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인 오늘은 승호가 가장 기다리는 날 중 하나입니다. 오늘은 아빠와 단 둘이 여행을 떠나는 날이기 때문이지요. 눈을 뜨자마자 승호는 아빠에게 달려갑니다. 오늘의 목적지가 궁금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아빠는 어떤 영문인지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아빠 다리에 매달려도 보고 힌트라도 달라고 졸라보아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돌아오는 말이라고는 그저 잠자코 아빠만 믿고 따라오라는 말뿐이었습니다.
궁금증과 기대에 한껏 들뜬 승호는 연신 싱글벙글하며 동생인 연호에게 자랑도 늘어놓았습니다. 드디어 출발입니다. 아빠 차에 탄 승호는 엄마와 동생에게 인사를 한 뒤 콧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는 바람에 승호는 그만 지쳐 잠이 들었습니다. 집에서 출발한 뒤 무려 3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잠에서 깬 승호는 도로 이정표를 보고 강원도 태백에 와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승호는 속으로 오늘 아빠와 둘이 등산도 하고 맛있는 한우도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목적지. 그런데 도착한곳은 태백산도 아니고 한우고기집도 아닌 석탄박물관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급격히 실망한 승호는 투덜거리고 싶었지만 아빠가 목적지도 알려주지 않고 여기로 온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일단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책에서만 보던 광부들이 캄캄한 동굴에서 석탄을 캐는 모습과 그 시대 광부들의 삶을 모형으로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형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향해 아빠는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옛날에 승호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이니까 아빠가 딱 승호만한 나이였을 때였어. 아빠의 아빠. 그러니까 승호 할아버지는 여기 보이는 사람들처럼 석탄을 캐는 광부셨어. 할아버지도 이렇게 검은 때가 온 몸을 뒤덮어도 열심히 일하셨지. 우리 승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삼겹살 있지? 그것도 사실 이렇게 하루 종일 탄가루에 뒤덮여 있는 광부들이 검은 가루가 씻겨 내려가라고 먹었던 음식인거 알았니?
그리고 아주 가난하던 시절 가족들의 끼니와 교육을 위해 앞이 보이지도 않는 어두컴컴한 지하 막장에서 땀 흘려 일하셨단다. 할머니는 노란 양은 도시락에 부족하지만 정성스레 담은 도시락을 매일 싸드렸어.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지. 달그닥 달그닥 빈 도시락 통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도 반가운 마음에 버선발로 뛰어나가셨던 모습이 생생해. 석탄 캐는 일이 목숨을 내놓고 일할만큼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도시락 소리가 들려야만 안심을 하곤 했었지. 승호 넌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정말 멋진 일을 하시던 분이셨어.”
이야기를 하는 아빠의 눈이 잠시 붉어졌습니다. 개구쟁이 승호도 이야기를 듣고는 얌전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습니다. 아빠가 왜 오늘 다른 곳이 아닌 태백에 석탄박물관에 왔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며칠 후 승호는 4시부터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두 시간 뒤에 아빠가 회사에서 돌아오실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승호는 아빠와 석탄박물관에서 들었던 아빠의 이야기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아 아빠도 할아버지가 보고 싶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빠 몰래 승호가 맛있는 저녁밥을 만들어드리기로 마음먹은 것이지요. 서툰 솜씨지만 뚝딱뚝딱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딩동! 초인종이 울리고 아빠가 들어오셨습니다. 으쓱한 마음에 승호는 아빠에게 달려가 품안에 쏙 안기며 아빠를 위한 멋진 선물을 준비했다고 말했습니다.
삼겹살에 돼지고기 김치에 돼지껍데기 등 돼지고기로 가득한 한 상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빠 귀에 대고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아빠, 아빠도 할아버지처럼 정말 멋진 아빠에요!”
아빠도 승호도 정말 푸짐하고 따뜻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거센 바람이 아님에도 촛대의 불이 하늘거리며 흔들렸다. 촛불이 흔들리는지 장군의 두 눈동자의 여린 초점이 흔들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수많이 적과의 전투가 있었고 곧게 뻗은 대나무처럼 한결같이 묵묵하게 전투를 치러왔던 그였다. 신라군과의 유난히 힘든 전투를 보낸 후라 그런지 그날따라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감도는 듯 했다. 문밖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무심하게 불던 바람에 더욱 평강이 보고 싶던 온달장군은 말없이 붓을 들었다.
온달장군은 늘 평강공주에게 표현이 서툴렀다. 하지만 누구보다 평강을 생각하는 그였다. 사람들은 그래서인지 그를 보고 바보온달이라고 불렀다.
온달은 서툰 솜씨로 편지를 써내려갔다. 막상 붓을 들고 그리운 마음을 전하려 하니 평강이 처음 집으로 와 살림을 꾸리겠다고 당차게 말하던 일이 떠올랐다. 단정하게 빗어 내린 머리칼과 곱디고운 얼굴을 하고 내게 시집을 오겠다고 하던 공주.
보고 싶은 평강공주 보시오.
오늘은 유난히 긴 하루였소. 아마도 당신이 그리워 그렇겠지. 이렇게 당신을 생각하니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라 웃음이 나는구려. 당신은 한없이 고운얼굴과 단정한 차림을 하고선 나에게 시집을 와 살림을 차리겠다고 말했었지. 그때 당신에게 단호하게 거절한 것은 당신이 내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사람들은 모두 나를 바보라고 불렀지만 당신만은 늘 나를 최고라 불러주었던 날들이 생각나오. 내가 당신만큼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에 능숙했더라면 당신이 조금은 덜 외로웠을 텐데, 한 마디 서운함 없이 옆에 있어주어 고맙소.
당신과 함께 장에서 말을 고르며 무술과 학문을 배우던 시간들이 떠오르는 밤이오. 말을 타는 것도, 검술을 익히는 것도 더딘 내게 당신은 그저 최고의 장군이라고 나를 치켜세워주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오.
당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이 고구려도 지켜내기 힘들었을 것이오.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공주.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밖이 고요하오.
늘 거침없고 두려움 없이 섰던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지나가는 바람에도 마음이 일렁이는구려.
아마도 당신이 그리워서이겠지. 이곳 단양에서의 전투가 끝나면 다시 볼 수 있을 것이오.
그 때까지 건강히 지내시오.
온달은 떨리는 붓을 조용히 거두었다. 막상 편지를 쓰니 평강이 더욱 그리운 밤이었다. 오늘은 쉽게 잠자리에 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긴긴밤이리라.
어김없이 날은 밝고 일찍부터 전투준비에 성 안팎은 분주했다. 병사들도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물과 식량도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온달은 얼른 전투를 끝내고 승전보를 울리며 평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견고하게 쌓여진 성벽사이로 여느 때와 같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화살과 돌이 쏟아져 내렸고 날이 선 칼은 순식간의 병사들을 위협했다. 밤에 한숨도 못잔 탓일까, 사력을 다해 싸워온 그였다. 그 때 온달을 향해 날아온 화살. 온달은 정신이 희미해졌다. 온달은 힘없이 쓰러졌다. 맹렬한 그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꼭 승리해서 돌아가겠다는 평강과의 약조가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그는 세상을 떠났다.
급히 온달의 죽음을 알리기 위한 전갈이 보내졌고 평강은 놀란 마음에 눈물로 통곡하며 산성으로 도착하였다. 하지만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그의 맹렬한 기세. 평강은 하염없이 울었다. 편히 보내주기 위해 화살을 제거하면서 온달의 가슴팍에서 어제 그가 써내려간 편지를 발견한다. 평강은 또 한 번 크게 울었다.
이제는 온달을 편히 보내줄 차례다. 그런데 장사를 지내기 위해 관을 움직이려 하자 관이 꿈적도 하지 않았다. 힘이 센 장정들이 들어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평강은 관을 쓰다듬으며 마지막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마음을 전했다.
"장군. 삶과 죽음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이제 편히 가소서." 하며 편지를 가슴이 품었다.
그러자 꿈적도 않던 관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평강만을 바라보던 바보장군과 온달만을 바라보던 평강공주. 이 둘의 사랑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남아있다.
수능 즈음은 유난히 바람이 맵다. 코끝이 빨개지도록 바람이 불고 손난로를 들고 있어도 좀처럼 따뜻해지질 않는다. 바람이 맵다는 것은 코끝이 시리다 못해 아리고 숨을 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 목구멍과 폐를 알알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올해의 수능 날씨가 검색어에 오른 걸 보면 이번에도 어김없이 춥겠지, 단단히 입지 않으면 감기 때문에 수능을 망치기 일쑤이다. 내가 수능 즈음을 기억하는 건 11월 둘째 주, 아주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잊을 수 없게 알알하게 박힌 기억 때문이다.
“감기 걸리지 않게 목도리랑 장갑 끼고, 알았지? 어? 엄마가 말하면 대답 좀 해.”
“아, 알겠어. 몇 번을 말해. 내가 애야? 일일이 목도리랑 장갑까지 확인하게.”
“요 녀석, 네가 애지 어른이냐? 엄마한테 자식은 평생 애야. 애.”
“아 알겠어, 귀찮게 정말.”
“저게, 오늘 일찍 들어와. 엄마가 맛있는 떡볶이 해줄게.”
“알겠어, 갔다 올게.”
수업이 끝날 무렵 주기적으로 울어대는 진동음이 신경 쓰였다. 다름 아닌 엄마의 전화. 또 일찍 들어오라는 잔소리를 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고 생각된 나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웅, 웅. 웅, 웅.
‘오늘따라 왜 이렇게 끈질겨. 엄마도 참.’ 엄마의 전화가 그날따라 끊임없이 울렸다. 한 번쯤 받으면 어떨까, 나 곧 간다고 한 마디라도 하고 끊으면 될 것을. 배터리를 빼버리는 일종의 반항을 저지른 뒤 곧바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교실 밖에서 서성이는 나를 발견한 친구의 부름에 곧바로 친구와 함께했다. 친구는 떡볶이를 먹자고 했다. 떡볶이? 집에서 먹는 거나 친구랑 먹는 거나 그게 그거라고 여겼던 나는 그 날 유난히 매운 떡볶이를 먹었다.
혓바닥에 불이 난 것처럼 매운 떡볶이에는 고추가 생으로 올라가 있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면서도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한 접시를 비웠다.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달리 갈 곳이 없던 나는 집으로 발길을 돌리며 엄마 생각이 났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엄마한테 미안한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에잇, 집에 가서 떡볶이 한 번 더 먹지 뭐.’ 하며 휴대전화 전원을 켰다.
띠링, 띠링, 띠링.
연속적으로 문자가 들어왔다. 엄마였다.
“이슬아, 엄마야. 우리 딸.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예쁜 우리 딸. 엄마가 집에 못 돌아갈 것 같아. 미안해. 엄마 지금 지하철인데, 사고가 났어, 우리 딸. 엄마가 미안해.”
“이슬아, 엄마가 많이 사랑해.”
“이슬아. 이슬아 사랑해. 사랑해 우리 딸”
엄마!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만 걸릴 뿐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날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무작정 달려가 현관문을 열어보니 엄마는 없었다. 그저 차갑게 식어버린 빨간색 떡볶이만 있을 뿐. 그리고 그 위에 아주 맵게 생긴 고추 고명이 예쁘게 얹어져 있을 뿐이었다.
눈물이 났다. 매운 떡볶이를 먹었을 때보다 더 매운 눈물이었다.
“엄마.”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엄마, 나 왔어. 이렇게 떡볶이만 두고 어디 간 거야. 장난치지 말고 빨리 나와. 나 장갑이랑 목도리 다 하고 이렇게 뛰어왔는데. 엄마 전화 안 받아서 장난치는 거지? 빨리 나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코끝이 아리도록 매운 눈물이 흘러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여전히 수능 즈음은 날씨가 차다. 찬바람에 눈이 시려 가끔 눈물이 맺히곤 한다. 찬바람에 눈이 매워서인지 엄마가 그리워서 인지는 모른다. 그저 코끝이 찡하다는 것만 알뿐이다.
“빨리 좀 해, 나 시간 없단 말이야.”
예진이의 말에 나는 묵묵히 가방 싸는 손놀림을 조금 더 빠르게 했다. 군대에 다녀온 나보다 이 년이나 빠르게 대학을 졸업하게 된 예진이는 요즘 들어 눈에 띄게 짜증이 많아졌다. 항상 카페 창가에 앉아 마시던 커피도 이제는 테이크아웃을 해서 도서관으로 직행하게 되었고, 거리를 마다 않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먼 일이 되었다. 토익 점수가 몇 점이고, 자격증이 몇 개이고 하는 것들이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보다 중요해져 버리는 그런 때가 오고야 만 것이다.
남자친구의 입장으로 서운하기는 했으나, 이번 학기가 마지막 학기이니 조급해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창밖에는 봄꽃들이 피었지만, 예진이의 달라진 생활 방식에 맞추어 기숙사와 도서관을 오가다 보니 나들이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진이가 나와 헤어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었다.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내게 짜증을 내고서도,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기분이 조금 가라앉으면 항상 먼저 사과를 해 오는 예진이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를 불러내어 사과를 건넨 예진이가 기지개를 켜다 말고 테이블 위에 그대로 엎드려 버렸다.
“진짜, 마음 같아서는 다 때려치우고 눈이나 봤으면 좋겠다.”
또 눈 얘기였다. 겨울에 딸기가 먹고 싶다 하면 마트에 가면 되는 시대가 왔으니, 나는 예진이가 조금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 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중에서도 남단에 위치해 있는 이 도시에서 4월에 눈을 찾으니, 이건 나로서도 정말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예진아, 조금만 더 힘내자. 우리 예진이 잘 할 수 있는 거 내가 다 알아.”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내 말이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졸업 후에 바로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회사에서 일하게 될 터라, 예진이가 느끼고 있는 막막함의 절반도 제대로 와 닿지 않으니 말이다. 예진이 말 대로 눈이나 보여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런 생각을 했다.
“눈 내리는 데는 없어도, 눈 내리는 거 뺨치게 예쁜 데는 있는데.”
내 고민을 들은 친구의 한 마디에 귀가 번쩍 뜨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구에 4월에 눈 내리는 곳 없냐고 물었는데, 의외의 대답을 들은 것이다.
“수성못 말이야, 수성못. 한 번도 안 가 봤어?”
“야, 우리는 학교 때문에 여기 와 있는 거잖아. 대구 지리를 알 리가 있냐.”
“하긴, 학교에서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은 걸리니까 너희들은 못 가 봤겠다. 대구 사람이면 다 아는 곳인데 말이야.”
대구 토박이인 친구는 여자 친구와 싸웠을 때에는 꼭 수성못에 가서 화해를 하고 온다고 하였다. 봄이면 벚꽃 가지 사이로 오리 배들이 지나다니는 걸 볼 수 있는데, 눈처럼 날리는 벚꽃을 배경으로 오리 배를 타는 것만큼 로맨틱한 연출도 없을 거란다. 목련과 개나리도 만개했을 테고, 잔디와 흙길이 많아 잘 정비된 아스팔트 공원보다 훨씬 정겨운 느낌이 날 거라고 했다.
“게다가 바로 옆에 수성유원지도 있어. 벚꽃 보다 지치면 이쪽으로 가도 되고. 근데 벚꽃으로 워낙에 유명한 데라 지칠 틈도 없을 걸?”
꽃구경도 하고, 예진이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눈 구경도 하니 이것보다 지금 우리에게 안성맞춤인 곳이 어디 있을까. 나는 먹던 밥값을 모두 계산하는 것으로 친구에게 사례를 하고는 서둘러 일어섰다.
예진이의 수업이 끝날 시간이었다. 강의실 앞으로 찾아간 나는 새삼스럽고도 정중하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묵직한 가방을 팔에 안고 있는 예진이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기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쭈뼛쭈뼛 망설이는 예진이의 손을 먼저 잡아 이끌었다.
“또 머릿속으로 공부 계획표 생각 하고 있지? 오늘 하루만 노는 건데, 뭐 어때. 눈 내리는 거 보러 가는 거야, 우리.”
눈이라는 말에 예진이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럴 줄 알았다. 못 이기는 척 끌려오는 예진이를 보며, 오늘 공부 못한 건 모두 내 탓으로 돌려주리라 결심했다.
장거리 연애의 고충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누군가 이들에게 장거리 연애를 하겠다고 하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뜯어말릴 것이라 할 정도다. 가장 큰 고충은 다른 연인들처럼 매일 매일 볼 수 없다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 집 앞에서 밤새 기다릴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 흔한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것도 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서로를 만나러 달려갈 수도 없다는 것이 가장 가혹하다면 가혹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둘도 처음부터 장거리 연애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동욱과 선아는 사내커플이었다. 입사동기로 들어와 함께 밤새워가며 프로젝트를 맞고 기획안을 작성하며 서로에 대한 호감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중 동욱에게 갑작스런 지방발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대리, 자네도 곧 대리에서 벗어나야지. 언제까지 대리 그 자리에 머물기만 할 건가? 딱 2년만 눈감고 내려갔다와. 올라오면 팀장자리 하나 내 만들어 놓을테니.”
“부장님, 그래도 완도까지는.”
“자네 지금 우리 회사에서 완도에 얼마나 신경을 쏟고 있는지 몰라서 그러나? 일단 내려가 봐. 갔다가 아니다 싶으면 다시 올라오면 되잖나?”
회사에서 내려진 인사발령이니 못 내려가겠다고 어린애처럼 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일단 내려간 완도다. 매일 보던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참 쓸쓸한 일이었다. 선아는 군대 간 남친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했고 편지와 문자,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데이트를 해야 했다.
그날따라 눈꺼풀이 무겁고 축 가라앉는 날이었다. 그 전날 동욱과 통화하면서 몸살이 난 것 인지 상사병이 난 것인지 모르겠다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었다. 어차피 동욱은 바로 올라올 수 없었고 괜히 걱정만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선아도 그저 농담 식으로 이야기 하며 지나갔었다.
하는 수 없이 병가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택배요”
주문한 것이 없는 데라고 생각하며 가까스로 문을 택배를 받아보니 보낸 사람의 주소가 완도였다. 발신인 이름을 보니 동욱이었다. 놀란 마음과 흥분된 마음으로 택배를 열어보니 완도산 전복과 자그마한 손 편지가 들어있었다. 아마 어제 몸살이 난 것 같다고 잠깐 투정을 부린 것을 잊지 않고 전복죽이라도 끓여먹으라고 보낸 것이 분명했다.
‘많이 아픈 건 아니지? 바로 달려가서 약이라도 사다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그래서 싱싱한 전복 한 상자 보내니까 죽 끓여먹어. 얼른 기운 차리고. 여긴 공기가 참 좋아. 경치도 좋고. 너와 함께 내려왔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리고 다음 주 주말에 여기 내려올 수 있어? 너랑 같이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아참, 죽 끓여먹은 거 인증샷 찍어서 바로 보내! 전화할게. 사랑해!’
동욱의 귀여운 이벤트였다. 싱싱해 보이는 전복을 바라보니 먹지 않아도 힘이 솟는 기분이었다. 따뜻하게 전복죽을 끓여 수저로 먹는 시늉을 하며 동욱에게 인증샷을 찍어 보냈다.
그리고 다음 주에 완도에서 보자고 하트까지 뿅뿅 찍어 보냈다.
동욱말대로 완도는 공기가 좋고 경치가 참 좋았다. 선아가 좋아하는 싱싱한 해산물들이 가득했고 특유의 바다 냄새도 좋았다. 둘은 그동안 못 다한 데이트를 실컷 즐겼다.
저녁이 되어서야 선아는 그때 가보고 싶다던 곳이 어디냐고 물었고 동욱은 선아의 손을 잡고 불빛이 찬란한 곳으로 갔다.
불빛을 따라 간 곳은 다름 아닌 완도타워였다.
“완도에도 이런 곳이 있었어? 남산 부럽지 않네.”
“그렇지? 여기 야경이 끝내줘. 봐봐.”
“그러네. 완도 시내가 다 보여. 불빛들 찬란한 것 봐. 멋지다.”
“나 여기서 얼른 자리 잡으면 이렇게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우리 함께 살자.”
선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움이 쌓이는 것도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단풍이 다 똑같은 단풍이지, 왜 꼭 산에까지 와야 하는 거야?”
남자 친구가 입대 전에 마지막으로 나와의 추억을 만들고 싶어 선택한 여행지는 소요산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수십 차례 산행에 나섰던 남자 친구인지라 우리나라의 유명한 산이란 산은 거의 다 가 보았다는데, 유독 소요산은 꼭 나와 함께 오르고 싶었다는 것이다. ‘길 따라 계곡에 드니 봉우리마다 노을이 곱다 험준한 산봉우리 둘러섰는데 한 줄기 계곡물이 맑고 시리다’는 김시습의 시까지 읽어주는데, 마지막 여행이 산이라니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루 종일 투정을 부리고 떼를 쓸 생각이었는데, 소요산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들떠버렸다. 연리지문을 보자마자 기분이 좋아져 기념사진을 찍자고 외쳐 버린 것이다. 남자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소요산에서 수행하던 원효 대사와 그런 원효 대사를 사랑한 아름다운 요석공주의 사랑이 연리지처럼 이루어질 수 있었기를 바라는 뜻이 담긴 문이라는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그럼 그렇지. 그냥 단풍이 예뻐서 왔을 리가 있나. 남자 친구는 토라진 나를 위해 또 이야기를 한 보따리 준비했을 터였다. 이야기를 듣고 내가 금방 기분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괘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해서 마음이 근질거리는 통에 또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해골 물 마신 그 원효 대사? 스님한테도 사귀는 사람이 있었어?”
“당연하지. 원효 대사의 아들이 설총이잖아.”
남자 친구가 들려 준 이야기는 교과서에 실린 원효 대사의 사상 이야기보다 몇 배는 더 재미있는 것이었다. 어느 날, 원효 대사는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줄 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네.’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무열왕은 원효 대사가 큰 인물이 될 아들을 얻으려 하는 모양이라 생각하여 일찍이 과부가 된 자신의 아름다운 딸인 요석 공주를 신붓감으로 내어 주기로 결심했다는데,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도 서로에게 관심이 있었단다.
요석 공주는 원효 대사에게 승복과 모란꽃을 선물하기도 했다는데, 이런 마음을 눈치 챈 무열왕이 관리를 시켜 요석 공주의 거처에서 가까운 다리 위에서 원효 대사를 밀어 물에 빠뜨리게 했다는 것이다. 물에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요석궁으로 들어간 원효 대사는 꼬박 사흘을 요석 공주와 함께 지내게 되었고, 요석 공주는 설총을 잉태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원효 대사는 스님이잖아.”
“그렇지. 그래서 원효 대사는 평생을 파계승으로 살아야 했어.”
사흘 뒤 원효 대사는 소리 없이 궁을 나왔고, 스스로를 소성거사라고 칭하며 속세를 떠돌며 속죄 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그러던 도중 수행에 전념하기 위하여 찾아온 곳이 바로 이 소요산. 예로부터 문인들이 이 산을 찾아 거닐었다고 해서 소요(逍遙)라는 이름이 붙은 곳인데, 원효 대사도 소요산에서라면 속세에서의 미련을 잊고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원효 대사를 잊지 못한 요석 공주도 소요산에 조그마한 별궁을 짓고 설총과 함께 소요산에 살았다. 하지만 다시 불도에 정진하는 원효 대사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어 원효 대사가 있는 방향을 향하여 원효 대사를 위해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원효 대사도 이를 알게 되어 산봉우리 하나에 요석 공주를 생각하며 공주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단풍 보러 온 게 아니라 원효 대사랑 요석 공주처럼 되고 싶어서 온 거라 이거야?”
남자 친구가 정곡을 찔린 듯 걸음을 빨리 했다. 나는 웃음을 꾹꾹 참으며 그 뒤를 따랐다.
요석 공원부터 공주봉, 원효 폭포에 이르기까지 소요산에는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를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이 붙은 곳이 많았다. 노을처럼 예쁘게 물들어 있는 소요산의 단풍을 바라보며, 문득 연리지문에 장식되어 있던 단풍이 떠올랐다. 요석 공주의 고운 사랑을 단풍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남자 친구는 다음 달이면 군대에 간다. 남자 친구가 군대에 가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요석 공주는 평생을 기다렸는데, 뭐. 내년에는 혼자 소요산에 올라 보기로 결심하며 남자 친구의 손을 잡았다.
‘물레야, 물레야! 밥 먹어라!’
가마 아저씨가 사료가 담긴 그릇을 가마 위에 올려놓고 사라졌다. 십여 분의 시간이 지나자 삼색 얼룩고양이 하나가 가마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흡사 전설의 고양에 나오는 구미호처럼 날렵하면서도 매력적인 몸짓이었다. 고양이는 사료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인양 ‘암냠냠냥’ 소리를 내며 먹었다. 사료 그릇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고양이는 몸을 뒹굴 하더니 가마위에 몸을 뉘였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거리는데도, 신기하게 사료그릇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누울 자리를 찾아 절묘하게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가마 위에서 고릉고릉 소리가 나자, 가마 아저씨가 조심스레 집밖으로 나왔다.
‘물레, 밥 다 먹었냐? 오늘은 만질 수 있으려나?’
아저씨는 발소리, 숨소리를 모두 죽인 채, 가마 가까이 다가갔다. 고양이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던 가마 위에 한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러다 고양이의 귀가 갑자기 쭈뼛 섰다.
“와옹~!”
고양이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고양이 뒤로 가마 아저씨가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었다. 고양이는 아저씨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아직은 때가 아닌데, 왜 자꾸 성급하게 다가오려 하느냐는, 원망 섞인 눈빛이었다. 고양이는 털을 곤추세우며 가마 밑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옹기집으로 갔는지, 청자집으로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뭐든 섣부르게 다가서려면 안 되는 법이지. 사람도 그렇고, 그릇도 그런데 하물며 묘연은 오죽할까…….’
가마 아저씨는 고양이가 잠시 머물렀던 가마 위를 바라보며, 자신의 지난날을 잠시 떠올렸다. 가마꾼이 되기에는 너무나 거칠었던 자신을. 저 고양이처럼 모든 것을 경계하던 자신을.
가마 아저씨가 도예촌에 들어온 건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이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겨울 날, 백자 굽는 집 앞에 열이 펄펄 끓는 채 쓰러져 있던 그를, 장인 내외가 발견하고 간호해주었다. 정신을 차린 그에게 내외가 ‘너는 누구며 무슨 일로 이곳에 왔냐, 목적지에 데려다 주겠다’ 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는
“저는 오갈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연히 도시에서 선생님의 백자를 보고, 태어나 처음으로 따스함을 느꼈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미의 따스함을요. 돈도 뭣도 필요 없으니 제발 제자로 삼아주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도자기 마을 사람이 되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그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백자네 가마 청년이라고 불렀다. 십여 년 정도 시간이 흐르자, 청년은 불혹을 넘어섰고, 이제 사람들은 그를 가마 아저씨라고 불렀다. 처음 몇 년간은 땔감만 만들었고, 그 다음 몇 년간은 백자의 원료가 되는 고령토만 찾으러 다녔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백자는 원료의 미세한 차이로 결정된다. 그래서 그는 좋은 백토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고 그렇게 찾은 흙을 가지고 마을에 돌아왔다. 이제 물레를 돌리는 것에만 열중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어렵게 모아놓은 흙 위에 자꾸 불청객이 실례를 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범인은 바로 고양이였다. 도시에서 살 곳을 읽어버린 고양이들이 도자기 마을까지 내려온 것이다. 대소변을 보면 흙으로 덮는 습성이 있는 고양이들이기에, 흙많은 도자기 마을은 참으로 살기 좋은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가마꾼은 고양이를 붙잡아 혼줄을 내주리라 생각했다. 포획하여 저 멀리 마을 밖에 버려두고 올 작정이었다. 그는 몇 날 며칠을 기다려 결국 고양이를 붙잡았다. 그러나 고양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는 어딘가 마음속이 저릿해 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 다 영글지 않은 외모에, 때가 꼬질한 얼굴.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 이 마을에 처음 오던 날의 자신을 꼭 닮아 있었다. 분명 어미에 의해 준비도 없이 강제로 독립하게 되었으리라. 그리고는 계속 어미를 그리워하며 살다, 저도 어미가 되고는 보통의 길고양이마냥 삼년여의 짧은 삶을 살다 가겠지. 나는 어미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어머니 같은 백자를 만들며 달래지만, 고양이는 물레도 돌릴 수 없으니…….
그는 결국 고양이를 놓아주었다. 고양이는 쏜살같이 달아가다가 차도에서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네 이름은 물레다. 나와는 떼놓을 수 없는 물레. 배고프면 언제든지 오너라. 밥은 줄 테니. 아, 그리고 제발 백토는 건들지 말고.”
가마 아저씨와 삼색 고양이 물레의 묘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물레를 처음 본 날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지금은 정말 용됐구먼.”
다음 날 새벽, 가마꾼은 땔감을 하러 밖으로 나왔다. 기지개를 켜며 집을 나서는데, 발치에 버석, 하고 무언가 밟히는 것이었다. 이게 뭔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백토 덩어리였다. 자기가 어딘가 흘렸던 것인가 싶어, 살펴보는데, 지금까지 채취한 흙과는 색이 묘하게 달랐다. 유심히 살펴보는데, 어디선가 고양이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물레였다. 물레는 입가에 흙을 잔뜩 묻히고,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물레를 바라보다가 그제야 깨달았다.
“아, 고양이는 누군가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조공을 바친다는데, 저 녀석은 내가 제일 귀하게 여기를 백토를 주려는 건가 보다.”
가마꾼은 나지막한 소리로 물레를 불렀다. 물레는 한참을 오롯이 서 있다가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와 머리를 부볏다. 도자기 마을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여기 토끼 같은 여자와 거북이 같은 남자가 있다. 지금까지 토끼와 거북이를 생각해보면 둘은 결코 친해질 수 없는 경쟁상대로 인식되어오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토끼와 거북이는 1:1 무승부이다. 토끼는 거북이에게 간을 빼앗기지 않았으므로 1승을 거두었고 거북이는 달리기에서 토끼를 제치고 결승점에 도달하였으므로 결론은 무승부이다.
그런데 이 둘의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수씨하고 민주씨 잠깐 내 자리로 와볼래요?”
팀장의 부름이다. 민주는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네! 라고 대답하며 재빨리 쪼르르 팀장의 자리로 달려갔고 현수는 민주보다 한 박자 늦은 대답고 걸음으로 팀장의 자리로 갔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프로젝트에서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 어려운 건 아니고, 음. 보자. 그러니까.”
팀장도 부장님께 듣고 온 업무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부장이 넘겨준 업무자료를 이리저리 넘기며 쓸데없는 단어로 말을 이어붙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팀장은 말을 이었다. 이 둘이 해야 할 일이 정리가 된 모양이었다.
“이번 테마는 갯벌이야. 갯벌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우리 회사 이미지를 잘 부합해서 진행해보도록 하라고. 체험이나 코스, 맛 뭐 다양하잖아? 잘 할 수 있지?”
팀장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비교적 간단했다. 그런데 프로젝트 업무를 맡은 이 둘의 조합이 문제였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둘이었지만 한 편으론 그리 나쁜 조합도 아니었다. 토끼 같은 여자는 아이디어가 좋았고 간간이 분위기도 잘 띄우는 사람이었다. 거북이 같은 남자는 조용하고 남들보다 한 박자 느렸으나 성실함만큼은 누구도 따라오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가 이 둘에게 떨어졌다. 팀장은 아이디어가 좋은 여자와 성실한 남자를 붙여놓기로 한 것이다.
회사의 여직원들은 어떻게 저렇게 답답한 사람이랑 일을 하냐며 민주의 하소연을 들어주었고 남직원들은 꾀만 부리면서 일하는 것보다 현수씨처럼 일하는 것이 정석이라며 각자의 편을 들어주었다.
둘은 시장조사도 해야 했고 갯벌에도 다녀와야 했음으로 온종일 거의 붙어있다시피 해야 했다. 민주는 매번 너무 꼼꼼하고 느린 성격의 현수가 답답했고 현수는 계획 없이 밀어붙이기만 하는 민주가 못미더웠다. 둘은 거의 각자 스타일대로만 기획안을 만들기 시작했고 팀장은 다시금 그 둘을 불러 세웠다.
“도대체 이게 뭐야? 둘이 같이 조사한 것 맞아? 누가 기획안 따로따로 작성하래?”
“팀장님 그게 아니고.”
“아니고 맞고 간에 오늘 둘이 사천 내려갔다와. 거기 갯벌에서 뒹굴든 치고 박고 싸우든 알아서 해. 제대로 된 기획안 가져오기 전까지 서울 올라올 생각도 하지 말고, 알겠어?”
팀장은 민주의 말을 매정하게 끊은 채 톡 쏘아 붙였다.
민주와 현수 둘은 하는 수없이 사천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둘은 도착하기 전까지도 한 마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착한 곳. 둘은 사전조사를 위해 섬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토끼가 하늘을 나는 듯한 모양의 섬이었다. 마을에 거주하는 할아버지께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가 내려져 있는 곳이라고 했다.
정신없이 섬을 둘러보다보니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둘은 말없이 떨어져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이 섬이 토끼와 거북이에 관한 섬이래요. 마치 우리를 닮은 것 같네.”
“이번 내기에서는 누가 이길 것 같은데요?”
“아직도 둘 중 누가 이길 것 같은 게 중요해요? 참. 이번 경기에서는 누가 이기고 지고 할 게 없다고요. 아까 팀장님 말 기억 안나요? 둘이 머리 싸매고 함께 해야 한다고요.”
토끼 같은 여자와 거북이 같은 남자는 서로 마주보고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