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래된 꿈 중에 하나는 바로 시인이다. 시는 곧 인생이며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여겨왔던 나는 늘 항상 옆구리에 오래된 시집 하나를 끼고 다녔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인지 시를 쓰며 세상을 그리고 현재의 환경을 비뚤어진 필체로 휘갈겨 쓰며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도 나는 내 인생이 탄탄대로의 삶으로 이어질 줄 알았다. 남들처럼 멋지게 시 한편 적어 신춘문예 당선은 물론 등단작가로서 시나 읊으며 살 줄 알았는데 나는 지금 그저 그런 글쟁이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도 조금의 위안이 된다면 국문과를 졸업했다는 희미한 스펙으로나마 자그마한 신문사에 취직을 하여 20여 년간을 묵묵히 시 곁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간간히 내로라하는 신문사의 이름을 달고 올해는 누가 신춘문예 당선이 됬다더라 누가 새로운 시집을 발간했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저 밑바닥에 있던 꿈이 불쑥 하고 올라왔다 다시금 잠잠해지는 것 빼고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달까.
대학시절 나는 내 친구와 함께 ‘담쟁이’라는 시와 문학이라는 동아리에 가입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마치 80년대 영화처럼 빙그르르 모여 앉아 서로의 시를 감상하며 우수에 젖어들곤 했다. 나는 그곳에서 단발머리 여자아이를 좋아했기에 그녀에게 들려줄 만 한 시를 쓰느라 밤새 몇 장의 종이를 찢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내 친구 녀석도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가 좋아서 시를 감상하기 위해서 모인 동아리 모임이 피 튀기는 전쟁터로 변해가고 있을 무렵, 내 친구가 ‘소녀’라는 시로 발표를 할 때였다. 동그랗게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 시의 소녀가 그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와 그 녀석뿐이었다. 어쩐지 그녀는 ‘소녀’라는 시를 무척 좋아했다. 이후 나는 제대로 된 게임도 못해보고 뒤로 물러나야 했고 동아리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탈퇴를 하였다. 이후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친구 녀석은 유명한 시인이 되어 잘 먹고 잘산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서일까 그 친구 녀석에 대한 질투는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저 유명한 시인이 되어 잘 먹고 잘 산다는 그 말에 잠시 동안 생각이 멈춰있을 뿐이었다.
“김부장님, 부장님도 소싯적에 시 쓰셨다면서요? 그럼 신춘문예 같은데 넣어보시지 그러셨어요. 아참, 이번에 칼럼대신에 <소녀>로 등단한 시인B님 시가 연재 될 예정이라는데 부장님 아는 사람일 거라고 하던데요?”
모르는 이야기다. <소녀>로 등단한 시인B라 하면 그 녀석인가 보다. 갑자기 내 책상서랍 제일 밑에 내가 가장 아끼는 시집이 생각났다. 그리고 가끔씩 시를 끼적이던 습작노트도 보기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분명 그 녀석에 대한 질투는 사라지고 난 뒤였는데.
나는 퇴근길에 언젠가 가보겠다며 벼르고 벼르던 시인의 길로 발길을 돌렸다. 젊은 날엔 호기롭게 여기에도 내가 쓴 시가 당당하게 한 자리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 이야기 하고 다녔는데 어쩐지 나는 이 길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녀석이 이 길의 중심 돌이라면 나는 그 곁에 머무는 나무 하나에 지나치지 않는 사람처럼 말이다. 시인의 길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지만 나는 이때까지 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시의 그리고 시인의 언저리에서 머무는 삶처럼 살다 가려는 마음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시인의 길은 생각보다 짧았다. 무언가를 생각하기엔 짧았고 하나하나 음미하며 걷기엔 조금 길었다고 하면 맞겠다. 오늘의 기분을 시로 쓴다면 어떨까 하고 잠깐 생각해봤다. 어쩐지 육두문자를 머금고 들어선 시인의 길에서 지금 이렇게 길 마지막에 서 있는 지금은 나름 홀가분한 기분이 더 컸다.
시인의 길. “다 좋은 말들뿐이군.” 하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 멀리서 여중생들의 무리가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분위기 확 깬다는 생각을 하며 획하고 뒤를 돌아본 순간 여중생들은 시인B, 그러니까 내 친구 녀석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야, 너 <소녀>읽어봤어? 그것도 시라고 썼냐? 촌스럽게.”
“원래 시는 촌스러운 거야. 몰라? 그리고 그 사람 나이가 있잖아. 그 정도면 봐줘. 그리고 요즘 누가 시를 사서 아냐? 그냥 교과서에 나오는 거나 대충 읽다 마는 거지. 그것도 시험에 안 나온다고 하면 시따위 그거 읽지도 않아.”
여중생들은 몇 마디 나누지는 않았지만 꽤나 마음에 맺히는 소리들을 늘어놓았다. 시인B의 시를 제멋대로 평가하면서 말미에는 시따위라며 시를 철천지원수인양 떠들어댔다. 나는 그 여중생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재빨리 시인의 길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시로 쓰여진 그 길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그리고 자기 전에 한동안 쓰지 않던 ‘시 한편을 써야 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저녁때가 다가와 장 보러 나갈 준비를 하자 어린 아들이 또 마트에 가자고 성화였다.
“엄마는 마트 말고 시장 갈 거야. 같이 갈래?”
“싫어! 시장은 냄새난단 말이야!”
아이가 잔뜩 토라진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내 오늘 저 녀석의 볼기짝을 때려 주리라 결심하고 뒤를 홱 돌아보았는데, 일곱 살 밖에 안 된 쪼끄만 게 눈치는 또 삼단이라 벌써 제 방으로 도망쳐버렸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아주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내게 모든 애정을 쏟아 부으셨다. 최신 전자기기를 반에서 가장 먼저 갖게 되는 것도 언제나 나였고, 가정부 아주머니가 말끔히 다려 준 교복을 입고 등교했으며, 방과 후 교문 앞에는 항상 나를 데리러 온 기사 아저씨가 있었다. 친구들은 모두 나를 부러워했고, 내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남들에게 없는 것도 다 있었고, 갖고 싶은 것이라면 언제든지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영화 속의 여주인공처럼 나날이 콧대가 높아져만 갔다.
어느 날은 교문 앞에 나를 데리러 온 기사 아저씨가 없었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두 시간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아버지께 이 일을 다 일러바쳐서 혼쭐이 나게 해 주리라고 벼르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 안이 소란스러웠다.
“영희야, 넌 안에 들어가 있어라.”
한 번도 내게 엄한 얼굴을 보인 적이 없던 아버지였는데, 표정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문에 귀를 바짝 대고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엿들었다. 아버지의 친구에게 명의를 빌려 준 일이 있는데, 모르는 새에 아버지 앞으로 빚이 엄청나게 쌓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가게를 팔고 새로 사업을 시작하겠다며, 나를 할머니께 맡기고 어딘가로 떠나셨다.
갑작스레 시골로 전학을 가게 된 것은 불만이었지만, 전에 사 두었던 워크맨 같은 것들이나 외국에 다녀온 이야기들로 쉽게 새 친구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나는 빠르게 새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고, 학교에서는 모두들 나를 부잣집 딸로 알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고기반찬이 하나도 없는 밥상 앞에 앉을지라도, 학교에서만은 여전히 내가 공주님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게 큰 약점이 하나 생겼다. 바로 할머니가 나물 장수라는 사실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맡아 키우시게 된 이후로 밤낮 없이 나물을 캐러 다니셨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싫었다. 이제는 할머니가 매일같이 내 교복을 다려주셨지만, 우리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보다도 낡은 옷을 입은 할머니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하교하던 나는 저 만치 멀리 길바닥에 앉아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발견했다.
“우리 강아지, 지금 끝난 거여?”
할머니는 내게 반갑게 손을 흔드셨지만, 나는 친구들 앞에서 ‘이상한 할머니네.’하고 시치미를 뗐다. 할머니는 내가 보낸 경멸의 시선을 빠르게 알아차리셨고, 내가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계셨다.
이 년이 지나고, 어느 정도 가세가 회복되어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까지 나는 한 번도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물을 다 팔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신 할머니는 항상 웃는 얼굴로 내게 저녁상을 차려 주셨다. ‘우리 강아지, 배고팠지?’하시면서 말이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는데, 내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서야 내 철없던 행동들을 반성했지만,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걷다 보니 어느 새 시장 입구였다. 간판까지 내 걸고 깔끔하게 새 단장을 마쳤지만, 거기에 서 계시는 노인들의 모습은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
“아이고, 오늘도 나오셨네. 봐봐. 오늘은 고사리가 아주 싱싱해.”
허물없이 건네는 인사들과 웃음이 오갔다. 나는 이 반듯한 신식 시장과 그 안에서 어우러져 피어나는 구수한 웃음들을 보며, 새침데기 고등학생이던 나와 우리 할머니를 떠올린다. 그 때 웃으며 할머니께 인사를 드릴 수 있었더라면, 할머니와의 추억이 몇 갑절은 많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우리 동네에는 더 많은 마트가 들어서겠지만, 나는 그 때에도 골목을 누비며 시장을 찾아 낼 것이다. 그리고 그 귀퉁이 어딘가에서, 또 어느 할머니에게 나물 한 봉지를 사야지. 그런 생각들을 했다.
빙글빙글, 내 꿈속에서 물레와 베틀이 나란히 돈다. 온 세상이 고요하고 새카만 가운데서 달칵달칵, 드르르 하는 소리를 내며 돈다. 나는 홀린 듯 그 앞에 가만히 앉아 물레와 베틀을 보고 듣는다. 물레가 오색실을 뽑아내면, 베틀은 구름을 잣기도 하고 꽃밭을 잣기도 한다. 그 빛깔이 너무도 고와 물레와 베틀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한참 물레와 베틀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문득 물레 건너편에 누가 앉아있는지가 궁금해진다. 아니, 누가 앉아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얼굴이 보고 싶어 슬그머니 일어서면, 항상 꿈에서 깨어버린다.
일어나 보면 눈시울이 축축하게 젖어있기는 했지만 악몽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물레 소리를 듣고 큰 나는 옷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드르륵 드르륵 달칵달칵,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청년 노동자가 되었을 때까지 한결같이 들리는 이 소리들을 몹시 싫어했다.
몇 달만의 휴가를 받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집에는 여전히 물레와 베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물레를 돌리고 계셨다.
“어머니, 요즘 미싱처럼 좋은 것들도 많이 나오는데 왜 여직 물레를 돌리세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퉁명스레 물어보면 어머니는 항상 잔잔하게 웃으셨다.
“너 어릴 적부터 내가 이걸로 네 옷도 다아 만들었는데, 기억나지 않니? 나는 물레만 돌리고 있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물레를 돌리셨고, 나는 그 날 귀를 막은 채 잠을 청했다. 그리고 내가 다시 공장으로 떠날 무렵, 어머니가 건네신 옷 한 벌을 내가 어떻게 했더라.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다시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곱게 천수를 다하여 돌아가신 것이니, 다들 호상이라 말하였다. 나 또한 어머니가 별다른 고통 없이 조용히 눈을 감으신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그 후로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어김없이 드르륵 드르륵 달칵달칵 하는 소리가 함께 들린다.
하지만 물레와 베틀이 나오는 꿈까지 꾸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슬픔은 자연스레 잊혀 졌기 때문일까. 딸아이가 성장하고 결혼함에 따라 내게는 인생의 값진 순간들이 연이어 찾아왔다.
물레가 나오는 꿈의 시작은 섬유박람회에서였다. 대구로 이사 온 지 이제 겨우 한 달. 딸이 중학생 손녀를 데리고 집들이를 왔었다. 아내와 딸이 오랜만에 함께 목욕을 가겠다는데, 손녀는 목욕탕이란 말에 질색을 했다. 대구하면 섬유 아니겠냐며 딸이 내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손녀와 둘이서 가게 된 곳이 섬유 박람회였다.
오랜만에 색색의 옷감들을 보니 생각나는 게 많았지만, 할아버지가 공장 다닌 이야기를 사춘기 소녀에게 해서 무엇 하겠는가. 손녀는 좋아하는 브랜드의 코너가 많아 신이 난 모양이었다. 나는 연신 감탄사를 내지르는 손녀의 발뒤꿈치를 보며 걸었다. 그 때, 손녀가 어디론가 쪼르르 달려가 나를 불렀다.
“할아버지, 저것 좀 보세요! 옷감은 이렇게 만드는 건가 봐요!”
손녀가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방직기였다. 방직기 회사의 코너인 듯, 하얗고 깔끔한 몸체를 지닌 방직기 몇 대가 돌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스르륵 스르륵 위잉위잉 하는 소리가 난다. 어머니의 물레 소리와 닮은 듯도 하고, 닮지 않은 듯도 하다.
어머니는 떠나는 내게 옷 한 벌을 건네셨다. 할머니가 물려주셨다는 물레와 베틀로 짜내고, 손수 가위질과 재봉질을 한 옷이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보아 온 나는 그 옷 한 벌을 짓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결국 손녀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옷장을 뒤져도, 침대 밑을 뒤져도 그 옷은 끝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빨리 좀 해, 나 시간 없단 말이야.”
예진이의 말에 나는 묵묵히 가방 싸는 손놀림을 조금 더 빠르게 했다. 군대에 다녀온 나보다 이 년이나 빠르게 대학을 졸업하게 된 예진이는 요즘 들어 눈에 띄게 짜증이 많아졌다. 항상 카페 창가에 앉아 마시던 커피도 이제는 테이크아웃을 해서 도서관으로 직행하게 되었고, 거리를 마다 않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먼 일이 되었다. 토익 점수가 몇 점이고, 자격증이 몇 개이고 하는 것들이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보다 중요해져 버리는 그런 때가 오고야 만 것이다.
남자친구의 입장으로 서운하기는 했으나, 이번 학기가 마지막 학기이니 조급해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창밖에는 봄꽃들이 피었지만, 예진이의 달라진 생활 방식에 맞추어 기숙사와 도서관을 오가다 보니 나들이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진이가 나와 헤어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었다.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내게 짜증을 내고서도,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기분이 조금 가라앉으면 항상 먼저 사과를 해 오는 예진이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를 불러내어 사과를 건넨 예진이가 기지개를 켜다 말고 테이블 위에 그대로 엎드려 버렸다.
“진짜, 마음 같아서는 다 때려치우고 눈이나 봤으면 좋겠다.”
또 눈 얘기였다. 겨울에 딸기가 먹고 싶다 하면 마트에 가면 되는 시대가 왔으니, 나는 예진이가 조금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 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중에서도 남단에 위치해 있는 이 도시에서 4월에 눈을 찾으니, 이건 나로서도 정말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예진아, 조금만 더 힘내자. 우리 예진이 잘 할 수 있는 거 내가 다 알아.”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내 말이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졸업 후에 바로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회사에서 일하게 될 터라, 예진이가 느끼고 있는 막막함의 절반도 제대로 와 닿지 않으니 말이다. 예진이 말 대로 눈이나 보여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런 생각을 했다.
“눈 내리는 데는 없어도, 눈 내리는 거 뺨치게 예쁜 데는 있는데.”
내 고민을 들은 친구의 한 마디에 귀가 번쩍 뜨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구에 4월에 눈 내리는 곳 없냐고 물었는데, 의외의 대답을 들은 것이다.
“수성못 말이야, 수성못. 한 번도 안 가 봤어?”
“야, 우리는 학교 때문에 여기 와 있는 거잖아. 대구 지리를 알 리가 있냐.”
“하긴, 학교에서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은 걸리니까 너희들은 못 가 봤겠다. 대구 사람이면 다 아는 곳인데 말이야.”
대구 토박이인 친구는 여자 친구와 싸웠을 때에는 꼭 수성못에 가서 화해를 하고 온다고 하였다. 봄이면 벚꽃 가지 사이로 오리 배들이 지나다니는 걸 볼 수 있는데, 눈처럼 날리는 벚꽃을 배경으로 오리 배를 타는 것만큼 로맨틱한 연출도 없을 거란다. 목련과 개나리도 만개했을 테고, 잔디와 흙길이 많아 잘 정비된 아스팔트 공원보다 훨씬 정겨운 느낌이 날 거라고 했다.
“게다가 바로 옆에 수성유원지도 있어. 벚꽃 보다 지치면 이쪽으로 가도 되고. 근데 벚꽃으로 워낙에 유명한 데라 지칠 틈도 없을 걸?”
꽃구경도 하고, 예진이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눈 구경도 하니 이것보다 지금 우리에게 안성맞춤인 곳이 어디 있을까. 나는 먹던 밥값을 모두 계산하는 것으로 친구에게 사례를 하고는 서둘러 일어섰다.
예진이의 수업이 끝날 시간이었다. 강의실 앞으로 찾아간 나는 새삼스럽고도 정중하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묵직한 가방을 팔에 안고 있는 예진이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기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쭈뼛쭈뼛 망설이는 예진이의 손을 먼저 잡아 이끌었다.
“또 머릿속으로 공부 계획표 생각 하고 있지? 오늘 하루만 노는 건데, 뭐 어때. 눈 내리는 거 보러 가는 거야, 우리.”
눈이라는 말에 예진이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럴 줄 알았다. 못 이기는 척 끌려오는 예진이를 보며, 오늘 공부 못한 건 모두 내 탓으로 돌려주리라 결심했다.
어느 날, 후배 한 명이 미리 주는 생일 선물이라며 김광석의 베스트 앨범 한 장을 건네 왔다. <서른 즈음에>라는 곡명에 형광펜으로 체크가 되어 있는 것을 보니 나를 곯리려 작정을 한 것이 분명했다. 괘씸하기는 했지만, 명곡은 명곡이었다. 신세대라고 하기에는 구세대이고, 구세대라고 하기에는 신세대인 어정쩡한 나이가 된 나는 이수영이나 성시경의 노래보다는 김광석의 노래를 더 사랑했다.
헤어진 전 여자 친구이기도 한 후배는 ‘술 좀 줄이시고요.’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또 마침 소주 안주로 제일인 것이 김광석의 노래라 하지 않았는가.
결국 과음을 한 탓에 다음 날 수업에 나가지 않자, 후배가 뺨을 붉히며 숙취 해소 음료 하나를 건네 왔다. 후배의 복잡한 표정에서, 그 애가 못다 한 말들이 읽혔다. ‘선배님, 장난 치고는 좀 심했죠.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하실 걸 모르는 게 아닌데. 기분 전환이나 하시라고 드린 선물이었는데,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하고 말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맙다는 말 대신, 뜬금없이 대구에 있다는 김광석 길에 함께 가주지 않겠냐는 말을 했다. 술이 덜 깨서일까, 아니면 김광석의 달콤하고도 쌉쌀한 노래들을 어제 하루 종일 들어서였을까. 아차 하는 마음에 미안하다고 말하려 하는데, 후배가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배가 다음 수업이 있다며 인사를 하고 강의실을 나간 뒤에도, 나는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 후회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다.
술은, 정말로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헤어진 후로 몇 달이나,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었다. 그러던 와중에 선물로 받은 것이 김광석의 앨범이요, 몇 달 만에 들어보는 따뜻한 말이 술을 좀 줄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광석의 노래가 내 방을 가득 채우니 술이 고픈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에서 <이등병의 편지>를 거쳐 타이틀곡인 <변해가네>까지는 그럭저럭 견뎠지만, <서른 즈음에>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냉장고를 열고 소주병을 꺼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 농담처럼, 내게도 서른이 왔다. 철부지 새내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몇 번의 작은 성공과 몇 번의 연애, 그리고 몇 번의 쓰린 실패 끝에 내게도 서른이 오고야 만 것이다. 잦은 휴학에, 아직 대학 졸업장도 받지 못했는데 말이다.
안주 없이 소주잔을 비우며 몇 방울의 눈물을 떨궜던 것 같기도 하다. 서른이라는 막막한 숫자 앞에, 그리고 서른이 되도록 무엇 하나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 거울 앞의 내 모습에 말이다. 내 인생의 역할 모델로 자리매김하고 계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며, 내 안의 어떤 것이 같이 죽어버렸다. 울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아버지의 시신을 보았을 때, 영영 무너지지 않을 아버지의 철옹성 같던 어깨가 실은 작은 새처럼 여린 것이었음을 알게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가장 크게 믿던 사람이 그렇게 한 순간에 한 줌의 재가 되었다.
“현석아, 네가 이제 우리 집의 기둥이여.”
나는 어머니의 그 말이 싫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에 대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어머니와 여동생의 버팀목 역할을 맡아야 했고, 그 자리가 두려워 계속 뒷걸음질만을 치다가 끝내 주저 앉아버리고야 말았다. 우스운 노릇이었다.
다가온 주말에 나는 정말로 후배와, 아니 내 전 여자 친구와 함께 대구행 기차를 탔다. 여전히 조금은 어색한 사이였기에 애초에 많은 대화가 오가지도 않았고, 삼십 분이 채 되지 않아 간간히 오가던 대화마저 완전히 끊겨 버렸다. 서로 감정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연애는 이미 지난 일이었다.
그 나른한 봄의 정적 속에서, 나는 잊고 있었던 풍경 하나를 기억해 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아버지의 서른 즈음에 있었던 일을 말이다. 만취하여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김광석의 노래를 열창하셨다. 다른 어떤 노래도 아닌, <서른 즈음에>를. 그것도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라는 부분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부르셨다. 비어가던 서른 살 아버지의 가슴을 다시 차오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툭, 하고 내 어깨 위로 고개 하나가 기울었다. 그 애가 봄기운에 취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서른 즈음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부처님 오신 날이다. 십 분만 일찍 깨워도 하루 종일 짜증을 내는 나이지만, 오늘만은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분주히 움직였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불자이시지만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일 년 중 딱 하루, 부처님 오신 날만큼은 내게도 특별한 날이다. 평소에는 집 근처에 있는 절에 다니시는 할머니와 어머니는 초파일에만 이른 아침부터 시외버스를 타고 범어사에 가신다. 그리고 나는 몇 년 째 범어사 가는 길에 동행하고 있다.
내가 막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이니, 오래되었다면 오래 된 이야기다. 친구와의 약속이 취소되는 바람에 마땅히 할 일이 없어 도시락을 싸 들고 어머니와 할머니를 따라 나섰는데, 그 곳에서 꿈속의 풍경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줄기마다 보랏빛 포도송이가 매달린 신비한 나라에 가는 꿈을 종종 꾸었다. 산자락 한 귀퉁이로는 맑은 샘물이 솟고, 그 안에는 자잘한 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큼직큼직한 바위들 사이로, 거대한 나팔꽃처럼 굵직한 나무줄기들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는 그 모습에 반하여, 하루는 꿈에서 깬 뒤에 그 숲의 모습을 남몰래 크레파스로 그려 두었었다.
몇 년 뒤, 어머니께서 그 스케치북을 발견하시며 이 숲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스케치북을 보시고는, 어머니가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요 녀석, 여기 갔던 걸 기억하고 있네? 아주 코흘리개일 때 데리고 갔었는데.”
그랬다. 어렸을 때 할머니 손에 이끌려서 갔었던 범어사의 등나무 숲이 꿈속에 나왔던 것이다. 이어지는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나는 연보랏빛 등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포도나무 숲이라며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었다고 한다.
“정말 괜찮겠니? 이따가 엄마랑 할머니랑 같이 가지 그래.”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지만, 나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된 내가, 어머니의 눈에는 언제까지고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자꾸만 나를 돌아보시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범어사로 올려 보내고, 나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등나무 숲으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안개가 짙었다. 등나무 꽃이 구름처럼 핀다 하여, 이곳을 등운곡(藤雲谷)이라고도 부른다 하였는데 안개와 등나무 꽃이 한 군데 어우러진 모습이 정말 신비로웠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오래 걷지를 못하는 탓에 잠시 등나무 숲 한 복판에 주저앉았다.
“등나무는 지가 살려고 소나무 같이 좋은 나무를 감아 올라가서 다 죽이삔다 아니가.”
구불구불한 등나무 사이로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쭉 뻗어 있는 모습을 보자, 작년 이곳에 왔을 때 들었던 이 동네 할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나는 그 날 집에 돌아가 방문을 잠그고는 숨을 죽여 울었다.
하나 뿐인 아들, 하나 뿐인 손자가 갑자기 사고를 당해 지팡이를 짚고 다니게 되자, 어머니와 할머니가 내 다리를 낫게 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니셨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춘기를 겪고 있던 나는 지팡이를 짚고는 도저히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검정고시라도 준비했으면 되었을 텐데,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절망감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기만 했다. 결국 나는 대학에도 가지 못했고, 취직도 하지 않은 채 방 안에 틀어박혀 백수가 되었다. 그런 나를 보고도 어머니와 할머니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고만 하셨다.
저 멀리서 어머니와 할머니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단숨에 나를 찾아내어 달려오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또 소나무 생각을 했다. 넘어지지는 않았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나는 익살스럽게 내가 짚고 있던 지팡이를 내밀어 보였다.
“이 녀석이 있잖아요.”
할머니가 웃으며 끼어드셨다.
“녀석, 그 지팡이도 요 등나무로 만들었다는 건 알고 있누? 지팡이 중에서는 등나무 지팡이가 최고지. 옛날에 신선들도 다 등나무 지팡이 짚고 다녔다잖어.”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소나무를 죽이는 등나무가 아닌, 다른 이들이 짚고 일어설 수 있는 등나무가 되고 싶었다. 어렸을 때에는 포도송이처럼 보였던 등꽃들이 줄지어 피어 있었다. 해가 지면 범어사 안에는 등불이 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저도 꽃을 피울게요, 어머니.”
어머니는 말없이 나를 끌어안고 우셨다.
한두 해에 걸쳐 한 번씩은 꼭 떠나는 부산여행이지만, 이번 여행길은 특별하다. 해수욕장에 가는 대신, 해운대와 광안대교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이기대의 해파랑길과 갈맷길을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낮이면 온종일 해수욕을 즐기고 밤이 되면 센텀시티의 찬란한 야경을 보며 술을 마시는 것을 부산 여행의 묘미로 삼던 나였는데, 이번에는 아내가 다른 모임에 가는 바람에 아들이 동행으로 붙어버린 것이다. 모처럼 혼자 떠나는 여행인지라 카메라를 챙겨 들고 여유를 즐겨 볼까 했는데, 다 틀렸다.
그래도 내 아들인데 어쩌겠는가. 아직 어린 아들은 빨리 바닷가에 수영을 하러 가자고 끝도 없이 칭얼거릴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이기대를 걸으며 들려 줄 이야기들을 미리 준비했는데, 이기대를 걸으며 전해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들까지 합하니 이야기의 규모가 꽤 크다. 기억 속에 그냥 남겨 두기가 아까워, 그것을 이 자리에 풀어 놓아 보고자 한다.
하나, 이기대의 이기(二妓)란, 두 명의 기생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야기 흐르는 대로’ 걸을 수 있는 곳이라 이기대라며 첫 운을 뗄 생각이었던 내게는 아주 맥 빠지는 내용이었는데, 내 멋대로 해석해 보기는 물 건너갔지만, 이 전설이 꽤나 재미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쳐들어와 이곳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는데, 이곳에 불려갔던 기생 두 명이 왜장에게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후 왜장을 안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때문에 의로운 기생들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라 하여, 의기대(義妓臺)라고 부르던 것이 조금 더 알아듣기 쉬운 이기대로 바뀌었다 한다. 논개에 이어, 이기대에서도 왜장을 안고 투신한 기생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으니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이곳 어딘가에 이 의로운 기생들의 두 무덤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도 내려오니, 이 무덤들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둘, 구천만 년 전에는 공룡도 이 길을 걸었다.
절벽과 절벽 사이를 가로지른 구름다리를 건너가다 보면 커다란 물웅덩이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공룡의 발자국이라고 한다. 무려 구천만 년 전의 백악기에 울트라사우르스라는 이름의 거대한 초식 공룡이 이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초여름이라 공룡 발자국 안에는 수십 마리의 올챙이들이 살고 있었는데, 공룡 발자국 안에서 자라 개구리까지 된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새로운 이야기들을 마구 써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근처에서 황동이 생산되기도 했다고도 하고, 동굴체험을 할 수 있는 곳도 있다. 몇 년 전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해운대>에서 이기대라는 이름의 어원까지 속 시원하게 언급된 지금이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곳이 되었지만, 이 아름다운 곳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군사지역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캐면 캘수록 과거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니, 과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라는 별칭이 어울리는 곳이다. 이렇게 숨은 이야기가 많은 지라 길 가다 만난 현지인들은 모두 훌륭한 이야기꾼이다.
셋, 오륙도의 새하얀 섬은 사실 가마우지의 배설물로 덮인 섬이다.
다섯 개의 구름다리를 건너 오륙도가 내다보이는 곳까지 이르렀다. 산책길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험난한 길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마다 오륙도의 섬 개수를 세어 보고 있다. 날이 맑아 오늘은 여섯 개의 섬이 모두 잘 보였다.
낚시를 좋아하는 나는 오륙도 인근까지 배를 타고 나가 본 일이 있는데, 아름다운 섬들 중에서도 설산처럼 하얀 굴섬에 매료되었었다. 그런데 ‘섬이 하얀 게 참 예쁘다’는 말을 하자마자 뱃사람 한 명이 웃음을 터뜨리며, ‘저게 다 가마우지의 똥’이라는 말을 했었다. 결과적으로는 이 천연 거름 덕택에 굴섬 주변에 훌륭한 천연 어장이 형성되었지만, 그 때의 충격과 창피함을 어찌 설명할 수 있으랴.
슬쩍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니, 눈이 초롱초롱한 것이 이기대가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공룡 이야기에서부터 얼굴을 펴기 시작하더니, 가마우지 똥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아주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던 것이다. 아들의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밥 좀 먹으러 시내로 나갈까?”
“아니, 나 아까 해녀 아줌마가 팔던 거 그거 먹을 거야!”
기특한 일이었다. 나는 아들의 손을 꼭 붙잡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해녀막사 앞의 난장에 멍게가 아주 싱싱하던 것이 떠올라 군침이 꿀꺽 꿀꺽 넘어갔다. 구천만 년 후의 이기대에서는 나와 우리 아들의 발자국이 발견되기를 바라며, 짧은 글을 마친다.
“아, 오빠! 이번에는 진짜 맛집이라고 했잖아!”
한바탕 화를 내려다 오빠의 허탈한 표정을 보고 그만두었다. 그래, 또 허탕이었다. 국밥 한 그릇 먹자고 부산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오빠도 나도 날이 갈수록 짜증만 더해갔다. 사건의 시작은 한 달 전, 부산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 갔다가 그 유명한 서면 돼지국밥을 맛보고 만 것이었다.
오빠의 제대 기념으로 남매끼리 떠났던 기차 여행. 하지만 여행 초반부터 예산을 초과해버린 탓에 하루 종일 차를 타고 이동하다 내려서 사진만 찍는 스파르타식의 여행을 하게 되었다. 부산의 명소란 명소는 다 돌았지만, 배가 고프고 지치니 즐겁지가 않았다.
그 때 내가 묘안을 내 놓았다. 서면에 살고 계시는 외할아버지가 생각 난 것이다. 외할아버지를 깜짝 방문한다면 끼니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용돈도 넉넉히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먼저 연락을 드려 볼 것을 그랬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보는 손주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 정도로 냉장고를 채워 두지 않으셨던 것이다. 곤란해 하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우리도 덩달아 초조해졌다. 할아버지는 고민 끝에 우리를 서면 시장으로 데리고 가셨다. 친구 분께서 하시는 유명한 국밥 집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구, 그 꼬맹이들이 벌써 이만큼 큰 거여?”
처음 보는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셔서 반갑게 우리의 손을 잡으셨다. 오빠도 나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친구 분께서는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에는 할아버지 댁의 바로 옆집에 살고 계셨다고 한다. 대여섯 명의 직원들이 있는데도, 그 할머니께서는 우리에게 손수 국밥 두 그릇을 말아다 주셨다.
“순자 그 할망구가 지금까지 살아만 있었어도 이 양반이 여기까지 걸음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여. 그 할망구는 뭐한다고 그렇게 일찍 가 버렸대.”
넋두리 반, 국밥 반이었다. 그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와 절친한 사이셨던 모양이었다. 친손자를 보듯 따뜻한 눈길에 마음이 참 편해졌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 때 먹은 그 국밥이 정말이지 너무도 맛이 있었다.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서울로 돌아온 오빠와 나는 그 때 그 맛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에 온 서울의 돼지국밥 집을 다 찾아다녔지만, 번번이 허탕이었다.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고 다대기와 부추를 넣는 것은 물론 고기 위에 새우젓까지 올려 정석대로 먹었지만, 부산에서 먹은 그 맛이 나지를 않았다.
엄마는 기대에 가득 찬 모습으로 집을 나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실망 한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오는 우리들의 모습이 퍽이나 재미있으신 모양이었다. 평소에도 엉뚱한 일을 많이 벌이기로 소문난 우리 남매지만, 이번엔 유독 별나다고 하셨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빠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오늘 밤 고백할게 너와 함께 돼지국밥을 먹고 싶다 부산으로 떠나자’라는 가사의 노래까지 틀고 있었다. 정말 부산으로 가야만 그 돼지국밥을 다시 먹을 수 있는 걸까. 국밥이라 우습게 봤는데 도무지 그 맛을 다시 볼 수가 없으니, 괜한 집착만 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 밤 엄마는 새벽 내내 부엌을 들락거리셨고,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식탁 위에 돼지국밥이 차려져 있었다. 아마 밤새 돼지 뼈를 삶으신 모양이었다. 집에서 돼지국밥이라니, 이게 웬 일인가 했더니 엄마가 나고 자라신 곳이 바로 부산이었다.
“할머니가 가르쳐 주신 지 하도 오래 돼서, 제 맛이 나려나 모르겠네.”
엄마는 멋쩍으신 듯 웃으셨지만, 우리의 칭찬을 은근히 기대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오빠와 나는 한 숟갈을 떠먹고는 서로 눈빛을 교환한 뒤 입을 모아 말했다.
“우리가 찾던 그 맛이네.”
솔직히 말하자면, 엄마가 만든 돼지국밥의 맛보다 부산에서 먹은 돼지국밥이 훨씬 더 맛있었다. 그런데 돼지 뼈를 삶고 옮기다 데셨는지 엄마의 검지가 빨갛게 부어올라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돼지국밥 찾기를 그만두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진부한 말처럼, 맛의 비결은 역시 사랑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