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생각 없이 가는 게 여행이라지만,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각자 나름 여행을 가게 된 계기가 있다. 누군가는 가족과 휴가를 보내기 위해. 누군가는 부모님의 생일을 기념하며. 그리고 누군가는 연인과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간다. 하, 나도 그랬지. 연인과의 추억도 좋지만, 화끈하고 끈적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코스를 생각하고, 숙소를 정하고, 이벤트를 생각하고, 내 몸을 정비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때의 연인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난 지금 혼자다.
그래서 그녀와 헤어진 이후, 여행을 한 번도 안 갔냐고? 그건 아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다녀오기도 했고, 친구 녀석들과 함께 객지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주말 껴서 하룻밤 더 눌러앉아 있었던 적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입사동기인 기범이 결혼식 겸 주말여행을 갔다. 여수에는 별미가 가득하다지? 한 두 개도 아니고 추천 먹을거리가 무려 열 가지나 된다고 한다. 그것을 ‘10미’라고 한다나 뭐라나? 게장백반, 한정식, 굴 구이, 장어구이와 탕, 금풍쉥이, 갯장어, 생선회, 돌산갓김치, 꽃게탕과 찜, 서대회. 캬, 이름만 들어도 정말 황홀하다. 다시 말하자면 여수에서 적어도 사흘은 묵어야 이 맛난 것들을 다 맛본다는 소리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것은 1박 2일. 비극이다. 그래도 절반은 먹고 가리다!
그러나, 막상 여수에 도착하고 나서 나의 굳은 결심은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기범이 녀석의 결혼식에서 그녀를 만났기 때문이다. 전에 같이 여행가서 화끈한 밤을 보냈던 그녀냐고? 걔 말고. 사실, 입사동기 중 괜찮은 여자가 하나 있었다. 이름은 진은영. 본사에 있을 때 사이좋게 지내서 잘하면 정분도 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그녀는 나에게 여지도 주지 않은 채 여수지사로 훌쩍 떠나버렸다. 그리고 나도 그녀도 별다른 연락 없이 각자의 삶을 살았다. 난 그 사이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만났으나, 결혼직전 헤어지고 말았고, 그녀도 지금은 싱글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사실 기대가 됐다. 오랜만에 만나면 뭐라고 하지? 그래, 은영이한테 여수 일대를 소개시켜달라고 하자. ‘10미’ 중 뭐가 제일 맛있냐고 물어보고, 그 중에 추천해주는 걸 같이 먹으러 가고, 그러다 분위기가 좋아지면 술도 한 잔 하고, 그러다가…….
그러나 은영이 건넨 첫마디는 너무나 잔인했다.
“혹시, 진헌씨야? 어휴, 못 알아보겠어. 살쪄서.”
삼 년 만에 만나서 나에게 살쪘다고 일침을 놓는 여자에게 어떻게 맛난 음식을 사달라고 하겠어. 게다가 그녀의 곁에는 날씬하다 못해 비쩍 마른 사내가 서 있었으니…….
“어, 남자친구야. 내년 3월에 결혼해. 진헌씨 내년에 여수 한 번 더 와야겠네?”
그녀의 2연타에 도저히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나는 단체사진을 찍기도 전에 황급히 식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무작정 택시를 탔다.
“아저씨, 여수에서 제일 맛있는 게 뭐예요? 그거 잘하는 집으로 가 주세요.”
아저씨는 선글라스를 낀 채 거울너머로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여수야 먹을 거 천지지. 서대회, 갯장어, 키조개, 꽃게탕…….”
“아저씨, 저 혼자 갈 거라 회나 탕은 좀 부담스러운데요. 다른 걸로…….”
“쯧쯧, 많이 먹게 생겨가지고 빼기는. 그럼 간장 게장이나 먹어. 근데 그것도 밥도둑이라 먹다보면 한도 끝도 없이 들어갈걸?”
“괜찮아요. 내일부터 다이어트 할 거니까.”
택시는 봉산 게장거리 앞에 나를 내려다 주었다.
“황소식당으로 가. 거기가 젤 맛있어.”
혼자 터벅터벅 걸어 황소식당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게장정식을 시켰더니 반찬이 한도 끝도 없이 나왔다. 간장게장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새우장에 갓김치에 매운탕에 양념게장까지……. 간장게장 없이도 밥을 반공기쯤 비웠을까? 사발 가득 담긴 간장 게장이 나왔다.
돌게라서 그런지 참게보다는 크기가 작고 단단한 듯 했다. 다리 하나를 쭉 뜯어 입에 넣고 씹는데! 쭈욱 베어 나오는 달콤한 게살들. 아아……. 생각보다 짜지도 않고 정말 별미였다. 게딱지에 붉게 붙은 내장과 알 위에 새 하얀 쌀밥을 얹고 쓱쓱 비벼 한 숟가락 입에 넣었더니, 진은영의 악몽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 여수는 내게 진은영이 사는 몹쓸 장소가 아니라, 앞으로는 간장게장 골목이 있는 꿈의 고장이다…….
진은영 말에 충격 먹어서 내일부터 다이어트를 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정신없이 두 공기 반을 뚝딱 비웠더니 몸과 마음이 모두 풍족해졌다. 그나저나 내 손에 들려 있는 이 묵직한 것은 무엇인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손이 멋대로 간장게장 5.5킬로 짜리 한 통을 결제하고 있었다. 그래, 한 통 다 비우면 그때부터 다이어트 해야지. 여자보다 달콤한 내 사랑 간장게장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란 말인가. 우쭈쭈쭈...
나는 간장게장을 소중히 품에 안고, 택시를 탔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여수역 가실 거예요?”
“아뇨, 아저씨, 여수에서 제일 맛있는 게 뭐예요? 간장게장 빼고 그거 잘하는 집으로 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