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점점 기력이 쇠해지면서 말수도 적어지셨다. 동네 경로당이라도 다시시면 좋으련만 며칠 나가시더니 그마저도 발길을 끊으셨다. 말이 경로당이었지 할머니보다 연배가 훨씬 적은 젊은 할머니들의 등쌀에 외부인 취급을 받으신 할머니는 그날로 줄곧 집안에만 계신다.
할머니는 건넌방도 거실도 아닌 베란다에 보금자리를 만드셨다. 구부정한 허리에 다리를 곧게 뻗으시고는 베란다 발코니에서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식사를 하거나 화장실에 용무를 보러 가시는 시간 이외에는 대부분 베란다에 계셨다. 베란다와 할머니는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 점에서 할머니에게 제법 어울리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화초라도 가꿔보는 것은 어떠냐고 했지만 금방 죽어버릴 걸 뭐 하러 사오냐며 그만 두라고 했다.
할머니는 줄곧 시골에서 사셨다. 꽃다운 나이에 시집온 그 동네에서 알콩달콩 살림을 꾸리며 십수 년의 세월을 보내셨다. 할머니 댁 앞마당에는 작은 개울가와 원두막이 있어 여름이면 꼭 할머니 댁에서 하루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작은 개울가에서 발도 담그고 빨래도 하던 공간을 70여 년 만에 떠나 서울로 올라오신 거다. 얼마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우리 집으로 할머니를 모셔왔다. 할머니는 한사코 거절하였지만 혼자 시골에서 적적하실 뿐더러 몸도 편치 않으셔서 안 된다며 엄마의 고집이 할머니 고집을 꺾었다. 서울로 올라오신 할머니는 서울도 참 많이 변했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점점 더 위태로워지셨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에게 산책이라도 다녀오시라고 했지만 말뿐이었다. 엄마도 할머니에게 최선을 다하고는 있었지만 그 무엇도 할머니의 무언가를 채워주지는 못했다. 베란다에 있는 시간도 더 길어지셨다.
“베란다에 도대체 뭐가 있길래 하루 종일 거기만 쳐다보고 있느냐고. 누가 보면 억지로 데려가 가둬두는 줄 알겠어. 우리 집 신고 당하면 다 엄마 때문인 줄 알아.”
“그냥 답답해서 그런 거니 신경 쓰지 말라 안하나.”
“답답하면 산책을 나가던가. 왜 집밖을 안 나가는데 같이 쇼핑가자고 해도 싫다고 하고 외식을 하러 나가자고해도 싫다 그러고. 노인네가 고집은 또 왜 이렇게 센지.”
엄마는 속상한 마음을 풀어놓았다. 그럴수록 할머니는 더욱 베란다 가까이에 붙었다. 나는 할머니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
할머니를 모시고 청계천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변해버린 서울이 두려워 집 밖을 나가기가 무서우셨던 거다. 늙어버린 당신과 함께한 고향을 두고 모든 것이 낯선 동네에서의 두려움은 할머니를 베란다로 내 몰았던 것이다. 그렇게 보금자리에서 위태로운 삶을 버텨가던 할머니는 결국 시골집의 작은 개울이 그리우신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병원 검진 때문에 집밖을 나오셔야 하는 날, 나는 진료를 받고 할머니를 청계천으로 모시고 갔다. 아이들은 발을 담그고 하하 호호 웃으며 놀고 있었고 청계천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할머니는 한참 동안 청계천을 바라보셨다.
막혀있던 물줄기가 시원하게 뻗어나가듯 청계천을 흐르는 물줄기가 제법 거셌다. 잘 꾸며놓은 조형물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할머니는 서울 한 가운데에서 시골 앞 개울가를 만난 듯 하셨다. 반가움에 두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할머니, 다리 안 아프셔요? 이제 그만 갈까?”“조금만 더 있다 가자꾸나. 조금만.”
“서울도 많이 바뀌었지요? 옛날에는 여기가 다 시멘트 바닥이었는데. 몰라보게 바뀌었어. 이렇게 꾸며놓으니 좋지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시골 개울가처럼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거나 멱을 감지는 않았지만 할머니 눈에는 검게 그을린 개구쟁이 아이들이 수업이 끝나고 미꾸라지를 잡는 모습으로 보이는 듯했다. 청계천 8경 중에서도 할머니는 5경에서 가장 오래 머물러 계셨다. 5경은 빨래터를 재연한 공간으로 아마 할머니의 집 앞 개울을 가장 많이 닮은 곳이기도 했다. 할머니의 눈시울이 조금은 붉어졌다. 그리고 마른 입술을 매만지셨다.
청계천에 다녀오신 후로 할머니는 기력을 조금씩 되찾으셨다. 베란다에 나가 계시는 시간도 줄고 간간히 산책도 다녀오셨다.
할머니의 시간은 앞으로도 흐를 것이고 청계천의 물도 이제는 마르지 않고 흐를 것이다. 언제나 언제나.
어느 날 문득 걸려온 전화 한 통. 초등학교 동창생에게 걸려온 전화이다. 사실 그녀가 학교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초등학교 동창생 인줄은 꿈에도 몰랐다. 설거지를 하던 도중에 급히 받은 전화라 대충 받고 끊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길어진 통화에 고무장갑까지 벗고 진지하게 전화를 받았다.
1993년 폐교가 된 생둔분교. 가물가물한 이름을 말하는 동창생이지만 일단 반갑게 통화를 했다. 평소보다 한 옥타브 정도는 더 높은 톤의 목소리에 동창생과 통화를 하는지 콜 상담원직원과 통화를 하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걸려온 전화의 요지는 이번 동창회는 특별하게 분교에서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반드시 참석하라는 것. 권유가 아닌 통보다.
홍천에서 서울로 떠나온 지가 언제인데. 그리고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한 옛 친구들과의 분교캠핑이라니. 다 늙어서 무슨 캠핑이람?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다.
홍천 시내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나오는 오지마을. 그동안 궁금하긴 했다. 매캐한 연기와 콘크리트 덩어리들 사이에서 쉼 없이 달려온 그동안의 시간 속에서 이곳이 궁금하긴 했다. 학교도 친구들도 마음속으로 안녕을 전해야만 했던 추억들이었다.
미숙이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기는 척 동창회에 나가기로 했다. 약속장소 도착 5분 전 친구들이 나를 못 알아보면 어쩌나, 초등학교 친구들이라 얼굴이 많이 변했을 텐데. 똑같이 나이를 먹고 같이 늙어가는 처지였으나 어쩐지 늙는다는 것이 서럽게 느껴졌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동창회 소식을 알리던 미숙이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전화 속 목소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어머 반갑다. 얘, 얘는 어떻게 늙지를 않니?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엉?”
궁금한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버스 안에 앉아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졸업을 하기 전 떠난 수학여행이 생각났다. 많지 않은 전교생이라 소풍 정도로 보였겠지만 그 나름의 추억이 있었다.
도심의 때가 묻지 않은 마을에 도착하니 감회가 새롭다. 점심도 그때의 추억 그대로 김밥에 주황색이 진한 환타 병까지 준비되었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 어색함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세월이 무색하게도 어색함이 없는 친구들. 맨 앞자리에 앉던 키 작은 친구, 뺑뺑이 안경에 반에서 일 등만 하던 반장 모두 그대로이다.
남자들은 물고기를 잡겠다며 바지를 걷어 올리고 족대를 들고 한껏 들뜬 모습으로 계곡으로 향했고 여자들은 금방 쪄낸 옥수수를 하나씩 들고 살아온 이야기를 나눴다.
일찍 시집갔던 친구는 벌써 손주를 보았고 여태껏 일만 하다 결혼을 못 한 친구도 있었다. 삶이 다 제각각이었지만 다들 열심히 살았나 보다.
언젠가 경비아저씨와 악을 싸우며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중년의 여성을 본 적이 있다. 내 나이와 비슷한 중년의 여성은 쉬지 않고 말을 했고 그 모습이 적잖이 꼴 보기 싫었다. 그 이후로 중년의 여성이 쉼 없이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름답지 않음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들 앞에서 쉼 없이 지난날을 곱씹고 있다. 누가 보면 꼴 보기 싫을 수도 있으나 상관하지 않는다.
어느새 내 옆에 와 있는 미숙이가 가볍게 한마디 던졌다.
“거봐, 오길 잘했지?”
빙그레 웃었다. 오길 잘했다. 2013년이 아닌 1993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으니까.
밤공기가 제법 쌀쌀해졌다. 서울 도심 한복판이었으면 열대야라며 손부채질을 끊임없이 해댔겠지만 이곳의 공기는 청명했다. 달도 밝고 별도 쏟아질 듯이 빛났다.
어느 샌가 친구들은 모두 별을 바라보았다. 언제 다시 이곳에 모일 수 있을까. 벌써 헤어짐이 아쉬운 걸까. 그리움을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의 행복과 기억이 추억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인지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밤공기를 들이마셔 본다. 차가운지 따뜻한지 모를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와 마음에 머문다.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수산시장의 하루가 시작된다. 얼음을 나르며 생선들에게 오늘 하루도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넨다. 수산시장만의 비릿한 냄새가 이제는 익숙한 사람들은 손에 물이 안 묻는 날이 없다. 겨울이면 옷을 겹겹이 껴입어봐도 고무장갑 사이로 들어오는 냉기 때문에 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한두 번이 아니다.
가지런히 정돈된 생선들과 횟감을 둘러보는 사람들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오늘 횟감 좋아요~ 사장님 한번 둘러보고 가셔.”
준영은 멀리서 엄마가 장사를 하시는 걸 보고만 있다. 손님이 엄마의 손을 냅다 뿌리치고 나서야 엄마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여긴 또 뭐 하러 와. 공부하라니까. 이 좋은 옷에 비린내 배겠다.”
“오늘 장사 많이 했어? 추운데 얼른 접고 같이 들어가자.”
“무슨 소리, 너는 얼른 공부하고 나는 얼른 장사하고 그게 우리가 할 일이야. 그만 가봐. 엄마 일 해야 해.”
준영은 엄마를 주려고 가져온 손난로를 채 건네지도 못하고 돌아섰다. 준영은 노량진에서 고시공부를 하고 있다. 이따금씩 엄마를 보러 수산시장에 오면 엄마는 옷에 냄새 밴다며 한사코 돌아가라고만 한다. 생선박스나 얼음은 덩치가 큰 장정들도 혼자 옮기가 힘든데 엄마는 번쩍번쩍 잘도 든다. 여자는 약하나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이런데서 나오는가 싶다.
엄마가 내색은 안 해도 내가 수산시장에 가면 옆 상회 아주머니들께 장차 나랏일을 할 우리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이따금씩 공부하는 것이 지겨워 ‘노량진’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치열하게 공부하는 사람들과 더 치열하게 생선을 파는 사람들. 어쩐지 엄마와 준영이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손난로를 건네주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는지 엄마는 그날 심한 열감기에 걸리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일을 나가시겠다며 완고하게 고집을 부리시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엄마를 모시고 시장으로 나갔다.
“너는 이제 올라가봐. 들어오지 말고.”
“오늘은 제가 도울게요. 엄마는 병원 다녀오세요.”
“병원은 무슨, 감기 가지고. 여기만 오면 다 낫는다. 여기가 엄마한테는 병원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엄마는 내심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으셨다. 오늘 하루는 공부 말고 엄마를 돕기로 하고 방수 앞치마에 장화, 고무장갑까지 끼며 생선들을 정리했다. 생선 종류가 하도 많아 어떤 게 어떤 것인지 듣고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오늘 생선 정말 싱싱해요. 어찌나 싱싱한지 펄떡거리는 거 잡다가 손목 부러질 뻔 했다니까요!”
“허허, 젊은 청년이 말도 잘하네. 키로에 얼마라고?”
“헤헤, 3만원만 주세요. 큰놈으로 골라 드릴 테니까 어서요.”
준영이 손님을 끌어오면 엄마가 회를 떴다. 엄마는 그 와중에도 손님에게 장차 나랏일을 할 사람이 골라준 생선이라며 쓸데없는 생색을 내셨다. 엄마는 빨간 코끝에 하얀 콧물이 맺힌 줄도 모른 채 생선 내장을 발라냈다.
잠시 손님이 뜸했다.
“엄마는 여기 이 냄새 그리고 생선 지겹지도 않아?”
엄마는 잠시 손난로를 만지작거리시더니 아니 라고 짧게 대답하셨다.
“나는 가끔, 아주 가끔 이 노량진이 지긋지긋해서 나가고 싶은 적도 있었는데. 엄마는 없다고?”
“지긋지긋 하지. 나라고 왜 아니겠어. 그래도 여기만큼 활기 넘치고 싱싱한 곳이 없어. 제철이면 제철 맞은 생선들이 파닥이고, 엄마는 이 비린내 흉이라고 생각 안 해. 나한테 주는 훈장이지 훈장.”
“근데 왜 나는 옷에 비린내 나니까 못 오게 해?”
“그게 너랑 나랑 같은가. 엄마는 여기가 일터고 너는 일터가 따로 있지 있으니까 그렇지. 그나저나 오늘 엄마 땜에 공부 하나도 못해서 어쩌냐. 곧 시험이라며.”
“하루 안했다고 떨어지는 실력이면 시험 봐도 그만이야. 오늘 공부보다 더 값진 공부 했는데 뭐.”
엄마는 껄껄 웃으셨다. 모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가슴 한 편이 뭉클했다.
비린내 가득하지만 싱싱함과 마주한 이곳. 노량진. 우리 모자에게 노량진은 그런 곳이다.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재작년에 시집을 간 여동생의 전화였다.
“언니, 주말에 뭐해? 우리 슬비 좀 하루만 봐주면 안 될까? 한번만 더, 응?”
주말에 뭐하냐고 물어보고선 내가 대답을 할 여유도 주지 않은 채 자신이 전화를 건 본 목적을 뒤따라 이야기 하는 동생이었다. 귀여운 조카 봐주는 것에 인색한 이모는 아니었지만 몇 년째 아이를 기다리는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어쩐지 조금 얄미운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렇다고 싫은 내색을 하기에는 어쩐지 조금 치졸한 이모가 될 것 같아 알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슬비는 엄마인 내 동생보다 어쩌면 나를 더 많이 따랐다. 여동생이라고 왜 배 아파 난 자기 자식이 안 예쁠까, 그저 나는 슬비에게 조금 더 약간의 집착이 섞인 행동을 하는 것일 뿐이다. 마치 꼭 저 아이에게서 ‘엄마’라는 단어를 듣고 싶은 사람처럼.
약속된 주말이 왔고 귀엽게 양 갈래를 하고 공주가 그려진 예쁜 원피스를 입은 슬비가 왔다. 이맘때 다른 아이 같으면 엄마랑 떨어지지 않겠다고 울며불며 떼를 쓸 텐데 슬비는 이모인 내 품에 쏙 하고 안겼다. 그리고는 쿨하게 엄마에게 빠이빠이 하며 손을 흔들었다. 여동생은 모처럼 남편과 데이트를 하러 가는 듯했다. 슬비를 내게 맡겨두고는 미안했는지 작은 봉투를 건넸다. 맨입으로 맡겨도 서운했을 텐데 막상 이렇게 돈 봉투를 보니 어쩐지 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슬비 점심부터 좀 먹여줘 라는 말과 함께 동생네 부부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우리 슬비 무슨 반찬 해줄까? 점심 먹고 이모랑 뭐하고 놀지 생각해봐.”
“음, 나 치즈계란말이 먹고 싶어.”
이젠 제법 똑 부러지게 자신의 입장 혹은 의견을 말하는 것을 보고 대견한 마음이 들면서도 약간의 거리감이 들었다. 조만간 이모네 집에 가기 싫다고 똑 부러지게 제 엄마에게 말이라도 하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슬비는 가방에 싸온 몇 가지 장난감을 바닥에 늘어놓은 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조잘조잘 혼자 떠드나 싶더니 이내 조용해져 불안한 마음에 거실 쪽으로 얼른 머리를 쏘옥 내밀어보니 무엇을 보는지 꽤나 집중을 한 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텔레비전에서는 슬비 또래의 아이들이 얼룩소에게 먹이도 주고 치즈로 피자를 만드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슬비야 점심 먹자. 맛있는 돌돌 치즈계란말이가 왔어요~”
슬비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텔레비전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몸도 찌뿌듯해서 집에서 놀다가 잠깐 놀이터나 나갔다올까 했는데 슬비는 저곳에 가고 싶은 눈치였다. 하는 수 없이 점심을 먹이고 차키를 챙겨 계양산자연체험학습장을 네비에 찍고 시동을 걸었다. 이래서 요맘때 아이들이 뭐든 다 들어주는 이모를 엄마보다 더 따르는지도 모르겠다. 멀리서 계양산자연체험학습장 간판이 보였다. 슬비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카시트에서 몸을 들썩였다. 벌써부터 시골냄새가 진하게 풍겨왔고 슬비 또래의 아이들이 보였다. 저 멀리서 체험장 관리하는 선생님이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어머니, 우선 아이 손부터 깨끗이 씻게 하시고 오늘 체험 등록한 아이들과 함께 젖소 젖짜는 체험부터 진행할게요.”
어머니? 물론 이 사람 입장에서는 엄마처럼 보였겠지만 누구의 어머니, 엄마라는 말이 생소한 나는 그만 얼굴이 새빨개졌고 부끄러운 마음에 얼른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이의 손을 씻기는 데 웬일인지 눈물이 고였다. 조카를 데리고 온 것도 좋지만 정말 내 아이와 함께 오면 얼마나 좋을 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아이는 즐거워보였다. 또래 친구들과 젖소 먹이도 주고 쓰다듬기도 하며 도심에서 쉽게 체험하기 힘든 체험들을 하며 정서발달과 신체발달을 고루 키워나갔다. 드디어 오늘 체험의 하이라이트, 직접 만든 치즈로 피자를 만드는 것이다. 사실 내 여동생은 슬비가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피자나 치킨 같은 음식들은 먹이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한 적이 있다. 그 흔한 자장면도 안 먹이고 직접 만들어 준다나. 그런데 오늘 이렇게 하이라이트 순간을 목전에 두고 물러설 슬비가 아니었다. 평소에 떼를 잘 쓰지 않는 성격이지만 꼭 하고 싶다거나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떼를 쓰기에 오늘 하루는 그냥 피자를 먹이기로 하며 체험을 이어나갔다.
우선 앞에서 선생님이 치즈에 대한 성분과 치즈 만드는 법을 간단히 설명했고 뒤따라 아이들과 부모님들도 치즈를 만들었고 자신이 원하는 재료를 받아다 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고소한 포테이토 치즈 피자를 만들었고 오븐에 15분 동안 구워내면 완성이었다. 하나 둘씩 저마다 만든 피자를 오븐 앞으로 가져갔다. 고사리 손으로 피자 위에 치즈를 듬뿍 올리고 피자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모, 난 이모가 정말 좋아.”
대뜸 고백을 해오는 슬비에 웃으며 이모도 그렇노라고 말해주었다.
“난 정말이야. 치즈가 좋은 것처럼 이모도 그만큼 좋아.”
슬비는 자신이 정말 좋을 때 치즈에 비유해서 그 양을 말하곤 했다. 그러니 나는 슬비에게 엄청나게 큰 점수를 딴 것이 분명했다.
“고마워, 이모도 슬비 엄청 많이 좋아해.”
“이모, 나한테 동생이 생기더라도 나 많이 좋아해줘야 해.”
여기서 동생은 내가 낳을 아이를 말하는 듯했다. 내가 미쳐 대답을 하기전에 오븐에서 땡 하는 소리가 울렸고 고소하고 부드러운 치즈피자가 완성됐다. 슬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피자를 보고 흥분하여 방방 뛰었다. 직접 만든 피자를 입속에 넣는 순간 치즈가 사르르 녹았다. 어쩐지 마음에 맺혔던 무언가도 함께 사르르 녹는 기분이 들었다.
체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슬비는 고단했는지 곯아떨어졌다. 우리가 집에 도착하니 뒤이어 여동생내 내외도 도착했다.
“언니, 오늘 슬비가 말썽 안 부렸어? 매번 고마워. 그리고 이거.”
동생의 손에는 인진쑥과 함께 산부인과 진료카드가 들려있었다.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에 마음이 스르르 녹았다.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 해 버렸다. 곱창골목에 가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만, 일부러 먼 곳에서 오는 내게 시간을 맞춰 주는 정도의 융통성도 없는 건 여전하다. 칼같이 시간을 지키는 그 섬세함은 나 때문에 생긴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약속 시간 한 시간 반 전으로 알람 맞추고, 정시에 도착해! 약속 시간 십 분 전에는 전화 하고. 일 분도 지각하면 안 돼!’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은 항상 내 쪽이었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곱창골목에서 걸어서 십 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카페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나 지금이나, 이 거리는 참 예뻤다. 마치 향기로 골조를 세운 것처럼, 각 가게의 특색이 그대로 반영된 건물들이 가득 들어 차 있다. 프랜차이즈 점들을 무심히 지나쳐 테라스가 있는 붉은 벽돌집 앞에 섰다. 연애를 시작하던 무렵, 정현이와 함께 케이블카를 타던 날 들렀던 그 카페였다.
우리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주 앉아 케이블카를 탔었다. 나는 너무 높아서 무섭다며, 소년처럼 신이 나 있는 정현이의 팔을 꼭 붙들었다. 아마 우리는 그 날 첫 키스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날의 붉어진 뺨처럼, 쉴 새 없이 두근대던 가슴처럼 달콤한 카페 모카를 주문했었다. 휘핑 크림을 잔뜩 얹어서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보이는 카페 모카를 말이다. 하지만, 방금 나는 카운터 앞에 서서 망설임 없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카페 모카와 아메리카노 만큼이나 다르다.
새삼, 옛 연인과의 재회가 이렇게 사심 없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현이와 헤어진 지도 어느덧 삼 년. 우리는 그 후로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몇 달에 한 번 정도는 꼬박꼬박 만나서 새로 생긴 고민이 무엇인지,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심지어는 새로운 애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하긴, 나와 정현이 둘 다 그 새로운 애인이라는 사람들과 빠르게 이별을 고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야, 너는 어째 백 일을 못 넘기냐.”
“뭐래, 너 지난 번 남자친구랑 한 달도 못 채우고 헤어진 거 기억 안 나?”
정현이는 자연스럽게 내 몫의 아메리카노를 주문했고, 나 또한 습관처럼 정현이 몫의 카페 라떼를 주문했다. 그러고 나면 왜 네가 내 것을 시키느냐며 투닥거릴 차례다.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처음으로 정현이 앞에서 카페 모카 대신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던 날을 기억한다. 정현이가 주문한 카페 모카를 취소하고, ‘아메리카노 주세요.’라고 힘주어 말했다. 곧바로 ‘나 이제 아메리카노 마시는 여자야.’라고 농담을 건네려 했는데, 오랜만에 만났더니 입맛마저 바뀌었느냐고 묻는 정현이는 왠지 모르게 우울해 보였다.
그 때, 나는 내가 내심 정현이가 나 때문에 새로운 연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사이의 불문율에 속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진지해지는 순간 여느 헤어진 연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서로를 피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다 함은, 그 사이의 공백 기간 동안 서로의 향기를 잊기 위해서다.
아메리카노 한 잔과 한 시간은 찰떡궁합이다. 여섯 시 십 분 전. 어김없이 휴대 전화가 울렸다. 정말,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내가 변하려고 기를 쓰는 동안, 정현이는 우리들의 달콤했던 향기를 잊지 않으려 애를 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야.”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한 마디는, 정현이가 입버릇처럼 내게 했던 말이다. 입가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옛 연인과의 재회가 사심 없을 수 있겠는가. 나는 지금 향기를 나누러 간다.
기다리는 일은 항상 생각보다 더디게 다가온다. 출근길의 버스나 고기가 낚시 바늘을 잡아 무는 순간, 아내의 귀가나 유채꽃이 피는 시기 같은 것들 말이다. 재희의 성화에 오늘도 호수공원에 나왔지만, 내가 이곳에서 사랑하는 것은 유채꽃뿐이다.
“아빠! 나 저 쪽!”
아이는 말을 배우는 속도가 더뎠다. 아내의 부재 때문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아마 나 때문일 것이다. 아내는 명문대를 졸업한 엘리트였고, 나는 중학교 졸업을 최종 학력으로 가진 막노동꾼이었다. 그날, 아내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빨간 가방을 멘 채 유채꽃밭에 서 있었고, 나는 공원을 재정비에 동원되어 자재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우리의 눈이 마주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썩어가던 더러운 하천이 말끔히 정비되어 아름다운 호수 공원으로 바뀐 그 해에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살림을 차렸다. 나는 쓰러진 장모님 앞에서, 아내를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다며 무릎을 꿇고 빌었다.
단칸방에서 시작한 살림이었지만, 불행하다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집 안에서 큰 소리가 나거나, 아내가 눈물을 흘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조금씩 나아지리라. 그러면 나는 아내에게 하얀 원피스를 선물하고, 아내와 나는 각자 아이의 오른손과 왼손을 잡고 유채꽃밭을 걸어야지. 아내는 장롱 안에서 빨간 가방을 꺼내 메고, 아이가 넘어지면 내게 주었던 노란 손수건으로 아이의 상처를 정성스레 닦아 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아빠, 나!”
재희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무심코 재희의 손을 뿌리치고 말았고, 어린애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나는 당황해 재희를 안아 일으키고 무릎이며 팔꿈치를 살펴보았다. 아이는 울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다.
“엄마 생각 해?”
나는 울고 싶어졌다.
아내는 재희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돈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놈의 돈이 없어 차일피일 병원 가는 것을 미루다보니 어느 새 늦어버리고 말았다. 블라인드가 쳐진 병실이 아니라, 창문에 신문지를 붙여 둔 단칸방에서 겨울 이불을 뒤집어쓰고 떨다가 죽었다.
아마 아내는 마지막 순간에 아이에게 먹일 분유를 타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겨우 기어 다니기 시작할 나이였던 재희는 엄마가 끝내 놓치고 만 빈 젖병을 안고 잠들어 있었고, 내가 집에 들어오자 옹알이 소리로 웃으며 나를 불렀다. 그 때부터 나는 왠지 아이가 무서웠다.
“다친 데 없지? 아빠 왜 불렀어?”
재희가 안내문을 가리켰다. 읽어 달라는 모양이었다. 안내문에는 장자못 설화가 적혀 있었다. 며느리는 장독대 뚜껑을 덮지 않은 것이 기억나 뒤를 돌아보았고, 그대로 돌이 되어버렸단다. 우스운 이야기였다. 나는 다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유채꽃이 피려면 아직 두 달은 더 기다려야 했지만, 장미정원에는 장미가 만개했다고 한다. 나는 재희를 안고 천천히 둘레길을 따라 장미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옛날 장자가 살던 자리에서 커다란 고기들이 뻐끔뻐끔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물고기가 숨 쉰 자리에서 동심원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재희가 내 옷깃을 꼭 잡고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심원이 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부스스 바람이 떨려옵니다. 바람이 떨리니 비자나무숲도 함께 떨립니다. 살림이 가지런히 정리되어있고 마당에는 은행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져 손님들을 먼저 맞이합니다.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고택에서 마른기침 한번 나더니 새하얀 버선을 신은 고산 윤선도선생이 걸어 나왔습니다. 크게 한숨을 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몸종을 불러 앞 강가에 나가자고 말했습니다.
“바람이 잔잔히 부는구나. 고기를 잡을까. 그냥 낚싯대만 드리울까.”
한손에는 부채를 들고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봅니다. 숨 한번 쉬고 시조 한번 읊으며 한가로이 시상을 떠올리고 있었지요.
그 때 고산의 증손인 윤두서 선생이 멀찌감치 고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윤두서 선생은 윤선도 선생께 가볍게 인사를 올린 뒤 가만히 윤선도 선생이 시조를 읊는 것을 듣고 있었지요. 그러다 어렵게 말 한마디를 붙였습니다.
“한양의 소식은 이제 궁금하시지 않으신가봅니다.”
“그래. 이렇게 강과 바람과 흙과 함께하는 데 한양인들 벼슬인들 그 무엇이 이보다 더 좋겠느냐.”
“예. 저도 외조부를 따라 여기서 시를 짓고 자연과 벗 삼아 지내는 삶이 더 좋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윤두서 선생은 자리에 앉아 오늘 강가에서 바라본 갈대와 물결 그리고 바람의 존재를 알려주는 작은 꽃들의 움직임을 시로 표현하기 위해 짧게 그림을 그려놓았습니다.
윤두서 선생은 즐겨 쓰던 붓이 닳아 새로운 붓을 사기위해 화방에 들렀다가 우연히 중국의 한 화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순간 화책에 매료된 선생은 곧바로 화책을 사들고 집으로 왔지요.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림을 보는 순간 시조를 읊고 시를 완성해나가는 것만큼의 감동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윤두서 선생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바라본 강, 바람, 풍경들을 쉼 없이 그려나갔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는 줄도 모른 채 붓을 계속 휘둘렀지요.
날이 밝았으나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한 나머지 매일 문안인사를 드리는 시간을 놓쳐버렸습니다. 큰일이라도 난 줄 안 윤선도 선생이 윤두서 선생의 집에 찾아왔지요. 그런데 방안에는 수없이 그려놓은 그림들과 화선지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윤두서 선생은 조부인 윤선도 선생에게 어젯밤 있었던 일을 말했습니다.
“두서야.. 그렇게도 그림이 좋으냐.”
“예. 그림은 글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강한 인상을 주고 더 깊은 여운을 남기기에 좋습니다.”
“그래도 난 네가 나와 같은 길을 걸었으면 좋겠구나.”
할아버지 윤선도의 만류에도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은 윤두서 선생은 자연풍경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은 풍속화를 그리는 데 열심을 다했습니다. 비록 유배지에서의 생활이었지만 이로서 더욱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요.
윤두서 선생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본 윤선도 선생도 끝내 그 고집을 꺾을 순 없었습니다.
며칠 뒤 윤선도 선생과 윤두서 선생은 예전의 그 강가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윤선도 선생과 윤두서 선생은 각자 먹 그리고 화선지를 앞에 두고 말없이 붓을 들었습니다.
윤선도 선생은 해남의 물과 달, 바위와 소나무, 대나무의 덕성을 종이 한 장에 담았고 윤두서 선생은 화선지 한 장에 얇은 붓이지만 정확한 필치로 강하고 힘 있게 해남의 정경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내었습니다.
윤선도 선생의 한 장의 시조와 윤두서 선생의 한 장의 그림이 어우러져 초록비가 내리는 해남에 하얀 불꽃을 만들어냈습니다.
주말아침부터 남편은 머리가 복잡하다며 아스피린을 찾았다. 얼마 전 이직한 회사에서의 업무스트레스와 잦은 야근 때문인 것 같다며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사실 과도한 피로를 풀지 못한 탓도 어느 정도 있었다. 삶에 쉼표 하나 그리지 못하고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 꼬맹이는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하다는 아빠 다리에 매달려 놀러가자고 성화였다. 남편은 그저 쉬고 싶다며 아이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동화책 하나를 쥐어주었다. 아이는 동화책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꾸만 남편을 귀찮게 했다.
“자기야 그러지 말고 오늘 망우리 공원 다녀오는 거 어때? 자기도 맑은 공기 쐬면서 머리 좀 식히고 우리 집 요 꼬맹이랑 놀아주기도 하고. 응?”
남편은 보나마나 귀찮다고 하겠지만 특기에 없는 콧소리를 내가며 애교를 부렸다. 애교가 먹혔는지 아니면 정말 머리를 식히고 싶어서였는지 남편은 선뜻 그럴까 했다. 남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간편하게 나들이 짐을 꾸렸다.
망우리 공원에는 사람이 많지도 적지도 않게 적당히 분산되어 머무르고 있었다.
“자기야, 여기가 사색의 길이래. 오늘 여기 걸으면서 생각들 좀 정리하고가.”
아이는 모처럼 나온 나들이 길에 신이나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이를 진정시키고자 불러 세웠다.
“도진이 너, 여기가 어딘지 알아?”
“엉, 여기 공원이잖아. 공원!”
“맞아, 공원이야. 그런데 여기 원래는 공동묘지였어. 도진이 공동묘지 알지? 으으으 귀신 나오겠다!”
아이를 골려주니 으악 하면서 아빠 품으로 쏙 숨었다. 아이를 골려주려고 꺼낸 이야기였지만 사실이었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공동묘지라는 이미지를 개선하고 휴식공간으로의 탈바꿈을 거치자 많은 사람들이 찾기 시작한 곳이다. 사실 아이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도진아, 엄마가 여기는 ‘사색의 길’이라고 했지? 사색의 길이 뭐냐면 조용히 생각을 하며 걷는 길이란 뜻이야. 도진이 학교 복도를 걸을 때 조용조용히 걸어야 하지? 도서관에서처럼.”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도 그렇게 걷는 거야. 조용히. 그리고 엄마가 여기가 공동묘지라고 했지? 무서워 할 것 없어. 이곳에는 일제에 항거하신 독립운동가 그리고 만해 한용운 선생님과 소파 방정환 선생과 같은 선생님들이 계신 곳이야.”
언제부턴가 아이와 함께 남편도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남편과도 이곳은 처음이었기에 그럴 것이다. 늘 집근처 공원이나 한강을 찾곤 했는데 오늘은 모처럼 이곳을 오자고 우긴 이유가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내 말을 백프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알아듣겠다는 듯 이마에 힘을 잔뜩 주고 뒤꿈치를 살짝 들며 사뿐사뿐 걸었다. 아마 복도에서 걷듯이 조용히 걸으라고 한 탓이었다. 웃음이 풋 나오려는 걸 참고 나도 사색에 잠겨보려 했다. 오랜만에 남편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이곳이 삶과 죽음이 이어지는 공간이 아닐까. 전혀 무섭지도 오싹하지도 않은 담담하고 경건한 느낌이었다. 공원의 또 다른 모습이자 서울의 또 다른 모습이랄까. 서울의 화려한 겉모습에 이렇게 잠잠한 공간이 있다는 것이 오묘했다.
남편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살짝 눈을 감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 길이 사색의 길인만큼 혼자만의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저 남편이 눈을 떴을 때 모든 근심이 내려놓아지길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