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그것 좀 내려놓을 수 없어요?”
한 달 전, 오랜 직장 생활을 마치고 쉬게 되신 아버지는 저녁을 먹자마자 또 통기타를 잡으셨다. 퇴직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얼큰하게 취하셔서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의 등에 난데없이 업혀 있던 바로 그 기타다.
“기억 안 나? 내가 왕년엔 기타로 아주 날렸잖어, 민정이 엄마!”
“그건 왕년 얘기고!”
어머니의 반격에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 말 그대로였다. 예전엔 아주 잘 치셨다지만,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기타를 연주한 적이 없는 아버지의 솜씨는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랜만에 기타를 잡았다는 사실이 마냥 좋으신 모양이었다. 내게 부탁하셔서 MP3에 가곡들을 잔뜩 다운로드 받으신 것은 물론이고, 7080 콘서트 프로그램 시간을 미리 적어두었다가 꼬박꼬박 챙겨보시기도 하셨다.
“어휴, 얘. 난 네 아빠 기타 소리 때문에 죽겠어, 아주.”
말씀은 항상 그렇게 하시지만, 나는 어머니는 아버지가 기타 치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것을 은근히 좋아하신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는 대학 캠퍼스의 잔디밭에서 기타를 치고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에 반했다고 하셨다. 옛날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 상징처럼 등장하는 바로 그 모습, 바로 흰 티에 청바지를 입고 장발을 한 채로 잔디밭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모습 말이다. 문학소녀였던 어머니는 소설처럼 아버지에게 첫 눈에 반했고, 매일 먼 발치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존재를 눈치 챈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거셨다고 했다.
“왜, 낭만적이고 좋은데.”
“다 늙어가지고 낭만은 무슨. 예전처럼 잘 치는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저걸 듣고 있자니 고역이다, 야. 저 양반, 내일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것도 까먹은 건 아닌지 몰라.”
어머니의 말에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독립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맞는 부모님의 기념일인 만큼, 올해는 꼭 내 손으로 챙겨드리고자 다짐했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여보, 민정이 엄마. 이리 좀 와 봐. 티비에 지금 누군 나오는지 알아?”
나는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지만, 어머니에게도 익숙한 이름인 듯 어머니가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가셨다. 서로 어깨를 기대고 앉아 노래를 따라 부르시는 모습이 정겨워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대체 어딜 가는 거냐?”
“가 보시면 다 알아요.”
저녁 식사 때 자르실 요량으로 아버지께서 사 오신 케이크를 그대로 조수석에 싣고,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미사리로 향했다. 서울 근교에 라이브 카페촌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 기억 나 어제 부랴부랴 검색을 해 보았더니, 꽤나 유명한 곳인데다가 생각보다 가까웠다.
서두른다는 것이 예약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버렸기에, 조정 경기장에 차를 세웠다. 운이 좋으면 모터보트 경기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데, 오늘은 시간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잔디밭과 꽃나무로 꾸며진 경정공원과 산책로, 솟대가 데이트코스로는 아주 그만이었다.
나는 아버지 몰래 어머니에게 예약된 카페의 전화번호와 약도를 건네 드렸다. 어머니는 초대 가수의 이름을 듣고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셨다.
“네 아버지 알면 아마 여기서 춤을 추실 거다.”
“그럼, 방해꾼은 이만 빠질게요. 한 삼십 분 있다가 이 길 따라서 쭉 걸어가시면 돼요.”
공연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카페 앞으로 두 분을 모시러 갈 것을 약속한 나는 혼자 자전거를 빌렸다. 공도교까지 이어지는 자전거 도로를 따라 갔다 오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한강변을 따라 자전거로 달리는 동안 종종 팔짱을 꼭 끼고 걷는 어르신들이 보였다.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는 노래 가사처럼, 추억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국어 시간, 같은 반 아이들은 우리가 사는 동네가 교과서에 나온다며 즐거워했지만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내가 원미동에 살게 된 것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마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한 사람처럼 나는 눈앞에 닥쳐온 걱정들을 빠르고 무딘 방법으로 해결하길 원했으며 별다른 불만사항은 물론이고 별다른 꿈도 없었다.
넉넉지 못한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난 탓일까,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 본 곳이라고는 국립공원이나 친척 집뿐이었다. 또래들과 같은 시기에 컴퓨터를 사지도 못했고, 유원지나 해외여행 같은 곳에 가자고 졸라본 적도 없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디지털 시대를 달릴 때 나는 홀로 아날로그 시대를 걸었다.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틀 만에 집에 들어오신 아버지에게 방학숙제를 위해 박물관에 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웃으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주셨고, 나는 묵묵히 오천 원짜리를 받아들고 집을 나섰다. 내가 원미동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부천 만화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하신 아버지 때문이었다. 좀처럼 돈을 벌기 힘들다는 직업을 택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자간의 대화가 갈수록 줄고 있는 것 또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원미 1동의 연립주택 203호에서 가장 가까운 박물관은 지하철로 네 정거장 거리에 있는 부천 만화박물관.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현실적인 범주 안에서의 판단이었다. 대강 훑어보고 견학문을 쓸 요량으로 빠르게 걸었다. 영화관에 가기보다는 만화방에 틀어박혀 있는 경우가 훨씬 많은 나였지만, 아이들처럼 뽀로로를 외치며 뛰어다닐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멈추어 선 곳은 볼록거울 앞이었다. 돌연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내 모습이 사방에 펼쳐진 것에 놀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기저기 뒤틀리고 구부러진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보며 온갖 생각을 다 해 보았다.
왜 가난한 집에 태어났을까. 기껏 외출할 기회가 생겼는데, 왜 고작 집 근처에 위치한 박물관에 와야 하는 것일까. 내 어깨는 왜 항상 움츠러들어 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여기에 이상한 거울을 설치해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건지에 대한 의문에 코너의 이름을 보니 ‘만화가의 머릿속’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한 마디가 불쑥 튀어나왔다.
“뭐야.”
웃음이 터진 나는 만화가의 머릿속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찬찬히 살펴보았다. 엉뚱한 상상력과 꿈이 넘치는 일상. 그곳은 아버지의 머릿속이었다. 행복과 불행은 종이 한 장의 차이라 하였듯이, 우스꽝스러움과 독특함 또한 종이 한 장의 차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폐관시간까지 박물관을 떠나지 못했다. 만화가들은 여전히 가난해 보였고,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내 몫의 저녁상을 차려놓은 채로 잠들어계셨다. 분명 어젯밤에도, 어쩌면 그제 밤에도 밤샘을 하셨을 것이다. 나는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어 아버지에게 덮어드리고는 다 식은 국을 맛있게 떠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한국 만화 영상 진흥원 안에 위치한 비즈니스 센터로 일터를 옮기셨다. 입주 경쟁이 꽤 치열한 곳이라고 했는데, 용케 심사를 통과하셨다. 한국 만화 영상 진흥원과 부천 만화박물관이 부천 영상 문화 단지 안에 나란히 입주해 있었다. 사무실 이전을 도우며, 나는 아버지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빠, 나 있잖아. 나도 그림을 그려볼까 해.”
아버지는 대답 대신 웃으셨다.
그날 저녁, 나는 원미동 연립주택의 거실에 누워 <원미동 사람들>을 읽었다. 교과서에 실린 김포 슈퍼와 형제 슈퍼 얘기가 전부인 줄 알았더니 꽤 두꺼운 연작소설이었다. 첫 장을 넘기자 첫 단편의 소제목이 보였다. ‘멀고도 아름다운 동네’. 그곳은 내가 사는 동네였으며, 아버지가 사는 동네였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영업을 하기 때문에 평소 쉽게 가게 문을 닫을 수 없었던 남자. 그래서 주기적으로 떠나는 휴가도 한번 제대로 떠나본 일이 없다. 그렇게 쉼 없이 달려온 3년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사업이었기 때문에 남자는 지난 3년간 아내와 아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이게 다 처자식을 위해 뼈 빠지게 버는 돈이라고 생각해왔으니까 미안하긴 했어도 조금은 당당했다. 그런 남편을 아내도 적잖이 이해해주는 눈치였다.
생전 가게로 전화를 안 하는 아내인데 웬일인지 가게로 다 전화를 했다. 아내의 말이 빨랐고 약간은 울먹였다.
“전화가 왔었어요. 방금. 민준이 담임선생님한테.”
“담임선생님한테? 왜? 민준이 뭐 사고친거야?”
“아, 아니. 학교에서 청소년 우울증 상담검사 같은 걸 받았는데. 결과가….”
평소 전화는커녕 부모님 모시고 오라는 소리 한번 듣지 않았던 터라 심장이 덜컹했다. 차라리 친구와 싸우거나 숙제를 안 해왔다는 전화였으면 좋았을 걸. 담임선생님의 전화는 뜻밖에도 아이가 학교에서 받은 청소년 우울증에서 우울증 수치가 높게 나왔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좀 더 자세한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전화였다.
우울증. 학교 다니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나? 아니면 학교에서 친구들과 관계가 좋지 않나? 그런 것도 아니다. 아내의 말대로라면 담임선생님께선 아이들과의 문제는 없어 보인다고 했으니까.
누구를 위한 3년의 시간이었나 생각한다. 남자는 가장으로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는데 아이는 아빠의 빈자리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었나보다.
모처럼 가게 문을 닫고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월성계곡으로 떠났다. 병원을 가보기 전 일단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담임선생님의 소견이었다. 아이는 즐거워보였다.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아니 아내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아이에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정 상태는 어떤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방송을 타서인지 계곡에는 때 늦은 피서객이 몰려들었다. 아빠와 즐겁게 물놀이를 하는 아이도 보였고 튜브를 타고 물살을 즐기는 아이들도 보였다. 멀리서 고기 굽는 냄새와 옥수수를 먹는 아이들이 보이며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내 아이의 머릿속도 아니 마음속도 한가롭다고 느껴지면 좋을 텐데 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물은 시리도록 맑았고 푸른빛이 맴도는 풍경은 봄의 화사함만큼이나 밝았다. 저마다 하하 호호 웃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방갈로 마다 퍼져나갔다.
하루를 아이와 꼬박 즐겁게 놀아본 것이 얼마만인지 남자의 머릿속은 금세 까마득해졌다. 내심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는 해맑게 방갈로를 뛰어다녔고 여느 때와 같이 즐거워보였다. 은근슬쩍 학교에서의 생활을 물어보기 좋은 시간이었다.
“학교 다니는 것이 힘들어? 친구들과 사이는 어때? 공부하는 것이 지치니?”
“아빠,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물어보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빨리 대답해봐. 응?”
“음. 아빠! 우리 다음에는 또 어디가요?”
세월이 변하고 강산이 변하여 내가 사는 모습 또한 이전과는 많이 다르다. 태백산맥 말단의 백양산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내 상세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백 년을 사는 속세의 사람들은 하루를 단위로 가치를 매기나, 수천 년을 사는 내게 하루하루는 덧없이 흐르는 세월 속의 한 자락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내 명도 다하여 백양산 어느 언저리에 조용히 젖어 들고자 하니, 눈에 띄는 것은 천 년 전이나 다름없이 운수사 뿐이라.
이 절이 처음으로 지어지던 날 또한 내 상세히 기억하지 못한다. 여느 때처럼 산을 한 바퀴 휘이 돌아 잠을 자러 가던 차에, 가야국의 사람 몇이 서까래가 될 나무들을 날라 오던 모습만이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잠시 몸을 숨기고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엿들어 보았었다.
“이곳에서 상서로운 운하가 피어오르는 걸 보았다는 게 정말인가?”
“그럼. 나는 본디 가락에 살던 사람이라 이 산을 자주 올려다보았네. 아침이면 이곳에서 흰 구름이 피어오르고 꽃 무지개가 뜨는 것을 가락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았지.”
“그것 참 신통한 일일세. 아마 이 곳에 신선이 살고 있나 보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만 껄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수천 년을 살아온지라, 내가 기침하여 하품을 할 때면 흰 구름이 피어오르고 기지개를 켤 때면 꽃 무지개가 뜨는 것을 가야국의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이 깊은 산중까지 내 흔적을 찾아올 생각을 한 것이 참으로 기특하여 운수사가 완공되었을 때, 이곳을 복전으로 만들어 줄 복두꺼비 한 마리를 몰래 내려 주었다.
그런데 운수사 터는 자꾸 넓어져만 갔다. 소원을 들어 준다는 영험한 두꺼비 바위를 찾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 끼의 공양을 짓는 데 쌀뜨물이 운수 계곡을 거쳐 십 리나 떨어진 모라 마을까지 흘러내릴 정도이니, 이 정도면 과하다 하겠다. 가야인들의 심성이 선하여 자연을 해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매일같이 인파가 다녀가니 내 몸 하나 편히 누일 곳이 사라져 가더라. 내 용왕과도 각별한 사이인지라 산신각 대신에 용왕각을 지은 것은 개의치 않으나, 날이 갈수록 산중이 소란스러워짐은 쉬이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내 중히 여기던 산의 한 자락을 기꺼이 내어 주었거늘, 어찌하여 산을 이리 마음대로 누리는가. 산중을 거니는 것이 유일한 내 귀에 매일같이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오니, 내가 견디기가 힘들어지는구려.”
벼르다 못해 주지 스님의 꿈에 나타나자 선한 주지 스님이 예상치 못한 호령에 황망해 하더라. 고민 끝에 주지 스님이 두꺼비 바위의 턱을 깨어 버리자, 본디 용왕에게서 맡아 바위 안에서 기르던 청사자 한 마리가 그대로 떠나 버렸다. 용왕께 돌려보낼 때가 되었다 생각하고 있었으나, 갑작스런 일에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한동안 구름이 피고 무지개가 뜨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으니,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 줄고 종국에는 사세가 기울어 가더라. 미안한 마음에 세진당 모퉁이에 팽나무 한 그루를 심어 두었다.
두꺼비 바위에서 도망친 청사자는 범어사로 갔다 하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 이 운수사도 천년고찰의 칭호를 얻게 되니, 이 또한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왜적의 난으로 불에 탔던 건물도 모두 복원되었으나, 운수사의 낡은 처마 끝에 나와 함께 지내 온 세월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금정봉과 불웅령을 돌아 하천 줄기를 따라 낙동강까지 둘러보았다. 마실의 종착지는 언제나 운수사 대웅전 앞이다. 나와 함께 천 년을 숨 쉰 곳이니, 이 조용한 절에 녹아들어 신선으로서의 삶을 마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 년을 숨 쉬어 온 절과 함께 천 년을 더 걸어갈 꿈을 꾸니, 마지막 꿈으로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은 꿈이다.
언제까지 계속 알바만 하고 다닐 거니? 친구들은 취업하지 않았어? 학교는 그러게 끝까지 다니라니까 아무튼 너만 보면 한숨만 나온다. 한숨만.
아침 일찍 어디라도 나가지 않으면 엄마의 잔소리로 하루를 맞이해야 한다. 사실 엄마가 이런 잔소리를 하는 것도 아주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다. 학교는 중퇴하고 친구들은 이제 직장에서 자리 잡으며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는데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서 단기 알바자리 있나 어슬렁어슬렁 거릴 뿐이었다.
내 삶을 돌아보면 나는 어쩌면 녹슨 못처럼 쓸모없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쩔때보면 숨만 쉬고 있는 집안의 가구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 때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야 뭐하냐? 집에서 뒹굴고 있을 것 같아서 전화했다. 좋은 단기 알바자리 있는데 할래?”
“뭐하는 건데?”
“칠석에 있을 전통놀이 행사라는데 그냥 가서 사극에서 나오는 옷 입고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어려운 건 아니라니까 해봐. 시급도 괜찮다고 들었어. 할거지? 한다고 한다!”
“야, 야 잠깐만.”
끊겼다. 칠석에 있을 전통놀이 행사? 그런걸 아직도 한단 말이야? 뭐 노인네들 잔치 하나보다 생각했다. 이 녀석은 언제까지 어디로 가면 되는지는 알려줘야지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었다.
행사 당일이 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 행사 관계자들 틈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는 나를 불러 세운 사람이 있었다.
“영기씨 맞나요?”
세련된 외모에 서구적인 체형을 가진 여자였다.
“네. 오늘 단기알바로 신청한 사람인데요.”
“네, 알고 있어요. 이쪽으로 와서 이 옷으로 갈아입고 고싸움이 시작하면 신나게 줄만 당겨주면 되요. 어렵지 않죠? 그리고 고싸움이 끝나면 나랑 같이 사람들 통제하면 되고요. 뭐 일종의 경호와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쉽죠.”
“아. 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무슨 면접 본 후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도 아닌데 왜 그런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저 여자와 함께 한다는 말 때문이리라.
행사는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머슴 옷과 같은 흰색 위아래 한복을 입고 있는 힘껏 줄을 당겼다. 여자는 남사당패들 사이에 있었다. 줄을 당기고 있는 그 순간에도 시선은 여자에게로 향했다. 있는 힘껏 줄을 당기며 아까 여자가 한말을 곱씹어 봤다.
‘나랑 같이 사람들 통제하면 되고요.’
나랑 같이 라고 했지? 분명. 그랬지?
줄 당기는 일이 끝나고 달집 태우는 순서가 오자 사람들이 불 가까이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람들을 통제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검은 양복으로 갈아입은 뒤 사람들이 불 가까이로 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여자도 사람들을 막고 서 있었다.
불길 옆에 있어서 일까 남자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히 더 열심히 사람들을 통제했다. 마치 정말 경호원이 된 것처럼.
달집태우기도 끝나고 준비된 모든 행사가 끝이 났다. 옷을 반납하고 돌아서려는데 여자가 나를 불러 세웠다.
“오늘 멋지던데요? 수고 많았어요. 단기 알바라고 하면 다들 그냥 자리만 채우다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거든요. 그런데 영기씨는 좀 다르더라고요.”
나보고 오늘 멋지다고 했다. 잔뜩 녹이 슬어 쓸모없어 하는 내게 누군가 처음으로 멋지다고 했다.
“너 상사화가 왜 상사화인줄 알아?”
“글쎄”
“에이, 그것도 몰라? 상사화는 말이야. 잎이 져야 꽃이 피고, 꽃이 져야 잎이 나는 꽃이야. 세상에, 꽃하고 잎이 만나지를 못해. 그래서 서로를 평생 그리워만 한다나? 이 얼마나 궁상맞은 꽃이냐. 내 인생하고 아주 똑같아…….”
“또 내 얘긴 듣지도 않고 하고 싶은 말만 하지. 아, 엄마! 방에 들어가서 자! 아유, 술 냄새!”
연례행사다. 상사화가 만개할 때마다 엄마에게 끌려 영광에 오기를 벌써 사 년째. 엄마는 항상 저녁 무렵에 영광에 도착해서 술을 진탕 마시고는 다음날 몽롱한 상태로 불갑사에 갔다. 그리고 잎도 없이 새빨간 상사화 속에 파묻혀 기도를 했다. 혹시 엄마가 독실한 불교 신자라서 상사화가 만개한 것을 부처님 공으로 돌리는 거 아니냐고? 아니, 우리 엄마는 나만 믿는다. 신보다도 내가 더 낫단다. 하긴, 엄마는 살아생전 아빠도 믿지 않았다.
아빠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우리에게 믿음을 준 적이 없었다. 잠수 타다 빚만 안고 돌아오기를 수십 번. 그래도 엄마는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아빠의 빚을 갚았고, 마지막으로 빚 대신 병을 안고 돌아온 아빠를 임종직전까지 극진히 간호했다. 나는 평생 애정 없는 남자를 뒤치다꺼리하며 살아온 엄마가 가여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흠모했던 다른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반갑기까지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엄마에게도 엄마의 인생이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엄마, 남자친구 만들어도 돼. 이제 아빠도 없으니까 자유잖아. 결혼 직전까지 좋아하던 딴 남자 있다며? 나 신경 쓰여서 머뭇거리는 거야?”
“아냐. 그런 거. 그 사람 출가했으니까.”
엄마가 좋아하던 사람은 어느 절의 스님이 되었다고 했다. 출가 전날, 훌쩍이던 엄마에게 잎이 없는 상사화 한 송이를 주며 이승에서 흠모했던 걸로 만족하니 저승에서 보자고 했다나? 하여간 아빠가 돌아가신 다음해부터 엄마는 해마다 상사화를 보러 나섰다. 그 스님의 소식은 알 수 없으니, 스님 대신 상사화가 있는 절이라도 가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검색 끝에 영암의 ‘불갑사’가 상사화 최대 군락지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엄마는 더 묻지도 않고 영암가는 차표를 샀다. 그리고 매년 9월, 나는 내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상사화 축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해마다 엄마의 간접 연애를 훔쳐보는 기분으로 말이지.
다음 날, 눈을 떠 보니 엄마가 먼저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 술 냄새도 가시지 않았는데, 의욕 충만한 모습이었다. 이국적인 모양의 불교 테마 공원을 지나 붉은 다리를 지나니, 붉은 꽃이 바다처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이뤄지지 못하는 인연에 반발하듯 붉게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잎도 없이 홀로 화려하게 피어난 것을 보니 고고한 한편 처연하게 보이기도 했다.
엄마는 상사화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귀하게 쓰다듬고, 곱게 보듬었다. 그리고는 화소 낮은 폴더 폰을 꺼내어 요리조리 다른 각도에서 사진을 쉼 없이 찍었다. 나는 예년처럼 그런 엄마에게서 조금 멀찍이 떨어져 꽁무니를 쫓아다닐 뿐이었다.
“소녀 같으시네요.”
정신없이 사진을 찍으시는 엄마에게 웬 사내가 말을 걸었다. 민머리에 승복을 입을 걸 보니 스님인 듯 했다. 엄마는 얼굴이 붉어졌다.
“예, 예? 환갑이 다 되어 가는데 소녀라니요…….”
“상사화 이야기에 나오는 소녀 같으세요. 스님에게 반해 속앓이 하다가 죽어 무덤에 상사화를 피웠다는 그 아가씨 말이에요.”
스님의 이야기에 엄마와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야말로 엄마의 이야기가 아닌가. 입을 쩍 벌린 엄마를 보며 스님이 말을 이었다.
“어떤 스님이 상사화 소녀가 오면 전해 달라 하셨어요. 그동안 고되게 사느라 고생 많았고, 남은 인생 자유롭게 살라고요. 그리고 앞으로도 상사화 철엔 꼭 불갑사를 찾아 달라 하셨습니다.”
엄마는 두 눈이 그렁그렁해진 채로 서 있었다. 나는 엄마의 뒷모습에서 처음으로 작은 소녀를 보았다. 붉게 일렁이는 상사화 사이에서 어느새 엄마도 꽃처럼 흐느끼며 일렁이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에 소식 없는 문 앞만을 지키고 서있다. 나올 시간이 지났는데 깜깜 무소식이었다. 그때 아기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렸고 남자는 자리에 멈추어서 소식을 말해줄이를 두손 모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문 안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 뒤로 안도의 한숨과 함께 산모는 아이의 성별을 물었다. 아들인가요? 딸인가요? 돌아오는 대답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 여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산모들 같으면 손가락 발가락 다 있나요? 혹은 아이는 어떤가요? 라는 말을 물었을 텐데 아이의 성별을 먼저 묻는 걸 보니 한참을 기다렸던 아들인가보다 했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나왔다. 아이의 성별을 말해주기 위함이었다. 방금 나온 아이가 아들이라는 것을 들은 남자는 털썩 주저앉았다. 기뻤다. 딸이었어도 기뻤을 것이었지만 아들이라는 말에 조마조마했던 시간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한참 만에 시골에 전화를 할 수 있었다. 감격에 찬 목소리로 전화를 걸고 아이가 아들임을 당당히 말했다.
“그게 정말이가? 고추가 나왔단 말이지? 아이고, 장하다. 장해.”
“어머니도 참. 아무튼 그렇게 아세요.”
“그래, 마. 아가한테도 수고했다고 전해주고. 알긋나?”
남자의 엄마는 수화기 주변으로 모여 앉은 사람에게 아들이라는 단어 대신에 또 고추라는 단어를 쓰며 아들이 태어났음을 알렸다. 그리고 며느리에게 아가라는 말을 단어를 쓴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아들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이제 시골집에 금줄에 고추를 매달아 놓을 것이다. 그리고 마을 잔치를 벌이시겠지.
요즘은 많이 사라졌다고 해도 시골에 계신 시부모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아들귀한 집안에 줄줄이 딸을 낳았으니 애가 타는 마음을 아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넷째를 가졌다는 말에 시골에서는 아들 낳기 좋다는 한약재들과 각종 음식들을 보내왔다.
그 중에서도 고추로 만든 음식들이 많았다. 여자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무리 아들을 바라왔던 이들이지만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생각했다. 고추를 많이 먹는다고 아들을 잘 낳게 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인구비율이 제대로 맞춰질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부담가지지 말라며 보내온 음식들을 꼬박꼬박 챙겨먹으며 여자는 온몸으로 모든 시선과 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의사는 양수와 분비물로 뒤섞인, 마치 핏덩어리 같은 갓난아이를 품에 안아주었다. 뱃속에 있다 나와서인지 따뜻했다.
“아들을 많이 기다리셨나봐요.”
“네. 많이 기다렸어요. 제가 그동안 고추를 얼마나 많이 먹었는데요.”
“아, 네. 참, 아이도 산모도 건강해서 다행입니다.”
의사는 마무리 말을 하고 간호사에게 뒷마무리를 넘긴 뒤 자리를 벗어났다. 의사에게 괜한 소리까지 한 것을 알면서도 여자는 감격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모를 눈물을 흘렸다.
이 아이가 딸아이였다면 아니, 또 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을 했다. 맵기도 정말 매웠던 고추를 그렇게 씹어 먹으며 눈물로 기다리던 아이였다. 막상 기다리던 아들이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왜 이렇게 슬픈 건지 몰랐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데 눈가가 매웠다.
저녁때가 다가와 장 보러 나갈 준비를 하자 어린 아들이 또 마트에 가자고 성화였다.
“엄마는 마트 말고 시장 갈 거야. 같이 갈래?”
“싫어! 시장은 냄새난단 말이야!”
아이가 잔뜩 토라진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내 오늘 저 녀석의 볼기짝을 때려 주리라 결심하고 뒤를 홱 돌아보았는데, 일곱 살 밖에 안 된 쪼끄만 게 눈치는 또 삼단이라 벌써 제 방으로 도망쳐버렸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아주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내게 모든 애정을 쏟아 부으셨다. 최신 전자기기를 반에서 가장 먼저 갖게 되는 것도 언제나 나였고, 가정부 아주머니가 말끔히 다려 준 교복을 입고 등교했으며, 방과 후 교문 앞에는 항상 나를 데리러 온 기사 아저씨가 있었다. 친구들은 모두 나를 부러워했고, 내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남들에게 없는 것도 다 있었고, 갖고 싶은 것이라면 언제든지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영화 속의 여주인공처럼 나날이 콧대가 높아져만 갔다.
어느 날은 교문 앞에 나를 데리러 온 기사 아저씨가 없었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두 시간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아버지께 이 일을 다 일러바쳐서 혼쭐이 나게 해 주리라고 벼르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 안이 소란스러웠다.
“영희야, 넌 안에 들어가 있어라.”
한 번도 내게 엄한 얼굴을 보인 적이 없던 아버지였는데, 표정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문에 귀를 바짝 대고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엿들었다. 아버지의 친구에게 명의를 빌려 준 일이 있는데, 모르는 새에 아버지 앞으로 빚이 엄청나게 쌓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가게를 팔고 새로 사업을 시작하겠다며, 나를 할머니께 맡기고 어딘가로 떠나셨다.
갑작스레 시골로 전학을 가게 된 것은 불만이었지만, 전에 사 두었던 워크맨 같은 것들이나 외국에 다녀온 이야기들로 쉽게 새 친구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나는 빠르게 새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고, 학교에서는 모두들 나를 부잣집 딸로 알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고기반찬이 하나도 없는 밥상 앞에 앉을지라도, 학교에서만은 여전히 내가 공주님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게 큰 약점이 하나 생겼다. 바로 할머니가 나물 장수라는 사실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맡아 키우시게 된 이후로 밤낮 없이 나물을 캐러 다니셨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싫었다. 이제는 할머니가 매일같이 내 교복을 다려주셨지만, 우리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보다도 낡은 옷을 입은 할머니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하교하던 나는 저 만치 멀리 길바닥에 앉아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발견했다.
“우리 강아지, 지금 끝난 거여?”
할머니는 내게 반갑게 손을 흔드셨지만, 나는 친구들 앞에서 ‘이상한 할머니네.’하고 시치미를 뗐다. 할머니는 내가 보낸 경멸의 시선을 빠르게 알아차리셨고, 내가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계셨다.
이 년이 지나고, 어느 정도 가세가 회복되어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까지 나는 한 번도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물을 다 팔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신 할머니는 항상 웃는 얼굴로 내게 저녁상을 차려 주셨다. ‘우리 강아지, 배고팠지?’하시면서 말이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는데, 내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서야 내 철없던 행동들을 반성했지만,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걷다 보니 어느 새 시장 입구였다. 간판까지 내 걸고 깔끔하게 새 단장을 마쳤지만, 거기에 서 계시는 노인들의 모습은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
“아이고, 오늘도 나오셨네. 봐봐. 오늘은 고사리가 아주 싱싱해.”
허물없이 건네는 인사들과 웃음이 오갔다. 나는 이 반듯한 신식 시장과 그 안에서 어우러져 피어나는 구수한 웃음들을 보며, 새침데기 고등학생이던 나와 우리 할머니를 떠올린다. 그 때 웃으며 할머니께 인사를 드릴 수 있었더라면, 할머니와의 추억이 몇 갑절은 많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우리 동네에는 더 많은 마트가 들어서겠지만, 나는 그 때에도 골목을 누비며 시장을 찾아 낼 것이다. 그리고 그 귀퉁이 어딘가에서, 또 어느 할머니에게 나물 한 봉지를 사야지. 그런 생각들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