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경상도 남자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것은 시골아이가 서울깍쟁이 여학생을 동경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멋들어진 사투리를 쓰고 무뚝뚝한 말투와 행동 속에 배어 있는 세심함이랄까? 한껏 부푼 기대를 안고 떠난 첫 경상도 여행길이다. 포항에 있는 친구에게 내가 내려가니 환영의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으라고 큰소리를 쳤다.
버스에 몸을 싣고 유유히 안내팜플랫을 열어보고 있는데 친구한테 문자가 왔다.
‘미안, 나 갑자기 세미나가 잡혀서 나대신 내 친구 보냈어. 남자애야.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소개팅이라고 생각해! 이 언니의 예기치 않은 깜짝 선물이다. 좋은 시간 보내!’
소개팅? 좋은 시간? 이걸 말이라고. 황급히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전화는 무심하게 신호음만 연결할 뿐이었다. 다시금 차를 되돌릴 수도 없고 1박 2일을 혼자 보내기도 겁이 났던 나는 일단 남자가 나와 있을 것이라는 포항터미널에 도착했다.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왔다.
“김수정씨?”
“아, 네.”
이 남자인가보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포항터미널에서 갑작스럽게 만난 남자라니.
“연주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경상도 남자한테 관심이 많으시다고 에스코트 좀 잘하고 오라고 하던데요?”
“아. 연주가 그래요? 아. 뭐..”
연주 이 기집애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나보다. 그리고 이 남자. 낯도 안 가리고 싹싹한 면이 있다.
“배 안고프세요? 포항 오셨으면 과메기 정도는 먹어줘야 되는데, 드셔보셨나 모르겠어요.”
“아. 한번인가? 자주 먹어보지는 못했어요.”
“그래요? 그럼 제가 제대로 먹는 법 알려줄게요. 가요.”
그렇게 처음 본 남자와 처음 와본 곳에서 점심을 먹으러 앉아있다. 죽도시장에서 가장 맛있는 집이라며 남자의 추천으로 들어온 집이다. 주문한 과메기가 나왔고 남자는 김과 과메기, 갖가지 채소들을 얹더니 ‘아’ 해보라고 했다. 괜찮다는 대도 자꾸만 ‘아’해보라고 했다. 쌈이 풀어진다나. 그렇게 수줍게 받아먹은 과메기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비리지도 않았고 고소한 맛이 감돌았다.
“어때요? 맛있죠?”
“네. 비리지도 않고 생각보다 고소하네요.”
“그렇다니까요. 제가 황금비율로 싸드려서 그래요.”
남자는 그러면서 싱긋 웃는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일일 가이드로 일임한 남자를 따라 포항 이곳저곳을 다녔다. 남자는 경상도 남자답게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다정하고 세심했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붉은 노을이 하늘을 수놓았다. 일출 명소인줄 알았는데 해가 저무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저,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이렇게 일일 가이드도 해주시고. 이제 그만 들어가 보세요.”
“뭘요. 저도 포항 여행 제대로 했는데요. 참. 내일 오전에 해돋이는 보시고 가셔야죠? 아침 일찍 여기로 나올게요. 해돋이 보고 가세요.”
“네? 아. 괜찮은데.”
“무슨 말씀이세요. 호미곶와서 일출 안보고 가면 여기 왔다고 명함도 못 내밀어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내일 6시 10분까지 나오겠다며 내일 보자고 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호의인가. 아니면 무엇일까.
다음날. 약속했던 시간이 약 30분이 남았음에도 모든 준비를 끝냈다. 애꿎은 시계만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드디어 6시. 호텔 로비를 서성이는데 남자가 나와 있다. 언제부터 와 있던 건지 코끝이 살짝 빨갛다.
남자는 곧 해가 뜬다며 슬며시 내 손을 잡고 일출 명소로 뛰었다. 호미곶의 상생의 손 사이로 붉은 해가 솟아올랐다. ‘와.’ 속으로 감탄을 삼키고 있는데 남자가 말을 걸었다.
“멋있죠?”
“네. 멋있네요.”
“그럼, 나는 어때요?”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수줍게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잔만 더 마시고 들어갈게. 누군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듯이 건넨 혼잣말이다. 벌 써 몇 병째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그는 되뇌었다. 마지막이라고. 남은 소주잔 이거 딱 한잔처럼 마지막이라고. 남자는 중얼거렸다.
남자는 어두운 실내 포장마차에 있었고 홀로 앉아있었다. 남자가 벌인 네 번째 실내 포장마차 사업장이었다. 매번 반짝 장사가 되다가 나중에는 파리만 날리는 쪽박집이 되기 마련이었다. 봄이 되면 꼭 가게를 빼줘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돌아서는 건물주의 당부가 있던 날이었다. 그렇다고 남자가 성실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늘 좋은 재료를 위해 새벽시간을 아끼지 않았고 대박 집과 쪽박 집을 나름대로의 계산에 맞춰 비교도 해본 그였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무언가 승부수를 걸어야만 했다.
남자는 귀여운 딸아이와 예쁘고 상냥하던 아내를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딱 한잔만 더 하고 들어갈게, 마지막이야.
반짝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신 남자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식탁에는 콩나물국이 놓여있었다. 아내가 왔었나보다 생각했다. 남자는 하나부터 천천히 다시 시작해보기로 한다. 그동안 무엇이 문제였는지 재료인지 인테리어인지 품목선정인지. 무의식중에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틀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내가 아침상을 다 차려놓고 나간 터라 더 이상 꺼낼 반찬이 없었음에도 남자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우연히 슬라이스 치즈가 눈에 띄었다. 술을 마시고 난 다음날 아침 느끼한 치즈를 먹는다는 것, 다른 날 같았으면 쳐다도 안보고 아내가 끓여놓은 콩나물국을 후루룩 마셨겠지만 남자는 치즈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냉장고에 있어 차가운 치즈는 입안에서 쉽게 녹지 않았다. 중얼거렸다.
‘치즈가 따뜻했으면 좋겠어’
남자는 그 순간 낙뢰가 하늘에서 번쩍 치듯 치즈 하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의 사업 아이템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치즈 생각뿐이었다. 좀 더 체계적인 사업 구상을 하기 위해 남자는 임실로 향했다. 남자에겐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니까.
치즈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 그곳엔 치즈의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치즈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음식부터 맛과 발효과정까지. 남자는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치즈 하나면 누구나 만족시킬 수 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년 봄이 되면 꼭 방 빼주셔야 해요.’
건물주가 이번엔 아내를 찾아간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귀여운 딸아이와 상냥한 아내를 생각했다. 남자는 성실하게 치즈로 만들 수 있는 음식들을 떠올렸다. 치즈의 맛을 끝까지 살리며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차별화 된 음식들이 무엇인지를.
남자는 아이들을 위한 치즈 그라탱부터 미니 피자 그리고 치즈의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인 치즈케이크를 디저트로 만들기로 했다.
“다음 달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지요.”
건물주가 웃으면서 재계약을 하러왔다. 남자는 더 이상 어두컴컴한 방에서 홀로 마지막을 되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귀여운 딸아이와 상냥한 아내와 함께 식탁에 앉아있을 것이다. 오늘도 그의 가게에서는 고소하고 부드러운 냄새가 난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순간 하늘이 닫힌 것 같은 어둠이 짙게 깔렸다. 눈을 몇 번 깜박이니 차츰 약간의 빛이 새어 들어왔다. 정전인 것 같았다. 급히 휴대전화의 불빛을 비춰보니 우리 집만 전기가 나간 것이 아니라 아파트 전체의 문제인 듯 했다. 의도하지 않은 어둠은 사람을 멍하게 만들었다. 전화도,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미리 충전해두었던 휴대전화로 빛을 비추어 보거나 긴급통화를 할뿐, 그마저도 남은 배터리가 15%밖에 되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아직 8시 40분밖에 되지 않았다. 전기가 언제쯤 공급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무인도에 갇혀 언제 구조될지 모르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가벼운 외투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서려는데 문자가 왔다.
“지금 우리 아파트 정전됐어. 요즘에도 가끔씩 정전이 되나봐. 심심해.”
오래전부터 알던 진환의 문자다. 듣자하니 진환이네 집도 정전이 되었나보다. 뉴스에서 전력공급 수요량에 대해 보도되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 때문인가 생각했다.
“우리 집도 지금 불 나갔어. 너네 동네랑 우리 동네랑 멀지 않아서 그런가? 심심한데 밖에서 잠깐 볼래? 맥주나 한 잔 하자.”
나도 나가려던 참이었다고 하고 우리 동네 앞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 녀석과 나는 원래부터 잘 알던 사이였으므로 어색할 것은 없었다.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가니 진환이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만 보면 우리는 참 공통점이 많다.
“여! 왔어? 갑자기 무슨 정전이래.”
“그러게. 그것도 우리 동네랑 너네 동네랑 같이 정전이라니. 웃기다 크크”
“근데 순간적으로 불이 탁 나가니까 기분이 묘하더라. 내가 너무 불빛에 익숙해졌나 싶기도 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그래도 막상 2~3분 지나고 나니까 할 게 없어서 불편하던데? 너도 심심하다고 나온 거잖아.”
“그건 그래. 와. 저기 새로 지어진 아파트 되게 으리으리하다. 그치? 저기 공원은 여기랑은 딴 동네 같지 않냐? 친환경 생태도시라던가? 저거봐, 여기는 정전인데 저기 보이는 불빛 봐. 엄청 화려하다. 빨강에 파랑에.”
“부러워?”
“아니. 뭐 부럽다기보다. 그냥. 얼른 결혼해서 저런 좋은 집에 살면 좋겠다는 뭐 그런 생각?”
우리는 비슷한 시기의 각자의 연인과 헤어졌다. 그것도 결혼을 약속한 상대들과. 연인과 헤어진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시기가 비슷해서일까 우리는 서로에게 꽤나 큰 의지를 했었다. 인연은 따로 있을 거라면서. 진환은 당시 여자 친구와 결혼을 준비하면서 지금 보고 있는 아파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런 곳에서 서로를 닮은 아이와 함께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해도 행복할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다.
진환의 얼굴빛은 불이 꺼진 방처럼 쓸쓸해졌다.
“가자.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보고 있어.”
“곧 분수가 올라올 거야. 분수만 보고 가자.”
진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분수는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화려한 불빛을 받은 분수는 아름다웠다.
언제부터였는지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고 분수는 아름답게 솟아올랐다.
아주 잠깐이리라. 솟아오르고 금방 내려오는 분수처럼 혹은 다시 불이 켜지기까지의 정전의 시간처럼.
연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거리에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들썩임이 가득했고 언제나 돌아오는 연말연시였지만 사람들은 늘 같은 흥분과 설렘으로 시간을 보냈다. 살짝 취기가 오른 얼굴은 영하의 온도에 아랑곳하지 않듯 붉어있었고 저마다의 한 해를 안주삼아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한테 연락 왔어? 경찰서에서는?”
“아직.”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우리는 엄마를 찾고 있다. 알츠하이머 중기 판정을 받은 후로 급격히 상태가 나빠진 탓에 이렇게 가끔씩 집밖을 나가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연말연시라 경찰들도 우리엄마를 찾아주기엔 할 일이 많았는지 자꾸만 집에서 기다리라는 말뿐이다.
“혹시 엄마 거기 가신 거 아니야?”
“어디? 생각나는 곳이라도 있어?”
“왜, 엄마 요 근래 자꾸 기차, 화본역! 그러지 않았어?”
해가 떨어졌어도 한참 전에 떨어져 달빛과 가로등 불빛으로만 시야를 분간해야 했다, 자그마한 대합실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엄마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시계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겨울 막바지라 금방 손발이 얼어붙듯 차가운 날씨였는데 엄마는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엄마의 기억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기에 여기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던 걸까. 치매 초기 때에는 밤이 오는 것이 무섭다며 방에 불도 못 끄게 했던 엄마였다. 엄마가 깊게 잠이 들어서야 불을 끌 수 있었다. 그마저도 자다 깨면 누가 불을 껐냐며 불호령이었지만, 그랬던 엄마가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간이역에 덩그러니 앉아있다. 눈빛에 무서움과 두려움은 없었다.
“엄마, 왜 여기와 있어. 기차타고 어디 가려고?”
“기다려. 기다리고 있어.”
“누구를 기다린다는 거야. 오밤중에. 정말 속상해 죽겠어.”
“마중 간다고 했어. 이제 곧 올 거야. 기차소리 들리잖아.”
“무슨 이 시간에 기차소리가 들린다 그래! 정말, 집에가, 빨리 일어나라고!”
“저리가. 마중 간다고 약속해서 기다려야해.”
엄마는 단호하게 내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추위도 잊은 채 오지 않는 기차를 아니 누군가를 마중가야 한다고 했다. 노인네가 고집만큼이나 힘이 얼마나 센지 두 팔을 힘껏 잡아당겨도 꿈쩍도 안했다.
엄마는 낑낑거리며 거기 남아 있겠다고 안간힘을 썼지만 엄마를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여 겨우 집으로 모시고 왔다. 집으로 오는 중에도 엄마는 계속 기차소리만 연발했다.
그날이후로 엄마가 또 한 번 사라진 적이 있다. 이번에는 경찰서에도 연락하지 않았다. 엄마의 기억이 머물던 자리로 갔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에도 집에 안 오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면 어쩌나 하고 화본역으로 달려갔고 엄마는 그 자리에 계셨다.
어쩐지 엄마가 조금 이상했다. 눈빛도 또렷했고 기차고 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는 듯했다.
“엄마, 거기서 뭐해?”
“왜 또 왔어. 어련히 집에 안들어갈까봐서.”
“우리엄마 맞네. 저번부터 누구를 그렇게 기다리는 거야? 누구 보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어?”
“보고 싶은 사람이라. 보고 싶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
“내 새끼?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어렸을 적 큰오빠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유괴인지 실종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잃어버린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삼십년 째 가슴에 품고 있던 아이를 이제야 마중 나가겠다며 기억을 잃은 그 순간에도 엄마는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그렇게 다섯 살 난 아들을 잃은 엄마는 구슬프게 우셨다. 그리고는 다시금 기차소리가 들린다고 하며 기찻길로 뛰어들었다. 기차는 오지 않았지만 엄마는 자리에 쓰러지셨다.
‘엄마가 마중 갈게. 조금만 기다려.’그렇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셨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앉은 친구가 나를 툭툭 쳤다. 진동이 울려 휴대 전화를 확인 해 보니 메시지 한 통이 도착 해 있었다.
‘절대 잠들면 안 돼. 잠드는 사람이 돼지국밥 쏘는 거야.’
알았다니까 그러네. 나에게도 잠들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랜만에 타는 기차가 신기할 뿐이었다.
서울역에서 테이크아웃 해 온 아메리카노 컵에는 물기가 맺혀, 홀더까지 눅눅해졌다. 기차 여행 기분을 제대로 내기 위해 사 온 김밥과 삶은 달걀도 껍데기만 남은 지 오래. KTX가 아닌 무궁화호를 탄 지라 부산까지는 다섯 시간. 부산역에 도착하기까지 이제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오랫동안 기차를 타니 피곤한 듯 잠든 승객들이 대부분인 가운데, 우리 넷만 초롱초롱한 눈으로 장난스런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서울 중에서도 강북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가 저 먼 남쪽 끝 부산으로의 여행을 결심한 데에는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 부산에 연고지가 있는 친척도 없었고, 야구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사직구장을 보러 부산까지 갈 만큼 열성적인 팬은 아니었다.
부산의 명물인 돼지국밥이나 밀면, 씨앗 호떡 같은 것들도 보성에 가면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고, 전주에 가면 비빔밥을 먹듯이 당연한 수순일 뿐. 우리에게는 해운대나 광안리 해수욕장 같은 것들도 가까이 있는 만리포나 정동진과 별다르지 않았다.
한 마디로, 부산이 부산이어서 택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가 부산을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야, 이왕에 여행을 갈 거면 부산 정도는 돼야지!”
그렇다. 내가 별 생각 없이 던진 이 말 한 마디에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우리가 원한 것은 여행다운 여행이었다. 부산에 가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두지 않았기 때문에 KTX가 아닌 완행열차를 택했다. 비둘기호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무궁화호 대신 비둘기호를 택했을 것이다. 우리들의 즐거운 여행은 서울역을 출발하며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다섯 시간 동안 조용히 명상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우리는 기차 안에서 여행 계획을 짜기로 했다. 우리들의 규칙은, 절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조사하지 않는 것이었다. 여행의 모든 것들은 여행 중에 결정하기로 했다.
지난 네 시간 동안 우리는 휴대 전화로 관광지를 짜고, 수첩에 메모를 하고, 실제로 가보고 싶은 풍경의 사진들을 공유했다. 여행 계획을 짜는 동안 여행지와 가까워지고 있다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무계획이 계획이라는 우리들의 작전을 듣고 코웃음을 쳤던 수많은 주변 사람들에게 지금 우리들이 느끼는 설렘을 그대로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몰운대와 보수동 책방 골목, 동백섬, 영화의 거리, 범어사와 영도다리, 광안대교까지 우리는 가고 싶은 곳을 모조리 수첩에 적었다. 하루가 걸린다면 무박 여행이 될 것이고, 일주일이 걸린다면 일주일짜리 긴 여행이 될 것이다. 이 날을 위해 우리 네 명 모두 몇 달 동안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해 왔으니, 여비 걱정도 없었다.
‘이렇게 두근거리면서 도착하기를 기다려 본 건 난생 처음인 것 같다, 야.’
단체 채팅방에 올라온 한 마디를 읽고, 우리는 또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은 생각보다 금방 지났다. 다섯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으니, 여행의 시작은 성공적인 셈이었다. 부산역은 큼지막한 여행 가방을 메거나 캐리어를 끌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행자들의 도시. 나는 부산에게 붙여 줄 첫 번째 타이틀을 이것으로 정했다.
기차에서 떠들지 못했으니, 도착하자마자 남자 애들 답지 않게 수다가 만발했다. 친구 한 녀석이 입이 근질근질해 죽는 줄 알았다며 손나팔을 만들어 소리를 내질렀다.
“우리가 왔다!”
제 갈 길을 찾아 바삐 움직이던 여행자들이 뒤를 돌아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우리가 왔다. 작전명, 부산 정복. 우리는 발길 닿는 대로 부산을 헤맬 것이고, 우리가 본 모든 것들이 우리들만의 부산을 만들 것이다.
오늘은 하늘이가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입니다. 달력에 색연필로 크게 동그라미도 그려놓았지요. 바로 하늘이의 외국 펜팔 친구 데이빗이 오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는 설레는 마음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친구가 도착하면 무엇을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 잠을 설친 것이지요. 아침 일찍 일어난 하늘이는 분주하게 친구를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우리나라와 하늘이가 살고 있는 보성을 함께 알려줄 수 있는 좋은 것이 없을까 생각하던 하늘이는 좋은 방법이 생겼다며 싱글벙글 입니다. 드디어 만난 하늘이와 데이빗. 하늘이는 곧장 녹차 밭으로 데이빗을 데려갔습니다. 데이빗은 녹차를 먹어본 적이 있다고 말했지요.
“데이빗! 녹차를 마셔본 적 있다고? 티백에 담겨져 있는 녹차를 말하는 거지? 오늘 우리가 마실 녹차는 좀 달라! 기대하라고~”
한껏 신이 난 하늘이는 데이빗을 데리고 녹차 밭을 구경한 뒤 조그마한 다실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아주머니가 계셨고 사람들은 조용하게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늘이와 데이빗도 조용히 자리에 앉았지요.
“반갑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녹차 밭에 오신 여러분과 차를 함께 나누어 마시게 되어 기쁘네요. 오늘은 다기를 이용하여 차를 우리는 법, 그리고 차를 마시는 예절 등 다례에 대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볼 거예요.”
하늘이가 외국인 친구 데이빗을 위해 준비한 것은 바로 다례체험이었습니다. 보성녹차의 진중하고 진한 맛을 좀 더 세심하게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지요.
선생님께서는 다기의 이름과 함께 오늘 마실 차는 올해 수확한 햇차로 우전이라고 불리는 녹차를 이용하여 차를 마시는 예절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선 두 손으로 뜨거운 물을 사발에 붓고 다관 뚜껑을 열어 조금 식은 물을 다관에 따릅니다. 그리고 찻잔이 따뜻해 질 수 있도록 뜨거운 물을 부어두고 차 우릴 물을 준비합니다. 한김 나간 따뜻한 물을 다관에 붓고 여린 녹차를 조금씩 덜어 넣습니다. 녹차가 우러나는 동안 찻잔을 데우던 물을 퇴수기에 따라버려주세요.”
다실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정숙한 분위기로 차를 우리고 예를 지키는 모습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하늘이와 데이빗은 더욱 진지한 모습이었지요. 차를 우리는 방법은 계속 되었습니다.
“자! 앞에 손수건처럼 보이는 다건을 이용하여 다관을 받친 후 팽주(차를 우리는 사람)는 자신의 잔에 먼저 따라보고 색과 향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팽주는 각각의 잔에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세 번에 나누어 차를 따릅니다. 잔 받침이라 불리는 차탁에 잔을 올려 큰 손님부터 드린 뒤 가볍게 목례를 하고 세 번에 나누어 차를 입안에 굴리며 색과 향 그리고 맛을 차례로 음미합니다. 어때요? 어렵지 않죠?”
하늘이와 데이빗도 천천히 차를 음미해보았습니다. 그동안에는 향과 맛을 느끼기 전에 꼴깍꼴깍 마셨던 것을 약간 후회하며 말이지요.
하늘이도 보성에 살면서 녹차를 수없이 마셔왔지만 녹차가 이렇게 진하고 무거운 맛을 내는지 몰랐습니다. 그동안에는 그저 텁텁하고 흔한 차라고만 여겼었지요. 무엇보다 외국에서 온 데이빗이 어설프지만 진지하게 차를 우리고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내심 뿌듯하였습니다.
하늘이는 늘 즐겨 마시는 녹차이지만 늘 티백이나 가루로 물에 타 마시기만 하여 가볍게만 생각하였는데 실제로 예를 갖추어 먹어보니 느낌이 달랐습니다. 훨씬 고소하고 단 맛이 느껴지며 진한 맛과 향이 입안에 가득 맴돌았지요.
데이빗도 굉장히 즐겁고 색다른 추억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렇게 여린 잎에서 이런 진한 향을 낼 수 있다면서 놀라워했지요.
오늘은 데이빗과 하늘이 둘에게 여린 잎이 남긴 진한 향은 더욱 진한 추억으로 한 잔의 녹차와 같은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화초를 가꾸는 일을 그만두라 하였더니, 어머니는 꽤 서운하신 모양이었다. 이제 육십 대 후반 줄에 들어서신 어머니는 요즘 들어 허리며 어깨며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 더운 날씨에 화단의 꽃들을 가꾸느라 몇 시간씩을 땡볕에서 보내시니, 옆에 붙어 있지도 못하는 딸자식은 답답할 따름이다. 봄이면 봄꽃 축제, 여름이면 장미 축제, 가을이면 가을꽃 축제, 겨울이면 눈꽃 축제가 열리는 이 꽃다운 곳에서 왜 굳이 어머니까지 직접 꽃을 키워야만 하는가.
집에 들를 때마다 이제 그만하시고 집에 가만히 좀 계시라 말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에, 이번엔 단단히 화를 내 버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등을 돌리고 앉아, 옷자락만 만지작거리고 계셨다. 그 모습이 초라해 보이는 것이 싫어, 나는 나도 모르게 또 짜증을 내버리고 말았다.
그 후로 몇 달이나 집에 들르지 못했던 나는, 어머니로부터 사진이 첨부된 문자 한 통을 받았다. 휴대전화를 사 드린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오타가 가득한 어머니의 문자는 여전했다. ‘언제’가 ‘ㅇ너제’, ‘엄마’가 ‘어마’로 표기된 문자와 몇 분 동안이나 씨름했지만, 도대체 전문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그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리 엄마 참 여전하구나.”
나는 스크롤을 내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어머니가 보낸 흔들린 사진 속의 피사체가 대체 무엇인지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당장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진 속에 꽃이라고는 단 한 송이도 없는 빈 화단의 모습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이게 뭐야? 꽃들 다 없애버린 거야? 누가 이렇게 다 없애버리라고 했어, 조금만 덜 고생했으면 좋겠다고 했지.”
나는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속사포처럼 할 말을 쏟아내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목소리는 뜻밖에 밝았다.
“아이고, 얘. 그 귀한 것들을 없애기는 누가 없앴다고 그래? 네가 화초 키우지 말랬지, 어디 갖다 버리라고 했느냐?”
내게 보여줄 것들을 잔뜩 준비했다는 어머니의 들뜬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오랜만에 집으로 향하며 나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와, 이게 다 뭐야?”
어머니는 마른 꽃을 인쇄하듯 한지에 박아 넣어 만든 공예품들을 하나둘씩 꺼내 보이셨다.
“이것 봐라. 꽃 가꾸는 것까지 그만두고는 집에 혼자 있기가 영 적적하고 해서 뭐라도 배워볼까 했더니, 이런 게 있지 뭐니. 이게 다 내가 요 앞에 있던 꽃으로 만든 거야. 신기하지 않어?”
꽃이 눌러 담긴 전등갓에서 새어나오는 불빛 아래로 꽃이 눌러 담긴 부채가 펼쳐졌다. 노란 백열전구 불빛에 비치는 줄기가 뻗은 모양새며 이파리의 맥들, 꽃잎들의 조화가 마치 그림 같았다.
“누른 꽃이라구 해서, 이걸 압화라고 한단다.”
“이걸 정말 엄마가 만들었단 말이야?”
내가 어머니의 압화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어머니는 장롱 아래서 오래된 앨범을 하나 꺼내 펼치셨다. 앨범 속에는 화단 앞에 앉아 웃고 있는 어린 내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너도 어렸을 때에는 이 꽃 가꾸는 걸 참 좋아했는데 말이야. 인제는 나 혼자 꽃을 키운다는데도 그렇게 성을 낼 건 또 뭐니. 다들 떠나고 나 혼자 이 집에 있으려니까 꽃이라도 예전처럼 가꿔볼까 한 건데.”
어머니는 채송화에 코끝을 갖다 댄 열두어 살의 내 사진을 한참이나 쓸어 보셨다.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다시 원룸으로 돌아오는 내내 어머니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어머니는 미안해하는 내 표정이 영 어색하신지 금세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야아. 그래도 다 늙어서 혼자 화단 가꾸려니까 힘들기는 하더라. 그래서 내가 이렇게, 여기 가만히 눌러 담아 두기로 했지.”
나는 가방을 열고 책장을 펼쳤다. 어머니 몰래 눌러 담아 온 사진 한 장이 가로등 불빛에 가만히 반짝거렸다.
창밖에는 바닥이 하얗게 변할 만큼 꽤 큼지막한 눈발이 하얗게 나렸다.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또 저 노래다. 지겹지도 않냐고 물어보려다 가자마 눈을 하고 흘기는 것이 무서워 관둔다.
“그래, 창 밖에 봐봐, 당신이 요즘 그렇게 목청껏 불러 마다않는 겨울이야. 근데 원래 넌 여름이 더 좋다고 하지 않았어? 사람들도 활기차보이고 무엇보다 보기만 해도 뼛속까지 시린 얼음골 폭포 보는 거 좋아했잖아. 겨울은 너무 추워서 싫다며.”
“응, 여름도 좋아. 그런데 난 우리 아이는 겨울에 태어났으면 좋겠어.”
아내는 갑자기 태어나지도 아니 계획에도 없던 아이이야기를 꺼냈다. 아내는 당황한 내 표정을 본체만체하곤 아이 그리고 겨울이야기를 독백처럼 떠들어댔다.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좋지.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하니까.”
오늘은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만 떠들어 댄다고 핀잔을 주려다 꾹 참는다. 아내는 가끔 나로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러니까 논리에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전형적인 이과남자라며 이과생이 문학과 정서를 이해할 수 있겠냐며 소설책을 읽고 있는 내 손이 민망해 질 정도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물론 오늘도 괜히 덤볐다가 본전도 못 찾을 것이 뻔했기에 잠자코 아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여름은 시원한 곳으로 찾아가니까 우리가 매년 얼음골로 피서를 가는 것처럼. 그리고 민소매도 마음껏 입을 수 있고. 그러니까 여름은 시원한 거고 겨울은 흰 눈이 온 세상을 감싸니까 왠지 따뜻해보여. 연말엔 기부도 많이 하니까. 안 그래?”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겨울 겨울 그런다. 흰 눈이 그렇게 보고 싶었어?”
“아니. 아주 시원하고 달콤한 사과 때문에.”
사과? 네가 사과를 좋아했던가? 연애만 4년 그리고 결혼 2주년까지 총 6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네가 사과를 특별하게 좋아했다는 것을 몰랐다. 내가 무심했던 건가 생각해보지만 특별히 그렇지도 않았다.
“사과? 겨울하면 넌 사과가 생각난다고? 군밤이나 군고구마도 아니고?”
“그래. 사과! 아. 생각하니까 먹고 싶다.”
아내는 해맑은 표정으로 사과를 떠올렸다. 절로 군침이 도는 모양이었다. 아내는 특별히 과일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다. 그저 철이 되면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과일들 중 하나를 골라 집어 의무적으로 섭취하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사과? 먹고 싶으면 사다줄까? 이렇게 추운데. 눈이 펑펑 오는데?”
괜히 맘에도 없는 말을 던져본다. 그것도 암묵적으로 가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말이다. 설마 다녀오라고 할까.
“정말? 그래 주면 좋고. 아참, 그냥 사과 말고 꼭 얼음골 사과로!”
오랜만에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낸다. 싫은 티를 팍팍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주면 좋다는 대답아 날아온 걸로 보아서는 어지간히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알겠어. 추우니까 요기 따뜻한 이불 속에서 조금만 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오리털 점퍼를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큼지막한 눈발이 내렸지만 앞이 안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호호 나오는 겨울이었다. 아내는 이 한겨울에 이름만 들어도 등골이 서늘한 얼음골 사과를 먹고 싶다고 하는지.
과일 가게 앞에서 서성일 필요도 없이 사과를 찾았다.
“어머, 색시가 아기를 가졌나 보네, 얼음골 사과를 찾는 거 보니. 아삭하고 달콤한 게 태기가 있을 땐 그런 게 땡기는 법이거든.”
“아기요? 에이. 아니에요.”
“그래? 난 또. 아무튼 야무진 놈들로만 골랐으니 얼른 가져다 줘요.”
아기라고? 에이 설마. 갑자기 걸음이 빨라졌다. 아내가 혹시 숨기고 있던 건가? 그래서 아까 아이 이야기를 꺼낸 건가? 머릿속이 흰 눈송이만큼 하얘졌다. 빠른 걸음으로 집 앞에 도착했다. 턱 끝까지 숨을 몰아쉬고는 문을 열었다.
“사과 사왔어! 아주 시원하고 아삭한 얼음골 사과”
아내는 이불 속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