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싸우는 소리에 낮잠에서 깨었다.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다가 쨍그랑 하는 소리에 눈이 번뜩하고 뜨인 것이다. 할아버지께선 또 아버지가 만드신 도자기를 던지신 모양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싸우고 있는 방 문 앞에서 귀를 쫑긋하고 세우며 말들을 엿듣고 있는데 엄마가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고는 방으로 들어가라고 버럭 소리치셨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요 근래 종종 싸우셨다. 그 발단은 아버지의 뜬금없는 중대발표로부터였다. 오래 다니시던 회사를 그만 두시고 도자기를 만들고 싶으시다는 것이었다. 사실 할아버지께서는 오래도록 도자기를 만드시던 도예장인이시다. 그래서 아마 아버지는 할아버지께서 도자기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자라 오래도록 그 꿈을 키워 오신 듯했다. 그렇지만 워낙 엄한 할아버지 앞에서 도자기를 만들고 싶다는 말을 쉬이 꺼내지 못한 채 지난 세월을 지나오신 듯했다.
“그만 두라고 하지 않았어? 도자기는 무슨 놈의 도자기야 네가. 다 때려 부수기 전에 그만 두어라.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네 어깨에 딸린 처자식은 어쩌고 너 혼자 여기 틀어박혀서 흙이나 만지작거리고 있겠냐는 거냔 말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아직도 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좀처럼 양 손을 어쩌지 못하고 숨만 씩씩 내뱉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종종 할아버지 작업실에 계신 적을 본 적은 있었는데 이렇게 밤낮없이 할아버지 작업실에만 계신 적은 없었다. 아버지가 도자기를 만들어내면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망치로 깨부쉈다. 그래도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대들지 않고 부서진 조각들을 모아 마당 한켠에 쌓아두셨다.
그러던 어느 날 술을 잘 드시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어떻게 된 일인지 술이 잔뜩 취하셔서는 작업실로 들어가셨다. 그러더니 도자기들을 손수 다 깨부수며 서럽게 우셨다. 아버지께서 눈물을 보이시는 것을 처음 보았는데 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셨다. 어깨를 들썩이시며 아끼시던 도자기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어머니와 할아버지께서 달려가셨는데 한동안 아무도 아버지를 말리지 않았다. 그저 한 발자국 떨어져 아버지의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듣고 계시죠, 아버지. 저요 아버지처럼 멋진 옹기장이가 되고 싶었다고요. 이렇게 흙 만지고 있는 것도 좋고 행복한데, 이젠 저도 제가 하고 싶은 것 해도 되지 않습니까? 예? 아버지, 대답 좀 해보세요. 예?”
취중진담이란 걸 눈앞에서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버지는 가슴 깊이 묵혔던 말들을 할아버지 앞에 고스란히 뱉어내고 있었다. 아버지 모습을 보니 어쩐지 그렇게 커 보이시던 아버지가 한없이 작아지신 것 같아 마음이 저릿해왔다. 할아버지는 멀찌감치 에서 뒷짐을 지고 계시다가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 아버지가 깬 도자기 파편들을 주우셨다. 그리고는 한동안 식어버린 가마 앞에 서계셨다.
다음 날 아버지는 머리를 지그시 누르시곤 식탁에 앉으셨는데 할아버지께서는 아침도 거르신 채 아침 일찍 외출을 하셨다고했다. 아버지는 간밤의 일이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와 대면하는 것이 자신이 없던 차였다가 도리어 잘 된 것 같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셨다. 아침 식사가 끝날 무렵 할아버지께서 돌아오셨는데 한 손에는 구하기 어렵다는 백토와 도예도구들을 사들고 오셨다. 그리고는 무심한 듯 마루에 내려놓으시고 아버지께 나갈 채비를 하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점퍼를 챙겨들고 나갈 준비를 마치셨다.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지도 않으셨다. 그저 할아버지 발길을 뒤따라 갈 뿐이었다. 한참을 걷고 또 걷다보니 곤지암 도자기공원에 다다랐다. 할아버지께서는 간밤에 있었던 일도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등의 말씀도 없으셨다. 그저 도자기 공원에 놓인 여러 도자기들과 도예 작품들을 세심한 눈으로 바라보시기만 하셨다.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뒤에서 할아버지의 시선을 따라 감상하였다. 그리고 어느덧 오래던 가마 앞에 다다르셨다. 전통가마라고 쓰인 그곳에서는 언제 불을 떼었는지도 모를 오래된 가마 하나가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할아버지께서 입술을 떼셨다.
“그게 그리 하고 싶더냐. 그리 하고 싶어. 하고 싶으면 해야지 어찌 하겠어.”
“아버지.”
“온 신경을 이 투박한 손끝에 실어야 한다. 아름다움을 빚는 다고 생각해야지.”
집으로 돌아오신 후 할아버지는 식었던 가마에 다시금 불을 지피셨다. 그리고 오래도록 그 앞에 서계셨다. 아버지가 작업실에서 나오기 전까지.
기다리는 일은 항상 생각보다 더디게 다가온다. 출근길의 버스나 고기가 낚시 바늘을 잡아 무는 순간, 아내의 귀가나 유채꽃이 피는 시기 같은 것들 말이다. 재희의 성화에 오늘도 호수공원에 나왔지만, 내가 이곳에서 사랑하는 것은 유채꽃뿐이다.
“아빠! 나 저 쪽!”
아이는 말을 배우는 속도가 더뎠다. 아내의 부재 때문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아마 나 때문일 것이다. 아내는 명문대를 졸업한 엘리트였고, 나는 중학교 졸업을 최종 학력으로 가진 막노동꾼이었다. 그날, 아내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빨간 가방을 멘 채 유채꽃밭에 서 있었고, 나는 공원을 재정비에 동원되어 자재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우리의 눈이 마주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썩어가던 더러운 하천이 말끔히 정비되어 아름다운 호수 공원으로 바뀐 그 해에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살림을 차렸다. 나는 쓰러진 장모님 앞에서, 아내를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다며 무릎을 꿇고 빌었다.
단칸방에서 시작한 살림이었지만, 불행하다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집 안에서 큰 소리가 나거나, 아내가 눈물을 흘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조금씩 나아지리라. 그러면 나는 아내에게 하얀 원피스를 선물하고, 아내와 나는 각자 아이의 오른손과 왼손을 잡고 유채꽃밭을 걸어야지. 아내는 장롱 안에서 빨간 가방을 꺼내 메고, 아이가 넘어지면 내게 주었던 노란 손수건으로 아이의 상처를 정성스레 닦아 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아빠, 나!”
재희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무심코 재희의 손을 뿌리치고 말았고, 어린애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나는 당황해 재희를 안아 일으키고 무릎이며 팔꿈치를 살펴보았다. 아이는 울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다.
“엄마 생각 해?”
나는 울고 싶어졌다.
아내는 재희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돈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놈의 돈이 없어 차일피일 병원 가는 것을 미루다보니 어느 새 늦어버리고 말았다. 블라인드가 쳐진 병실이 아니라, 창문에 신문지를 붙여 둔 단칸방에서 겨울 이불을 뒤집어쓰고 떨다가 죽었다.
아마 아내는 마지막 순간에 아이에게 먹일 분유를 타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겨우 기어 다니기 시작할 나이였던 재희는 엄마가 끝내 놓치고 만 빈 젖병을 안고 잠들어 있었고, 내가 집에 들어오자 옹알이 소리로 웃으며 나를 불렀다. 그 때부터 나는 왠지 아이가 무서웠다.
“다친 데 없지? 아빠 왜 불렀어?”
재희가 안내문을 가리켰다. 읽어 달라는 모양이었다. 안내문에는 장자못 설화가 적혀 있었다. 며느리는 장독대 뚜껑을 덮지 않은 것이 기억나 뒤를 돌아보았고, 그대로 돌이 되어버렸단다. 우스운 이야기였다. 나는 다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유채꽃이 피려면 아직 두 달은 더 기다려야 했지만, 장미정원에는 장미가 만개했다고 한다. 나는 재희를 안고 천천히 둘레길을 따라 장미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옛날 장자가 살던 자리에서 커다란 고기들이 뻐끔뻐끔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물고기가 숨 쉰 자리에서 동심원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재희가 내 옷깃을 꼭 잡고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심원이 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사람은 얼마만큼의 기억을 얼마나 똑똑히 저장할 수 있을까?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교를 통해 어떤 것을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 4세 이하의 어린 시절은 기억에 없다. 아무리 기억을 해내려고 해도 머릿속은 텅 비어 있을 것이고 기억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은 아마 어릴 적 모습을 담아둔 사진첩을 통해서 유추해 낸 단편적인 조각들일 것이다.
할머니의 기억력은 점차 감퇴되셨다. 처음에는 그저 노화의 한 부분이리라 생각하셨다고 했다. 아이를 출산 하면 기억력이 조금 떨어져 자주 깜박깜박 하신다고 하는데 우리 할머니는 열 두 남매를 출산 하셨으니 그럴 만도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할머니께서 노인성 치매를 앓고 머지않아 급격히 상태가 나빠지셔서 생각보다 빨리 하늘나라로 가버리셔서 그런지 엄마는 항상 도끼빗으로 머리를 콕콕 두드리시며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반복해서 읽으셨다. 그리고는 심심풀이라면서 고스톱으로 하루 점을 치시기도 하셨다. 화투가 치매예방에 좋다나. 엄마는 염려하는 것 보다 기억력이 좋았다. 어쩌면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은 것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엄마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내가 어렸을 때 동네에서 말 타는 아저씨를 따라 갔을 때 입었던 초록색 멜빵바지를 다 기억하고 계실 정도였다.
그런데 엄마가 너무 정신건강에만 열중을 한 탓일까 엄마를 괴롭힌 병은 머릿속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엄마 몸속에 침투한 몹쓸 암덩어리. 엄마는 자궁암판정을 받았다. 의사도 엄마의 상태에 대해 급격히 나쁘다 혹은 호전될 가능성이 높다는 등의 확실한 입장을 표명하지 못했고 일단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으며 상태를 보자고 했다. 이렇게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의사의 멱살이라도 잡아끌며 당장 수술이라도 하라고 악을 쓰고 싶었지만 의사의 지나친 냉담한 태도에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엄마는 다른 아닌 암이라는 말에 상심이 큰 듯했다. 나는 어렸을 때 엄마가 없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때 눈물이 날까 눈물이 나지 않을까를 생각한 적이 있다. 물론 눈물이 나겠지로 생각을 마무리했지만 이렇게 막상 엄마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조그마한 눈에 눈물이 넘치도록 고였다. 엄마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집에 가서 입원을 위한 옷가지 몇 벌과 생활필수품들을 챙기고 다시 병원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당신 마음도 채 추스를 시간도 없이 나머지 가족들에게 어떤 말을 꺼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대뜸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바다를 갈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나는 가까운 갈치호수로 엄마를 모셨다. 엄마는 한동안 호숫가를 바라다보았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실까? 현재 엄마의 상황에 대한 원망의 생각일까 아니면 벌써부터 드는 두려움일까 혹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엄마, 괜찮아. 항암치료 받으면 암세포도 줄어들고 수술하고 나면 싹 다 사라질 거야. 그러니까 마음 굳게 먹고. 응?”
“응”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난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하나도 안 무서워. 엄마도 그랬으면 좋겠어. 긍정적인 생각들만 하라고.”
“그래. 할머니가 보고 싶네, 갑자기.”
“갑자기 할머니는 왜. 자꾸 슬픈 소리만 할 거야? 그러지 말고 우리 저기 간장게장 집에서 맛있는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자. 어차피 병원 들어가면 밍밍하고 싱거운 밥들만 계속 먹어야 할 텐데 오늘까지는 먹고 싶은 거 먹고 들어가서 열심히 치료받자, 응?”
“낙조가 보고 싶은데, 반월호수로 가자. 거기 가서 해 지는 것만 보고 들어가자.”
싫다는 나를 이끌고 엄마는 굳이 반월호수로 옮겼다. 마침 어둑어둑 해지더니 금세 해가 저물었다. 어쩐지 슬픈 기운이 엄마와 나 사이를 감도는 것 같아 집으로 가자고 하려던 차에 엄마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떼었다.
“엄마, 잊어버리지 마. 그리고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도 잊어버리지 말고 다 기억해줘.”
“엄마 정말 이럴래? 자꾸 왜 슬픈 얘기만 하는 건데?”
나는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고 엄마도 흐느껴 우셨다. 해가 진지 오래되었지만 엄마와 나는 잊지 않으리라는 약속만 되풀이하며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했다.
나는 할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짜증이 많고 늘 우울해하셨으며, 전쟁 때 팔 한 쪽을 잃어 보기 흉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입만 여시면 세상을, 정부를,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저주하고 비관하는 말만을 하셨기에 할아버지 댁에 방문하는 것은 낙천주의자인 내게는 꽤나 고역이었다. 자식들이 모두 성공한데다가 할아버지를 극진히 모셔서, 생활비로 쓰고도 저축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 매달 들어오시는데도 굳이 불편한 몸으로 밭을 일구시는 억척스러운 면도 싫었다. 술을 드신 날이면 좋은 옷을 입은 자식들이며 손주들에게 손가락질을 하시며 우셨고, 서울에 사시는 것을 한사코 마다하시고 먼 김포땅 끝자락에 집을 지으셨다. 어렸던 나는, 그 괴팍한 성미의 할아버지에게 어른들이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린 적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지난 해 겨울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술에 잔뜩 취하셔서 집으로 돌아오시다 넘어지셨는데, 그만 일어나지 못하시고 동사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유골을 강에 뿌리고 돌아오던 날,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기일마다 애기봉에 오를 것을 제안하셨다.
“왜 하필 산에 올라요?”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무서워하고 피하기만 하는 통에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줄 기회가 없었다고 하시며 긴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 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할아버지가 실향민이며, 할머니를 북쪽에 두고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쟁 중에 한쪽 팔을 잃은 할아버지는 아내와 아이들을 부탁했던 친구 집을 찾았다. 아내가 달려 나와 자신을 맞아 줄 줄로만 알았는데, 그곳에는 아이들뿐이었다. 할머니는 아이들을 감싸다 크게 다쳐 도저히 남으로 넘어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냥 자신을 버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라고 하셨고, 워낙에 급박한 상황에 친구네 가족은 할머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아이들만을 겨우 챙겨 남으로 넘어왔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불편하신 몸으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형제를 열심히 키우셨지만, 한편으로는 북에 두고 온 할머니 생각에 매일같이 괴로워하셨다고 한다. 돌아가셨으면 시신 수습도 제대로 못 한 것이, 살아 계시면 외롭게 혼자 살아 계실 것이 걱정이셨다. 자식들이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북한에 계실 할머니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아 하셨다고 한다.
애기봉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에 있었다. 애기봉 전망대에 오르면 강 너머의 북한에 있는 마을까지도 맨눈으로 건너다 볼 수 있었는데, 텔레비전에서나 접하던 북한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애기봉이라는 이름은 병자호란 때 혼자 강을 넘어 피신한 기생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애기라는 이름을 가진 이 기생은 평양 감사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자신만 강을 건너고 평양 감사는 그대로 청나라에 잡혀가자 감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이 봉우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후에 이것이 이산가족의 모습 같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이름 없는 봉우리에 애기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나는 어쩌면 할아버지도 할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꿈처럼 강을 건너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장난감을 들고 있던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우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때 그 손을 잡아드릴 수 있었다면 할아버지는 울음을 그치셨을까. 할아버지의 고개. 나는 애기봉에 그런 이름을 붙여 보기로 했다.
“임신하면 태교가 가장 중요한 거 몰라? 그리고 그렇게 사람 많은 곳 갔다가 뭔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원래 임신하면 좀 예민해진다고는 들었지만 아내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머리에서 뿔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들꽃 같던 아내는 여전히 예뻤지만 입덧을 꽤나 심하게 하더니 좀 더 예민해진 것 같았다.
“그래, 알겠어. 그런데 여름휴가로 그냥 집에만 있겠다고? 그냥 주말이랑 별다를 게 없잖아. 그리고 자기도 바깥바람 쐬고 그러면 입덧도 좀 나아지고 기분전환도 될 거야. 그러니까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고 잘 생각해봐.”
“내가 지금 예민하게 군다고 생각하는 거구나. 내가 나 좋자고 그래? 이게 다 우리 아가 생각해서 이러는 거잖아.”
네버엔딩이다. 내가 수그리고 들어가지 않으면 좀처럼 싸움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조건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해야 했고 그러는 것이 나도 편했다. 그래도 일 년에 한 번뿐인 여름휴가를 이렇게 집에서 아내와 투덕거리며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내는 플로리스트다. 그런데 혹여나 아이에게 좋지 않을까 하여 임신을 한 뒤로는 꽃꽂이를 하지 않았다. 집에 있던 꽃들도 시들어 버리자 그냥 내다버렸고 오로지 아이를 위한 태교음악과 미술전시만 간간히 보러다닐뿐이었다. 속으로 그렇게 유난 안 떨어도 된다고 하려다가 더 큰 불씨로 돌아올까 봐 말을 삼켰다.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 하나 빵빵하게 틀지 못하게 하여 연신 손부채질을 해가며 선풍기 앞에서 SNS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회사 동료 중 한명이 폭포사진을 하나 올렸다. 의례적으로 좋아요를 눌러주려다 궁금한 마음에 사진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그곳의 폭포는 사진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더위가 싹 가시는 것처럼 시원해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폭포의 이름이었다. ‘피아노 폭포’. 폭포가 떨어지면서 피아노 소리를 내나? 궁금한 마음에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여름휴가로 가까운 곳을 다녀왔다고 했다. 특히나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다면서 집도 가까우니 한번 다녀오라는 조언과 함께. 머리에 반짝하는 불빛이 들면서 나는 곧장 아내에게로 달려갔다.
“자기야, 내가 인터넷에서 본 곳인데 시원한 여름휴가도 즐기면서 태교도 할 수 있는 그런 곳 이 있는 거야. 어때? 끌리지? 내일 당장 가보자. 절대 휴가를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말 재미있는 곳 같아서 그래, 이름도 피아노 폭포랑 피아노 화장실이라니까?”
아내는 내 여름휴가 집착증에 두 손을 든 것인지 아니면 나처럼 피아노 폭포라는 말에 호기심을 가진 것인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아, 이게 얼마 만에 나들이야? 그치? 자기도 막상 나와 보니 기분 좋지? 집에만 있으면 아기도 심심하고 답답할 거야.”
“응, 좋네. 바깥바람도 쐬고. 근데 에어컨 좀 줄일 수 없어? 창문을 열자 차라리.”
아내는 쉬이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모처럼 밝은 모습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피아노 폭포는 교외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 사진을 찍는 곳이 피아노폭포 인듯했다. 그런데 피아노 폭포보다 더 먼저 우리 둘의 시선을 끈 곳은 다름 아닌 그랜드 피아노 모양을 한 건물이었다. 백색의 그랜드 피아노 형식을 한 건물은 화장실이라고 했다. 경기도 수원에 반딧불이 화장실은 들어보았어도 피아노 화장실은 또 처음이다. 신기한 듯 구경을 하는데 계단을 오를 때마다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랜드 피아노 선율에 절로 눈이 감겼다. 아내는 화장실은 찝찝하다며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더니 은근히 노래를 감상하고 있는 눈치였다. 밖으로 나가보니 네다섯 살 난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었고 어른들은 92m 높이의 피아노 폭포에 감탄을 쏟아 붓고 있었다. 하수처리 방류수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인공폭포라는 데 꽤 웅장한 소리와 함께 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공간에 시원하게 솨아아 하고 쏟아지는 폭포를 보니 멀리 계곡에 와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때? 나오길 잘했지?”
“응, 그러네. 여기 우리 아가 태어나면 또 와도 좋겠다. 아기들 노는 거 보니까 보기도 좋고. 우리아가 빨리 만나고 싶어.”
아내의 입에서 또 오고 싶다는 말이 나오니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마치 큰 성과를 내 회사에서 인정받은 사람처럼 기분이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도 콧노래가 흘러나왔고 언젠가 아이와 함께 오는 그 날에도 피아노 폭포에서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흐를 것 같다.
“단풍이 다 똑같은 단풍이지, 왜 꼭 산에까지 와야 하는 거야?”
남자 친구가 입대 전에 마지막으로 나와의 추억을 만들고 싶어 선택한 여행지는 소요산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수십 차례 산행에 나섰던 남자 친구인지라 우리나라의 유명한 산이란 산은 거의 다 가 보았다는데, 유독 소요산은 꼭 나와 함께 오르고 싶었다는 것이다. ‘길 따라 계곡에 드니 봉우리마다 노을이 곱다 험준한 산봉우리 둘러섰는데 한 줄기 계곡물이 맑고 시리다’는 김시습의 시까지 읽어주는데, 마지막 여행이 산이라니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루 종일 투정을 부리고 떼를 쓸 생각이었는데, 소요산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들떠버렸다. 연리지문을 보자마자 기분이 좋아져 기념사진을 찍자고 외쳐 버린 것이다. 남자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소요산에서 수행하던 원효 대사와 그런 원효 대사를 사랑한 아름다운 요석공주의 사랑이 연리지처럼 이루어질 수 있었기를 바라는 뜻이 담긴 문이라는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그럼 그렇지. 그냥 단풍이 예뻐서 왔을 리가 있나. 남자 친구는 토라진 나를 위해 또 이야기를 한 보따리 준비했을 터였다. 이야기를 듣고 내가 금방 기분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괘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해서 마음이 근질거리는 통에 또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해골 물 마신 그 원효 대사? 스님한테도 사귀는 사람이 있었어?”
“당연하지. 원효 대사의 아들이 설총이잖아.”
남자 친구가 들려 준 이야기는 교과서에 실린 원효 대사의 사상 이야기보다 몇 배는 더 재미있는 것이었다. 어느 날, 원효 대사는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줄 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네.’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무열왕은 원효 대사가 큰 인물이 될 아들을 얻으려 하는 모양이라 생각하여 일찍이 과부가 된 자신의 아름다운 딸인 요석 공주를 신붓감으로 내어 주기로 결심했다는데,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도 서로에게 관심이 있었단다.
요석 공주는 원효 대사에게 승복과 모란꽃을 선물하기도 했다는데, 이런 마음을 눈치 챈 무열왕이 관리를 시켜 요석 공주의 거처에서 가까운 다리 위에서 원효 대사를 밀어 물에 빠뜨리게 했다는 것이다. 물에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요석궁으로 들어간 원효 대사는 꼬박 사흘을 요석 공주와 함께 지내게 되었고, 요석 공주는 설총을 잉태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원효 대사는 스님이잖아.”
“그렇지. 그래서 원효 대사는 평생을 파계승으로 살아야 했어.”
사흘 뒤 원효 대사는 소리 없이 궁을 나왔고, 스스로를 소성거사라고 칭하며 속세를 떠돌며 속죄 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그러던 도중 수행에 전념하기 위하여 찾아온 곳이 바로 이 소요산. 예로부터 문인들이 이 산을 찾아 거닐었다고 해서 소요(逍遙)라는 이름이 붙은 곳인데, 원효 대사도 소요산에서라면 속세에서의 미련을 잊고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원효 대사를 잊지 못한 요석 공주도 소요산에 조그마한 별궁을 짓고 설총과 함께 소요산에 살았다. 하지만 다시 불도에 정진하는 원효 대사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어 원효 대사가 있는 방향을 향하여 원효 대사를 위해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원효 대사도 이를 알게 되어 산봉우리 하나에 요석 공주를 생각하며 공주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단풍 보러 온 게 아니라 원효 대사랑 요석 공주처럼 되고 싶어서 온 거라 이거야?”
남자 친구가 정곡을 찔린 듯 걸음을 빨리 했다. 나는 웃음을 꾹꾹 참으며 그 뒤를 따랐다.
요석 공원부터 공주봉, 원효 폭포에 이르기까지 소요산에는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를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이 붙은 곳이 많았다. 노을처럼 예쁘게 물들어 있는 소요산의 단풍을 바라보며, 문득 연리지문에 장식되어 있던 단풍이 떠올랐다. 요석 공주의 고운 사랑을 단풍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남자 친구는 다음 달이면 군대에 간다. 남자 친구가 군대에 가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요석 공주는 평생을 기다렸는데, 뭐. 내년에는 혼자 소요산에 올라 보기로 결심하며 남자 친구의 손을 잡았다.
중학교 3학년 국어 시간, 같은 반 아이들은 우리가 사는 동네가 교과서에 나온다며 즐거워했지만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내가 원미동에 살게 된 것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마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한 사람처럼 나는 눈앞에 닥쳐온 걱정들을 빠르고 무딘 방법으로 해결하길 원했으며 별다른 불만사항은 물론이고 별다른 꿈도 없었다.
넉넉지 못한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난 탓일까,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 본 곳이라고는 국립공원이나 친척 집뿐이었다. 또래들과 같은 시기에 컴퓨터를 사지도 못했고, 유원지나 해외여행 같은 곳에 가자고 졸라본 적도 없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디지털 시대를 달릴 때 나는 홀로 아날로그 시대를 걸었다.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틀 만에 집에 들어오신 아버지에게 방학숙제를 위해 박물관에 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웃으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주셨고, 나는 묵묵히 오천 원짜리를 받아들고 집을 나섰다. 내가 원미동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부천 만화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하신 아버지 때문이었다. 좀처럼 돈을 벌기 힘들다는 직업을 택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자간의 대화가 갈수록 줄고 있는 것 또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원미 1동의 연립주택 203호에서 가장 가까운 박물관은 지하철로 네 정거장 거리에 있는 부천 만화박물관.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현실적인 범주 안에서의 판단이었다. 대강 훑어보고 견학문을 쓸 요량으로 빠르게 걸었다. 영화관에 가기보다는 만화방에 틀어박혀 있는 경우가 훨씬 많은 나였지만, 아이들처럼 뽀로로를 외치며 뛰어다닐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멈추어 선 곳은 볼록거울 앞이었다. 돌연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내 모습이 사방에 펼쳐진 것에 놀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기저기 뒤틀리고 구부러진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보며 온갖 생각을 다 해 보았다.
왜 가난한 집에 태어났을까. 기껏 외출할 기회가 생겼는데, 왜 고작 집 근처에 위치한 박물관에 와야 하는 것일까. 내 어깨는 왜 항상 움츠러들어 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여기에 이상한 거울을 설치해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건지에 대한 의문에 코너의 이름을 보니 ‘만화가의 머릿속’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한 마디가 불쑥 튀어나왔다.
“뭐야.”
웃음이 터진 나는 만화가의 머릿속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찬찬히 살펴보았다. 엉뚱한 상상력과 꿈이 넘치는 일상. 그곳은 아버지의 머릿속이었다. 행복과 불행은 종이 한 장의 차이라 하였듯이, 우스꽝스러움과 독특함 또한 종이 한 장의 차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폐관시간까지 박물관을 떠나지 못했다. 만화가들은 여전히 가난해 보였고,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내 몫의 저녁상을 차려놓은 채로 잠들어계셨다. 분명 어젯밤에도, 어쩌면 그제 밤에도 밤샘을 하셨을 것이다. 나는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어 아버지에게 덮어드리고는 다 식은 국을 맛있게 떠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한국 만화 영상 진흥원 안에 위치한 비즈니스 센터로 일터를 옮기셨다. 입주 경쟁이 꽤 치열한 곳이라고 했는데, 용케 심사를 통과하셨다. 한국 만화 영상 진흥원과 부천 만화박물관이 부천 영상 문화 단지 안에 나란히 입주해 있었다. 사무실 이전을 도우며, 나는 아버지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빠, 나 있잖아. 나도 그림을 그려볼까 해.”
아버지는 대답 대신 웃으셨다.
그날 저녁, 나는 원미동 연립주택의 거실에 누워 <원미동 사람들>을 읽었다. 교과서에 실린 김포 슈퍼와 형제 슈퍼 얘기가 전부인 줄 알았더니 꽤 두꺼운 연작소설이었다. 첫 장을 넘기자 첫 단편의 소제목이 보였다. ‘멀고도 아름다운 동네’. 그곳은 내가 사는 동네였으며, 아버지가 사는 동네였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환승을 위해 모란역에서 서울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거리 너머로 시끌시끌한 장터가 눈에 띄었다. 오늘이 4일이니 모란장이 선 모양이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기일 전후로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이곳을 지나지만, 모란시장이 눈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는 줄곧 모란시장 얘기를 하셨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종종 나를 데리고 시장 구경을 가셨다는 것이었다. 너무 어렸을 때라 그런지 내 머릿속에는 모란시장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인지 나도 모르는 새에 길을 건너고 말았다.
집 근처에 대형 할인점이 생긴 뒤로 전통시장에 발을 들여놓는 것도 처음이었다. 고무줄 바지와 중국제 그릇들, 가짜 골동품, 싸구려 길거리 간식 등 식재료를 제외하고는 없는 이곳에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지를 물었더니, 어머니는 웃으며 ‘다 사람 보러 가는 거지, 뭐.’ 하셨다. 구수한 음식 냄새와 함께 할아버지들의 사투리,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을 보러 온다더니, 정말 동네잔치 같은 느낌이었다. 개고기로 유명한 모란시장이지만, 장날이라 그런지 애완 강아지며 고양이, 토끼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사람이 신기한지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 귀여워 그 앞에 한참을 서 있는데, 갑자기 시끄러운 뽕짝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서 보소. 품바 왔네, 품바!”
노점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던 할아버지 몇 분이 일어서시더니 음악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하셨다. 말로만 듣던 품바 공연이 펼쳐진 모양이었다. 색동옷을 입고 연지곤지를 찍은 아저씨들이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것을 구경하던 나는 어머니와 함께 모란장을 방문했던 기억 중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홉 살짜리의 눈에 비쳤던 품바 공연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넋을 쏙 빼놓을 만큼 시끄러운 것이었다. 저만치서 들려오는 흥겨운 가락에 얼마나 넋이 빠졌던지 나는 그만 어머니의 손을 슬그머니 놓고 공연단 앞으로 달려가고 말았는데,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었으면 될 것을 또 어머니를 찾아 이리저리 헤맸었다. 삼십여 분을 헤맨 끝에야 울음이 터졌고, 근처에서 사탕을 파시던 할머니 한 분이 나를 얼른 안아 올렸다.
“왜 그러냐, 아가. 엄마 잃어버렸누?”
나는 고개만 끄덕거리며 엉엉 울었다. 우는 애 달래는 데 옛날 얘기만 한 게 어디 있겠는가. 할머니는 ‘옛날 옛날에 말이야’ 하며 이야기의 서막을 여셨다. 옛날 옛날에 북에서 온 사람 하나가 북한의 산 이름을 따서 ‘모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었다.
“모란봉도 모란봉이지만, 제 어미가 그리워서 어미 모 자를 쓰려고 했다고도 한디야. 딱 이 자리에서 너처럼 ‘엄마, 엄마’ 하며 울었단 거야.”
다 큰 어른이 엄마를 부르며 우는 모습이 우스워 울음을 그친 나는 할머니가 물려주신 사탕을 빨며 얌전히 어머니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찾아낸 어머니는 내게 매운 꿀밤 한 대를 먹이면서도 사탕을 봉지 가득 담아 손에 들려주셨다.
품바 공연이 끝나고 휑해진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줄곧 모란시장 얘기를 하셨다.
“거기 말이야, 오리도 팔고 병아리도 팔고 네가 좋아하는 커피 사탕도 팔았지.”
내가 어머니만큼 자란 다음에도 어머니는 가끔 비닐봉지 가득 커피 사탕을 사 오셨다. ‘어휴, 엄마는 왜 자꾸 시장 물건을 사오고 그래.’하고 나는 가끔 어머니에게 되려 짜증을 내기도 했다. ‘다 사람 보러 가는 거지, 뭐.’ 하며 멋쩍게 어머니의 모습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