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나가지 않는 날임에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이 떠졌다. 평소였으면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소리에도 밍기적거리며 이불속으로 몸을 숨겼을 그녀다.
그녀는 사뿐히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질끈 묶으며 커튼을 걷었다. 아침햇살이 눈부셔 살짝 미간을 찌푸렸으나 금세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상쾌한 아침이다.
아침을 먹기 위해 찬장에서 우연히 인스턴트 미역국을 집어 들었다. 그때 울리는 문자소리. 휴대전화를 열어본 그녀는 오늘이 자신의 생일임을 알았다. 모 카드사에서 온 고객축하 문자다.
수지님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참 친절하게도 모르는 이의 생일을 축하해준다. 그녀는 생각했다. 때로는 가족이 카드사보다 못하다는 걸.
우연히 집어든 인스턴트 미역국을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윙하며 돌아가는 늠름한 전자레인지를 뒤로하고 그녀는 잠시 골똘히 생각을 했다. 생일엔 왜 미역국을 먹을까. 우리 엄마도 나를 낳고 미역국을 먹었을까. 그녀는 웬일인지 엄마 생각을 했다.
그녀는 엄마와 마지막으로 연락한 적이 언제인지 떠올린다.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마 떠오른다고 해도 악을 쓰며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소리 소리를 질렀을 때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가 미웠고 이후 가족과 등을 지며 살았지만 그녀라고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적이 없었을까.
온몸이 부서지게 아플 때 엄마가 끓여준 따뜻한 미역국에 밥 한 그릇 말아 후루룩 말아 먹으면 금세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아쉬운 대로 끓여먹은 것이 이 인스턴트 미역국이었다.
전자레인지가 임무를 마쳤다는 소리를 낸지도 모른 채 그녀는 식탁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애꿎은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렸고 혹시나 연락이 온 곳이 없나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지만 없다. 그녀는 다시금 창밖을 내다보았다. 얇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연락해볼까 생각했다.
멋쩍은 듯 연락을 하면 뭐라고 할까. 엄마도 나를 보고 싶었다고 할까.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어쩌나.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먼저 손 내미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하긴 그게 쉬웠다면 우리나라도 진즉에 통일을 하더라도 열두 번은 더 했겠지.
잊고 있던 미역국이 생각나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전자레인지를 열어 미역국을 꺼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시나 엄마일까?
아니어도 상관없다며 마음을 다독이고 문자를 확인했다.
엄마다.
생일축하한다우리딸
미역국은먹었니 인스턴트미역국먹지말고 집으로와
미역국끓여놨어
이게 뭐야. 띄어쓰기도 하나도 안 하고. 무심하게.
하지만 그녀도 안다. 엄마가 문자를 보내기 전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을 것을.
그동안의 앙금과 미안함과 서운함이 섞인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말 한마디면 될 것을. 서로 그리워했다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표현만 해도 이렇게 쉽게 풀어질 것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것을,
그녀는 황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벌써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조개를 넣고 끓여 비릿한 미역국.
그러면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이렇게 말할 것이다.
조개 말고 쇠고기 넣은 미역국이 더 좋댔잖아!
그리고는 말없이 서로의 손을 꼭 잡을 것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나는 오랫동안 시를 써 왔다. 그러니 내 이 마지막 수필은 어쩌면 다분히 시적이고 또 어쩌면 아주 알아듣지 못할 말로만 채워져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내가 시를 쓰는 이유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절망 때문이었다. 다른 모든 시인들도 그렇게 말했다. 세상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니 내가 펜을 드노라고. 정말로 그랬다. 내가 겪은 상실이나 슬픔의 깊이를 말로 표현해 내는 것은 정말로 견딜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혀끝에서 나의 감정은 녹슬고, 때 묻고, 가벼워져 버렸다. 그러므로 나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에서 절필을 결심했다.
내게는 삶의 터전이라는 것이 없었다. 기쁨이라는 것도 없었다. 내 명의로 된 집이나 차를 가져 본 적이 없었고, 내가 가진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나누고 싶은 배우자를 만난 적이 없었으며, 흔히들 말하는 토끼 같은 자식들이란 꿈에나 나오는 말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고아원에서 자랐고, 검정고시에 합격하지 못했으며, 이력서에는 쓸 말이 하나도 없었다. 지하철 역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잠을 청해 본 적이 있으며, 백 원이 모자라 컵라면을 사 먹지 못했던 적도 있다.
물론 항상 가난했던 것은 아니다. 먹고 살 만큼의 돈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일거리가 있을 때에는 일을 했고, 없으면 없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세상 모든 불행이 내 인생만을 방문하는 것 같은 이 기분을 누구에게 설명해야 위로받을 수 있을까. 진정한 위로는 공감 위에서만 탄생한다. 그러므로 나는, 위로 받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 모든 불행 가운데서 놓지 않았던 단 한 가지가 바로 시를 쓰는 일이었다. 종이와 연필 하나만 있어도 충분한 취미라는 것이 어려서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니까, 시와 나의 만남은 지독한 가난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시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내가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카메라를 갖지 못했다는 뜻이며, 아직 골프장의 잔디를 밟아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나마 좋은 점이 있다면 언제나 어느 때나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 수목원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내가 언제나처럼 딱히 갈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고, 운 좋게 내 바지의 왼쪽 주머니에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한 장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 뿐이었다.
물향기 수목원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물향기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오는 날에도 미소 지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수십 년 간의 비관은 사람의 눈을 가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내가 종이와 연필을 꺼내 든 이유는, 수목원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왕에 시를 쓸 것이면 인공적인 나무와 인위적인 호수, 이기적인 인간들의 군상을 담아야만 했다. 나는 그것이 내가 시를 쓰는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절필을 결심한 것이 어느 지점에서였더라. 토피어리 정원을 지나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졌을 때였을까, 미로원을 지날 때였을까, 아니면 저 멀리서 아이들이 징검다리를 건너는 모습이 보였을 때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고목 아래의 벤치에 앉아 혼자 책을 읽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을 때였을까. 이것마저 아니면 늪지에 핀 꽃들을 보았을 때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오래 멈춰 서 있었던 곳은 수생식물원이었다. 개구리밥과 수련, 갈대 등이 수면을 가득 덮고 있어서 처음에는 초원인 줄 알고 다가선 것이었다. 가까이 가 본 나는 이곳이 늪지였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이루지 못한 모든 것들이 늪지 아래로 가라앉아 버리는 느낌이었다.
그 때, 실잠자리 한 마리가 눈앞을 스쳤다. 실잠자리가 가는 방향을 보니 쇠오리 새끼 한 마리가 겁도 없이 물가로 올라오고 있다. 그 옆에는 수련 한 송이가 피었는데, 그 뿌리가 검은 물 밑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수련을 노려보며 종이에 시상을 적어나가려던 찰나, 잉어 한 마리가 수련 줄기를 툭 건드리고 지나갔다. 물 밑의 잉어에서 그 위의 수련으로 자연스레 시선이 옮겨갔다. 검은 물 아래서 올라온 연녹색의 줄기가 하얀 수련을 피워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연필을 놓치고 말았다. 연필은 데구르르 굴러 물 밑으로 사라져버렸다. 문득, 연필이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수련 한 송이를 피워내는 상상을 했다. 수련에서 물향기가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뿐이었다.
빙글빙글, 내 꿈속에서 물레와 베틀이 나란히 돈다. 온 세상이 고요하고 새카만 가운데서 달칵달칵, 드르르 하는 소리를 내며 돈다. 나는 홀린 듯 그 앞에 가만히 앉아 물레와 베틀을 보고 듣는다. 물레가 오색실을 뽑아내면, 베틀은 구름을 잣기도 하고 꽃밭을 잣기도 한다. 그 빛깔이 너무도 고와 물레와 베틀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한참 물레와 베틀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문득 물레 건너편에 누가 앉아있는지가 궁금해진다. 아니, 누가 앉아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얼굴이 보고 싶어 슬그머니 일어서면, 항상 꿈에서 깨어버린다.
일어나 보면 눈시울이 축축하게 젖어있기는 했지만 악몽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물레 소리를 듣고 큰 나는 옷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드르륵 드르륵 달칵달칵,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청년 노동자가 되었을 때까지 한결같이 들리는 이 소리들을 몹시 싫어했다.
몇 달만의 휴가를 받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집에는 여전히 물레와 베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물레를 돌리고 계셨다.
“어머니, 요즘 미싱처럼 좋은 것들도 많이 나오는데 왜 여직 물레를 돌리세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퉁명스레 물어보면 어머니는 항상 잔잔하게 웃으셨다.
“너 어릴 적부터 내가 이걸로 네 옷도 다아 만들었는데, 기억나지 않니? 나는 물레만 돌리고 있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물레를 돌리셨고, 나는 그 날 귀를 막은 채 잠을 청했다. 그리고 내가 다시 공장으로 떠날 무렵, 어머니가 건네신 옷 한 벌을 내가 어떻게 했더라.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다시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곱게 천수를 다하여 돌아가신 것이니, 다들 호상이라 말하였다. 나 또한 어머니가 별다른 고통 없이 조용히 눈을 감으신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그 후로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어김없이 드르륵 드르륵 달칵달칵 하는 소리가 함께 들린다.
하지만 물레와 베틀이 나오는 꿈까지 꾸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슬픔은 자연스레 잊혀 졌기 때문일까. 딸아이가 성장하고 결혼함에 따라 내게는 인생의 값진 순간들이 연이어 찾아왔다.
물레가 나오는 꿈의 시작은 섬유박람회에서였다. 대구로 이사 온 지 이제 겨우 한 달. 딸이 중학생 손녀를 데리고 집들이를 왔었다. 아내와 딸이 오랜만에 함께 목욕을 가겠다는데, 손녀는 목욕탕이란 말에 질색을 했다. 대구하면 섬유 아니겠냐며 딸이 내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손녀와 둘이서 가게 된 곳이 섬유 박람회였다.
오랜만에 색색의 옷감들을 보니 생각나는 게 많았지만, 할아버지가 공장 다닌 이야기를 사춘기 소녀에게 해서 무엇 하겠는가. 손녀는 좋아하는 브랜드의 코너가 많아 신이 난 모양이었다. 나는 연신 감탄사를 내지르는 손녀의 발뒤꿈치를 보며 걸었다. 그 때, 손녀가 어디론가 쪼르르 달려가 나를 불렀다.
“할아버지, 저것 좀 보세요! 옷감은 이렇게 만드는 건가 봐요!”
손녀가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방직기였다. 방직기 회사의 코너인 듯, 하얗고 깔끔한 몸체를 지닌 방직기 몇 대가 돌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스르륵 스르륵 위잉위잉 하는 소리가 난다. 어머니의 물레 소리와 닮은 듯도 하고, 닮지 않은 듯도 하다.
어머니는 떠나는 내게 옷 한 벌을 건네셨다. 할머니가 물려주셨다는 물레와 베틀로 짜내고, 손수 가위질과 재봉질을 한 옷이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보아 온 나는 그 옷 한 벌을 짓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결국 손녀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옷장을 뒤져도, 침대 밑을 뒤져도 그 옷은 끝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물들다.
나는 너에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언제나 너는 붉은색 입술을 오물거렸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듯이. 하지만 너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하얀 얼굴이 금세 붉게 물들곤 했다. 내가 기억하는 너는 그렇다. 너는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미일까.
나는 너에게 고백을 했지만 너는 말없이 싱긋 웃기만 했다. 좋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시 묻지는 않았다. 네가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3년 전일 것이다.
“매화가 아직 피어있을까? 피어 있어야 할 텐데.”
“글쎄. 피어있겠지. 설마 지금 매화 보러 가자고 하는 건 아니지?”
“왜? 지금은 안 돼?”
“피곤해. 내일 프레젠테이션 준비도 해야 하고.”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오랜 침묵은 그동안의 관계에도 곰팡이처럼 번져나가 관계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나는 그깟 매화는 내년에도 후년에도 언제든지 보러 가면 그만인데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너는 그런 나를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늘 피는 꽃과 내일 피는 꽃이 같아?”
“피곤해. 하루 종일 회사에서 그놈의 말장난 받아주느라 힘들었단 말이야. 꽃 타령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응?”
“꽃이 다 같은 꽃이라고? 그게 어떻게 같아? 그게 어떻게 같냐구. 아침과 저녁이 다르듯 어제와 오늘이 다른데 어떻게 꽃이 다 같아.”
우리의 관계가 위태롭다고 느껴지긴 했지만 매화 하나로 너와 나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버릴 줄은 몰랐다. 붉은 매화가 질 무렵 너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떠난다고 했다.
그동안의 침묵 그리고 공백이 익숙해져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무심하게 알겠다고 했다. 어디로 언제 떠나냐는 질문조차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그녀가 떠난 뒤 처음 맞는 주말이었다. 그녀와 함께 살던 집도 아닌데 유난히 텅 비어보였다. 너와 마지막으로 다투던 날 너는 흰색 소파와 어울리는 연분홍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 너는 우리 집에 올 때면 항상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았어. 그리고는 흰색 꽃을 식탁에 정성스레 꽂아 두었지.
나는 네가 떠나고 나서 유난히 너의 빈자리를 느꼈다. 마치 함께 하던 공간에 반이 딱 잘려 나간 것 같은. 늘 혼자 있던 공간에서 너를 찾고 너에 대한 연결고리를 찾았다. 네가 자주 듣던 노래를 틀어놓고 네가 좋아하던 꽃을 식탁에 꽂아 놓은 적도 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매화가 아직 피어있을까? 피어 있어야 할 텐데.”
추운 겨울이 봄으로 물드는 시간. 네가 떠난 후 삼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너에게선 아직도 연락이 없다. 그때 언제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면 이렇게 마냥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을까? 아니면 네가 매화를 보러 가자고 할 때 피곤하다는 말 말고 차키를 집어 들었다면 되었을까?
문득 네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아침과 저녁이 다르듯 어제와 오늘이 다른데 어떻게 꽃이 다 같냐고. 네가 뭘 아냐고 소리를 질렀지.
물들다.
지나고 보니 너는 나에게 물들어 있었다. 아무리 지워보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연하지만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너의 기억만으로도 봄을 되찾을 수 있을까?
“아빠, 이번 연말에는 어디 갈 거예요?”
딸의 머릿속에는 이미 가보고 싶은 곳이 가득한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산통을 좀 깨야겠다. 나도 내년에는 꼭 내 시집을 내리라 결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번에는 멀리 가지 말자. 연말 되면 카운트다운 하는 곳 있잖아. 거기 가서 타종식 한 번 보고 오는 건 어때? 아빠가 옛날에 가 봤는데, 가수들도 많이 오고 불꽃놀이도 해.”
싫다고 떼를 쓰면 어떡하나 하고 있었는데, 자기도 그런 의미 있는 곳에 가는 게 좋다고 하는 것을 보니, 딸도 이제 어린애는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내도 꼭 한 번 직접 타종식을 보고 싶었다며 한 수 거들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가족의 연말 맞이 여행, 아니 연말 맞이 나들이 장소가 결정되었다.
서울 시내 어디가 북적거리지 않겠냐마는, 내가 젊은 시절부터 가장 좋아하는 북적임이 있다. 바로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일대. 시간이 비는 오후면 교보문고에 들러 소설책을 한 권 읽고 가기도 하고, 아직 초등학생인 조카들을 데리고 세종대왕 동상과 그 아래 숨겨진 박물관을 견학하기도 했다.
몇 년 전, 수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모였던 촛불집회가 열렸던 곳도 바로 이 세종대왕 동상 앞이다. 그리고 대학생 시절 사회 운동을 하러 나왔을 때, 회사원들이 건물 창밖으로 두루마리 휴지를 던지며 무언의 응원을 보내던 장관도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었다. 젊은 시절 아내와 함께 거닐었던 경복궁이 동상 너머에 있었었으며, 청계천이 처음 조성되었을 때에도 이곳에서 시작되는 물길을 보러 왔었다.
그렇다. 내게 있어 광화문은, 내가 아는 수십 년의 서울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세 시간 쯤 여유를 두고 광화문에 도착했다. 몰려드는 인파를 한 번에 감당할 수 없어 타종식이 있기 얼마 전에는 교통을 통제하기 때문에 종각에 미리 가 봐야 소용이 없으니, 그 전에 가족들과 함께 이 광화문 일대의 문화를 느껴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은 또 크리스마스였기에, 거리는 아직 오색 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상가들이 크리스마스와 연말 행사를 한 번에 챙길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야말로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 이어’였다.
나는 아내에게 근래에 크게 유행했던 로맨스 영화의 원작 소설 한 권을, 아내는 딸이 요새 푹 빠져 있는 외국 밴드의 앨범 한 장을, 딸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의 새로 나온 시집 한 권을 선물했다.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건실한 문화 향유층이야. 문화 시민이 달리 뭐 있겠어?”
딸이 건넨 말에 한바탕 웃으며 교보문고를 빠져나왔다. 청계 광장을 한 바퀴 둘러보러 왔는데, 청계천에도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조명들이 밝혀져 있었다.
“여기서 예전에 등 축제 정말 예뻤는데. 아빠가 매일 그렇게 광화문 노래를 불러도 안 와 닿더니, 그 때는 정말 세상에서 여기가 제일 아름다운 것 같았다니까요.”
그래, 문화라는 것이 말로 백 번 들어 무엇 하겠는가. 한 번 눈으로 보면 단숨에 반해버릴 것을. 내 철학을 늘어놓았다가는 면박을 면치 못할 것이기에, 마음속으로 할 말을 삼키며 웃었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제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여기저기서 전화를 걸어 ‘새해 복 많이 받아!’하는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무척이나 정겨워 보였다. 오죽하면 이 일대에서만 휴대전화가 반쯤 불통이 되었겠는가. 사람들의 입가에는 하나같이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신나게 소리를 지르다 보니 행사는 모두 끝났지만, 하늘에는 여전히 삼천 원짜리 싸구려 불꽃이 팡팡 터진다. 화약재가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데, 아무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옷을 털어내지 않았다. 우리 가족도 노점상에서 파는 핫도그 하나씩을 들고, 축제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광화문을 걸었다. 평소에는 길거리 음식이라면 학을 떼는 아내도 오늘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지금 이곳이 바로 살아 숨 쉬는 서울 문화의 거리였다.
“임신하면 태교가 가장 중요한 거 몰라? 그리고 그렇게 사람 많은 곳 갔다가 뭔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원래 임신하면 좀 예민해진다고는 들었지만 아내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머리에서 뿔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들꽃 같던 아내는 여전히 예뻤지만 입덧을 꽤나 심하게 하더니 좀 더 예민해진 것 같았다.
“그래, 알겠어. 그런데 여름휴가로 그냥 집에만 있겠다고? 그냥 주말이랑 별다를 게 없잖아. 그리고 자기도 바깥바람 쐬고 그러면 입덧도 좀 나아지고 기분전환도 될 거야. 그러니까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고 잘 생각해봐.”
“내가 지금 예민하게 군다고 생각하는 거구나. 내가 나 좋자고 그래? 이게 다 우리 아가 생각해서 이러는 거잖아.”
네버엔딩이다. 내가 수그리고 들어가지 않으면 좀처럼 싸움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조건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해야 했고 그러는 것이 나도 편했다. 그래도 일 년에 한 번뿐인 여름휴가를 이렇게 집에서 아내와 투덕거리며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내는 플로리스트다. 그런데 혹여나 아이에게 좋지 않을까 하여 임신을 한 뒤로는 꽃꽂이를 하지 않았다. 집에 있던 꽃들도 시들어 버리자 그냥 내다버렸고 오로지 아이를 위한 태교음악과 미술전시만 간간히 보러다닐뿐이었다. 속으로 그렇게 유난 안 떨어도 된다고 하려다가 더 큰 불씨로 돌아올까 봐 말을 삼켰다.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 하나 빵빵하게 틀지 못하게 하여 연신 손부채질을 해가며 선풍기 앞에서 SNS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회사 동료 중 한명이 폭포사진을 하나 올렸다. 의례적으로 좋아요를 눌러주려다 궁금한 마음에 사진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그곳의 폭포는 사진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더위가 싹 가시는 것처럼 시원해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폭포의 이름이었다. ‘피아노 폭포’. 폭포가 떨어지면서 피아노 소리를 내나? 궁금한 마음에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여름휴가로 가까운 곳을 다녀왔다고 했다. 특히나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다면서 집도 가까우니 한번 다녀오라는 조언과 함께. 머리에 반짝하는 불빛이 들면서 나는 곧장 아내에게로 달려갔다.
“자기야, 내가 인터넷에서 본 곳인데 시원한 여름휴가도 즐기면서 태교도 할 수 있는 그런 곳 이 있는 거야. 어때? 끌리지? 내일 당장 가보자. 절대 휴가를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말 재미있는 곳 같아서 그래, 이름도 피아노 폭포랑 피아노 화장실이라니까?”
아내는 내 여름휴가 집착증에 두 손을 든 것인지 아니면 나처럼 피아노 폭포라는 말에 호기심을 가진 것인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아, 이게 얼마 만에 나들이야? 그치? 자기도 막상 나와 보니 기분 좋지? 집에만 있으면 아기도 심심하고 답답할 거야.”
“응, 좋네. 바깥바람도 쐬고. 근데 에어컨 좀 줄일 수 없어? 창문을 열자 차라리.”
아내는 쉬이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모처럼 밝은 모습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피아노 폭포는 교외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 사진을 찍는 곳이 피아노폭포 인듯했다. 그런데 피아노 폭포보다 더 먼저 우리 둘의 시선을 끈 곳은 다름 아닌 그랜드 피아노 모양을 한 건물이었다. 백색의 그랜드 피아노 형식을 한 건물은 화장실이라고 했다. 경기도 수원에 반딧불이 화장실은 들어보았어도 피아노 화장실은 또 처음이다. 신기한 듯 구경을 하는데 계단을 오를 때마다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랜드 피아노 선율에 절로 눈이 감겼다. 아내는 화장실은 찝찝하다며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더니 은근히 노래를 감상하고 있는 눈치였다. 밖으로 나가보니 네다섯 살 난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었고 어른들은 92m 높이의 피아노 폭포에 감탄을 쏟아 붓고 있었다. 하수처리 방류수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인공폭포라는 데 꽤 웅장한 소리와 함께 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공간에 시원하게 솨아아 하고 쏟아지는 폭포를 보니 멀리 계곡에 와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때? 나오길 잘했지?”
“응, 그러네. 여기 우리 아가 태어나면 또 와도 좋겠다. 아기들 노는 거 보니까 보기도 좋고. 우리아가 빨리 만나고 싶어.”
아내의 입에서 또 오고 싶다는 말이 나오니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마치 큰 성과를 내 회사에서 인정받은 사람처럼 기분이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도 콧노래가 흘러나왔고 언젠가 아이와 함께 오는 그 날에도 피아노 폭포에서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흐를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국어 시간, 같은 반 아이들은 우리가 사는 동네가 교과서에 나온다며 즐거워했지만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내가 원미동에 살게 된 것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마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한 사람처럼 나는 눈앞에 닥쳐온 걱정들을 빠르고 무딘 방법으로 해결하길 원했으며 별다른 불만사항은 물론이고 별다른 꿈도 없었다.
넉넉지 못한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난 탓일까,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 본 곳이라고는 국립공원이나 친척 집뿐이었다. 또래들과 같은 시기에 컴퓨터를 사지도 못했고, 유원지나 해외여행 같은 곳에 가자고 졸라본 적도 없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디지털 시대를 달릴 때 나는 홀로 아날로그 시대를 걸었다.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틀 만에 집에 들어오신 아버지에게 방학숙제를 위해 박물관에 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웃으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주셨고, 나는 묵묵히 오천 원짜리를 받아들고 집을 나섰다. 내가 원미동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부천 만화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하신 아버지 때문이었다. 좀처럼 돈을 벌기 힘들다는 직업을 택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자간의 대화가 갈수록 줄고 있는 것 또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원미 1동의 연립주택 203호에서 가장 가까운 박물관은 지하철로 네 정거장 거리에 있는 부천 만화박물관.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현실적인 범주 안에서의 판단이었다. 대강 훑어보고 견학문을 쓸 요량으로 빠르게 걸었다. 영화관에 가기보다는 만화방에 틀어박혀 있는 경우가 훨씬 많은 나였지만, 아이들처럼 뽀로로를 외치며 뛰어다닐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멈추어 선 곳은 볼록거울 앞이었다. 돌연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내 모습이 사방에 펼쳐진 것에 놀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기저기 뒤틀리고 구부러진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보며 온갖 생각을 다 해 보았다.
왜 가난한 집에 태어났을까. 기껏 외출할 기회가 생겼는데, 왜 고작 집 근처에 위치한 박물관에 와야 하는 것일까. 내 어깨는 왜 항상 움츠러들어 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여기에 이상한 거울을 설치해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건지에 대한 의문에 코너의 이름을 보니 ‘만화가의 머릿속’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한 마디가 불쑥 튀어나왔다.
“뭐야.”
웃음이 터진 나는 만화가의 머릿속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찬찬히 살펴보았다. 엉뚱한 상상력과 꿈이 넘치는 일상. 그곳은 아버지의 머릿속이었다. 행복과 불행은 종이 한 장의 차이라 하였듯이, 우스꽝스러움과 독특함 또한 종이 한 장의 차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폐관시간까지 박물관을 떠나지 못했다. 만화가들은 여전히 가난해 보였고,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내 몫의 저녁상을 차려놓은 채로 잠들어계셨다. 분명 어젯밤에도, 어쩌면 그제 밤에도 밤샘을 하셨을 것이다. 나는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어 아버지에게 덮어드리고는 다 식은 국을 맛있게 떠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한국 만화 영상 진흥원 안에 위치한 비즈니스 센터로 일터를 옮기셨다. 입주 경쟁이 꽤 치열한 곳이라고 했는데, 용케 심사를 통과하셨다. 한국 만화 영상 진흥원과 부천 만화박물관이 부천 영상 문화 단지 안에 나란히 입주해 있었다. 사무실 이전을 도우며, 나는 아버지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빠, 나 있잖아. 나도 그림을 그려볼까 해.”
아버지는 대답 대신 웃으셨다.
그날 저녁, 나는 원미동 연립주택의 거실에 누워 <원미동 사람들>을 읽었다. 교과서에 실린 김포 슈퍼와 형제 슈퍼 얘기가 전부인 줄 알았더니 꽤 두꺼운 연작소설이었다. 첫 장을 넘기자 첫 단편의 소제목이 보였다. ‘멀고도 아름다운 동네’. 그곳은 내가 사는 동네였으며, 아버지가 사는 동네였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고 푸른 잎사귀가 넘실거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손에는 낯익은 지도와 어깨에는 큰 배낭을 짊어진 남자가 자동차에서 내렸습니다. 레오라는 이름의 요리사였지요. 레오는 세계를 돌며 수많은 요리를 연구하고 만들어왔지만, 한국요리만큼 레오의 입맛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리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한국요리를 연구하고 만들어왔지만 한국의 전통음식과는 오묘하게 다른 느낌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레오는 얼마 후 미국 열리는 세계적인 요리경연대회에서 당당히 자신이 만들어 낸 한국요리를 선보이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오래전 먹었던 한국 음식의 맛이 나지 않아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지요. 그렇게 고심만 하던 레오는 직접 한국에서 그 맛과 비결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레오는 이곳저곳을 물어물어 다니며 최고의 재료와 맛을 찾아 떠났습니다. 전국 팔도를 다 돌았지만 이렇다 할 만큼의 특별함을 찾지 못한 레오는 상심하여 돌아가려고 하다 우연히 예전 미국에서 만난 친구 태서의 고향인 정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밤이 되어도 화려한 불빛이 꺼지지 않고 자신과 비슷한 외모의 외국인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레오는 이곳이라면 최고의 맛과 비결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되찾았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술과 게임에 정신이 팔려있었고 한국요리보다 외국 요리들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실망한 레오는 터덜터덜 길을 나섰지요.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았지요. 그곳은 온갖 나물들과 생활용품을 파는 작은 시장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노란 머리를 가진 외국인이 신기했는지 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레오를 신기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레오의 눈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물건을 사고팔고 시장 한편에서는 광대 분장을 한 사람이 가위를 두들기며 무엇인가를 팔고 또 다른 옆에는 저마다 한 그릇의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이 신기하게만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시끄러운 소리에 사람들로 복잡한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밥 한 그릇을 쓱 내밀더니 한 아주머니께서 말했습니다.
“노란 머리 총각, 밥은 먹었나? 이거 한 그릇 먹고 가, 배고플 텐데”
아주머니는 레오가 말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연신 웃는 모습으로 그릇을 내밀었지요.
레오도 낯선 사람과 문화가 어색하였지만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아주머니의 성의를 거절하기가 미안해서 많은 사람 틈에 앉아 밥 한 숟가락을 떠먹었습니다. 별 볼 일 없다고 느낀 밥맛이 꿀맛처럼 느껴졌습니다. 밥에 들어간 재료를 살펴보니 흰 쌀밥과 나물 그리고 고추 양념을 한 간장 정도 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좀 더 시장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시장을 찬찬히 둘러보니 아까 그 밥에 들어있던 나물도 보이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전도 보였습니다. 신이 나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각종 산에서 나오는 나물들을 팔았습니다. 나물을 사는 사람들은 큰 봉지를 손에 들고 있었고 나물을 파는 아주머니는 나물을 한 움큼 더 집더니 봉지에 담아주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은 소박하지만 하나같이 행복한 웃음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조심스럽게 아까 먹은 밥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곤드레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봉지 하나 가득 담아주며 말했습니다.
“이렇게 멀리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네. 총각, 밥 맛있게 먹었다니 그것도 고맙고.
집에 가거든 우리나라 그리고 여기 정선 5일장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고 호호호”
레오가 돈을 내밀자 아주머니께서는 사양하시며 빙그레 웃고는 돈은 다음에 올 때 달라고 하였습니다.
레오는 서툴게 감사함을 전한 뒤 마을을 떠났습니다. 얼마 후 레오는 세계요리경연대회에서 한국인의 마음이라는 제목의 음식을 선보였습니다. 소박하지만 정성스럽게 차려낸 밥상에는 곤드레 나물밥과 메밀부꾸미, 그리고 김치가 있었습니다. 다른 요리들에 비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누구의 요리보다 특별했습니다.
지금도 레오의 마음에는 그날의 기억이 선명히 남아있습니다. 웃으며 밥 한 그릇을 건네주던 아주머니의 미소 그리고 정선 5일장의 많은 사람의 행복한 웃음소리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