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산사랑은 끝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산에 가지 말라는 것은 집에서 박제인형처럼 지내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바람만 쌩하고 불어도 엄마는 산이 위험하다며 아빠를 말리려 들었고 아빠는 좁은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고양이처럼 또 산으로 가셨다.
엄마는 아빠가 아무래도 산에 우리가 모르는 좋은 것을 숨겨두었나 보다고 혀를 끌끌 찼지만 아빠가 왜 이토록 산에 매달리는지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종종 내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빠가 어렸을 적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꽤 큰 인삼밭에서 농사를 지으셨다고 했다. 그런데 해마다 인삼도둑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셨다는 것이다. 애지중지하던 인삼을 어떤 놈이 훔쳐갔는지 걸리기만 하면 온몸을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줄 것이라며 씩씩대셨다고 했다. 그날 아침이 되었을 때도 어김없이 인삼 한 뿌리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꼭 한 뿌리씩만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마음먹은 할아버지는 그날 조그만 오두막에서 꼼짝없이 인삼도둑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이상한 짐승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던 할아버지는 무서움에 덜덜 떨면서도 인삼도둑을 잡고자 기다란 몽둥이를 들고 꼭꼭 숨어있었다. 그런데 그때 자박자박 거리는 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졸음이 확 깨었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자박자박 자박자박’ 사람의 소리인지 짐승의 소리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았던 할아버지는 오두막에서 내려와 냅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진했다.
“잡았다 요놈!”
“악!”
깜깜한 어둠 속 사정없이 내리친 몽둥이를 온몸으로 받은 건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그렇게 잡고 싶었던 인삼도둑이 짐승도 아닌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이었다니.
불빛을 비춰보니 아버지는 그만 정신을 잃었고 이마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에구머니나 하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도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고 아버지를 둘러업고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자초지종을 물었다. 한참 뜸을 들인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사실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것아, 그게 얼마짜린데 도대체 그동안 그걸 다 어디에 빼돌린겨? 엉?”
“아부지, 잘못했어요. 빼돌리려고 빼돌린 것은 아니고 다 좋은 곳에 썼다니까요.”
“이놈이! 바른대로 말 못해? 몽둥이찜질 한 번 더 당해야 말할 것이여?”
“아아, 아부지. 실은 저 윗동네 민자네 어무니가 많이 아프다 해서 내 몇 개 가져다준 것밖에 없다니까요.”
“뭐? 민자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양반네 가져다 바쳤다 이 말이지?”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나 보다. 사실 우리 엄마 이름이 민자고 엄마는 아빠의 첫사랑이다. 첫사랑을 위해 간 큰 도둑이 되기로 했던 어린 소년.
아빠가 요즘 산에 다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 할아버지 때문이다.
그 옛날 우리 아빠가 엄마를 위해 인삼도둑이 되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할아버지를 위한 거짓말도둑이 되기로 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도둑이 될 수 있다는 것. 아버지는 오늘도 함박웃음을 띠며 산으로 간다.
그날 내 눈길을 잡아끌었던 것은 ‘소금꽃 피었네, 갯골로 소풍가자!’라는 문구가 아니라 눈부시게 하얀 꽃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 모습을 담아낸 포스터였다. 몇 달 째 공강 시간마다 사거리의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크로키를 연습하고 있지만 도심에서 하는 크로키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변화가 필요해.”
쥐고 있는 연필을 내려놓은 내 입에서 자연스러운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처음 창가 자리에 앉았을 때에는 하나하나가 특별해 보였던 사람들의 복장이나 표정들도 몇 달이나 크로키를 계속 해 온 지금은 모두 엇비슷해 보인다. 다들 뭐가 그렇게 피곤한 걸까. 조금 더 다양하고 생기 넘치는 표정들을 그려보고 싶었는데, 미소를 띤 채 걷는 사람들을 찾기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을 기다려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 한 자루만을 가방에 챙겨 넣고는 집을 나섰다. 가방이 가벼워서 그런지 아니면, 오랜만에 가보는 지역 축제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역시나 갯골생태공원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코스모스 꽃길도, 갖가지 재미있는 모양을 한 조형물들이나 염전도 아닌 축제를 방문한 사람들의 생동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사람들이 메고 있는 가방에는 분명히 도시락이나 카메라 같은 오늘을 위한 준비물이 들어있을 것이다. 각자 세운 나들이 계획만큼이나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을 그리기 위해 당장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 들고 싶었지만, 일단은 공원 안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코스모스 길을 따라 걸었다. 초가을인데도 갖가지 색깔의 코스모스가 공터에 한가득 피어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아이들의 웃는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표정이 다양한데다가 어떤 표정을 지어도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크로키 대상이지만, 대학교 근처에서는 좀처럼 보기가 어렵다. 나는 아이들 한 무리를 데리고 소풍을 나온 초등학교 선생님 같은 기분으로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모래 대신 하얀 소금이 깔려 있는 놀이터 한 구석에 있는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그저 열심히 놀다가 기운이 빠져 잠시 앉아 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전망대에 올라 갯골생태공원의 전경을 감상하고 내려온 뒤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보고는 불안한 마음에 말을 걸었다.
“얘, 혹시 엄마를 잃어버렸니?”
아이가 도리질을 했다. 엄마가 잠시 풍경 사진을 찍으러 다녀오실 동안 오빠와 놀고 있으라고 했는데, 또래 아이들을 만나 신이 난 오빠가 자신을 놀이에 끼워 주지 않는단다. 아이가 손가락질 하는 곳을 바라보자, 초등학교 사오 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모여 노는 가운데서 아이와 꼭 닮은 짱구머리 남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아이가 혼자 다른 곳으로 가 버리면 그대로 미아가 될 터였다. 나는 잠시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 주기로 결심하고는 아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냈다.
“언니, 화가예요?”
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스케치북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화가는 아니고 화가 지망생이지, 하고 솔직하게 대답하려다가 그냥 유명한 화가라고 거짓말을 해 버렸다. 아이는 설레는 눈빛으로 빈 스케치북을 들여다보다가는 자기 얼굴을 그려 달라며 내 앞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사진관에 갔을 때처럼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 앞에 앉은 아이를 보다가 웃음이 나왔다.
어린아이를 그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아이들은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린다. 어느 새 내 주변에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다음은 자기 차례라며 티격태격하다가도 또 웃는다. 웃음꽃이 피었다. 아이들의 소매며 바지 자락에 묻은 소금꽃들도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3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대학 졸업반 시절 떠난 봉사활동에서였다. 나는 보육원에서 어린 아이들을 돌보며 꽃밭에서 아이들에게 꽃반지를 만들어 주는데 멀리서 날아온 공이 내 앞에 떨어졌다. “Sorry.” 라고 짧은 말을 남긴 채 공을 가지고 휙 달아났다. 벤치에 앉아 공을 들고 간 쪽을 바라보니 남자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며 놀아주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보육원 아이들은 일제히 식판을 들고 배식을 기다렸다. 아이들에게 점심을 먹이고 아이들 낮잠시간이 되니 한숨 돌릴 시간이 났다.
아이들의 장난감을 치우고 빨랫줄에 빨래를 거는데 큰 이불 같은 건 영 쉽지 않았다. 그런데 웬 키 큰 남자가 불쑥 내 앞에 서서 빨래를 걸어주었다. 자세히 보니 아까 축구공을 가지고 간 그 외국인이다.
“때, 땡큐.”
“뭘요.”
“어! 한국말 할 줄 알아요?”
“그럼요. 한국말 조금 할 줄 알아요. 나는 메브에요. 프랑스에서 왔어요. 당신은요?”
“아. 저는 은영이에요.”
빨래를 다 널고 우리는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이곳에 봉사활동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한국은 관심 많아요. 우리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에요. 그리고 여기는. 음. 봉사 좋으니까.”
“그렇군요.”
서툴게 한국말을 하는 메브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났다. 약간은 귀엽다고 할까.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프랑스 우리 동네에 서울공원 있어요. 나는 가보았습니다. 서울에도 파리공원 있어요.”
“프랑스에 서울공원이요?”
강남역 사거리에 서울시와 이란의 수도 테헤란시가 자매결연을 맺은 기념으로 길 이름을 붙인 것은 알았지만 프랑스와도 이렇게 공원을 지어 외교적인 문화를 나누었다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쩐지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프랑스 서울공원 멋져요.”
메브는 휴대전화에서 서울공원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었다. 한국적인 고전미가 넘치는 정자에 불로문까지. 사진 속 메브는 귀여운 모습이었다.
“멋지네요. 파리공원에도 가 보았나요?”
“아직 못 가봤어요. 내일 가볼거에요. 같이 갈래요?”
그렇게 갑작스런 인연은 하루 더 함께 하게 되었다.
검정색 모자에 빨간색 운동화를 신은 메브는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메브와 파리공원을 둘러보니 정말 파리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파리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은 작은 모형의 에펠탑과 개선문 정도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나 에펠탑 정말 보고 싶었는데, 언젠가 파리에 가면 꼭 보고 말거야.”
“이거보다 조금, 조금 더 크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농담 아니야 메브. 난 파리에 꼭 가보고 싶어. 에펠탑도 보고 여기 있는 개선문도 보고.”
“언제 놀러와. 우리나라에 은영 초대할게.”
“그래, 고마워.”
“나는 말이야 메브. 꼭 프러포즈는 에펠탑 아래에서 받고 싶어. 그게 내 로망이랄까?”
웬일인지 메브 앞에서 뜻밖의 이야기까지 꺼내는 내가 놀라웠다. 그저 프랑스라는 나라와 파리라는 도시에 연계가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정도로 메브와 가까워 졌다고 느껴졌을까.
“꼭 와. 내가 불 반짝 하고 있을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프랑스 사람과 그 프랑스 앞에 서 있는 한국 사람이 조금은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한발자국 더.
해가 중천에 떴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여전히 이불속에서 꿈틀거렸다. 아침밥은 칼같이 먹어왔던 생활습관 때문에 우리 집 아침 식사는 늘 6시 반이었다. 평소와 같이 6시면 주방에 있어야 할 아내가 어쩐 일인지 오늘은 여태 방안에 있다. 주말 아침이라 그런가 싶어 내버려 두었으나 시계바늘이 7시를 막 넘어가니 배도 고프고 해서 아내를 깨우기로 했다.
“이봐, 이제 그만 일어나. 어? 지금 몇 신줄 알어? 나 배고파.”
“아이 참. 당신은, 밥통에 밥 있고 냉장고에 반찬 있는데 그것도 하나 못 꺼내 먹어서 이러는 거예요? 나 좀 쉬자고요. 제에발.”
“여태 누워있었으면 됐지 뭘 더 누워있으려고해? 빨리 밥 줘,”
“몸살이 왔는지 지금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오늘 아침만 좀 넘어가자고요.”
아내는 다시 이불을 똘똘 말고 애벌레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사람이 무슨 몸살이냐고 물어보려다 괜히 불똥이 튈까 말없이 냉장고로 향했다. 아내말대로 밥통에는 밥이 있고 냉장고에는 반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주말이라 애들도 다 약속 있다고 나가버리고 아내와 단 둘이 있는 집에서 혼자 아침을 먹으려니 괜히 서글퍼졌다.
꺼내던 반찬통을 다시 냉장고에 집어넣고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봐. 몸살 났을 땐 낙지가 최고야, 낙지 사줄 테니까 먹으러 가자고.”
“당신이 웬일이래?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큰일 난다던데 아픈 게 내가 아니라 당신 아니야?”
“이 사람이, 사준대도 뭐라 그래? 싫으면 관둬.”
“누가 싫대요? 가요. 가자고요.”
아내는 힘이 없다더니 목포로 내려가는 내내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멋이라곤 하나 없던 양반이 오늘은 왜 이러냐면서 싱글벙글이다. 평소 무뚝뚝한 성격에 아내에게 살가운 말 한 번 못하긴 했어도 무신경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아내는 참 별 거 아닌 것에 감동스러워했다.
채 정돈이 안 된 옛 부두를 지나 재래시장이 줄줄이 늘어선 항구를 찾으니 바다 냄새와 생선의 비릿한 냄새가 풍겨와 코끝을 간질였다.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시원했고 낯선 항구도시는 언제나처럼 반가웠다.
바닥에 야트막히 물이 고여 있고 장화를 신은 장사꾼들은 싱싱한 물건이 많이 들어왔다며 손짓했다. 다른 것은 볼 것도 없이 세발낙지를 쓱 둘러보는데 주인이 흥정을 걸어왔다.
"뭣 찾으신다요?"
"저거, 저 세발낙지는 얼마요?"
"아 세발낙지 좋지요. 6마리에 3만원인데 특별히 큰 놈으로다 7마리 넣어드릴랑게 여서 드시고 가시쇼.”
"비싸네."
"뭐시 비싸다고 했싼다요? 크기는 이래봬도 한 마리만 자시면 힘이 벌떡 벌떡 솟는 당게요."
"한마리만 더 주면 안 될까요?"
"아따 사장님도 차암. 에이, 그렇게 허요."
흥정을 마치고 자리에 앉으니 매콤한 양념장에 돌돌 말은 낙지 호롱구이와 갈낙탕이 차례로 나왔다. 주인의 걸쭉하고 호탕한 말만큼이나 음식도 푸짐했다. 나무젓가락에 돌돌 말린 호롱구이를 베어 물던 아내는 음식을 채 삼키기도 전에 실웃음을 터트렸다.
“풋. 당신 오늘 이상하네.”
“낙지 먹다 말고 뭐가 또.”
“당신이 흥정을 다하고. 내가 알던 사람 맞나 싶어서. 크큭”
“싱겁긴. 식기 전에 얼른 먹어. 한 마리만 먹어도 힘이 불끈 솟는다는데 어때, 기별이 좀 와?”
“글쎄~ 한 마리 더 먹어봐야 알겠는데?”
아내가 배시시 웃는다. 세발낙지가 힘만 불끈 솟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부간의 사랑도 불끈 솟게 만드는 힘이 있나보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에 걸을 때마다 부스럭한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제법 쌀쌀한 바람에 소매사이로 찬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겨울이 왔나보다.
궁을 떠나온 지 닷새가 훌쩍 지났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누구보다 조정과 임금을 생각하며 성실히 정치를 펼쳤다. 누구보다 학식이 뛰어났고 어진 성품으로 임금을 잘 보필하던 그였다.
하지만 어찌 정치를 하는 사람들과 궁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이와 같은 마음일까. 궁의 세력들에 밀려 크게 화를 입은 그는 잠시 영주에 내려와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가느다란 눈발이 잠시 내려앉았다 사라졌다. 겨울이 왔다.
긴긴 겨울을 어찌 보내랴. 이제 겨울의 시작인 것을. 언제 봄이 오려나.
선비는 긴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임금을 걱정했다. 그리고 임금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고 싶었다. 하루도 한양이 그리워 발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자리에 들었다.
선비는 조용히 종이를 펼치고 먹을 갈아 붓을 들었다. 옛날 선비의 할아버지가 종종 흰 종이에 매화를 그리셨던 것을 떠올렸다. 선비도 고고하고 기품 있는 매화나무를 그렸다. 그리고는 한 송이 한 송이마다 정성을 들였다.
달빛을 받아 더욱 아름다운 매화나무.
매화꽃 한 송이가 피어나면 그 다음날 또 한 송이.
그렇게 피어난 매화는 하얗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수줍은 미소를 건네네.
겨울이 가면 봄은 더욱 가까워오리. 멀지 않은 곳에 봄은 오고 있네.
선비는 그렇게 정성스럽게 꽃 한 송이씩 여든 한 송이의 하얀 매화를 그렸다. 하얀 매화는 긴긴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선비는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매화나무를 창문에 붙이고 하루 한 송이씩 붉은 색으로 물들였다. 그렇게 여든 한 송이가 다 물들 때면 봄이 오리라 믿었다.
매일 하루를 마무리 할 때면 노랗게 빛나는 달을 바라보며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하여 경건하게 절을 올린 뒤 매화 꽃송이에 붉은 색을 입혔다. 선비는 떳떳하고 흔들림 없는 지조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다. 내일이면 동지로 부터 여든 한 번째 날이 되는 날이다. 창문에 붙여놓은 매화나무에도 한 송이의 흰 매화가 없이 모두 붉은 빛을 내는 아름다운 매화나무가 완성될 것이다.
드디어 여든 한 번째의 날이 되었다. 선비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았다. 정말 마당 앞에 매화나무에도 이처럼 꽃망울을 틔운 꽃들이 반겨줄까 긴장되었다.
문을 열어보니 정말로 봄을 알리는 매화가 피어있었다. 선비는 환하게 웃었다. 길고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찬바람 사이로 붉은 매화가 꽃잎을 흔들었다. 그때였다. 한양에서 온 전갈이라며 다시 한양으로 올라와 정사를 함께 돌보라는 왕의 명이 담겨있었다. 끝까지 의리와 지조를 버리지 않고 봄을 기다린 선비에게 정말로 봄이 찾아왔다.
선비는 감사함에 절을 올리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겨울이 오면 머지않아 봄은 다시 올 것이다. 그렇게 다시 봄이 오리라.
나는 할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짜증이 많고 늘 우울해하셨으며, 전쟁 때 팔 한 쪽을 잃어 보기 흉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입만 여시면 세상을, 정부를,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저주하고 비관하는 말만을 하셨기에 할아버지 댁에 방문하는 것은 낙천주의자인 내게는 꽤나 고역이었다. 자식들이 모두 성공한데다가 할아버지를 극진히 모셔서, 생활비로 쓰고도 저축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 매달 들어오시는데도 굳이 불편한 몸으로 밭을 일구시는 억척스러운 면도 싫었다. 술을 드신 날이면 좋은 옷을 입은 자식들이며 손주들에게 손가락질을 하시며 우셨고, 서울에 사시는 것을 한사코 마다하시고 먼 김포땅 끝자락에 집을 지으셨다. 어렸던 나는, 그 괴팍한 성미의 할아버지에게 어른들이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린 적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지난 해 겨울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술에 잔뜩 취하셔서 집으로 돌아오시다 넘어지셨는데, 그만 일어나지 못하시고 동사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유골을 강에 뿌리고 돌아오던 날,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기일마다 애기봉에 오를 것을 제안하셨다.
“왜 하필 산에 올라요?”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무서워하고 피하기만 하는 통에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줄 기회가 없었다고 하시며 긴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 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할아버지가 실향민이며, 할머니를 북쪽에 두고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쟁 중에 한쪽 팔을 잃은 할아버지는 아내와 아이들을 부탁했던 친구 집을 찾았다. 아내가 달려 나와 자신을 맞아 줄 줄로만 알았는데, 그곳에는 아이들뿐이었다. 할머니는 아이들을 감싸다 크게 다쳐 도저히 남으로 넘어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냥 자신을 버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라고 하셨고, 워낙에 급박한 상황에 친구네 가족은 할머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아이들만을 겨우 챙겨 남으로 넘어왔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불편하신 몸으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형제를 열심히 키우셨지만, 한편으로는 북에 두고 온 할머니 생각에 매일같이 괴로워하셨다고 한다. 돌아가셨으면 시신 수습도 제대로 못 한 것이, 살아 계시면 외롭게 혼자 살아 계실 것이 걱정이셨다. 자식들이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북한에 계실 할머니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아 하셨다고 한다.
애기봉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에 있었다. 애기봉 전망대에 오르면 강 너머의 북한에 있는 마을까지도 맨눈으로 건너다 볼 수 있었는데, 텔레비전에서나 접하던 북한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애기봉이라는 이름은 병자호란 때 혼자 강을 넘어 피신한 기생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애기라는 이름을 가진 이 기생은 평양 감사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자신만 강을 건너고 평양 감사는 그대로 청나라에 잡혀가자 감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이 봉우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후에 이것이 이산가족의 모습 같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이름 없는 봉우리에 애기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나는 어쩌면 할아버지도 할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꿈처럼 강을 건너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장난감을 들고 있던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우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때 그 손을 잡아드릴 수 있었다면 할아버지는 울음을 그치셨을까. 할아버지의 고개. 나는 애기봉에 그런 이름을 붙여 보기로 했다.
월출산에 올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달이 떠오르는 산’이라길래 이름마냥 고요하고 아름다울줄 알았는데, 웬걸, 기암절벽에 바위 천지, 산세는 또 어찌나 험한지!
“이 산이 원래 이렇게 험한 거야, 아님 내가 가는 이 코스만 험한 거야?”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검색을 시작했다.
“월출산, 우리나라에서 풍수지리상으로 기세가 가장 센 산? 아, 내가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구만. 게다가 구름다리 코스가 가장 난코스? 아아악, 젠장!”
당장이라도 휴대전화를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따 아내와 통화를 해야 하니까. 싸우고 꼴 보기 싫어도, 집에는 같이 가야한다. 한 집에 사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이렇게 꼬일 줄 알았으면 아내와는 같이 안왔을텐데. 그는 지금 후회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처음부터 월출산에 가는 걸 싫어했다. 이왕 여름휴가를 받아 쉴 거면 산 보다는 바다가 좋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가지도 않은 산악 캠핑장에 푹 빠져 있었다. 그의 아내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망할 리얼 버라이어티가 대한민국 남자들을 전부 된장 캠퍼로 만들어 놨어...’
게다가 전국의 술이란 술은 다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인데, 하필 영암에는 그가 아직 섭렵하지 못한 술이 있었다. 그래서 목적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영월이 됐다. 도대체 그냥 막걸리도 아니고, 무화과 막걸리가 뭐길래!
남편의 소원대로, 그들은 월출산 캠핑장에서 무화과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는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처음에는 툴툴거리던 아내도 한 사발, 두 사발 받아먹더니, 혼자 한 동이를 다 비웠다. 그렇게 둘이서 세 동이쯤 먹었을까? 혀가 살짝 꼬인 채 남편이 말했다.
“야, 너는 그렇게 오기 싫어하더니, 이렇게 맛나게 출을 처마시냐? 너 인제 내가 하는 말에 토 달지마 이 여편네야.”
“야, 너 지금 말하는 스타일이 왜 그 모양이야. 너 잊었어? 난 지금도 산이 싫어. 벌레는 왜이리 많고, 저 깎아지른 듯 한 산세는 뭔데? 네가 언제 내가 원하는 대로 말 들어준 적이나 있어? 내가 참아주고 사니까 이게 그걸 당연한 줄 알아. 뭐 그리고 술을 쳐 마셔? 그래, 나 아주 상스럽게 처마시고 있다. 너 때문에 열 받아서 술이 아주 그냥 술술 들어간다. 됐냐?”
사실 남편은 말을 입 밖으로 뱉는 순간부터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아, 입이 방정이다. 오늘 분위기잡고 첫째 만들려고 했는데, 이거 뭐 분위기고 뭐고, 내일 무사히 집에나 갈 수 있음 다행이게.’
결국 아내는 텐트에서, 그는 해먹에서 잤다. 2세 만들기는 생각조차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함께 나란히 오르기로 한 월출산을 따로 나섰다. 아내는 바람폭포 쪽으로, 남편은 구름다리 쪽으로.
월출산 캠핑장에서 구름다리까지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렸다. 그러나 구름다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이 어마어마한 산새는 무엇인가; 한 시간 밖에 안 걸었는데도 다리에서 힘이 풀리고 있었다. 게다가 남들은 고어텍스 옷이며 등산용 스틱이며 만반의 준비를 하며 걷는데, 그의 무기는 달랑 등산화뿐이었다. 걷다가 벌써 생명의 위협을 몇 번이나 느꼈던가! 긴장감에 물을 마구 들이켰더니, 물도 벌써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구름다리는 정말 장관이었다. 밥로스 아저씨가 나이프로 휙휙 휘저어 그린 듯한 바위절벽 사이에 끝도 보이지 않게 긴 다리가 있었다. 어마어마한 공포가 밀려왔다. 한참동안 다리 입구에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난간을 꼭 잡은 채 한 발 두 발 걸어갔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경치는커녕 눈을 어디에도 돌릴 수 없었다. 간신히 눈을 돌려 난간을 잡은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다, 그는 깜짝 놀랐다. 난간에는 매직으로 네 글자가 적혀있었다. ‘떨어져라.’
그는 꽁지에 모터가 달린 듯 건너편을 향해 걸어갔다. 차원이 다른 공포였다. 산의 기운이 짓누르기 전에 산과 산을 잇는 이 허공에서 도망가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민망할 정도로 빠르게 구름다리 건너편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전화기를 꺼냈다.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딸칵. 왜?”
“너 어디야, 바람폭포야?”
“아니, 나 천황봉 거의 다 왔는데? 이제 내려갈 거야. 끊어.”
“야야야야야! 너! 아니, 미안하다.”
“너 왜 그래, 약먹었어?”
아내의 목소리를 듣자 그는 오만생각이 떠올랐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에 떠오르는 건 역시 마누라밖에 없구나. 지가 아무리 기가 세고 바가지를 긁는들 그 기운이 월출산만큼 뻗치진 않으니. 적어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진 아니하잖나. 악처라도 처가 있는 게 낫다고, 감사하며 살자.
“아냐. 생각해보니까 그냥 미안해서. 나 인제 구름다리니까 조금만 기다려. 사랑한다.”
“놀고 있네... 빨리와. 투둑. 뚜.뚜.뚜.뚜...”
우리 엄마는 해녀입니다. 나는 우리 엄마를 인어공주라고 부르지요. 책에서 나오는 인어공주가 우리 엄마보다 조금 아주 쪼금 더 예쁩니다. 인어공주는 입술은 분홍색, 머리는 빨갛게 물을 들였기 때문일 거예요. 우리 엄마도 화장하면 인어공주보다 백배는 더 예쁠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엄마의 모든 것이 다 좋지만, 엄마랑 같이 자는 것은 싫어요. 왜냐하면, 엄마는 잘 때 코를 심하게 골거든요. 유난히 코를 심하게 골 때 코를 살짝 막은 적도 있어요. 그래도 엄마는 모르더라고요. 엄마는 왜 늘 숨을 호오이 쉬느냐고 물어본 적도 있어요. 그런 엄마는 해녀들이 물 위에서 숨을 몰아서 쉬는 버릇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지요.
그런데 얼마 전에 엄마는 해녀 일을 그만두셨답니다. 언니가 계속해서 말린 일 때문이지요.
나와 언니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납니다. 언니는 회사에 다니고 나는 아직 초등학생이거든요.
언니는 엄마가 걱정된다며 이제 그만 집에서 쉬라고 했고 엄마도 그동안 많이 힘드셨던 모양입니다. 매일같이 물속에서 지내서인지 귀도 먹먹하고 이제는 물에 들어가면 오래 숨을 참기도 힘들다고 하셨지요. 언젠가 엄마와 잠수놀이를 한 적이 있는데 내가 엄마를 이긴 것만 보아도 엄마가 이제는 숨 참기가 정말 힘든가 봅니다.
언니는 오랜만에 제주에 내려왔으니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신이나 방방 뛰었지만, 엄마는 그냥 집에 있는 해산물로 매운탕이나 끓여 먹자고 했습니다. 엄마는 바다냄새가 지겹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나는 이제 바다냄새 가득 나는 해산물이면 질리도록 먹어서 치킨이나 햄버거가 더 좋습니다.
언니는 그럼 비싼 회를 사주겠다고 싫다는 엄마를 모시고 횟집에 들어갔고 엄마는 한 상 차려진 음식 중에서 전복과 멍게, 해삼, 성게들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아마 엄마가 물질을 하면서 매일 따던 것들이라 그럴 것이겠지요. 엄마는 늘 물질하는 것이 힘들다고 했었는데 막상 그만두려니 슬픈 마음이 드는 것 같았습니다.
엄마는 나와 언니에게 많이 먹으라고 하시더니 소일거리로 시내에 수영장에서 물청소를 해볼까 한다고 말했습니다. 언니는 이제 물이 지겹지도 않으냐고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언니는 이제 집에서 쉬라고 했지만 엄마는 싱긋 웃으시더니 아직 쌩쌩하다고 하셨지요.
"엄마 인생에서 물을 빼놓으면 내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는 물을 떠난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단다. 젊었을 때 처음 물질하면서 숨 참기도 힘들고 수영도 잘 못해서 많이 울었었는데 이 악물고 버텼지. 다 너희들 웃는 얼굴 보면서. 너희들 더 맛있는 것 먹이고 더 좋은 옷 입히고 싶어서…․ 후후. 특히 우리 막내.”
엄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새우를 까 내 입에 넣어주었고 언니는 말없이 물만 꿀꺽꿀꺽 삼켰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언니는 안방에서 엄마 옛날 사진첩을 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처음 보는 엄마의 젊었을 때 모습이 담겨있었지요. 엄마는 참 예뻤습니다.
검은색 해녀복을 입고 물허벅을 찬 모습으로 브이자를 그리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전복을 한가득 따서 신이 난 엄마의 모습도 보였어요.
엄마는 물속에서 행복해 보였습니다. 물을 떠나면 살 수 없는 인어공주처럼 엄마는 물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