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 일곱 살 터울의 우리 남매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왔다. 친척집에서 독립한 뒤로는 오빠가 밤낮없이 아르바이트를 하여 생활비를 충당했고, 둘 다 무사히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뒤에는 몇 년을 더 일하여 작은 카페 하나를 차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다툰 기억이 거의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서로를 이해하려 무던히도 노력해 왔고, 기쁜 일이 있어도 고민이 있어도 가장 먼저 서로에게 말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오빠와 말다툼을 하는 일이 많다. 아마 내가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여느 가정의 오빠들처럼, 우리 오빠도 내 동갑내기 남자친구를 덮어두고 싫어했다. 하지만 나도 이제 스물여덟이었다.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어도 될 나이에 여전히 보호받고 있다는 것은 때로 나를 갑갑하게 만들었다.
“다희야, 너 또 걔 만나고 늦게 들어온 거야? 오빠가 말했잖아. 걔는 안 된다니까?”
나는 오빠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거실에서 오빠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방 안까지 들렸다.
오빠의 마음을 아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빠가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도 나는 초등학생이었으니, 오빠가 나를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빠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누구보다 잘나게 살길 바라고 있었다.
내 남자친구는 잘 생기지도 않았고, 집안에 돈이 많지도 않으며, 돈을 많이 벌지도 못한다. 오빠가 바라는 내 신랑감이란 내 남자친구와는 정 반대의 인물이었다.
어느 날은 오빠가 남자친구의 험담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내가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를 지른 적이 있었다. 오빠는 마치 사춘기의 딸을 처음 대하는 아버지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나대로 감정이 상하여, 그대로 방문을 걸어 잠가 버렸다. 자기가 잘못했다며, 이 문 좀 열어보라는 오빠의 말이 계속 들렸지만 안 들리는 척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일어나보니 오빠가 오랜만에 나들이나 가자며 도시락을 싸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오빠에게 미안하여 슬그머니 도시락 싸는 것을 도왔다. 그런데 오빠가 뜻밖의 말을 전해 왔다. 내 남자친구도 함께 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도착한 곳은 벽화마을이었다. 얼마 전에 조성된 마을이라고 들었는데, 다른 벽화마을들이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데에 비해 이 마을의 분위기는 완전히 시골이었다. 토담이나 돌담 위에 지게, 황소, 저고리를 입은 아이들, 단풍과 꽃 같은 것들이 그려져 있으니 말이다. 그 분위기가 너무 따스하여 홀린 듯 골목들을 걸었다.
오빠는 남자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를 잠시 따로 데리고 나왔는데, 오빠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가니 이상하게 생긴 나무가 서 있었다.
“어, 이게 뭐야? 연리지는 봤는데 뿌리가 얽힌 건 처음 보네.”
우리나라에서 한 그루밖에 없는 귀한 나무라고 했다. 오빠는 나무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사실 네가 죽을 때까지 나랑 함께 살았으면 했어. 솔직히 네가 나한테 동생이겠냐, 딸이지. 엄마랑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그 때는 나도 중학생이었어. 초등학교에도 못 들어간 네가 엄마 보고 싶다고 울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더라. 넌 그 때 어렸으니까 기억나지 않겠지만 고모도 우릴 많이 싫어하셨어. 너도 이제 시집 갈 나이이고 하니까, 네가 갑자기 결혼해서 집을 나가겠다고 하면 내가 누굴 보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더라.”
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말을 마친 오빠는 ‘데이트 재미있게 해.’라며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어렸을 때라고는 해도 여섯 살 무렵의 일인데 왜 기억나지 않겠는가. 나도 다 기억하고 있었다. 불쌍한 우리 오빠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바로 일을 하러 갔다. 고모에게 제 손으로 번 양육비를 드리고, 몰래 저축을 하여 나와 함께 도망치듯 고모 집을 나왔다. 내가 잠든 뒤에 집에 들어오고, 내가 잠에서 깨기 전에 집에서 나갔기에 나는 제대로 된 우리 집이 생긴 뒤에야 오빠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자친구가 멋쩍게 웃으며 ‘내가 더 잘해야지.’라고 했다. 아무래도 자기가 많이 부족한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오빠는 그냥 투정을 부리고 있을 뿐이야.”
나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 가족처럼 정겨운 분위기로 물들어 있던 마을, 그 한 구석에 같은 땅을 붙들고 서 있던 연리목이 꼭 우리 남매의 모습 같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지겹도록 건조한 일상의 반복이 시작된 것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꽤나 오랫동안 나는 이 생활을 지속해 왔고 지금은 그 생활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마치 오랜 기간을 만난 연인 사이에는 더 이상의 설렘과 풋풋함이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그런거였을까. 오래 만난 연인에게 늘 찾아온다는 권태기처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건조하고 팍팍한 일상에서 한 번 벗어나 보고 싶다, 뭔가 말랑말랑하고 몽글몽글한 새로움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또 일상에 문득 찾아온 권태기가 점점 사그라들 때쯤, ‘딩동’하는 핸드폰 알람음이 울렸다. 가끔씩 눈요기용으로만 사용하는 SNS 친구신청 알림메시지였다.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내 인간관계에 새로울 사람이라고는 없는데 하는 생각과 함께 친구 신청한 그의 이름을 보니 어렴풋이 머릿속에 들어오는 세 글자, ‘조수호’.
그였다.
작년 여름, 한 9개월 전쯤이었지 아마. 회사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원하는 날짜에 휴가를 받지 못하고 남들 다 여름을 즐기고 난 후에나 느지막이 3일 휴가를 받았었다. 그래도 나름 휴가인데 하는 마음에 아무 계획 없이 덜컥 기차표부터 끊어 놓았다. 목적지는 파주, 지방에 사는 나로서는 최고의 결정이자,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나의 파주로의 반짝 휴가는 시작되었다. 여행은 늘 언제나 그렇듯 향하는 곳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적어도 나에게 파주는 그런 도시였다. 잘 알지 못하는 곳에 대한 두려움과 그래서 더 많이 보고 느끼고 싶다는 벅찬 욕심을 안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여행에는 음악이 빠질 수 없단 생각에 준비한 라즈베리필드의 ‘청춘열차’라는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혼자라도 왠지 기분이 좋은 여행길 / 설렘 가득 안고 달려가고 있어 / 낡은 철길 위로 맑은 하늘 바라보네 / 내 마음은 바람소리에 맞춰 춤을 춰
노랫가사가 내 마음의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행복하고 행복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파주의 모습은 파랬다. 파아란 하늘과 초록나무로 가득 찬 이곳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제일 먼저 발걸음이 향한 곳은 말로만 듣던, 아니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너무나도 아기자기하고 예뻤던, 파주출판단지였다. 좋아하는 것 세 가지를 꼽으라면 엄마, 돈, 책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책은 그런 존재다 내게, 그래서 더 ‘파주’라는 곳이 특별한지도 모르겠다. 과연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어떤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행운이었다.
‘행운’, 아마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조수호’. 그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출판단지 안에 있던 지혜의 숲이었던가. 온통 책으로 뒤덮인 그 곳에서 나와 그는 처음 만났고, 서로 통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그의 미묘하지만 애써 담담하게 건넨 첫마디는 ‘저.. 책 좀 추천 부탁드려도 될까요?’였다. 그리고는 시작된 우리의 이야기는 그날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되었고 급기야는 다음날 임진각까지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알고 보니 그는 파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그럼에도 일부러 그러는 건지, 진짜 어리숙한 사람이여서 그랬는지 임진각을 가는 데에도 꽤나 애를 먹었다. 그래도 참으로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과 만나 함께 서로의 마음과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것은 꽤나 신선하고 즐거운 일이였다. 그렇게 3일이라는 시간을 그와 파주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어색함이 감돌기도 했지만 그래서 더 두근거리고 떨렸던 나의 여행. 그는 더 오랜 시간을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지만 이제는 현실의 나로 돌아와야 할 때였다. 기차역까지 바래다주면서 그는 말했다. ‘은하씨, 우리 또 만나요. 또 만나고 싶어요.’라며, 그렇게 나는 떠나고, 그는 남았다. 그리고 그 뒤로 간간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연락을 주고받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점점 연락을 하는 횟수가 뜸해졌고, 절대로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이야깃거리도 다 써버린 듯 형식적인 인사들만 주고받다가... 그렇게 서로를 조금씩 기억의 저편으로 묻어버렸다.
그런데 지금 딱, 내가 일상에서의 나른함과 권태로움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기라도 한 듯 먼저 손길을 내민 그에게 나는 어떤 대답을 주어야 할까. 그냥 친구신청이라기엔 너무나도 오랜만이고, 그렇다고 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에도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곧, 떠올랐다. 그를 위한, 아니 그와 나를 위한 명쾌한 대답을.
떠나기로 했다. 다시. 내가 좋아하는 책이 있는,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있는 그 곳, 파주로.
갑자기 지난 여름의 기억들이 하나 둘 내 가슴 속에 와 닿으며 또 다시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그래서 예전의 설렘과 풋풋함, 새로움이 가득한 나 자신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이번에도 파주행 기차표를 덜컥 끊어버렸다.
그곳에서 복숭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퍽 힘든 일이었다. 도로변에는 복숭아밭이 있고, 봄이면 도화잎이 날렸으며, 여름이면 복숭아 축제가 열렸다. 그리고 우리는 폐교 운동장을 빌어 열리는 그 축제에서 맛볼 수 있는 복숭아 막걸리를 사다가 자취방에 쟁여두곤 했다. 복가난한 대학생들이었던 우리에게는 딱 그 만큼이 행복이었다. 복숭아향이나 복숭아 빛깔, 복숭아 맛까지. 우리는 많은 것들을 복숭아에 빗대어 표현했으며, 특히 나는 복숭아를 닮은 너의 발그레한 두 뺨을 좋아했었다.
휘어진 가지 끝은 종종 울타리를 넘어왔다. 한밤중이면 우리는 술기운을 빌어, 그리고 세상 모든 대학생의 권리라는 패기를 빌어 복숭아 서리를 감행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가 서리한 복숭아들은 항상 시거나 떫었다. 내가 복숭아를 훔치는 이유는 혹시나 주인이 나타날까봐 잘 익은 복숭아처럼 상기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네가 재미있었기 때문이었지만, 너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내 말이 맞지? 울타리를 넘어 오게 놔둔 것들은 맛없는 복숭아라니까.”
“아무렴 어때.”
나는 정말로, 아무려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었지만 너는 금방 토라진 얼굴로 길가에 주저앉으며 맛없는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문다. 다리를 까딱이며 맛없고, 조그맣고, 게다가 못생기기까지 한 복숭아를 오래오래, 아주 조금씩 먹어치웠다. 나는 그동안 모난 성격에, 키가 작고, 결코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네 옆모습을 조금씩 훔쳐보고 있었다. 딱 이 부분에서부터 나는 조금씩 혼란스러워진다. 너는 긴 머리를 하고 있던가, 안경을 쓰고 있었던가. 너는 나보다 어렸던가, 아니면 동갑내기였던가. 마침내 네가 복숭아씨를 퉤, 하고 뱉어냈을 때, 낡은 슬리퍼를 신고 있던 너의 복사뼈 언저리가 마치 곧 싹이 돋을 것처럼 신비롭게 보였던 것만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어느 날 너는 갑작스레 사라져버렸다. 사고가 났다고 했던가, 아니면 병에 걸렸다고 했던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휴학을 했다고 하던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거짓말처럼 덜 신경질적이며, 키가 더 크고, 더 예쁘장한 아이와 함께 아주 가끔씩 복숭아를 훔쳐 먹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졸업을 맞이한 나는 자연스레 그곳을 떠났다. 몇 년 동안 머무르던 자취방을 정리하고, 기념처럼 가지고 있던 빈 막걸리 병들을 내다 버렸으며, 백 리터짜리 쓰레기봉투 가득 담겨있던 것 중에는 분명 너와의 추억이 서린 물건들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렴 어때. 짐정리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고, 나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복숭아, 조치원 복숭아요!”
귀갓길에 트럭으로 복숭아를 내다 파는 노점 상인의 고함소리를 듣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무려 2만원 어치의 복숭아를 사 들고 돌아왔으며, 복숭아를 다 먹어치운 주말 즈음에는 조치원으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타고 있었다. 복숭아가 생각보다 맛있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복숭아씨들을 곧바로 내다버리지 않고 싱크대 한 구석에 모아두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나는 그동안 두 번의 연애를 더 했고, 한 번의 이혼을 감행했으며, 첫 번째 이직을 앞두고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지쳐 있었고, 다시 말하자면 네가 보고 싶었다. 물론 대학교 캠퍼스에 간다 한들 그곳에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저녁 즈음에야 학교 정문 앞에 하차했고, 절반 정도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후배들을 불러내어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셨고, 급기야는 몇 년 새 더 견고해진 울타리의 귀퉁이를 부수고 복숭아밭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학창시절에 단 한 번도 검거되지 않았던 복숭아서리범이 지금 밭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유다.
‘알 만한 사람이 도대체 왜!’하는 성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쩌면 그곳에서 자라는 복숭아나무들 중, 너의 복사뼈에서 자란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알 만한 사람이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어떻게 해도 너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나는 가끔 사람들의 발목 언저리를 내려다보곤 한다. 혹시나 낡은 슬리퍼 위로 드러났던 너의 바싹 마른 복사뼈, 금방이라도 싹이 돋아오를 것 같은 어리고 단단한, 못생긴 복사뼈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항상, 굽 높은 하이힐 위로 자리한 동그란 뼈들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모두 매끈하게 다듬어진 아름다운 모양이다. 나는 가끔씩 그것이 서럽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뉴스에서는 비닐하우스에서 딸기를 따던 노인의 갑작스런 사망을 보도했다. 사실상 장마나 태풍이 왔다고 해도 기승을 부리는 더위는 쉽게 가실 줄을 몰랐고 사람이고 식물이고 더위에 지칠 수밖에 없었다.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는 곳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택배 배달 일을 하는 나는 유난히 더위에 도출이 잦았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옷이 땀에 젖었다 말랐다 해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아내는 내 땀냄새를 보고 돈냄새라고 했다. 아내에게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었지만 순수하던 아내가 속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했다.
일하던 중 유일하게 쉴 수 있었던 곳은 시원한 백화점이나 좋은 건물에 배달을 가는 것이었다. 운이 좋으면 시원한 음료를 건네기도 했고 수령인이 한 10분만 기다려 달라고 하면 못이기는 척 시원한 곳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기다려주기도 했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아마도 폭염주의보가 사흘째 이어지던 날일 것이다. 온 몸에 주름진 곳이라면 땀이 끼어있었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고 쉴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수십 개 아니 수백 개의 노란색 박스를 옮겨 담았다. 오로지 아내와 딸아이를 생각하면서였다.
순간 핑.
하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을 끔뻑이며 정신을 차려보려고 했으나 이미 하늘은 노란빛을 띠었고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 두 개로 겹쳐 보이다 이내 검은 빛을 띠었다. 악 소리 한번 질러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상자박스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그 다음은 기억이 없다. 눈을 떠보니 하얀색 천장이 보였고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아내의 얼굴이 보였다. 아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고 내가 눈을 뜬 것을 확인한 뒤 이내 약간의 혈색이 도는 듯 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내의 얼굴임을 알면서도 잠시 동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나는 왜 여기에 누워있는지.
“당신 괜찮아요? 정신 잃고 쓰러졌었는데.”
순간 하늘이 핑 돌더니 이내 쓰러졌던 모양이다. 건강만큼은 자신한다고 생각했는데, 택배 일 하면서 절로 운동한다고 탄탄해진 허벅지를 자랑했는데 이내 쓰러진 모양이었다.
“쓰러졌다고? 얼마나?”
“쓰러지자마자 누가 바로 보고 신고해줘서 다행이었어요. 지금 한 한 시간 정도 지났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그래? 이제 괜찮아. 그나저나 배달은 어떻게 한담.”
“지금 배달이 문제에요? 당신 열사병 때문에 쓰러진 거래요. 날이 계속 덥더니만.”
“열사병?”
쓰러진 이유가 과로이거나 빈혈인 줄 알았는데 열사병이었다. 그날따라 덥더라니.
퇴원 수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약을 처방받고 며칠간은 뜨거운 곳에서 지나치게 운동을 하거나 일을 하는 것을 삼가라고 했다.
지나치게 운동을 하거나 고온 환경에서 일을 삼가라니. 일을 바로 쉴 수는 없었다. 그저 요령껏 땡볕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시원한 물을 자주 마셔주는 것 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출근 준비를 위해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데 아내가 웬 봉투를 쓱 내민다.
“이거 입고 다녀요. 이거 최고 좋은 거라 비싸게 주고 산거니까.”
아내가 내민 것은 모시양말과 손수건, 개량한복처럼 생긴 모시옷이었다.
“한산 모시? 모시를 입고 출근하라는 거야?”
“모시는 뭐 노인네들만 입으라는 법 있어요? 요즘 젊은이들도 시원하고 가볍고 통풍 잘된다고 다 입고 다녀요. 당신 또 쓰러지면 어떻게 해? 그러니까 그냥 입어요.”
아내는 내가 쓰러졌을 때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아내가 준비해 준 옷을 한번 입어본다. 바람이 분 것도 아닌데 시원했다.
살갗을 스치는 까슬까슬한 느낌이 좋았다.
자, 따라하세요.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죄송합니다. 아픕니다.
다시 한 번 따라하세요. 자, 저기 알리씨. 입을 더 크게 벌려야 소리도 크게 나지요.
외국인 근로자들은 점심시간 전 10분 동안 기초 한국어 회화를 배운다. 배운다기보다는 반복적으로 따라 읽는 것이다. 한국말이 서툰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알찬 시간이 된다.
“장미씨는 한국말 잘 하니까 이런 수업이 필요 없죠? 그래서 우리 조선족 사람들이 참 좋아. 말도 잘 통하고 일도 야무지게 잘 하고. 자자 손님들 몰릴 시간입니다. 서두르세요.”
경영지원이라는 팀의 차장은 슬쩍 장미의 어깨를 톡톡 치며 능글스런 얼굴을 하고 지나쳤다.
공장이나 공단에서 그렇듯 서울 주변 식당에서도 이주노동자들의 고용률은 대폭 상승했다. 국적도 언어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지만 그중에서도 연변사람 즉 조선족들의 고용률이 눈에 띄게 많았다. 아마 외국인근로자라는 이유로 임금 부담이 낮은데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장점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 ‘코리안 드림’을 가슴에 품고 하루를 버텨가고 있다. 임금을 받으면 최소한의 생활비만 남기고 모두 고향으로 보내고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아파도 아프지 말아야 했다.
저기요, 여기 이거 고기 정량 맞아요? 저기요, 여기 반찬 좀 더 달라는데 왜 안 갖다 줘요? TV프로그램 채널 좀 돌리게 리모컨 좀 가져다 줘요.
식당을 찾는 사람들은 말투와 억양이 좀 어색한 외국인 근로자들을 보면 유난히 뾰족한 말투로 그들을 대했다. 여기 사장 나오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반말로 야, 너라고 말하는 사람, 심지어는 욕설까지 아무렇지도 내뱉는 사람들까지.
사실 그들을 홀대하는 것은 식당을 찾은 손님들만은 아니었다. 식당에서도 일종 텃새라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좀 더 험한 일을 한다거나 사고가 났을 때 처리들이 그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주방에서 일을 하다 화상을 입었다거나 배달을 나갔다가 오토바이 사고라도 나면 병원비를 지급해주기는커녕 오토바이 수리비를 임금에서 차감하는 일도 잦았다.
그들의 코리안 드림은 녹록치 않았다.
꺅. 짧은 외마디 비명이 주방 창고 쪽에서 들렸다. 식당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창고 쪽으로 향했고 몇몇 사람들이 창고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창고에서 식당 최고참 주방장이 허겁지겁 나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주방장은 별일 아니고 선반에서 물건이 장미씨 머리 쪽으로 떨어질 뻔 했다고 했다. 그런데 창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래쪽 선반에는 물건들이 어질러져 있고 장미씨가 겉옷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장미씨, 이리와 봐요. 아까는 많이 놀랐죠?”
식당에서도 유일하게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친절한 여직원이 장미를 불렀다.
“아, 네. 조금요.”
“나도 한국 사람이지만 식당일 하면서 사람들한테 정떨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야. 그러니 외국인들은 오죽할까 싶어. 나라도 나서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해주고 싶지만, 괜히 불똥 튈까 무서워서 그러지도 못하고. 씁쓸하네.”
“아니에요.”
“혹시나 사장이든 주방장이든 또 그런 일이 있다고 하면 참지 말고 말해요. 왜 당하고 있어야 해. 사실 그렇잖아. 나나 그쪽이나 여기 사장이나 다 돈 벌자고 하는 거잖아. 가족들 부양해야 하고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봐주고 외국인이라고 무조건 참고 그건 옛날 일이야. 요즘은 그런 시스템도 다 잘 돼 있다고 하더라고. 주방장일은 내가 잘 말해볼게. 놀랐을 텐데 오늘 마감은 내가 하고 들어갈 테니 얼른 집에 가봐요.”
장미는 눈물이 찔끔 났다. 서럽고 서러운 마음이 겹겹이 복받쳐 뜨거운 눈물로 흘려 내렸다. 당장이라도 짐을 싸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말처럼 쉽지 않음을 알기에 장미는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강해져야 했다. 기회의 땅에서 외로움을 딛고 당당히 일어나 꿈을 이루어야 하기에.
언제부턴가 어색한 사이를 메우는 공간이 문화예술의 공간이 되었을까? 그곳에는 보이지 않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있다. 미술작품을 보면서 작품을 바라보는 안목을 확인하고 취향이 우회적인지 노골적인지를 확인한다. 젊은이들은 그곳에서 문화를 나누고 한숨을 돌린다.
그리고 티켓 단 두장만으로 두 사람의 마음이 움직일 수 공간이다.
“효진씨,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요?”
“오늘 저녁이요? 야근만 없다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런데 왜요?”
“다른 건 아니고, 저한테 뮤지컬표 두 장이 생겼거든요. 혹시 안보셨으면 같이 보실래요?”
“우와, 그거 엄청 빨리 매진 된 거라 구하기 힘든 건데. 갈래요!”
민수는 효진이 일하는 곳 상사이다. 효진이 이곳에 입사한 후로 가까이에서 가장 많이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민수의 컴퓨터 모니터로 효진이 보낸 매신저가 날아왔다.
‘대리님! 이따 퇴근하고 정문 앞에서 봬요. 저녁은 제가 쏠게요^^’
민수는 그 메시지 하나로도 충분했다. 어렵사리 친구놈에게 구걸하다시피 표를 산 것이, 거의 표 두 배 가격을 주고 산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순간이었다.
모처럼 칼퇴를 하고 나서니 멀리서 효진이 보였다. 하늘높이 손을 들어 내 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간단한 샌드위치와 커피를 들고 공연장으로 들어섰다. 효진은 정말 보고 싶던 뮤지컬이었다며 재차 기쁨을 표했다. 공연이 끝나고 둘은 근처에서 간단히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서울의 밤은 여전히 화려했고 잠들지 않았다. 공연장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공연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아 공연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했고 그중에 효진과 민수도 속해있었다.
효진은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키더니 화려하게 반짝이는 불빛을 보면서 말했다.
“가만 보면 서울은 참 희한한 동네인 것 같아요. 동네라고 하기도 좀 그렇지만.”
“어떤 점에서?”
“음,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잖아요. 이렇게 건물들에 불이 켜져 있는것도 다 밤늦게까지 일하는 사람들일 테고. 그런데 그 속에서 이렇게 숨 좀 돌려보겠다고 공연도 보고 미술도 관람하고 하는 걸 보면 참 딱해요. 서울사람들도.”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러네. 서울이라는 동네가.”
“그렇죠? 서울에 야경이 멋있다는데 보면 다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인데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해요.”
효진은 자기감정에 취해있는 듯했다. 회사에서는 효진과 특별하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음으로 효진의 생각과 가치관을 들어볼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그냥 어린 신입사원이라고 생각했는데 꽤 진지한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 같아서 속으로 살짝 당황스러웠다.
효진은 맥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취기가 올라서인지 불빛 때문인지 아니면 공연의 흥분감이 채 가시지 않아서인지 효진의 두 볼이 약간 발그레 했다.
“전 예술의 전당이 참 좋아요. 여기에선 숨통이 좀 트인 달까? 친구와도 좋고 연인도 좋고 가족도 좋고. 누구와 와도 좋은 곳인 것 같아요. 지금 우리처럼 직장 상사와도 좋고!”
효진은 빙그레 웃었다. 효진의 말대로 서울의 문화 예술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의 전당은 그랬다. 누구와 와도 즐거운 곳이었다.
민수는 겉옷을 벗어 효진의 어깨에 슬며시 걸쳐주었다. 효진도 나쁘지 않은 듯 배시시 웃었다. 예술의 전당에서는 희미하게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저녁 오페라 공연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희미한 노랫소리에 맞춰 예술의 전당 앞 분수가 춤을 추었다. 분수에 오색빛이 비춰지자 환상적인 느낌을 연출했다.
효진이 자그마한 허밍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희미한 노랫소리 그리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반짝이는 서울의 밤은 그렇게 잠들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기에 충분했다.
어느 날, 후배 한 명이 미리 주는 생일 선물이라며 김광석의 베스트 앨범 한 장을 건네 왔다. <서른 즈음에>라는 곡명에 형광펜으로 체크가 되어 있는 것을 보니 나를 곯리려 작정을 한 것이 분명했다. 괘씸하기는 했지만, 명곡은 명곡이었다. 신세대라고 하기에는 구세대이고, 구세대라고 하기에는 신세대인 어정쩡한 나이가 된 나는 이수영이나 성시경의 노래보다는 김광석의 노래를 더 사랑했다.
헤어진 전 여자 친구이기도 한 후배는 ‘술 좀 줄이시고요.’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또 마침 소주 안주로 제일인 것이 김광석의 노래라 하지 않았는가.
결국 과음을 한 탓에 다음 날 수업에 나가지 않자, 후배가 뺨을 붉히며 숙취 해소 음료 하나를 건네 왔다. 후배의 복잡한 표정에서, 그 애가 못다 한 말들이 읽혔다. ‘선배님, 장난 치고는 좀 심했죠.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하실 걸 모르는 게 아닌데. 기분 전환이나 하시라고 드린 선물이었는데,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하고 말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맙다는 말 대신, 뜬금없이 대구에 있다는 김광석 길에 함께 가주지 않겠냐는 말을 했다. 술이 덜 깨서일까, 아니면 김광석의 달콤하고도 쌉쌀한 노래들을 어제 하루 종일 들어서였을까. 아차 하는 마음에 미안하다고 말하려 하는데, 후배가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배가 다음 수업이 있다며 인사를 하고 강의실을 나간 뒤에도, 나는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 후회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다.
술은, 정말로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헤어진 후로 몇 달이나,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었다. 그러던 와중에 선물로 받은 것이 김광석의 앨범이요, 몇 달 만에 들어보는 따뜻한 말이 술을 좀 줄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광석의 노래가 내 방을 가득 채우니 술이 고픈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에서 <이등병의 편지>를 거쳐 타이틀곡인 <변해가네>까지는 그럭저럭 견뎠지만, <서른 즈음에>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냉장고를 열고 소주병을 꺼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 농담처럼, 내게도 서른이 왔다. 철부지 새내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몇 번의 작은 성공과 몇 번의 연애, 그리고 몇 번의 쓰린 실패 끝에 내게도 서른이 오고야 만 것이다. 잦은 휴학에, 아직 대학 졸업장도 받지 못했는데 말이다.
안주 없이 소주잔을 비우며 몇 방울의 눈물을 떨궜던 것 같기도 하다. 서른이라는 막막한 숫자 앞에, 그리고 서른이 되도록 무엇 하나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 거울 앞의 내 모습에 말이다. 내 인생의 역할 모델로 자리매김하고 계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며, 내 안의 어떤 것이 같이 죽어버렸다. 울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아버지의 시신을 보았을 때, 영영 무너지지 않을 아버지의 철옹성 같던 어깨가 실은 작은 새처럼 여린 것이었음을 알게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가장 크게 믿던 사람이 그렇게 한 순간에 한 줌의 재가 되었다.
“현석아, 네가 이제 우리 집의 기둥이여.”
나는 어머니의 그 말이 싫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에 대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어머니와 여동생의 버팀목 역할을 맡아야 했고, 그 자리가 두려워 계속 뒷걸음질만을 치다가 끝내 주저 앉아버리고야 말았다. 우스운 노릇이었다.
다가온 주말에 나는 정말로 후배와, 아니 내 전 여자 친구와 함께 대구행 기차를 탔다. 여전히 조금은 어색한 사이였기에 애초에 많은 대화가 오가지도 않았고, 삼십 분이 채 되지 않아 간간히 오가던 대화마저 완전히 끊겨 버렸다. 서로 감정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연애는 이미 지난 일이었다.
그 나른한 봄의 정적 속에서, 나는 잊고 있었던 풍경 하나를 기억해 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아버지의 서른 즈음에 있었던 일을 말이다. 만취하여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김광석의 노래를 열창하셨다. 다른 어떤 노래도 아닌, <서른 즈음에>를. 그것도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라는 부분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부르셨다. 비어가던 서른 살 아버지의 가슴을 다시 차오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툭, 하고 내 어깨 위로 고개 하나가 기울었다. 그 애가 봄기운에 취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서른 즈음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 이번 연말에는 어디 갈 거예요?”
딸의 머릿속에는 이미 가보고 싶은 곳이 가득한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산통을 좀 깨야겠다. 나도 내년에는 꼭 내 시집을 내리라 결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번에는 멀리 가지 말자. 연말 되면 카운트다운 하는 곳 있잖아. 거기 가서 타종식 한 번 보고 오는 건 어때? 아빠가 옛날에 가 봤는데, 가수들도 많이 오고 불꽃놀이도 해.”
싫다고 떼를 쓰면 어떡하나 하고 있었는데, 자기도 그런 의미 있는 곳에 가는 게 좋다고 하는 것을 보니, 딸도 이제 어린애는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내도 꼭 한 번 직접 타종식을 보고 싶었다며 한 수 거들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가족의 연말 맞이 여행, 아니 연말 맞이 나들이 장소가 결정되었다.
서울 시내 어디가 북적거리지 않겠냐마는, 내가 젊은 시절부터 가장 좋아하는 북적임이 있다. 바로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일대. 시간이 비는 오후면 교보문고에 들러 소설책을 한 권 읽고 가기도 하고, 아직 초등학생인 조카들을 데리고 세종대왕 동상과 그 아래 숨겨진 박물관을 견학하기도 했다.
몇 년 전, 수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모였던 촛불집회가 열렸던 곳도 바로 이 세종대왕 동상 앞이다. 그리고 대학생 시절 사회 운동을 하러 나왔을 때, 회사원들이 건물 창밖으로 두루마리 휴지를 던지며 무언의 응원을 보내던 장관도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었다. 젊은 시절 아내와 함께 거닐었던 경복궁이 동상 너머에 있었었으며, 청계천이 처음 조성되었을 때에도 이곳에서 시작되는 물길을 보러 왔었다.
그렇다. 내게 있어 광화문은, 내가 아는 수십 년의 서울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세 시간 쯤 여유를 두고 광화문에 도착했다. 몰려드는 인파를 한 번에 감당할 수 없어 타종식이 있기 얼마 전에는 교통을 통제하기 때문에 종각에 미리 가 봐야 소용이 없으니, 그 전에 가족들과 함께 이 광화문 일대의 문화를 느껴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은 또 크리스마스였기에, 거리는 아직 오색 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상가들이 크리스마스와 연말 행사를 한 번에 챙길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야말로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 이어’였다.
나는 아내에게 근래에 크게 유행했던 로맨스 영화의 원작 소설 한 권을, 아내는 딸이 요새 푹 빠져 있는 외국 밴드의 앨범 한 장을, 딸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의 새로 나온 시집 한 권을 선물했다.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건실한 문화 향유층이야. 문화 시민이 달리 뭐 있겠어?”
딸이 건넨 말에 한바탕 웃으며 교보문고를 빠져나왔다. 청계 광장을 한 바퀴 둘러보러 왔는데, 청계천에도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조명들이 밝혀져 있었다.
“여기서 예전에 등 축제 정말 예뻤는데. 아빠가 매일 그렇게 광화문 노래를 불러도 안 와 닿더니, 그 때는 정말 세상에서 여기가 제일 아름다운 것 같았다니까요.”
그래, 문화라는 것이 말로 백 번 들어 무엇 하겠는가. 한 번 눈으로 보면 단숨에 반해버릴 것을. 내 철학을 늘어놓았다가는 면박을 면치 못할 것이기에, 마음속으로 할 말을 삼키며 웃었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제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여기저기서 전화를 걸어 ‘새해 복 많이 받아!’하는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무척이나 정겨워 보였다. 오죽하면 이 일대에서만 휴대전화가 반쯤 불통이 되었겠는가. 사람들의 입가에는 하나같이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신나게 소리를 지르다 보니 행사는 모두 끝났지만, 하늘에는 여전히 삼천 원짜리 싸구려 불꽃이 팡팡 터진다. 화약재가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데, 아무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옷을 털어내지 않았다. 우리 가족도 노점상에서 파는 핫도그 하나씩을 들고, 축제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광화문을 걸었다. 평소에는 길거리 음식이라면 학을 떼는 아내도 오늘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지금 이곳이 바로 살아 숨 쉬는 서울 문화의 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