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대학 졸업반 시절 떠난 봉사활동에서였다. 나는 보육원에서 어린 아이들을 돌보며 꽃밭에서 아이들에게 꽃반지를 만들어 주는데 멀리서 날아온 공이 내 앞에 떨어졌다. “Sorry.” 라고 짧은 말을 남긴 채 공을 가지고 휙 달아났다. 벤치에 앉아 공을 들고 간 쪽을 바라보니 남자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며 놀아주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보육원 아이들은 일제히 식판을 들고 배식을 기다렸다. 아이들에게 점심을 먹이고 아이들 낮잠시간이 되니 한숨 돌릴 시간이 났다.
아이들의 장난감을 치우고 빨랫줄에 빨래를 거는데 큰 이불 같은 건 영 쉽지 않았다. 그런데 웬 키 큰 남자가 불쑥 내 앞에 서서 빨래를 걸어주었다. 자세히 보니 아까 축구공을 가지고 간 그 외국인이다.
“때, 땡큐.”
“뭘요.”
“어! 한국말 할 줄 알아요?”
“그럼요. 한국말 조금 할 줄 알아요. 나는 메브에요. 프랑스에서 왔어요. 당신은요?”
“아. 저는 은영이에요.”
빨래를 다 널고 우리는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이곳에 봉사활동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한국은 관심 많아요. 우리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에요. 그리고 여기는. 음. 봉사 좋으니까.”
“그렇군요.”
서툴게 한국말을 하는 메브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났다. 약간은 귀엽다고 할까.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프랑스 우리 동네에 서울공원 있어요. 나는 가보았습니다. 서울에도 파리공원 있어요.”
“프랑스에 서울공원이요?”
강남역 사거리에 서울시와 이란의 수도 테헤란시가 자매결연을 맺은 기념으로 길 이름을 붙인 것은 알았지만 프랑스와도 이렇게 공원을 지어 외교적인 문화를 나누었다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쩐지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프랑스 서울공원 멋져요.”
메브는 휴대전화에서 서울공원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었다. 한국적인 고전미가 넘치는 정자에 불로문까지. 사진 속 메브는 귀여운 모습이었다.
“멋지네요. 파리공원에도 가 보았나요?”
“아직 못 가봤어요. 내일 가볼거에요. 같이 갈래요?”
그렇게 갑작스런 인연은 하루 더 함께 하게 되었다.
검정색 모자에 빨간색 운동화를 신은 메브는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메브와 파리공원을 둘러보니 정말 파리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파리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은 작은 모형의 에펠탑과 개선문 정도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나 에펠탑 정말 보고 싶었는데, 언젠가 파리에 가면 꼭 보고 말거야.”
“이거보다 조금, 조금 더 크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농담 아니야 메브. 난 파리에 꼭 가보고 싶어. 에펠탑도 보고 여기 있는 개선문도 보고.”
“언제 놀러와. 우리나라에 은영 초대할게.”
“그래, 고마워.”
“나는 말이야 메브. 꼭 프러포즈는 에펠탑 아래에서 받고 싶어. 그게 내 로망이랄까?”
웬일인지 메브 앞에서 뜻밖의 이야기까지 꺼내는 내가 놀라웠다. 그저 프랑스라는 나라와 파리라는 도시에 연계가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정도로 메브와 가까워 졌다고 느껴졌을까.
“꼭 와. 내가 불 반짝 하고 있을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프랑스 사람과 그 프랑스 앞에 서 있는 한국 사람이 조금은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한발자국 더.
어느새 ‘강남’이라는 행정자치구 자체가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강남을 외쳤고 그 외침 하나로 강남이라는 지역 일대에 파란이 일었다. 땅값은 물론 그곳에서 피어난 문화, 패션, 거리 하나까지 그 시대의 트렌드를 이끄는 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강남스타일이라는 대중가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도대체 ‘강남스타일’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그것에 열광을 하는 것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언젠가 강남이라는 단어는 부의 상징이었고 무너져가는 아파트라도 강남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훈장처럼 달리는 명예였다. 소위 잘산다는 사람들의 동네로 불리는 강남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워너비 동네로 자리 잡고 있다.
“너 장래 희망에다 뭐 썼어?”
“난 청담동 며느리.”
“청담동 며느리가 되는 것이 꿈이야?”
“그럼, 좋은 집안에 시집가서 남편 잘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니?”
민지는 청담동 며느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민지 말대로 좋은 집안에 시집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겠지만 그것이 곧 행복이고 꿈이라는 건 조금은 슬픈 일이었다.
드라마에서 재벌집들이 전화를 받으면 동네 이름을 말하며 전화를 받는 것처럼. 민지도 콧소리를 흘리며 ‘청담동입니다’라고 할 것이다.
민지는 항상 만날 약속장소를 말하면 강남역 7번 출구였다. 그래서 친구들은 민지를 강남역 7번 출구라고 부르기도 했다. 금요일이면 강남역은 젊은이들의 문화로 가득했고 만남과 만남으로 들떠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붕붕 울리는 음악과 현란한 사람들의 발소리가 늦은 시각임을 실감하지 못하게 했다. 민지의 헬스클럽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강남역 7번 출구로 나갔다.
민지는 운동으로 잘 다져진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도 다 청담동 며느리가 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라고 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커피숍에 들어가도 민지는 아메리카노 이외에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나는 약간 비꼬는 목소리로 그것도 강남 스타일이냐? 라며 비웃었지만 민지는 눈 하나 끔뻑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도도한 목소리로 그렇게 달달한 거 자꾸 먹으면 ‘살쪄’라며 생크림 잔뜩 들어간 달달한 내 음료를 비난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은 강남과 강북을 갈랐고 조망권과 교통권, 문화생활의 차이를 만들어갔고 그 차이를 통해 만족을 느끼려했다.
어쩌면 강남은 서울의 수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뛰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많은 스펙을 쌓으며 어떤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일까. 과연 서울에도 수도가 있다면 그곳은 강남일까.
여전히 강남역엔 사람들이 붐볐다. 압구정동이나 청담동에는 비슷한 차림새에 비슷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생각과 다른 사연들을 품고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나는 물끄러미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돈이 많은 건 아닐 텐데. 비슷한 얼굴에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원하는 삶과 생각은 다를 텐데 말이다.
민지와 꽤 늦은 시간에 헤어졌다. 민지는 저들 틈으로 사라져갔다. 유유히. 민지는 금세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누가 누군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갔다.
순간 나는 길을 잃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내가 가야할 곳을 말해줄 것 같은 사람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나에게 ‘이쪽으로 가면 강남역이 나오고 저쪽으로 가면 청담으로 가는 길일 거예요. 저쪽은 삼성동이고요.’정도로 이야기 해주겠지.
겨우 길을 걸으면서 나는 민지를 떠올렸다. 우리는 민지를 선뜻 속물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사람들의 통념이 그렇듯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웬만하면 서울, 그 중에서도 강남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더 많은 사람들의 장래희망이 혹은 꿈이 ‘도곡동 고급아파트, 삼성동 유명백화점, 청담동 며느리’가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었다.
나는 지금 마른 풀을 엮어 만든 움집 앞에 있다. 거대한 버섯을 말려둔 것 같은 모양의 움집 안에서, 금방이라도 온몸에 진흙을 묻힌 원시인 하나가 기다란 창을 들고 나올 것만 같다. 움집 안에서는 바싹 바른 여자 하나가 떨고 있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곰이 나타날 것만 같아서 말이다.
“엄마, 다른 데로 좀 가자니까요? 나 숙제하려면 사진 많이 찍어야 한단 말예요.”
옆에서 아들이 몇 번이고 옷을 당기는데도 나는 그 움집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몇 년 전, 남편과 함께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시간과 운명의 인과관계를 다룬 영화였는데, 다른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었다. 바로 우울증에 걸린 여주인공을 지키는 주인공의 모습이, 곰으로부터 아내를 지키는 원시인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원시 복장 차림의 여자에게 이제는 곰이 없다고 되뇌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오래도록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제, 초등학생인 아들이 기행문을 써야 한다며 나를 졸랐다. 가까운 곳에 무엇이 있나 보았더니, 하필이면 그게 또 선사유적지였다. 나는 영화 속의 그 장면이 꿈에도 나오더니, 이제는 내가 선사유적지를 찾아가게 된 것이었다. 원시인과 내 사이에 운명의 끈이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하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했었다.
아들이 다시 내 옷자락을 당겼다. 알았어, 알았어. 나는 못이기는 체 걸었다.
아들을 낳고, 나는 꽤 길게 산후우울증을 앓았다. 눈앞에 내 몸에서 나온 아이가 있는데도 몸속이 비어버린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울고, 짜증을 냈으며, 사소한 일로도 남편과 크게 싸웠다.
몇 년이 지나, 우울증은 모두 나았지만 나는 남편을 잃었다. 그 동안 쌓여 온 앙금을 쉽게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오겠다던 남편은 두 달이 넘게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남편이 어디 있는지 찾으려 하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없는 곰을 두려워하며 움집 안에 웅크리고 있었던 내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아들은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처음 보는 원시인들의 모습에 신이 난 모양이었다. 움집 앞 여기저기에 사냥 도구를 만들거나, 잡아 온 사냥감을 굽고 있는 모습들의 황동상들이 서 있었다.
“엄마! 저것 좀 봐요!”
아들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무 막대를 들고 남자에게 사냥법을 배우고 있는 어린 원시인의 모습을 한 황동상이 서 있었다. 아들은 바닥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더니, 그 모습을 똑같이 흉내 내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말했다. 뷰파인더에 눈을 가져다 댔는데, 남자 원시인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여자 원시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이란 어쩌면 저렇게 오랜 세월 동안 한결같은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먼 옛날, 선사 시대에 살았던 나도 움집 안에 웅크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나는 이제 곰을 두려워하지 않아.’라고 의미 모를 문자 한 통을 보냈다. 별다른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보낸 문자였다. 잠든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나는 휴대전화에 찍힌 정다운 발신자명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남편이 문자 한 통을 보내왔다. 나는 남편의 문자를 보고 울었다. 나는, 나의 움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린나이에 남편과 헤어지고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도 벌써 3년이 지났다. 친정엄마도 아이를 그다지 탐탁지 않아 하였기에 아이를 봐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서부터 어린이집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이집 원장님께서 전화를 주었다.
“풀잎이 어머님 되시죠? 여기 어린이집인데요. 아이 문제로 상의드릴 일이 좀 있어서요.”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데 나는 급하게 처리하던 일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더 급하니 나중에 다시 전화를 걸어 달라고 말할 뻔했다.
“네? 잠시만요. 아이 문제라니요?”
“풀잎이가. 말을 잘 안하려고 하네요.”
“아이가 원래 말을 잘 안 해요. 집에서도. 몸이 아프거나 그런 건 아니죠?”
“어머님. 이건 몸이 아픈 것 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 것 같은데요. 일단 오늘 저 좀 뵙고 가세요.”
어린이집 원장선생님께 한 차례 꾸중 아닌 꾸중을 듣고 난 뒤 7시가 넘은 시각에 아이를 데리러 갔다. 아이는 방 한 편에 곤이 자고 있었다.
“풀잎이 어머님 되시죠? 잠시 제 방으로.”
“네, 오전에는 죄송했어요. 제가 급한 일을 처리할 게 있어서. 원장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못했네요.”
“일이 많이 바쁘신 건 알겠지만. 그리고 제가 의사도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풀잎이가 유난히 또래보다 정서발달이나 언어 발달이 늦은 것 같아요. 지금 풀잎이 정도면 한창 이것저것 호기심도 많고 말도 많이 웅얼거릴 시기인데 혼자 장난감만 쥐었다 폈다 정도니까.”
원장님의 말에 갑자기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에게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했던 것뿐인데 지금 아이는 홀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니. 그것도 이렇게 조그마한 아이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선생님.”
“뭐, 일단 아이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엄마 아빠와 고루 정서를 교감하는 것이 아이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물론 그러기 힘들다는 것 저도 잘 알고 있지만요. 아니면 자연이나 동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차선책이긴 하지만 그런 것도 좋고요.”
아이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원장선생님 말씀에 큰 결심을 해야 했다. 엄마손이 가장 많이 필요한 시기에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한 아이는 정서가 고루 발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번 주 주말에 하루만 시간을 내기로 했다.
오랜만에 우리 세 식구가 모였다. 가족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어색함이 감돌았지만 날씨도 좋았고 북서울꿈의숲에는 역시나 가족단위로 모인 사람들이 많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넓고 넓은 잔디밭이 어색한지 자꾸만 한곳에 가만히 서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잔디를 밟아보았다.
“풀잎아. 이게 잔디야. 잔디. 그리고 지금 풀잎이 볼을 스치고 간 건 바람.”
풀잎이도 마음이 조금 열렸는지 발을 콩콩 굴렀다. 한 손에는 아빠의 손을 다른 한 손에는 엄마의 손을 잡은 풀잎이는 모처럼 신이 난 모양이었다.
“우리 풀잎이 기분 좋아? 풀잎이가 좋으니까 엄마도 기분 좋다.”
“엄마, 아빠, 풀, 바람, 하늘, 구름”
풀잎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단어들을 나열하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눈물이 흐르는 것을 감추기 위해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쾌청했다.
남편이 이런 내 모습을 보았는지 가볍게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남편의 뜻밖의 행동에 서러움이 북받쳤는지 또 눈물이 핑 돌았다.
“혼자 힘들었을 거 알아. 양육비랍시고 돈 보내주는 것 밖에 못해서 미안해. 오늘 풀잎이 보니까 나도 느끼는 거 많았어. 미안해. 앞으로 자주 시간 보내자.”
남편의 말에 어쩐지 힘이 났다. 그 누구의 말보다 그 누구보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했다.
후회라는 것은 언제나 지나고 난 다음에야 든다. 내가 그렇고 다른 사람이 그렇듯 언제나 동일하게.
“따님이 어머님을 많이 닮았어요.”
미용사가 엄마의 머리를 빗으로 다듬으면서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어쩌면 지금껏 엄마를 봐온 나보다 엄마를 처음 본 미용사가 더욱 살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엄마는 참 오랜만에 미용실을 찾았다.
“우선 희끗한 저 흰머리 좀 염색해주시고 머리는 가볍게 파마해주세요.”
엄마는 온순한 양처럼 가만히 앉아있다. 바로 앞에 마주하고 있는 큰 거울이 어색해서 인지 자꾸만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엄마, 고개 좀 들어봐. 그래야 머리가 예쁘게 되고 있는지 알지.”
내 말에 그제야 고개를 살짝 들어 거울을 본다. 여전히 어색한 표정은 남아있지만 그런 어색함이 낯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따님이랑 이렇게 시내 나오시니 좋으시죠?”
“네”
엄마의 단답형 대답에도 미용사는 여전히 수다스럽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아무래도 직업병이 아닌가 싶었다.
“점심은 맛있는 거 드셨어요? 따님한테 오늘은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하세요. 예를 들면 스파게티라던지 경양식도 좋고요.”
“네”
미용사는 친절히 메뉴까지 들어주었지만 여전히 엄마는 무뚝뚝했다. 미용사도 조금은 지쳤는지 머리손질에 신경을 두었다. 두어 시간 지나자 엄마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희끗했던 흰머리는 단정한 자연갈색으로 물들었고 헝클어져있던 머리칼은 가벼운 펌으로 탄력이 생겼다.
“이야. 누구 엄마인지 정말 예쁜데?”
엄마는 피식 웃었다. 엄마도 마음에 드신 듯 웃음을 보이셨다.
엄마는 얼마 전 자궁근종 수술을 받았다. 암은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자궁을 들어낸다는 것에 엄마는 여자로서의 삶이 끝난 것처럼 많이 우울해 하셨다. 수술은 잘 되었고 건강관리만 잘 하시면 일상생활에도 큰 문제가 없을 거라 했다.
“엄마,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한동안 죽만 먹어서 좀 질렸을 텐데. 엄마가 좋아하는~”
순간 엄마가 좋아하는 하고 말문이 막혔다.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엄마는 내가 자취집에서 집에 가는 날이면 우리 딸 좋아하는 순두부다 갈비찜이다 한상 떡 벌어지게 차려놓고 계셨는데 나는 이렇게 많은 식당이 있음에도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 하나가 떠오르지 않아 엄마 손을 잡고 계속 걷기만 하고 있다.
“칼국수 먹자. 칼칼하고 시원한 게 먹고 싶네.”
엄마는 내가 당황한 것을 알아챘는지 칼국수를 드시고 싶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엄마는 입맛이 없다고 하는 날이면 국수를 말아 드셨던 기억이 났다.
등촌동 칼국수는 뽀얀 국물에 바지락이 들어가 있는 모양이 아니었다. 버섯 매운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얼큰한 국물에 버섯과 미나리 그리고 칼국수 면을 넣어 칼칼하게 먹는 방식이었다. 한여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먹다보면 땀이 나면서 몸에 원기가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음, 국물 시원하다. 엄마 여기 와 본적 있어?”
“응, 저번에 네 아빠랑. 국물이 칼칼하고 시원한 게 좋더라고.”
“아빠랑? 언제?”
“엄마 수술하기 전에. 여기에서 답답하던 속 다 풀고 가라고.”
무뚝뚝하던 아빠는 수술 전에 엄마를 모시고 나온 적이 있으셨나보다. 엄마의 갑작스런 수술에 아빠도 적잖이 걱정이 되셨던 모양이다. 평소 말 한마디 선물 하나 제대로 해본 적 없으셨던 아빠가 먼저 외식을 하자고 했다는 것에 엄마도 아빠의 마음을 조금은 느끼셨으리라 생각한다.
국수를 다 건져먹고 갖은 채소와 계란까지 풀어 볶음밥까지 싹 비우고 나서 음식점을 나왔다.
나는 엄마에게 뭐 해보고 싶은 것이 없는지 물었다. 엄마는 내손이랑 엄마손을 비교해보더니 “나도 이런 거 해보고 싶다. 이걸 뭐라 하더라? 네일아트?” 엄마는 생각도 못한 네일아트를 해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 엄마. 이제 엄마 해보고 싶은 거 다 하면서 그렇게 사세요.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엄마와 걸어가는 데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이 어디든 산을 오르는 것이 미연은 영 못마땅하다. 서울의 많고 많은 곳 중에 산이라니. 미연은 혀를 끌끌 찼다.
“너도 참 너다. 이 넓은 서울에 갈 곳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동네 산이니?”
“왜, 좋잖아. 자 공기한번 쭉 마셔봐. 이렇게 맑은 공기를 돈 안내고 마시는 걸 감사해야해. 그리고 멀리 가지 않고 등산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아!”
“웃겨. 너랑 주말을 보낸다고 온 내가 바보다.”
미연은 투덜거리면서도 연수의 뒤를 곧잘 쫒아온다. 리본 끈으로 길을 안내하는 곳곳에는 이야기가 있는 관악산 둘레길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아, 힘들어. 원래 이렇게 힘든 코스였어? 동네산이 뭐 이래?”
“여기만 넘어가면 내리막길이야. 조금만 힘내. 너 다이어트 한다며, 한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지방 타는 소리가 들리지~ 안 들려?”
“놀리냐, 힘들어 죽겠구만. 물이나 좀 줘봐.”
관악산 둘레길 제2구간은 물과 바람 공기가 참 시원했다. 작고 아담한 계곡을 지나면 장승과 솟대가 등산객을 반긴다. 한여름이면 여름의 냄새가 나고 가을이면 또 가을의 냄새가 나는 곳이다. 흙길을 걷다보면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번갈아가며 나왔다. 오르막을 오르다 지칠 즈음이면 내리막길이 나와 쉼을 주었고 땀이 식을 만하면 다시 오르막길이 나왔다. 작은 들꽃은 휴식을 함께 기뻐해주기라도 하듯 아담하게 피어있다.
희진은 미연이 올라올 수 있도록 보폭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뒤에서 미연의 등을 살짝 떠밀어주기도 하며 미연의 힘을 나누고자했다.
“어! 다람쥐다. 여기 다람쥐가 다 있네.”
“그러게, 귀엽다.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소풍 온 어린애들 같아.”
“소풍? 소풍이라면 소풍이지. 점심으로 김밥도 싸왔으니까, 제대 론데?”
미연과 희진은 마주보고 웃었다.
관악산 제2구간은 돌산 조망점에 올라 서울시내를 바라 볼 수 있으며 인근 호수공원도 둘러볼 수 있는 코스라고 했다. 미연과 희진도 곧 돌산 조망점 지점에 도착하였다. 한숨 돌리고 큰 바위에 털썩하고 주저앉으니 서울시내가 한눈에 다 담겼다. 이곳이 정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이 신기했다. 뭉친 다리근육을 털고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오이를 꺼냈다.
“경치는 좋네.”
“거봐, 따라오길 잘했지? 땀 흘리고 먹으니까 더 맛있는 것 같다. 그치?”
“이래서 사람들이 산을 오르는 걸까?”
“무슨 소리야?”
“아니, 그냥. 턱 끝까지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려도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걸 느끼고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공기가 좋아서 오는 사람도 있고, 바람을 좀 더 많이 느끼고 싶을 수도, 그냥 산이라는 것 자체가 좋아서 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야기가 있는 둘레길은 친구와, 가족과 연인 등 사랑하는 사람과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의 산을 오르는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산이 주는 행복과 시원함은 각자의 추억대로 되가져갈 것이다.
누군가 산다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있다고 했다. 흙길로 걷기도 했다가 딱딱한 아스팔트를 걷기도 하며 계단을 오르기도 하고 평지를 걷다 내리막길을 만나기도 한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그곳에 바람도 있고 물도 있고 나무도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구간까지 정복하고 나니 석수역이다. 꽤나 긴 코스를 마치고 내려오니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꽤나 알찬 주말을 보낸 것 같은 뿌듯함과 쾌감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그저 그런 주말이었다면 집에서 밀린 잠을 잔다거나 텔레비전이나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50분.
“드디어 도착. 음, 막걸리에 파전 어때?”
“좋지!”
반만년의 무게를 담고 오랜 세월의 흐름은 무상한 듯 고요히 흐르는 푸른 한강 위에 돛단배가 유유히 흐른다. 노를 젓는 사공도 없이 뉘엿뉘엿 흘러가는 강물 따라 흘러내려 간다. 저 멀리 보이는 포구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웅성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푸른 한강에서는 한가롭게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있다. 강나루에는 신록이 짙어져 버드나무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아차산의 푸름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나는 아차산에 올라 광나루를 내려다본다. 언젠가는 이란 경치를 벗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작은 텃밭에서 상추, 고추, 가지 등을 가꾸면서 낚싯대 하나 등에 메고 패랭이 하나 쓰고 그저 느긋하게 낚시를 즐기고 싶다. 광나루에 앉아 낚시 던져놓고 그저 여유롭게 낮잠이나 자는 삶이 얼마나 한가하지만 여유로울까.
나는 현재의 최고 명문가인 안동 김씨의 후원을 받고 있다. 나는 그를 위해 그의 집인 청풍계(淸風溪)를 여러 번 그려줬다. 내가 그린 청풍계 그림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사람들은 신선의 솜씨라며 나를 칭송한다. 여기에 성상께서도 나를 후원해 주고 계신다. 나는 성상을 세제(世弟) 시절부터 그림 스승이었을 정도다. 하지만 나의 예술혼은 채워지지 않는다.
수십 년 전 우연한 기회에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그림을 본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어찌 이런 그림을 단 3일 만에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사람의 솜씨가 아니다.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자신이 사는 곳을 그려냈구나.”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마음을 뺏기고 어찌하면 나 역시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수없이 고민하고 수없이 그리기를 수십 년. 수백 장의 화선지에 검은 묵과 종이의 여백을 살려 수없이 그리고 찢기를 반복하고 있다.
내가 이곳 광나루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아차산과 한강이 어우러지는 아리따운 경치와 함께 이곳은 권문세가들의 별장이 있어 자연과 인간의 건축물이 잘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더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모습과 우리의 시대를 한 폭의 그림에 그리고 싶다. 마치 신선이 사는 몽유도원도처럼...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그리고 내가 사는 현재를 그리고 싶을 뿐이다. 아차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나루터에 묶인 두어 척 나룻배와 한강을 가로질러 쉴 새 없이 다니는 돛단배, 그리고 그 안에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선비들이 가득 타고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풍류를 즐기고 있다. 나는 그리고 싶다. 우리가 사는 이곳을 신선이 노니는 곳처럼 말이다.
그렇게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해 나는 전통적 수묵화법이나 채색화를 나 나름대로 해석해 나만의 필묵법을 개발했다. 세간 사람들은 수많은 그림을 그렸고 내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는 선비나 직업 화가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겸재파 화법이라 부른다고 한다.
나는 이제 나만의 화법으로 '광진'을 그리고 있다. 광진은 도성 안에서 살곶이다리를 거쳐 광진길을 따라 이르게 되는 강나루로, 여기서 배를 타야 강 건너 삼전도로 갈 수 있다. 이상향의 존재하지 않는 산수를 그리는 것이 아닌 실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산수를 하나의 붓으로 백색 화폭에 담아 꿈을 꾸는 것 같은 환상을 자아내고 싶을 뿐이다. 그것의 나의 ‘광진’인 것이다.
자, 따라하세요.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죄송합니다. 아픕니다.
다시 한 번 따라하세요. 자, 저기 알리씨. 입을 더 크게 벌려야 소리도 크게 나지요.
외국인 근로자들은 점심시간 전 10분 동안 기초 한국어 회화를 배운다. 배운다기보다는 반복적으로 따라 읽는 것이다. 한국말이 서툰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알찬 시간이 된다.
“장미씨는 한국말 잘 하니까 이런 수업이 필요 없죠? 그래서 우리 조선족 사람들이 참 좋아. 말도 잘 통하고 일도 야무지게 잘 하고. 자자 손님들 몰릴 시간입니다. 서두르세요.”
경영지원이라는 팀의 차장은 슬쩍 장미의 어깨를 톡톡 치며 능글스런 얼굴을 하고 지나쳤다.
공장이나 공단에서 그렇듯 서울 주변 식당에서도 이주노동자들의 고용률은 대폭 상승했다. 국적도 언어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지만 그중에서도 연변사람 즉 조선족들의 고용률이 눈에 띄게 많았다. 아마 외국인근로자라는 이유로 임금 부담이 낮은데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장점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 ‘코리안 드림’을 가슴에 품고 하루를 버텨가고 있다. 임금을 받으면 최소한의 생활비만 남기고 모두 고향으로 보내고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아파도 아프지 말아야 했다.
저기요, 여기 이거 고기 정량 맞아요? 저기요, 여기 반찬 좀 더 달라는데 왜 안 갖다 줘요? TV프로그램 채널 좀 돌리게 리모컨 좀 가져다 줘요.
식당을 찾는 사람들은 말투와 억양이 좀 어색한 외국인 근로자들을 보면 유난히 뾰족한 말투로 그들을 대했다. 여기 사장 나오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반말로 야, 너라고 말하는 사람, 심지어는 욕설까지 아무렇지도 내뱉는 사람들까지.
사실 그들을 홀대하는 것은 식당을 찾은 손님들만은 아니었다. 식당에서도 일종 텃새라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좀 더 험한 일을 한다거나 사고가 났을 때 처리들이 그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주방에서 일을 하다 화상을 입었다거나 배달을 나갔다가 오토바이 사고라도 나면 병원비를 지급해주기는커녕 오토바이 수리비를 임금에서 차감하는 일도 잦았다.
그들의 코리안 드림은 녹록치 않았다.
꺅. 짧은 외마디 비명이 주방 창고 쪽에서 들렸다. 식당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창고 쪽으로 향했고 몇몇 사람들이 창고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창고에서 식당 최고참 주방장이 허겁지겁 나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주방장은 별일 아니고 선반에서 물건이 장미씨 머리 쪽으로 떨어질 뻔 했다고 했다. 그런데 창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래쪽 선반에는 물건들이 어질러져 있고 장미씨가 겉옷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장미씨, 이리와 봐요. 아까는 많이 놀랐죠?”
식당에서도 유일하게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친절한 여직원이 장미를 불렀다.
“아, 네. 조금요.”
“나도 한국 사람이지만 식당일 하면서 사람들한테 정떨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야. 그러니 외국인들은 오죽할까 싶어. 나라도 나서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해주고 싶지만, 괜히 불똥 튈까 무서워서 그러지도 못하고. 씁쓸하네.”
“아니에요.”
“혹시나 사장이든 주방장이든 또 그런 일이 있다고 하면 참지 말고 말해요. 왜 당하고 있어야 해. 사실 그렇잖아. 나나 그쪽이나 여기 사장이나 다 돈 벌자고 하는 거잖아. 가족들 부양해야 하고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봐주고 외국인이라고 무조건 참고 그건 옛날 일이야. 요즘은 그런 시스템도 다 잘 돼 있다고 하더라고. 주방장일은 내가 잘 말해볼게. 놀랐을 텐데 오늘 마감은 내가 하고 들어갈 테니 얼른 집에 가봐요.”
장미는 눈물이 찔끔 났다. 서럽고 서러운 마음이 겹겹이 복받쳐 뜨거운 눈물로 흘려 내렸다. 당장이라도 짐을 싸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말처럼 쉽지 않음을 알기에 장미는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강해져야 했다. 기회의 땅에서 외로움을 딛고 당당히 일어나 꿈을 이루어야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