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은 아무 말이 없다. 제천 가는 버스에 올라탄 후로 둘은 아무 말이 없다. 남자는 초조하게 손가락만 주기적으로 까딱하고 있었고 여자는 창밖만 내다볼 뿐이었다. 둘은 아무 말이 없지만, 머릿속으로 스쳐 가는 생각들은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딜 간다고? 유학?”
“그렇게 됐어.”
“그렇게 됐다니, 무슨 말이 그래? 그럼 나는?”
그럼 나는. 여자는 자신을 책임져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는 남자의 말에 나는 너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냐를 묻는 것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행복할 것 같냐고 물었을 때.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둘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고 행복한 둘만의 미래를 머릿속으로 수만 번도 더 그려왔었다. 이제 그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한 여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사실 여자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그가 돌연 선택한 유학길이 아니라 ‘같이 가자’라는 이 네 글자가 남자의 입에서 나오지 않음이었다.
여자는 차마 ‘나도 같이 가면 안 돼?’라고 물을 수 없었다. 남자의 눈빛은 이미 고요했고 적막하기까지 했다. 여자는 같이 가자는 말을 잊은 건 아닌가 생각했지만 아무런 기대를 바랄 수 없는 눈빛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울어보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여자도 알았다.
“곧 도착이야.”
긴 침묵을 깬 것은 여자였다. 여자의 말이 끝나고 난 뒤 정확히 2분 뒤 버스는 정차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좀 더 근사한 곳을 가지 왜 하필 여기냐고 했고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암묵적인 이별상태의 남녀가 마지막이라고 해서 굳이 근사한 곳에 갈 필요가 있을까? 애써 낭만적인 분위기로라도 서로의 앞날을 축복해주어야 하나 생각했다. 사실 둘의 관계가 정말 좋았을 때 분위기 따위는 상관이 없었다. 그곳이 어디든 그저 둘이 있는 곳 그거면 좋았다.
여자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차분히 그리고 애써 아무런 원망도 섞여 있지 않은 듯 이야기를 하려니 목소리가 먹먹했다.
“옛날 아주 옛날에 어떤 도령이 있었어. 선비였던 도령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중이었지. 날이 저물고 어떤 농가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는데 아주 아름다운 낭자와 마주하게 된 거야. 그런데 과거를 보러 가야 했던 도령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낭자를 떠나게 되었지. 아무리 기다려도 도령이 돌아오지 않게 결국 낭자는 죽고 말았대.
하지만 걱정마 나는 아주 잘 살 거니까.”
남자는 무심한 엷은 미소를 보였다. 왜 여자가 갑자기 이곳을 오자고 하였는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남자가 말없이 여자의 손을 잡았다. 아주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마음과도 같았다. 아주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여자는 배가 고프다고 했고 둘은 근처 도토리묵 집으로 갔다. 남자는 또 겨우 도토리묵이 뭐냐고 했고 여자는 여전히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며칠 전 C와 만났던 일을 떠올린다. 남자가 왜 돌연 유학을 떠나기로 했는지 왜 여자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C의 입에서 듣게 되었다. 그리고는 남자에게 이곳을 오자고 한 것이다.
말캉말캉한 도토리묵이 동동주와 함께 나왔다. 남자가 여자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이별을 결심했던 것처럼 여자도 남자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남자를 보내주려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었다. 아주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표정으로.
수능 즈음은 유난히 바람이 맵다. 코끝이 빨개지도록 바람이 불고 손난로를 들고 있어도 좀처럼 따뜻해지질 않는다. 바람이 맵다는 것은 코끝이 시리다 못해 아리고 숨을 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 목구멍과 폐를 알알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올해의 수능 날씨가 검색어에 오른 걸 보면 이번에도 어김없이 춥겠지, 단단히 입지 않으면 감기 때문에 수능을 망치기 일쑤이다. 내가 수능 즈음을 기억하는 건 11월 둘째 주, 아주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잊을 수 없게 알알하게 박힌 기억 때문이다.
“감기 걸리지 않게 목도리랑 장갑 끼고, 알았지? 어? 엄마가 말하면 대답 좀 해.”
“아, 알겠어. 몇 번을 말해. 내가 애야? 일일이 목도리랑 장갑까지 확인하게.”
“요 녀석, 네가 애지 어른이냐? 엄마한테 자식은 평생 애야. 애.”
“아 알겠어, 귀찮게 정말.”
“저게, 오늘 일찍 들어와. 엄마가 맛있는 떡볶이 해줄게.”
“알겠어, 갔다 올게.”
수업이 끝날 무렵 주기적으로 울어대는 진동음이 신경 쓰였다. 다름 아닌 엄마의 전화. 또 일찍 들어오라는 잔소리를 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고 생각된 나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웅, 웅. 웅, 웅.
‘오늘따라 왜 이렇게 끈질겨. 엄마도 참.’ 엄마의 전화가 그날따라 끊임없이 울렸다. 한 번쯤 받으면 어떨까, 나 곧 간다고 한 마디라도 하고 끊으면 될 것을. 배터리를 빼버리는 일종의 반항을 저지른 뒤 곧바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교실 밖에서 서성이는 나를 발견한 친구의 부름에 곧바로 친구와 함께했다. 친구는 떡볶이를 먹자고 했다. 떡볶이? 집에서 먹는 거나 친구랑 먹는 거나 그게 그거라고 여겼던 나는 그 날 유난히 매운 떡볶이를 먹었다.
혓바닥에 불이 난 것처럼 매운 떡볶이에는 고추가 생으로 올라가 있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면서도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한 접시를 비웠다.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달리 갈 곳이 없던 나는 집으로 발길을 돌리며 엄마 생각이 났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엄마한테 미안한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에잇, 집에 가서 떡볶이 한 번 더 먹지 뭐.’ 하며 휴대전화 전원을 켰다.
띠링, 띠링, 띠링.
연속적으로 문자가 들어왔다. 엄마였다.
“이슬아, 엄마야. 우리 딸.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예쁜 우리 딸. 엄마가 집에 못 돌아갈 것 같아. 미안해. 엄마 지금 지하철인데, 사고가 났어, 우리 딸. 엄마가 미안해.”
“이슬아, 엄마가 많이 사랑해.”
“이슬아. 이슬아 사랑해. 사랑해 우리 딸”
엄마!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만 걸릴 뿐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날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무작정 달려가 현관문을 열어보니 엄마는 없었다. 그저 차갑게 식어버린 빨간색 떡볶이만 있을 뿐. 그리고 그 위에 아주 맵게 생긴 고추 고명이 예쁘게 얹어져 있을 뿐이었다.
눈물이 났다. 매운 떡볶이를 먹었을 때보다 더 매운 눈물이었다.
“엄마.”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엄마, 나 왔어. 이렇게 떡볶이만 두고 어디 간 거야. 장난치지 말고 빨리 나와. 나 장갑이랑 목도리 다 하고 이렇게 뛰어왔는데. 엄마 전화 안 받아서 장난치는 거지? 빨리 나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코끝이 아리도록 매운 눈물이 흘러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여전히 수능 즈음은 날씨가 차다. 찬바람에 눈이 시려 가끔 눈물이 맺히곤 한다. 찬바람에 눈이 매워서인지 엄마가 그리워서 인지는 모른다. 그저 코끝이 찡하다는 것만 알뿐이다.
그곳을 떠나온 것이 벌써 햇수로 30년이 넘었다. 언젠가 다시 찾아오리라 마음먹었던 곳.
유난히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자그마한 나무들과 내 키보다 훌쩍 큰 담장에는 담쟁이넝쿨이 올망졸망 매달려 있었다. 담장 한 편에는 키가 자랄 때마다 그어놓았던 선이 있다. 담장을 뒤로하면 아버지가 시원하게 등목을 하시던 물이 졸졸 흐르는 수돗가가 있다. 아버지가 시멘트를 발라놓으시고는 밟지 말라고 그렇게 주의를 주셨는데 돌아다니다 발자국을 쾅하고 박아놓은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사 가야겠어.
그때에 아버지는 낮고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지만 꽤 울림이 있었다. 아버지는 조용히 엄마에게만 말한 이야기였지만 나와 우리 언니도 우리가 곧 이사를 가야 했음을 알았다. 나는 집을 떠난다는 아니, 동네를 떠난다는 상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언니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언니 왜 그래?”
“왜긴, 이 바보야. 우리 이사 간다잖아. 그럼 이 집에서도 못 살고 친구들도 못 만나게 될 거야.”
그랬다. 왜인지는 몰랐지만 아빠와 엄마가 집을 떠나야 했기에 나와 언니도 집을 떠나야 했다. 유난히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우리 집 뒷동네에는 자그마한 동산이 있었다. 동산에 올라가면 졸졸졸 실개천이 흐르고 풀피리 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졸졸졸 실개천이 흐르고 풀피리 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늙은 수탁의 울음소리에 눈을 뜨고 얼룩백이 황소의 게으른 울음소리에 잠이 들었다.
서울에 사는 아이들은 시골 근처에만 오면 똥냄새난다고 코를 틀어막았다. 여기에 지내면서 똥냄새라고 여기지 못했는데, 서울 친구들은 여간 깍쟁이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똥냄새가 아니고 고향냄새인 줄도 모르는 서울깍쟁이들이었다.
서울로 이사를 오고 나서부터 한동안은 마당이 넓던 우리 집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길을 잃었고 울고 있었다. 낯설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분위기에, 이제는 남의 집이 되어버린 우리 집을 보고 나는 울었다. 꿈에도 잊히지 않는 우리 집이었다.
언젠가 꿈에서 나는 초인종을 눌렀고 그곳에서 나온 정말 그 집 주인에게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우리 집이었어요. 라고 하며 운 기억도 난다. 지금도 가끔 꿈을 꾸지만 꿈속에만 가면 나는 항상 다섯 살 그때의 어린 나로 돌아간다. 지금은 비록 울지는 않지만 길을 한참 헤매다 찾곤 한다.
이제야 왔다. 그곳에 여전히 실개천이 졸졸졸 마을을 휘돌아 나갔고 얼룩백이 황소는 게으르게 울었다. 담쟁이넝쿨은 내 키보다 훌쩍 큰 담장 전체를 휘감았고 여전히 수돗가의 발자국은 깊게 패여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꿈속에서도 잊히지 않았던 곳.
마당 넓은 집에 돌아왔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예쁜 꽃도 금방 시들고 아끼던 보석들도 금세 싫증 나고 마는데. 아니,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마음이 바뀌는 건 한순간이라고들 하는데 과연 세상에 영원한 것은 과연.
모든 것이 변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옛날부터 사람들은 춤과 노래를 즐겼으며 그곳에는 항상 술이 빠지지 않았다. 술의 신 디오니스소 시대부터.
2차도 모자라 3차까지 가자는 진호를 극구 뜯어말리느라 택시를 잡았다가 보내기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줄지어 서 있는 가로수 나무에 헛구역질을 해대면서도 막무가내다. 연호는 만취한 진호의 모습이 놀랍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그저 말없이 택시에 탑승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딱 한 잔만 더 하자니까. 엉? 딱 한잔만. 아니면 노래방 갈까? 너 우리 집에서 얻어간 포도 생각해봐 짜식. 근데 술 한 잔도 더 못해? 치사한 놈”
연호는 진호의 주사를 더는 들어줄 수 없다는 듯 가까스로 잡은 택시에 구겨 넣듯이 진호를 밀어 넣었다.
진호네는 과수원을 했다. 포도농사. 장마철이면 한 해 농사를 망칠까 가슴을 졸였으며 알이 실하지 않을까 상품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늘 부모님은 사서 걱정을 했다. 진호가 서울에 올라와 직장을 갖기 전까지 부모님을 도와 포도재배를 했다. 어린아이 만지듯 조심히 다루라는 부모님의 말에 조심스럽게 포도를 땄다. 가만히 포도를 본 진호는 포도껍질에 낀 흰 당분을 보고 연호를 떠올렸다. 연호의 혀에 낀 하얀 백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연호는 유난히 진호네 포도를 좋아했다.
원래 포도껍질에 하얗게 낀 것이 맛있거든. 바로 당분이 많이 있다는 증거야. 이런 말을 하는 와중에도 진호는 연호의 혓바닥을 바라보았다. 분홍빛과 보랏빛이 적절히 섞인 혓바닥에 낀 하얀 것을.
몇 시간 전 진호는 문득 연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에 술 한 잔 하자는 것이다. 할 말이 있다고. 퇴근시간의 극심한 러시아워 때문에 연호는 약속장소에 30분 정도 지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금요일임을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연호가 앉아있는 진호를 발견했을 때 이미 진호는 얼굴이 조금 붉어있었고 이미 술을 마시고 있는 상태였다.
“뭐야, 내가 조금 늦은 사이 혼자 시작한 거야?”
“그러길래 누가 늦게 오래? 약속시간도 안 지키고 말이야. 엉? 내가 클라이언트였다면 넌 꽝이야 인마. 알아? 클라이언트는 삼분도 안 기다려 준다고.”
“그래, 알았어. 근데 웬 와인이야? 너 포도 지긋지긋하다고 와인은 입에도 안 대던 애가?”
“그냥, 나 내려가서 살까 봐. 과수원 일이나 하고.”
“갑자기 왜?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은. 없었어. 그런 거.”
연호를 만나기 두 시간 전. 팀장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진호를 불렀다. 진호네가 과수원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이번 와인열차 기획에 담당으로 진호를 추천할 예정이라고 언지를 주었다. 월말에 인사고과가 있던 차에 팀장의 부름은 진호에게는 틀림없는 기회였다.
“김대리. 내가 자네 팍팍 밀어주고 있는 거 알지? 그래서 말인데…”
진호는 연호가 보고 싶어졌다. 팀장의 혓바닥에서 하얗게 낀 백태를 보아서일까.
조금만 더 힘내. 다와 간단 말이야.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아까부터 저 말만 족히 30번째다. 2000년도 밀레니엄을 맞아 함께 뒷동산에 묻은 타임캡슐을 찾으러 가는 길이다. 같은 자리만 빙빙 도는 느낌이 들었으나 여자의 들뜬 목소리에 남자는 포기하고 내려가자는 말을 쉽게 하지 못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차라리 뭐라도 나왔으면 하고 땅을 파볼까 생각도 했다. 여자는 지친 기색은 없었으나 추억이 송두리째 사라질까 염려가 마음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어떻게 1999년에서 2000년이 될 수 있지?
바보 같긴. 당연히 1999 더하기 1은 2000이 되니까 그렇지.
저렇게 무드와 낭만이 없다. 아무튼 공대생이란. 혀를 소리 내지 않게 끌끌 차고는 남자의 손을 이끌고 한가로운 공원 벤치에 앉았다. 여자는 가방에서 아끼던 예쁜 편지지와 알록달록한 사인펜을 꺼내고는 미리 준비해 둔 작은 선물도 꺼내었다. 남자도 여자가 신신당부를 하며 준비해 오라던 선물을 꺼내었다.
“자. 이제 서로에게 편지를 쓰는 거야. 나는 미래의 너에게. 너는 미래의 나에게. 그리고 타임캡슐에 담아 저기 대추나무 밑에 묻고 3년 뒤 오늘! 짠 하고 열어보는 거지. 어때? 정말 낭만적이지 않니?”
으 응. 이라고 겨우 대답하는 남자를 얄밉다는 표정으로 한번 쏘아본 뒤 편지지를 남자의 앞으로 내밀었다. 여자의 강요에 겨우 펜을 잡은 남자는 몇 자 끼적이기 시작했다. 남자와 여자는 각자 편지와 선물을 타임캡슐에 넣고 상기된 표정으로 큰 대추나무 밑에 땅을 파 타임캡슐을 묻었다. 3년 뒤에도 이 자리에 있겠지? 잊지 말아야 한다는 당부를 몇 차례 주입시킨 뒤 서로의 편지와 선물이 궁금했지만 3년 뒤에 열어보기로 하였기 때문에 궁금해도 어쩔 수 없었다.
아! 여긴 것 같아. 여기 대추나무!
여자와 남자는 족히 40분간 같은 자리를 빙빙 돌다 3년 전 타임캡슐을 묻었던 대추나무를 찾았다. 안도의 한숨이 자신도 모르게 후 하고 나왔다. 등에는 식은땀도 주르륵 흘렀다.
“뭔가 변한 것 같아.”
“변하긴 뭐가. 똑같구만. 우리 변한 것 봐. 우리가 변해서 대추나무도 변한 것 같은 것일 뿐이야.”
“그런가? 아무튼 얼른 파보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대추나무 밑을 파보았다. 쏘옥하고 3년 전 묻어두었던 둘만의 추억이 솟아올랐다.
“있었구나. 정말. 그대로. 얼른 읽어볼래 편지!”
다소 오글거리는 편지를 나눠 읽은 뒤 작은 선물을 열어보았다. 여자는 남자가 당시 가지고 싶어 하던 카세트테이프를 넣었었다. 당시 남자가 좋아하던 가수 신승훈 카세트테이프다.
여자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선물상자를 열었다. 어?
대추씨 반쪽
“이게 뭐야?”
“대추씨 반쪽이잖아.”
“누가 몰라서 물어? 그러니까 나한테 줄 선물이 고작 대추씨였어? 그것도 반쪽짜리?”
“우리가 있는 곳 우리의 추억이 묻힌 곳 그리고 이 나무를 잘 봐.”
여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무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뭔가 변한 것 같아.”
거센 바람이 아님에도 촛대의 불이 하늘거리며 흔들렸다. 촛불이 흔들리는지 장군의 두 눈동자의 여린 초점이 흔들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수많이 적과의 전투가 있었고 곧게 뻗은 대나무처럼 한결같이 묵묵하게 전투를 치러왔던 그였다. 신라군과의 유난히 힘든 전투를 보낸 후라 그런지 그날따라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감도는 듯 했다. 문밖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무심하게 불던 바람에 더욱 평강이 보고 싶던 온달장군은 말없이 붓을 들었다.
온달장군은 늘 평강공주에게 표현이 서툴렀다. 하지만 누구보다 평강을 생각하는 그였다. 사람들은 그래서인지 그를 보고 바보온달이라고 불렀다.
온달은 서툰 솜씨로 편지를 써내려갔다. 막상 붓을 들고 그리운 마음을 전하려 하니 평강이 처음 집으로 와 살림을 꾸리겠다고 당차게 말하던 일이 떠올랐다. 단정하게 빗어 내린 머리칼과 곱디고운 얼굴을 하고 내게 시집을 오겠다고 하던 공주.
보고 싶은 평강공주 보시오.
오늘은 유난히 긴 하루였소. 아마도 당신이 그리워 그렇겠지. 이렇게 당신을 생각하니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라 웃음이 나는구려. 당신은 한없이 고운얼굴과 단정한 차림을 하고선 나에게 시집을 와 살림을 차리겠다고 말했었지. 그때 당신에게 단호하게 거절한 것은 당신이 내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사람들은 모두 나를 바보라고 불렀지만 당신만은 늘 나를 최고라 불러주었던 날들이 생각나오. 내가 당신만큼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에 능숙했더라면 당신이 조금은 덜 외로웠을 텐데, 한 마디 서운함 없이 옆에 있어주어 고맙소.
당신과 함께 장에서 말을 고르며 무술과 학문을 배우던 시간들이 떠오르는 밤이오. 말을 타는 것도, 검술을 익히는 것도 더딘 내게 당신은 그저 최고의 장군이라고 나를 치켜세워주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오.
당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이 고구려도 지켜내기 힘들었을 것이오.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공주.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밖이 고요하오.
늘 거침없고 두려움 없이 섰던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지나가는 바람에도 마음이 일렁이는구려.
아마도 당신이 그리워서이겠지. 이곳 단양에서의 전투가 끝나면 다시 볼 수 있을 것이오.
그 때까지 건강히 지내시오.
온달은 떨리는 붓을 조용히 거두었다. 막상 편지를 쓰니 평강이 더욱 그리운 밤이었다. 오늘은 쉽게 잠자리에 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긴긴밤이리라.
어김없이 날은 밝고 일찍부터 전투준비에 성 안팎은 분주했다. 병사들도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물과 식량도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온달은 얼른 전투를 끝내고 승전보를 울리며 평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견고하게 쌓여진 성벽사이로 여느 때와 같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화살과 돌이 쏟아져 내렸고 날이 선 칼은 순식간의 병사들을 위협했다. 밤에 한숨도 못잔 탓일까, 사력을 다해 싸워온 그였다. 그 때 온달을 향해 날아온 화살. 온달은 정신이 희미해졌다. 온달은 힘없이 쓰러졌다. 맹렬한 그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꼭 승리해서 돌아가겠다는 평강과의 약조가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그는 세상을 떠났다.
급히 온달의 죽음을 알리기 위한 전갈이 보내졌고 평강은 놀란 마음에 눈물로 통곡하며 산성으로 도착하였다. 하지만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그의 맹렬한 기세. 평강은 하염없이 울었다. 편히 보내주기 위해 화살을 제거하면서 온달의 가슴팍에서 어제 그가 써내려간 편지를 발견한다. 평강은 또 한 번 크게 울었다.
이제는 온달을 편히 보내줄 차례다. 그런데 장사를 지내기 위해 관을 움직이려 하자 관이 꿈적도 하지 않았다. 힘이 센 장정들이 들어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평강은 관을 쓰다듬으며 마지막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마음을 전했다.
"장군. 삶과 죽음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이제 편히 가소서." 하며 편지를 가슴이 품었다.
그러자 꿈적도 않던 관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평강만을 바라보던 바보장군과 온달만을 바라보던 평강공주. 이 둘의 사랑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남아있다.
가을이 오긴 왔다. 빨강 노랑 어여쁜 색으로 단장을 마친 나뭇잎들이 살랑대며 약을 올리는 가을 말이다. 불과 3주 전만해도 기어코 올해는 꼭 주원과 단풍을 보러 가겠다고 다짐하였으나 지금은 이렇게 혼자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깍지 낀 손을 꼭 마주잡고 오르기로 하였던 단풍놀이는 어디로 갔을까.
“또 또 또! 나 실연당했어요. 자랑할 일 있어? 얼굴 좀 펴.”
친구라는 것이 자신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찍힌 셀카를 남자친구에게 전송하면서 말한다. 그러자 또 다른 친구가 한 술 더 떠 거든다.
“그래! 너 자꾸 그렇게 죽상하면 주원인지 뭔지가 알아주기나 할 것 같애? 너만 손해야. 너만.”
가뜩이나 머리도 복잡하고 마음도 복잡한데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신경을 건드린다.
“자꾸 잔소리 할 거면 너희 먼저 올라가.”
“기집애, 괜히 우리한테 화풀이지. 너 그렇게 굼벵이처럼 굴 거면 진짜 우리먼저 간다.”
매정한 것들. 친구들이라고 기분 풀어준다며 기어코 끌고나오더니 이제는 지들끼리 다닌단다. 차라리 그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여자는 먼저 산길을 올라가는 친구들의 발걸음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곧 비가 오겠는데? 길을 걷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그제야 혼자임이 실감이 난 여자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애들은 어디로 간 거야. 전화도 안 받고.
앗. 여자의 발목이 잠시잠깐 춤을 추듯 움직였다.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걸린 탓이다. 여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었지만 서러움의 무게가 더욱 그녀의 눈물샘을 짓눌렀다.
“괜찮으세요? 아까 보니까 발목이 삐끗한 것 같던데.”
낮은 음색의 목소리가 주원과 비슷했다. 이렇게 순간순간 주원이 떠오르는 자신이 싫었다. 도움은 고마웠지만 복잡한 심경이 더욱 컸던 여자는 귀찮다는 듯 괜찮다는 말을 하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곧 비가 내릴 거라던데. 잠시 비를 피했다 가시는 게 좋겠네요. 부축 해드릴 테니까 제 어깨 잡으세요.”
“괜찮아요. 그까짓 비.”
여자는 상냥하게 말하는 남자에게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소나기처럼 제법 쌀쌀하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괜찮다니까요. 정말!”
여자는 신경질적인 표정과 말투로 남자를 다시 한 번 올려다보았다. 그때 한 두 방울 빗방울이 여자의 이마에 톡톡하고 떨어지더니 이내 굵은 빗줄기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남자는 거보라며 여자의 신경질에도 불구하고 여자를 부축해 굴 안으로 몸을 피했다.
“제법 굵은 비가 오네요. 마치 장맛비처럼.”
“…”
“혼자 온 거에요? 저기 연리지 나무 봤어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 보면 영원히 이루어진다고 하던데.”
“도와준 건 고마운데요. 이렇게 다리를 삐끗했는데도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연리지 나무가 무슨 소용 있겠어요? 정말 짜증나게.”
여자는 남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으나 늘 주원에게 투정을 부리던 것처럼 남자에게 짜증을 늘어놓았다. 왠지 이 남자라면 주원처럼 그녀의 짜증을 받아줄 것 같았다.
“다리는 좀 괜찮아요?”
“네, 덕분에요.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괜히 짜증 부려서 미안하고요.”
“비가 금방 그칠 것 같네요. 금세 하늘이 맑아졌어요. 많이 힘든 것 같은데 비는 이렇게 금방 그쳐요. 그리고 다시 맑은 하늘과 바람과 햇살이 비추죠. 그쪽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다른 때 같았으면 웬 오지랖이냐며 속으로 한바탕 욕을 했겠지만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빗방울이 점점 얇아지며 먹구름이 가신 자리에는 한 그루의 예쁜 연리지 나무가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자주 혼자 계셨다. 언제부턴가는 가족들이 할머니를 보러오는 것도 귀찮은 눈치였다. 할머니는 엄마가 오징어채다 콩자반이다 밑반찬을 바리바리 싸와도 늘 김치 하나만 두고 드셨다. 그런데도 밥은 한 가득 꾹꾹 눌러 담아 드셨다. 그런 할머니에게 엄마는 바리바리 싸온 밑반찬과 함께 잔소리도 한 아름 늘어놓았다.
“엄마, 정말 이렇게 살 거야? 언제까지? 엄마도 아빠 따라 가려고 그래?”
“그런 말 마라. 이렇게 사는 게 어떻다고. 늙으면 다 그런 거지. 무슨 유난은. 이제 이런 것도 가져오지 마. 먹고 사는데 아무 문제없으니까.”
“김치, 지겹지도 않아? 그것도 폭삭 쉬어터진거. 만두도 못해먹겠다.”
할머니는 엄마의 잔소리가 귀찮다는 듯 조용히 보청기를 내려놓으셨다.
엄마는 할머니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분풀이랄까 아니면 그것이 이 두 모녀만의 대화 방법이었을지는 모른다. 그저 반찬만 두고 바로 돌아선다면 독거노인 돌보러 오는 사회복지사와 무엇이 다를까 생각한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이렇게 혼자 계시기 시작한 것은 몇 달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부터이다. 엄마는 할머니가 혼자 계시는 것이 안타까워 모셔간다고 우겼으나 할머니의 고집은 누구도 말릴 수 없이 단호했다. 엄마가 할머니께 반찬을 가져다줄 때면 내가 항상 뒤따랐다. 할머니 혼자 계신 집에 발을 들일 때면 항상 퀴퀴하면서도 짠 냄새가 났다. 할머니 고유의 살비듬 냄새가 벽지와 가구, 침구에 배어있는 듯했다. 할머니 댁에 갈 때면 은연중에 나도 모르게 킁킁거렸다. 예전에 할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에는 분명 깔끔한 냄새가 났었다고 기억한다.
“엄마, 할머니한테서 이상한 냄새가 나.”
“그런 말 마. 가꾸지 않아서 그래. 혼자 살면 원래 더 그런 거야.”
그리움이 켜켜이 쌓여서일까. 할머니의 방에서는 짜고 비릿한 냄새가 났다. 마치 새우젓과 같은 냄새랄까. 할머니의 흔적이 묻어있는 곳에서는 항상 할머니 냄새가 났다.
엄마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배추와 파 고추 등 김장에 필요한 재료들을 샀다. 할머니가 다 쉬어터진 김치만 두고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거실 한가득 김치 재료들을 늘어놓았다. 엄마는 한숨을 푹푹 쉬었으나 할머니를 다시금 찾아 뵐 이유가 생겼음에 기분이 들떠보였다.
김장 재료들 사이로 새우젓이 눈에 들었다. 할머니 방이 떠올랐다. 나중에 우리 엄마 방에서도 이런 냄새가 난다면 어떨까?
보자기로 한 보따리를 들고 할머니 댁을 다시 찾았다. 할머니는 반가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심 속으로는 반가우신 모양이었다. 엄마는 언제나 그랬듯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저번에 엄마가 가져다 준 반찬이 거의 그대로였다. 엄마의 기대에 부응을 한 냉장고는 늠름하게 문을 닫았고 엄마의 잔소리는 다시금 시작되었다.
“엄마, 내가 가져다 준 반찬 하나도 안 먹었어?”
“먹었어.”
“뭘 먹어. 그대론데. 정말 속상하게. 또 김치 하나만 두고 먹었어? 휴. 안 그래도 김치 새로 담가왔어,”
“뭘. 또 새로 만들었어. 놔두라니까.”
할머니가 오늘은 보청기를 빼놓지 않는다. 엄마와의 대화가 이제는 귀찮지는 않은가 보다. 할머니의 방에 들어서면서 숨을 크게 들이마셔보았다. 할머니 냄새가 희미하게 묻어있었다.
할머니의 흔적이 묻은 곳에서는 짜고 비릿한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