇지만 너무 맵잖아.”
“매우니까 먹는 거야. 매우니까.”
엄마는 대답을 하면서도 훌쩍거렸다. 눈물과 콧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제 곧 외출했던 할머니가 오실 시간이기 때문에 엄마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내가 도와주겠다고 해도 엄마는 ‘아서’라는 말을 하며 만지지 못하게 했다. 나는 마늘을 까도 맵지 않았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마늘 정리를 하고 있는 엄마를 곁눈질로 힐끔 보시더니 ‘뭐하려고 맨날 마늘이고.’라고 중얼거리며 쿵 하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엄마는 할머니가 중얼거리는 소리도 놓치지 않고 ‘의성마늘이 매콤한 게 혈액순환에 좋다고 하잖아요, 풍에도 좋지 않을까 해서.’라고 대답을 했으나 이미 할머니가 방문을 있는 힘껏 닫고 들어간 후였다. 나는 할머니가 들어간 방문이라도 흘겨보았다. 언젠가 할머니에게 엄마를 왜 이렇게 미워하냐고 물으려다가 그럼 못쓴다고 엄마에게 호되게 혼이 난 적이 있어서 그러지는 못했다.
엄마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엄마에게 마늘은 ‘매움’ 그 자체였나 보다. 엄마의 굽은 등허리가 들썩거릴 때마다 마늘은 더욱 매워졌는지도 모른다.
딸아이가 또 무릎이 다 까져서 왔습니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그랬는지 빨갛게 살갗이 찢어져서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들어옵니다. 흐르는 물에 상처를 씻어주고 바람을 호호 불어주었지요. 아이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 다시 생기를 되찾습니다.
어릴 적 넘어져 무릎이 다치거나 상처가 나면 우리엄마도 반창고를 붙여주지 않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저 깨끗한 물에 씻고 소독을 하여 바람을 쐬어주는 것이 제일이라고 하셨지요. 여섯 살에 나는 우리 엄마가 계모인가 생각한 적이 있답니다. 나도 친구들처럼 예쁜 곰돌이 반창고를 붙이고 싶었는데 엄마는 상처가 덧난다며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독약을 발라주고 따가울까 봐 호호 불어주는 모습을 보고 우리 엄마로 확신을 하긴 했지만요.
사실 상처가 난 곳에 물이 닿고 소독약이 닿으면 따갑기 때문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인데 엄마는 그것도 모르나 보다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에 씻어 치료하는 것은 할머니 때부터 엄마까지 쭉 이어져 내려온 치료법으로 다 이유가 있다고 했지요.
옛날 신라와 백제가 전쟁 할 당시 싸움에서 크게 다친 아들의 약을 애타게 찾던 어머니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백설이 온 땅을 뒤덮은 곳에 날개를 다친 학 한 마리가 눈이 녹은 물웅덩이에 날개를 적셔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아들의 상처를 물에 담그게 하여 치료하였다는 전설이 있다고 말이지요. 엄마는 옛말 그른 것 하나 없다고 했지만 나는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들은 체 만 체하였답니다.
엄마는 할머니와 동네에 아주 오래된 온천에 자주 가셨습니다. 전설이야기도 여기에서 들은 이야기이지요. 동네에 으리으리하게 세워진 좋은 찜질방들도 많은데 엄마랑 할머니는 꼭 유성온천으로 가셨답니다. 특히 몸이 여기저기 쑤신다거나 마음에 근심이 쌓이면 어김없이 온천을 찾으셨지요. 한참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 먼저 나가겠다고 투정을 부리면 엄마는 온천을 하고 나면 몸이 개운해지는 것처럼 마음도 개운해진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마음에 근심이 물에 씻겨 내려간다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친구들이랑 놀기보단 엄마랑 온천에 가는 일이 더 잦았습니다. 엄마는 꼭 수고했다고 온천에 가 그동안의 몸 고생, 마음고생을 다 씻겨 보내라고 하셨지요.
지금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가 더 그립습니다. 엄마와 마지막으로 온천에 갔던 날이 떠오릅니다. 엄마는 내 손을 꼭 잡으시고는 말씀하셨다.
"그저, 몸이나 마음이나 같은 법이다. 상처가 덧날까 꽁꽁 싸매고 있으면 그 속이 더 곪아 터지는 법이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셨지요.
어렸을 때 나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뜨거운 물에 몸을 숨이 턱턱 막히는데 왜 그렇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지. 그런데 지금 이렇게 엄마를 그리워하며 내 딸아이의 손을 잡고 유성온천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엄마의 말에 일리가 있나 보다 생각이듭니다. 내가 지금 이곳에서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내 딸아이도 나를 기억할까요? 문득 엄마가 보고 싶어지는 날입니다.
몇 년 전, 우연히 건넜던 다리가 하나 있다. 친척집에 다녀오던 길, 어머니가 갑작스레 야경이 보고 싶다 하셔서 일부러 차를 돌려서 갔던 곳에서 본 다리였다. 아치와 원 모양이 붉은 색과 녹색의 조명으로 빛나고 있던 그 다리는 화려하지도, 소박하지도 않았다. 다리 건너편으로 펼쳐져 있던 울산의 야경이 참 조용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말문을 여셨다.
“옛날에는 여기까지 고래가 들어왔다지.”
울산이 고래로 유명한 곳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강까지 고래가 다녀갔다니? 아버지의 말에 놀라 다리를 다시 살펴보니, 그것은 고래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물론 강에 고래가 지나다닌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일 터였다. 하지만 그 후로 나는 가끔, 울산에 흐르는 작은 강과 그 아래를 헤엄치는 고래의 모습을 상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강은 그리 작은 편은 아니었다. 다만, 내 상상 속의 커다란 대왕고래 한 마리가 헤엄치기에 작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내 상상 속에서 고래는 항상 하얀 배로 강바닥을 긁으며 천천히 태화강 상류로 헤엄쳐간다. 고래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가끔씩 하얀 물안개를 그려내며 유유히 헤엄친다. 그 거대한 고래가 지나가고 움푹 팬 자리에 푸른 강물이 넘실대며 차오르고, 고래의 지느러미가 쓸고 지나간 부분은 그대로 아름다운 강둑이 된다. 그야말로, 고래가 만든 강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나는 다시 그 다리를 찾게 되었다. 오랜만에 다시 친척집을 찾았는데, 돌아오는 길에 가족 나들이가 계획된 것이었다. 어디로 갈까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고래를 닮았던 그 다리를 다시 보고 싶다 하셨고, 마침 아버지도, 나도 그 다리가 그리워지고 있던 참이라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이제 막 정오를 지났으니 야경을 보는 건 무리겠네.”
어머니가 아쉬운 듯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우리 가족은 야경만큼이나 값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해가 내리쬐는 시간에 본 태화강변은 내 상상과는 달리, 아주 넓은 대밭이었던 것이다. 밤에는 그저 강변공원에 조성된 숲인 줄로 알았던 것이, 낮에 보니 모두 대나무였다.
“세상에,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낮에 들렀을 텐데 말이야. 고래 다리도 예쁘지만 대숲이 아주 장관이네!”
“그럼 아예 지금부터 해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야경까지 보고 갈까?”
아버지의 말에 우리 가족 모두 오케이를 외쳤다. 흔히들 그러듯이, 울산이라 하면 공업 도시를 생각하는데 이곳은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대나무들이 녹색 장막을 펼치고 있었다. 이전부터 자생하던 대나무를 시민들이 합심하여 이만큼 키워낸 것이라는데, 사람들뿐만 아니라 백로나 괭이갈매기, 고니, 왜가리나 민물 가마우지 같은 철새들도 많이 다녀간다고 했다. 도시 한가운데임에도 불구하고, 너구리가 살고 있다는 안내판까지 붙어있는 것을 보고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만하면 고래도 아직 살지 않을까?”
실없는 말 한 마디를 던졌을 뿐인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러면 좋겠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대숲을 누비고 다니다 지친 우리는 배를 탔다. 강 이쪽 편과 저쪽 편 사이를 연결한 줄을 잡고 직접 뗏목을 움직여가는 이 배의 이름은 갯배라고 하였다. 태화강 전망대와 그 뒤에 펼쳐진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직접 줄을 잡고 당기게 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줄을 당기는 동안, 건너갈 수 없을 것만 같던 강 저편이 점점 가까워져갔다.
순간, 나는 물밑으로 커다란 고래 한 마리가 헤엄치는 상상을 했다. 고래의 숨구멍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가 대밭으로 떨어진다. 대나무는 고래가 뿌린 물을 마시려 고개를 한껏 빳빳이 세웠다. 난데없는 상상에 웃음이 났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셨다. 나는 그 순간 우리 모두 같은 상상을 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흐뭇한 마음에 줄을 더욱 힘껏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