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곰과 호랑이는 아옹다옹합니다. 서로 자신이 더 우위에 있다며 형님이라고 부르라는 것이지요. 곰은 단군시대부터 호랑이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고 호랑이는 한반도가 호랑이 형상을 띄고 있으니 자신이 곰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곰과 호랑이의 싸움을 보다 못한 밤나무가 제안을 하나 하였습니다. 우리 마을 숲속 동물친구들 앞에서 공주에 전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서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동물이 형님이 되는 것이었지요.
곰과 호랑이 둘 다 밤나무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다음날 정오가 되자 밤나무 주위로 동물 친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밤나무를 사이에 두고 빙 둘러앉은 동물친구들도 곰이 이길지 호랑이가 이길지 의견이 분분하였지요.
먼저 곰이 어깨를 으쓱하며 나섰습니다.
“에헴,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아주 먼 옛날 연미산 강 건너에 홀로 외롭게 살고 있던 암곰 한마리가 있었어. 늘 외로움에 떨며 캄캄한 동굴 속에 살았지. 그런데 어느 날 강 나루터 근처에 나무를 하고 온 나무꾼이 목을 축이려고 강가로 내려오는 게 아니겠어? 물고기를 잡으러 강가로 나갔던 암곰이 글쎄 그 나무꾼을 데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캄캄한 동굴 속으로 들어갔어.
목숨을 잃을까 두려웠던 어부는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암곰이 자신을 헤치지 않고 먹을 것을 물어다 주고 살뜰히 대해주는 게 아니겠어? 그래도 나무꾼이 도망을 갈까 두려웠던 암곰은 동굴의 문을 굳게 닫고 열어주지 않았어.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나무꾼은 조금씩 암곰에게 마음을 열고, 정을 나눈 암곰과 나무꾼은 자식도 낳고 오순도순 살았지.
쯧쯧쯧, 그런데 암곰이 사람을 너무 많이 믿었던 거야. 나무꾼이 인간세상을 그리워하는 줄 몰랐던 거지. 어느 날 암곰이 물고기를 잡으러 강가로 나간 순간, 나무꾼은 열린 동굴 문을 통해 통나무배를 타고 도망을 쳤어. 물고기를 잡다 장면을 목격한 암곰은 새끼 두 마리를 안고 나무꾼에게 도망가지 말라고 애원을 하였지.
하지만 나무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배를 타고 떠났고, 암곰은 자식들을 품에 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네.
어때? 구슬프고도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니 내가 저 호랑이놈보다 형님이 되는 것이 맞지!”
곰의 이야기가 끝나자 동물 친구들은 슬픈 이야기에 훌쩍거리며 곰이 형님이 되는 것이 맞지! 하며 곰의 편을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호랑이도 질세라 크르렁 거리며 동물들 앞에 나왔지요.
“어허! 내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안했다고! 다들 잘 들어봐.
옛날 계룡산에 한 중이 작은 암자를 짓고 도를 닦고 있었어. 그런데 절 밖에서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겠어? 문 밖으로 나가보니 호랑이가 고통스러운 소리로 울부짖으며 목을 바닥에 비비는 거야. 가까이 다가가보니 호랑이 목에 큰 비녀가 걸려 있었어. 스님은 고통스러워하는 호랑이의 목에서 비녀를 빼주었지. 호랑이는 고마움을 표하고 유유히 사라졌어. 호랑이가 다녀간 다음날 또 문밖에서 기척을 느낀 스님이 밖을 나가보니 어제 그 호랑이가 웬 처녀를 물어다 놓고 재빨리 사라지는 것이었어. 정신을 잃은 처녀를 방으로 옮겨 정성껏 돌보아 주었지.
정신을 차린 여자는 혼인을 앞둔 양가의 처녀였어. 저녁에 뒷간에 갔다가 정신을 잃었다고 하였지. 스님은 처녀를 본가에 데려다 주었지만 자신을 구하여 준 스님을 따라 불도를 닦으며 일생을 보내기를 소원하였어. 처녀의 어버이도 하는 수 없이 허락하였고 스님 역시 간곡한 청을 뿌리칠 수 없었지. 그렇게 처녀와 스님은 의남매를 맺고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열반에 올랐다는 군.
어때! 내 이야기가 더 흥미롭지 않아? 그러니 저기 저 곰보단 내가 형님이 되는 것이 옳아!”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가 끝나자 동물친구들은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결국 투표로 진행하게 되었답니다. 호랑이 하나, 곰 하나. 그렇게 투표가 진행되었습니다. 마지막 표를 하나 남겨두고 호랑이와 곰의 투표는 동점이었지요. 마지막으로 표를 열어보니 호랑이와 곰 중간으로 기권이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곰과 호랑이의 승부는 오늘도 무승부가 되었습니다.
다음에는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로 공주 마을의 이야기 왕이 되기 위한 내기를 할까요?
딱 한잔만 더 마시고 들어갈게. 누군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듯이 건넨 혼잣말이다. 벌 써 몇 병째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그는 되뇌었다. 마지막이라고. 남은 소주잔 이거 딱 한잔처럼 마지막이라고. 남자는 중얼거렸다.
남자는 어두운 실내 포장마차에 있었고 홀로 앉아있었다. 남자가 벌인 네 번째 실내 포장마차 사업장이었다. 매번 반짝 장사가 되다가 나중에는 파리만 날리는 쪽박집이 되기 마련이었다. 봄이 되면 꼭 가게를 빼줘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돌아서는 건물주의 당부가 있던 날이었다. 그렇다고 남자가 성실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늘 좋은 재료를 위해 새벽시간을 아끼지 않았고 대박 집과 쪽박 집을 나름대로의 계산에 맞춰 비교도 해본 그였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무언가 승부수를 걸어야만 했다.
남자는 귀여운 딸아이와 예쁘고 상냥하던 아내를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딱 한잔만 더 하고 들어갈게, 마지막이야.
반짝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신 남자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식탁에는 콩나물국이 놓여있었다. 아내가 왔었나보다 생각했다. 남자는 하나부터 천천히 다시 시작해보기로 한다. 그동안 무엇이 문제였는지 재료인지 인테리어인지 품목선정인지. 무의식중에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틀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내가 아침상을 다 차려놓고 나간 터라 더 이상 꺼낼 반찬이 없었음에도 남자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우연히 슬라이스 치즈가 눈에 띄었다. 술을 마시고 난 다음날 아침 느끼한 치즈를 먹는다는 것, 다른 날 같았으면 쳐다도 안보고 아내가 끓여놓은 콩나물국을 후루룩 마셨겠지만 남자는 치즈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냉장고에 있어 차가운 치즈는 입안에서 쉽게 녹지 않았다. 중얼거렸다.
‘치즈가 따뜻했으면 좋겠어’
남자는 그 순간 낙뢰가 하늘에서 번쩍 치듯 치즈 하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의 사업 아이템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치즈 생각뿐이었다. 좀 더 체계적인 사업 구상을 하기 위해 남자는 임실로 향했다. 남자에겐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니까.
치즈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 그곳엔 치즈의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치즈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음식부터 맛과 발효과정까지. 남자는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치즈 하나면 누구나 만족시킬 수 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년 봄이 되면 꼭 방 빼주셔야 해요.’
건물주가 이번엔 아내를 찾아간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귀여운 딸아이와 상냥한 아내를 생각했다. 남자는 성실하게 치즈로 만들 수 있는 음식들을 떠올렸다. 치즈의 맛을 끝까지 살리며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차별화 된 음식들이 무엇인지를.
남자는 아이들을 위한 치즈 그라탱부터 미니 피자 그리고 치즈의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인 치즈케이크를 디저트로 만들기로 했다.
“다음 달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지요.”
건물주가 웃으면서 재계약을 하러왔다. 남자는 더 이상 어두컴컴한 방에서 홀로 마지막을 되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귀여운 딸아이와 상냥한 아내와 함께 식탁에 앉아있을 것이다. 오늘도 그의 가게에서는 고소하고 부드러운 냄새가 난다.
한참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친구가 어깨를 툭 쳤다.
“야, 너 또 그런 거 보고 있어?”
“아, 깜짝이야. 인기척 좀 내고 다녀라. 간 떨어질 뻔 했잖아. 난 이게 제일 재미있더라.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게 한이야, 정말.”
내가 보고 있던 건 다름 아닌 고래 사진이었다. 유치원 때부터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 나의 고래 사랑은 쭉 이어져 왔다. 그렇다고 해서 고래의 생태와 습성 같은 것들에 대해 학술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나는 그냥 고래의 사진을 보는 것이 좋았다.
아쿠아리움에 가면 헤엄치고 있는 돌고래들도 귀엽지만, 뼈 하나가 사람의 키만큼 큰 고래들이 더 멋지다. 포유류들 중 몸집이 가장 크다는 고래. 비행기나 배를 타고 바다 위를 지날 때면, 저 아래 고래 한 마리가 헤엄치고 있는 상상을 해 보곤 한다. 흰긴수염고래처럼 거대한 고래를 만난다면, 나는 아마 기뻐서 기절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보다 조금 작은 긴수염고래도 좋고, 점박이가 귀여운 범고래도 좋다. 다큐멘터리 채널에 고래가 나올 때마다,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고래나 공룡은 어렸을 때나 좋아하는 거 아니냐는 사람들이 많은데, 천만의 말씀이다. 이 거대한 생명체가 움직이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고래는 우리 학교 건물만큼이나 커다란 몸집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육중한 몸을 움직여 바다 속을 거니는 것이다. 학교가 물속을 헤엄치는 모습을 상상 해 보라! 놀랍지 않은가.
“나 어제 텔레비전 보는데 네가 정말 좋아할만한 곳 나오더라.”
자리에 앉자마자 고래 얘기를 시작하려는 내 말을 지영이가 뚝 끊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이미 고래변태라는 해괴한 별명을 얻은 나는 한 번 고래 얘기를 시작하면 멈출 줄을 몰랐다.
“울산에 장생포 고래 박물관이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 가면 4D 영상 체험도 할 수 있고 고래 뼈도 볼 수 있대. 왜, 그 공룡 전시회처럼.”
나는 지영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지영이를 꼭 끌어안고 말았다. 당장 가자며 방방 뛰며 조르자, 참다못한 지영이가 내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먹였다.
지체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 주말에 바로 친구를 끌고 울산까지 왔다.
“정말, 너한테 그런 말을 한 내가 바보지.”
투덜대는 지영이에게는 울산의 명물이라는 치즈 맛 고래 빵 열 개짜리 한 세트를 사 주었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내가 가끔 꾸는 고래 꿈처럼 달달한 맛이 났다.
고래 박물관답게 정원의 조형물들도 모두 고래 모양이어서 여기저기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눈이 동그래져서 정원을 둘러보고 있는데, 지영이가 고래 모양을 한 매표소 앞의 황동상에서 멈추어 섰다. 황동상은 돌고래와 입을 맞추고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래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인지, 아니면 소녀가 바다 속으로 들어간 것인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지영이가 무릎을 탁 쳤다,
“<돌고래의 요정 티코>! 우리 어렸을 때 방영됐던 만화!”
“그런데 만화에 나오는 건 돌고래가 아니라 범고래였어!”
내 말에 지영이가 깔깔 웃었다. 물론 나도 그 만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이십 대 중반 줄에 들어서고 있는 또래들 중, 이 만화를 한 번도 보지 않은 아이가 몇 명이나 될까. 만화는 범고래랑 친구인 소녀가 전설의 황금고래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내용이었는데, 어린 마음에 범고래와 함께 바다 속을 헤엄치는 주인공의 모습이 정말 멋져 보였다. 어쩌면 내가 고래를 좋아하게 된 것이 이 만화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결국 고래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래가 나오는 영화, 고래가 나오는 소설, 고래가 나오는 만화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는 끊이지가 않았다. 박물관에 들어서며,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 보았다.
소녀와 함께 헤엄치던 고래는 영화 <그랑 블루>의 포스터 속 달빛 아래에서 뛰어오르는 고래와도 닮았고, 황금고래는 <피노키오>에 나오는 거대한 고래와도 닮아 있었다. 사람들이 꿈꾸는 고래의 모습은, 딱 이 귀여운 고래 빵을 수만 배로 부풀려 놓은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전 세계 사람들은 태어나서 한 번쯤, 고래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우연히 건넜던 다리가 하나 있다. 친척집에 다녀오던 길, 어머니가 갑작스레 야경이 보고 싶다 하셔서 일부러 차를 돌려서 갔던 곳에서 본 다리였다. 아치와 원 모양이 붉은 색과 녹색의 조명으로 빛나고 있던 그 다리는 화려하지도, 소박하지도 않았다. 다리 건너편으로 펼쳐져 있던 울산의 야경이 참 조용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말문을 여셨다.
“옛날에는 여기까지 고래가 들어왔다지.”
울산이 고래로 유명한 곳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강까지 고래가 다녀갔다니? 아버지의 말에 놀라 다리를 다시 살펴보니, 그것은 고래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물론 강에 고래가 지나다닌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일 터였다. 하지만 그 후로 나는 가끔, 울산에 흐르는 작은 강과 그 아래를 헤엄치는 고래의 모습을 상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강은 그리 작은 편은 아니었다. 다만, 내 상상 속의 커다란 대왕고래 한 마리가 헤엄치기에 작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내 상상 속에서 고래는 항상 하얀 배로 강바닥을 긁으며 천천히 태화강 상류로 헤엄쳐간다. 고래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가끔씩 하얀 물안개를 그려내며 유유히 헤엄친다. 그 거대한 고래가 지나가고 움푹 팬 자리에 푸른 강물이 넘실대며 차오르고, 고래의 지느러미가 쓸고 지나간 부분은 그대로 아름다운 강둑이 된다. 그야말로, 고래가 만든 강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나는 다시 그 다리를 찾게 되었다. 오랜만에 다시 친척집을 찾았는데, 돌아오는 길에 가족 나들이가 계획된 것이었다. 어디로 갈까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고래를 닮았던 그 다리를 다시 보고 싶다 하셨고, 마침 아버지도, 나도 그 다리가 그리워지고 있던 참이라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이제 막 정오를 지났으니 야경을 보는 건 무리겠네.”
어머니가 아쉬운 듯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우리 가족은 야경만큼이나 값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해가 내리쬐는 시간에 본 태화강변은 내 상상과는 달리, 아주 넓은 대밭이었던 것이다. 밤에는 그저 강변공원에 조성된 숲인 줄로 알았던 것이, 낮에 보니 모두 대나무였다.
“세상에,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낮에 들렀을 텐데 말이야. 고래 다리도 예쁘지만 대숲이 아주 장관이네!”
“그럼 아예 지금부터 해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야경까지 보고 갈까?”
아버지의 말에 우리 가족 모두 오케이를 외쳤다. 흔히들 그러듯이, 울산이라 하면 공업 도시를 생각하는데 이곳은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대나무들이 녹색 장막을 펼치고 있었다. 이전부터 자생하던 대나무를 시민들이 합심하여 이만큼 키워낸 것이라는데, 사람들뿐만 아니라 백로나 괭이갈매기, 고니, 왜가리나 민물 가마우지 같은 철새들도 많이 다녀간다고 했다. 도시 한가운데임에도 불구하고, 너구리가 살고 있다는 안내판까지 붙어있는 것을 보고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만하면 고래도 아직 살지 않을까?”
실없는 말 한 마디를 던졌을 뿐인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러면 좋겠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대숲을 누비고 다니다 지친 우리는 배를 탔다. 강 이쪽 편과 저쪽 편 사이를 연결한 줄을 잡고 직접 뗏목을 움직여가는 이 배의 이름은 갯배라고 하였다. 태화강 전망대와 그 뒤에 펼쳐진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직접 줄을 잡고 당기게 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줄을 당기는 동안, 건너갈 수 없을 것만 같던 강 저편이 점점 가까워져갔다.
순간, 나는 물밑으로 커다란 고래 한 마리가 헤엄치는 상상을 했다. 고래의 숨구멍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가 대밭으로 떨어진다. 대나무는 고래가 뿌린 물을 마시려 고개를 한껏 빳빳이 세웠다. 난데없는 상상에 웃음이 났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셨다. 나는 그 순간 우리 모두 같은 상상을 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흐뭇한 마음에 줄을 더욱 힘껏 당겼다.
또! 또 이야기 해주세요! 네?
손주 녀석이 주위를 맴맴 돌며 자꾸만 성가시게 군다.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성화다. 녀석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이 늙은이의 소일거리가 되어버렸다. 딸애가 손주를 맡기고 외출을 했을 때 하도 심심해하기에 옛날이야기를 한 번 해준 것이 시작이었다.
“동화책보다 할머니가 이야기 해주는 게 훨씬 재미있단 말이야.”
“할머니 귀찮으시니까 책을 보든가 비디오 봐. 네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빌려왔어.”
“싫어. 싫어, 할머니 무릎에 누워서 이야기 들을 거야. 메롱~”
손주 녀석이 내 무릎위에 자리를 잡고 눕더니 기어이 눈을 감고 이야기를 기다린다. 하기야 이제 좀 더 크면 이런 어리광도 못 보겠다 싶어 못이기는 척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옛날 옛날에, 아주 탐스러운 사과나무 한그루가 있었어. 사과나무는 마을 한 가운데 우물 옆에 있었지. 처음에 마을사람들은 사과나무에 탐스러운 사과가 열리면 우물물처럼 공동으로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어. 남는 것은 따다가 마을 공동 창고에 보관하면서 먹었지. 그때까지만 해도 마을에 큰 문제가 없었단다. 그런데 문제는 마을사람들의 탐욕이었단다.
언젠가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욕심이 자라났고 옆 동네 김씨가 자기네보다 더 많은 사과를 가져가는 것 같았고 옆 집 박씨가 더 탐스럽고 빛깔 좋은 사과를 먼저 골라가는 것 같이 느꼈던 거야. 마을 사람들 모두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탐스러운 사과나무가 자기네 소유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그래서요? 막 싸우고 그랬어요?”
“원래 사람의 마음에 욕심이 들어차는 순간이 문제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던 김씨가 사과나무 근처로 가서 마을사람들 몰래 탐스러운 사과를 따기 시작했단다. 처음에는 한 다섯 개만 몰래 가지고 왔지. 그런데 도둑질이라는 게 습관이 되면 무서운 법이지. 하루 이틀이 지나고나니 김씨는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열 개, 스무 개씩 몰래 따오기 시작했단다. 원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지.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마을 회의 때 누군가가 사과나무의 사과가 자꾸만 줄어드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단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김씨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화를 내면서 그런 양심 없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걸리면 가만두지 말아야 한다고 했지. 마을사람들은 김씨의 의견에 적극 동조하면서 사과도둑을 잡아야 한다고 했단다.
그래서 김씨는 머리를 썼단다. 자신이 도둑을 잡아오겠다고 큰 소리를 친 거지. 도둑은 아무래도 새벽녘에 나타날 테니 자신이 숨어 있다가 도둑을 잡겠다고 한 거야. 그리고는 날이 밝으면 도둑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할 속셈이었단다.
날은 어두워졌고 김씨는 우물 옆에 숨어있었단다. 그리고는 잽싸게 사과를 땄지. 그런데 그 때였어. 마을 사람 중에서도 유독 김씨를 눈여겨 본 박씨였지. 박씨는 ‘도둑이다. 사과 도둑이 나타났다’라고 소리를 치며 긴 몽둥이를 휘두르며 김씨에게로 달려왔단다. 놀란 김씨는 그만 휘청하여 옆에 있던 우물에 빠지고 말았어.”
“헉, 그래서 김씨는 어떻게 되었어요? 우물에 빠져서 죽었어요?”
“뒷이야기가 꽤나 궁금한 모양이로구나. 우물에 빠진 김씨는 박씨에게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면서 그동안 자신이 사과를 훔쳤다고 솔직하게 말을 했단다. 박씨는 김씨를 용서하고 우물에서 꺼내어 주었지. 그런데 박씨가 우물에서 김씨를 구해주자 마자 김씨의 태도가 별안간 달라졌단다. 목숨을 구해준 박씨에게 오늘 일을 마을사람들에게 말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박씨를 협박했지. 박씨는 무서운 마음에 알겠다고 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었단다. 그런데 마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단다. 새벽녘이 되면 우물에서 김씨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어.
자기가 사과도둑이었고 목숨만 살려준다면 마을사람들에게 잘못을 빌겠다고 김씨가 우물에 빠졌을 때 말한 내용이었지.
우물에서 들려온 소리 때문에 김씨의 잘못이 온 동네방네 소문이 났고 김씨는 진정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잘못을 뉘우쳤고 박씨에게도 사과를 했단다.”
“이야. 역시 할머니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어요! 다음에도 또 재미있는 이야기 들려주셔야 해요!”
이번 이야기도 꽤나 재미있던 모양이다. 다음 이야기는 무엇을 들려주어야 하나 오늘도 행복한 고민거리가 하나 늘었다.
내가 생각한 여행은 이런 것이었다. 친구와 도란도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며 푹 쉬다 돌아가는 국내 여행. ‘레일바이크를 타고 섬진강변을 따라가며 자연을 만끽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나 홀로 여행이 되고 말았다.
새벽 여섯 시쯤 되었나, 민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왜 벌써 전화했어. 일곱 시에 만나기로 했잖아.”
“우리 쁘띠가, 우리 쁘띠가! 흐윽윽윽!”
쁘띠는 민정이 키우는 개다. 나이가 열 살이 넘었으니 사람으로 치면 노인에 가깝다. 외동인 민정과는 형제처럼 지낸지라 쁘띠에 대한 민정의 사랑이 상당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쁘띠가 호흡곤란이 왔단다. 그래서 민정은 지금 24시간 동물병원에서 대기 중이다. 결국 민정은 여행 출발 한 시간 전, 펑크를 냈다.
그렇다고 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열차도 끊고, 숙소도 예매하고, 고대하던 레일바이크도 나를 기다린다. 혼자라고 못 탈쏘냐! 난 결국 혼자만의 여행을 감행했다.
그러나 애초에 시작이 꼬여서 그런 걸까? 벌써 레일바이크에서 발이 묶였다. 이인용이라도 혼자 페달을 밟아 갈 생각이었는데, 혼자서는 탈 수 없단다. 그리고 이건 몰랐던 사실인데, 증기기관차가 레일바이크와 같은 레일을 사용한단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운행하긴 하지만, 그래도 자칫 잘못하면 열차랑 같이 갈 수 있다고…….
직원들이 혼자 태울 수 없다고 말리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혼자 침곡역에 멀뚱히 앉아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나는 눈에 불을 켜고 나처럼 혼자온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어쨌든 둘이 타기만하면 되는 거 아닌가! 모르는 사람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레일바이크를 타고 싶었다. 그때, 침곡역 구석에 앉아있는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저기, 혼자 오셨어요?”
“아, 네.”
“괜찮으시면 저랑 레일바이크 타실래요? 저도 혼자 왔거든요.”
“아, 그런데 어쩌죠. 저도 레일바이크 탈 생각으로 왔는데, 아까 곡성역에서 그만 다리를 삐끗했어요. 오기로 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페달밟는건 무리 같네요. 죄송해요.”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일단 타세요! 페달을 저 혼자 밟을게요. 보시다시피 저 허벅지 끝내줘요.”
나는 막무가내로 남자의 승낙을 받아냈다. 그리고 절룩이는 그를 부축하여 레일바이크에 태웠다.
“여기 직원들 앞에서는 다리 안 아픈척 하세요. 잘못하면 또 저지당하니까.”
신호와 함께 꿈에 그리던 레일바이크 체험이 시작됐다.
“여러분! 앞사람과 간격 맞추시고, 뒤처지지 않게 페달 열심히 밟으세요!”
그러나 우리 앞에는 운 없게도 건장한 남자 둘이 타고 있었다. 그들을 태운 레일 바이크는 이미 저 멀리 사라진 후였다.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죄송해요! 한쪽다리로라도 페달 좀 밟아볼게요.”
남자는 미안해했다. 침곡역에서 가정역까지 레일바이크로 사십분 정도 걸린다는데, 십오 분 정도 왔을까? 벌써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분명 섬진강은 아름다웠고. 레일 위를 지나는 기분도 좋았다. 그렇지만 너무 힘들었고, 증기기관차가 언제 돌진할지 모른다는 이상한 공포가 밀려왔다. 아직 레일바이크 타다 증기기관차에 치여 죽었다는 얘기는 못들은 것 같긴 한데……. 도저히 기운이 나질 않았다. 젖 먹던 힘까지도 쥐어짤 수 있는 동기부여가 절실했다.
나는 페달을 밟으며 소리쳤다.
“저기요!”
“네?”
“제가 너무 기운이 없어서 그러는데요! 페달 빨리 밟게 힘 좀 북돋아주실래요?”
“어, 어떻게요? 음악 틀어드릴까요?”
“아뇨!”
남자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 졌다.
“그럼, 제가 불러야 돼요?”
“아뇨! 노래 말고 다른 거요.”
이 말을 할까 말까 할까 말까 하다가 그냥 뱉었다. 아, 내가 죽겠다는데! 우리 두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잖아!
“가정역 도착하면 저랑 맥주한잔 하실래요?”
내 말을 들은 남자의 얼굴에서 약간의 긴장이 사라졌다. 오호, 싫지는 않은가본데?
“하하. 네, 그래요. 신세도 졌으니 제가 살게요.”
하지만 나의 패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전화번호도 알려주세요.”
“네? 아, 알겠습니다. 밟으세요.”
아싸! 나는 신이 나서 전력을 다해 페달을 밟았다. 더욱 힘차게 밟았다.
12월 31일. 오늘은 날씨가 제법 쌀쌀한걸 보니 비가 내린다면 눈으로 바뀔 것 같았다.
날씨가 흐리면 안 될 텐데 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차에 남자친구가 오후에 날 갠다는 희소식을 전했다.
사람들 마음속에도 연말이라는 뜬 구름이 가득 차있는 듯했다, 거리마다 사람들은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있었고 오늘이 세상 끝 마지막 날이라도 된 것처럼 무엇인가를 하려고 노력했다. 특별히 어디를 가지 않는다고 해도 제야의 종소리는 들어야 한다며 종로 2가로 모여들 것이다. 사실 특별할 것 없이 지나가는 하루일뿐임에도 사람들은 굳이 무엇인가를 하며 추억의 액자를 못박으려했다. 언젠가는 잊힐 무심한 다짐들과 함께.
여자도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이번 남자친구와 처음 맞는 새해였기 때문에 여자는 더욱 들떠있었다. 여자는 아침부터 12월 31일의 코스를 짜기 시작했다. 오전에 만나서 간단히 브런치를 즐긴 뒤 점심은 좀 더 특별하게 도시락이 어떨까? 저녁은 정말 근사한 곳에서 칼질을 한 뒤 12시에 맞추어 종로로 가는 일정이었다. 친구들과의 여행에서도 이렇게 짜임새 있는 일정을 짜본적이 없던 그녀였다. 남자친구도 그녀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노력했다. 카페에 앉아 점점 맑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던 남자는 여자에게 선뜻 제안을 하나 했다.
“오늘 우리 해돋이 보러갈까? 너랑 해 뜨는 거 보고 싶은데.”
“해? 음, 나 외박 안 되잖아. 너도 알면서. 우리 엄마 아빠 난리 나실걸.”
“그럼 새벽에라도 출발하면 되잖아. 응? 해돋이 보러가자.”
남자는 좀처럼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여자도 해돋이를 보러 가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새해라고 해서 구름떼처럼 몰려오는 사람들과 술 냄새인지 땀 냄새인지 뒤섞여 콧물은 주르륵 흐르고 몸을 오들오들 떨며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소리소리 지르는 아저씨들 틈 사이에서 새해를 보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여자는 코를 한번 훌쩍이며 ‘이따 상황 봐서’라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남긴 뒤 화제를 돌렸다.
여자의 짜임새 있던 일정대로 둘은 간단히 브런치를 즐긴 뒤 여자가 정성스럽게 싼 도시락까지 먹었다. 이제 남은 건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종소리를 들으러 갈 것인지 해돋이를 보러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여자는 남자가 시간이 지나면 귀찮아 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애국가를 통해서 나오는 일출도 볼만하다고 여길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쉽게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남자는 평소에 고집을 부리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여자는 오늘 특별히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했다. 무슨 다짐을 얼마나 거창하게 하려고 해돋이까지 보러갈까 싶었다.
“좋아, 가자. 해보러. 말갛게 떠오르는 해, 보자구.”
“가기로 한 거야? 고마워. 담요랑 손난로도 준비했지.”
남자는 활짝 웃었다. 가지말자고 떼를 썼다면 남자가 많이 실망했겠다 생각했다. 담요랑 손난로까지 준비한 것을 보니 더욱 그러했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연신 하품을 하는 여자를 향해 남자는 눈 좀 붙이라고 했지만 여자는 무거운 눈꺼풀을 끔벅이며 시계를 들여다봤다.
오전 4시 43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남자는 곧 도착이라고 말했고 여자는 으응 이라고 대답했다.
예상대로 사람들은 많았다. 가족, 연인들로 저마다 들뜬 표정을 지었다. 해가 떠오를 때 무슨 다짐을 할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넌 해 뜰 때 무슨 다짐할거야? 담배는 안 피우니 금연은 아닐 테고, 다이어트? 아님 승진?”
“그런 거 말고 있어. 비밀이야. 안 알려준다고.”
“치, 우리사이에 비밀이 어디 있어. 빨리 이야기 해줘 응?”
여자가 남자에게 딱 붙어서 이야기를 할 때 저 너머에서 붉은 해가 비쳤다. 사람들은 웅성웅성하며 한 곳을 응시했다.
검고도 붉은 해를 보니 괜스레 경건한 마음까지 들었다.
“멋지다.”
쉿.
여자가 말을 하려는데 남자는 여자의 말을 막았다. 해는 이미 떠오르고 어스름히 새벽이 밝아왔다. 여자는 참았던 졸음이 몰려왔고 남자는 끝내 어떤 다짐 그리고 소원을 빌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여자의 손을 잡아줄 뿐이었다.
그거 아니? 거제도 해금강에는 많은 생명들이 잠들어 있다는 걸 말이야. 이건 너에게만 해주는 이야기니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돼. 쉿! 너와 나만의 비밀이야.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믿고 믿지 않고는 너의 결정이야. 하지만 듣고 나면 믿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이야기일거야!
해금강에는 여러 바위들이 있어. 부처바위, 신랑신부바위, 조도령바위, 토끼바위, 늙은 사자바위, 미륵바위 등등……. 얼마나 많은지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도 없을 지경이라니까. 그런데 말이지. 정말 신기한 게 뭔지 아니? 사실 이 바위들은 다 살아있다는 거지. 그런데 왜 잠들어 있는 걸까? 그건 바로 십자동굴 밑에 사는 바다괴물 때문이야. 얼굴이 네 개나 달려 있는 아주 못생긴 괴물이지. 십자동굴 위에 절벽들이 커다란 덩어리처럼 보이지? 하지만 바다 속에서 바라보면 네 개로 나눠져 있어. 바다괴물이 네 개나 되는 자기 몸을 억지로 가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처럼 보이는 것뿐이지.
처음에 바다괴물도 얼굴이 하나인 아주 아름다운 바다선녀였대. 그런데 왜 그렇게 끔찍하게 바뀌었냐고? 자신이 아름답다는 걸 알고 바다를 우습게 보았기 때문이지. 결국 바다는 크게 화가 났고 거센 파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깎아내려 끔찍한 모습으로 뒤바꾸어 버렸대. 그때부터 그 선녀는 바다괴물로 불리게 됐지.
바다괴물은 끔찍한 얼굴이 되어버린 뒤로 항상 혼자였대.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어도 그 모습이 너무나 무서워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돌이 되고 말았어. 하지만 바다괴물은 외로움을 너무 많이 타서 도저히 혼자일 수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모두 돌이 되어 버려도 자기 옆에 누군가를 두고 싶었대. 혼례를 올리는 신랑과 신부도, 크게 하품을 하던 늙은 사자도, 담뱃대를 물고 연기를 내뿜던 조도령도, 절벽 위 숲에 사는 토끼도 전부 다 말이지.
이를 두고 보지 못한 근처 절의 부처가 바다괴물을 찾아갔대. 못됐다고 소문난 무서운 괴물을 무찌르려고 말이지. 그런데도 바다괴물은 정말 기뻐했어. 자기의 끔찍한 얼굴 때문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손님이 찾아온 거였거든. 열심히 단장을 한 거야. 하지만 못생기고 끔찍한 얼굴을 바뀌지 않았지. 바다괴물은 너무나 슬펐어.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지. 부처는 돌이 되지 않기 위해 밤에 괴물을 찾아갔어. 계속해서 울어대던 바다괴물은 부처를 보자 기뻤대. 자신의 얼굴을 보고도 변하지 않는 건 부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부처는 그런줄도 모르고 바다괴물을 힘껏 내려쳤어. 그러자 바다괴물의 몸이 네 개로 나누어져 버리고 말았지. 그리고 그 순간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어. 그때 부처는 바다괴물의 얼굴을 보고 만거지. 결국 부처조차 바위가 되고 말았대.
괴물은 돌이 되어버린 부처를 보고 슬퍼서 계속해서 울었어. 자기 몸이 네 개로 나누어진 줄도 모르고 말이야.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대. 괴물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된 거야.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려고 죄 없는 생명들을 돌로 만들어버린 일에 대해서 뉘우쳤지. 그리고 그때 해가 떠올랐어. 바다괴물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얼굴이 정말 궁금했어. 끔찍한 모습으로 변한 이후에는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거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못생긴 얼굴을 봤대. 너무나 놀라 자기도 모르게 네 개로 변한 얼굴을 하나로 감싸 가려버렸대.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는 이유로 돌로 굳어버리고 말았지.
정말 신기하고도 슬픈 이야기지? 괴물이 돌이 되고 난 이후에 흙 한줌 없는 기암괴석 절벽위에는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대. 천년의 세파에도 청청히 계속해서 살아 남았대. 이 천년송은 지금 해금강의 수호송이 되었어.
하지만 정말 안 된 일이지? 바다괴물과 바위가 되어버린 생명들이 말이야. 지금부터 내가 말하려는 비밀은 바로 이거야. 그때 해와 달이 떴던 일월봉 기억나니? 일 년에 한번씩 일월봉 위로 해와 달이 뜨고 진대. 그러면 바다괴물은 아름다운 바다선녀로 잠에서 깨어난대. 그리고는 자신 때문에 돌이 된 신랑신부와 부처, 토끼, 늙은 사자, 조도령을 깨워 함께 하루종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하더라. 무엇을 하고 놀길래 그렇게 즐거운지 누구나 궁금해할 정도로 말이지. 너도 궁금해지지? 이 비밀을 알게 됐으니 너도 일 년에 한번, 해와 달이 뜨고 질 때 그 십자동굴로 찾아가보렴. 혹시 모르니? 잠에서 깬 그들이 너를 맞이할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