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학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새내기로 맞았던 대학의 첫 봄은 너무 빨리 지나가버렸다. 남들도 다 겪는다는 미완의 러브스토리도 두어 개 생겼고, 아주 많은 사람들과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벚꽃 날리는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이야기를 하던 꿈같은 지난 봄. 올해도 캠퍼스에서 봄을 맞을 수 있었는데, 연년생인 동생이 사립 명문에 턱걸이로 합격하며 나는 휴학을 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동생의 학비를 위해 내 학업을 잠시 접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카페에서 시작한 파트타임의 아르바이트는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흰색과 푸른색으로 꾸며진 심플한 내부에 하얀 의자들이 놓인 카페는 내 취향에 꼭 맞는 곳이었고, 사장님께 라떼 아트를 배우는 재미도 쏠쏠했다. 직장인들이며 대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점심시간 대를 제외하고는 손님도 그렇게 많지 않았고, 별다른 사건 사고도 없었다.
문제는 이 사건사고가 없는 점이었다. 스물한 살이 맞는 봄 치고는 너무도 단조로운 이 봄. 동생의 SNS 페이지에 올라오는 대학 생활의 단면들을 감상하며, 왠지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여기에서 샷을 내리고 휘핑크림을 얹고 있고, 동생은 웃고 떠들고 공부하고 논다. 등록금 때문에 빚을 낼 수도, 갓 대학에 합격한 동생을 휴학시킬 수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억울한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정오 즈음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이어지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여행을 가기도 애매했고,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과는 시간이 맞지를 않았다.
작년 12월에 1학년의 두 번째 학기를 종강한 이후로 카페와 집만을 오가던 내가, 갑자기 카페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린 것은 순전히 기분 전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날도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계양역에서 내려 계양대교 위를 건너가는데, 기차 한 대가 다리 밑을 지나갔다. 갑작스런 소음에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았는데, 눈을 떠 보니 아라뱃길 위로 지나는 유람선이 보였다.
평소에는 눈길도 주지 않던 아라뱃길이 그날따라 왜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을까. 계양대교를 따라 아라뱃길 위를 건넌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귤현타워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봄꽃이 꽃망울을 틔워내는 시기였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봄바람에 섞여 온 아련한 꽃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그러고 보니 봄이 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꽃구경 한 번 하지 못했다. 시간이 없어 못했다기보다는, 도저히 꽃구경을 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삼십 여 분을 걸었을까, 저 멀리 아라폭포가 보였다. 친구들한테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인공 폭포라고 해서 공원이나 캠퍼스에 조성되어 있는 작은 폭포를 상상했었는데, 아라폭포는 생각보다 꽤 컸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아라폭포 위로 올라 가 볼 수 있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왜 떨어지는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폭포 안쪽에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옛날이야기 속의 신선이라도 된 것 같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폭포 안으로 들어갔다. 물줄기에 가려져 바깥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폭포 안에 쪼그려 앉아 머리 위에서 힘차게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아래로 흐른 물은 다시 위로 올라갈 것이고, 또다시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는, 또 위로 올라갈 것이다. 하루가 지나듯, 한 달이 지나듯. 그리고 일 년이 지나듯 말이다.
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사장님의 부재중 전화가 열통이 넘게 찍혀 있었다.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문자와 함께. 그리고 동생이 보낸 메시지가 와 있다. 메시지를 읽기 전에 나는 폭포를 나와 내려가는 계단에 앉았다. 시원한 물소리가 귀를 때렸다. 물줄기를 따라 봄이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알람 소리를 듣지 못했다. 완전히 지각이었다. 사장님의 욕설 섞인 호통을 들으며, 고개를 숙여 잘못했다고 빌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지각이었다. 나는 남들보다 늦은 출발선에 서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벌써 육 개월 전에 캠퍼스에서 봄을 맞았다. 나는 아직도 내가 가야 할 길로 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외동아들인 내가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기를 원하고 계셨고, 나도 오래 전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수도권의 경영학과에 가기 위해 성적을 맞추면서도,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정답은 당연히 ‘아니오.’였다. 하루에 두세 시간은 꼭 그림을 그리는 데 할애하는 내게는 벌써 수십 권의 드로잉북이 있었다. 내가 미술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그림쟁이에게 대 줄 돈은 한 푼도 없다며 화를 내셨다.
아버지와 크게 싸운 나는 그대로 집을 나왔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한 뒤, 아르바이트 장소 근처의 고시원에 자리를 잡았다. 스무 살. 나는 아직 어렸고, 앞으로의 생활 문제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앞섰다. 잘리지 않기 위해 사장님의 온갖 뒤치다꺼리까지 다 해결하며 사방팔방 뛰어 다녀도 소용이 없었다. 최저 시급도 챙겨 주지 않는 월급으로 밥값과 방값을 해결한 뒤 남는 돈은 오십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이렇게 무작정 돈을 번다고 해서 대학에 갈 수 있을까. 등록금만 번다고 해서 미대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미술학원을 다녀도 모자랄 시간에 돈을 벌고 있어도 되는 것일까. 날이 갈수록 불안해지기만 할 뿐, 구체적인 방향이나 해결책이 없었다.
일주일에 하루 밖에 되지 않는 휴일, 나는 기분 전환을 위해 인근의 공원으로 나섰다. 고시원 주인에게 물어보고 나선 길이라 어떤 곳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알려준 길대로 찾아와 보니 알록달록한 조형물이 늘어 서 있는 것이 내 취향은 전혀 아니었다. 그대로 돌아서려는데 ‘나비 공원’이라는 글자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비. 봄에 날개를 펴는 나비. 나는 나비를 그리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여린 날개로 나폴 나폴 날고 있는 것을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초등학생 때 우연히 번데기에서 부화하는 나비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따스한 봄볕에 날개를 말리는 나비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도 나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내가 처음 그리기 시작한 그림도 나비였다.
나는 홀린 듯이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나비 장식이 된 전등, 나비 날개가 달린 벤치, 나비 모양의 풍향계와 나비 모양의 거대한 조형물들. 잠자리가 날아다니는 계절에 나비가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포기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때, 나비생태관이라고 적힌 푯말이 보였다. 마지막 희망을 안고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노란 돔형 온실의 모양을 한 나비생태관은 작은 식물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순간, 제비나비 한 마리가 눈앞을 스쳐 날아갔다. 자세히 보니 꽃인 줄 알았던 것들이 나비였다. 꽃나무 가지 위에 나비들이 앉아서 날개를 까닥이고 있었다. 나는 드로잉북을 꺼내는 것도 잊고 한참동안 나비를 구경하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던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나비는 꽃잎처럼 팔랑이며 조금씩 더 높게 날았다. 봄에 보는 나비만큼이나 가을에 보는 나비도 아름다웠다.
나비를 따라 시선을 옮겨가니 온실 천장을 통해 하늘이 보였다. 햇살에 눈이 찡하고 아파왔다. 두 손으로 눈을 감싸 쥐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나비는, 언제 날아도 다 같은 나비였다.
서울에 취직이 결정되어 집을 떠나게 되었을 때, 기뻐하는 내 곁에서 어머니는 ‘왜 굳이 서울이냐’는 말만을 반복하셨다. 취업난이 얼마나 심각한데. 엄마가 뭘 몰라서 그렇다며 짜증을 내는 통에, 어머니와 나의 이별은 그리 아름다운 모양새가 아니었다.
이삿짐을 싸고 있는 내게 어머니가 책 한 권을 건네셨다. 귀퉁이가 다 닳고 너덜너덜해진 책. 우리 집처럼, 낡고 또 낡았다.
“이런 건 또 왜요. 가져가 봐야 읽지도 않을 텐데.”
“너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인데 기억 안 나니? 어젯밤에 읽어봤는데 재미있더라. 일하다 지치면 한 번씩 들여다 봐.”
나는 그 책을 꼬박 오 년이 지난 오늘에야 다시 발견했다. 오 년 동안 쉼 없이 일한 결과, 직급도 연봉도 높아졌다. 직장에서 사십 분이 걸리는 대학가의 자취방에서 시작해서, 이제는 지하철로 다섯 정거장 떨어진 원룸 촌에 자리를 잡았다. 집에 가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자주 전화를 드리지도 않았다. 먼 지방의 지역 번호를 누르는 것이 싫었다. 이유는 그 뿐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나는 행복이라는 것을 좀처럼 느낄 수가 없었다. 아침 일곱 시 반에 일어나 회사에 가서, 하루 종일 엇비슷한 서류들 사이에서 머리를 싸맸다. 나를 괴롭히는 상사도 없었고, 딱히 사이가 나쁘다 할 만한 동료들도 없었으며, 매일 점심을 같이 먹을 정도로 친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바쁘게 사는 것이 좋았다. 얼굴을 본 지도 몇 년이 지난 친구들을 굳이 불러내어 맥주를 한 잔 하는 것이 귀찮았다. 통장에 쌓여가는 잔고들을 확인하며, 미래를 꿈꾸는 것이 좋았다.
헌데 그 미래라는 것이 참 묘했다. 안정된 직장을 가진 좋은 사람을 만나, 아이들을 낳고 싶었다. 그러는 중에는 내 집을 가지기 위해 일을 할 것이다. 아침에는 조금 더 일찍 일어나 가족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저녁에는 가계부를 정리할 것이다.
하루의 끝, 자진해서 야근을 하고 돌아오면 빈 부엌에서 무엇을 먹어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뜨거운 물로 삼십 분도 넘게 샤워를 했다. 고단함이라는 것이 쉽게 씻겨 나가지 않았다. 문득,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러 본 지도 십 년이 넘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가신 이후로 혼자 나를 키워 오셨다. 집안 살림이 넉넉한 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나날이 말라가셨다. 하지만 집에 웃음이 끊겼던 기억도 없다. 낡고 초라한 반지하의 빌라였지만, 어머니는 매일 내가 좋아하는 반찬 한 가지씩을 상에 올려 주셨다. 먼 곳에 가지는 못했지만, 저녁이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섰다. 길거리의 이름 모를 꽃들을 들여다보며 함께 웃었다. 컴퓨터를 사 주지는 못하셨지만, 헌 책방에서 한 달에 한두 권씩은 꼭 책을 사다 주셨다.
점심 즈음에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와 내가 함께 살던 반지하의 빌라가 헐린다고 했다. 나는 ‘받은 돈으로 새 집을 구하면 되지. 혼자 살기에는 어차피 크잖아.’라고 대꾸하고 전화를 끊었었다. 그런데 그 낡은 책을 보자 문득, 그 구질구질한 집에서의 웃음소리가 그리워 진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첫 장을 펼쳤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라는 투박한 제목을 가진 그 책은, 어머니가 사다 주셨던 책 중의 한 권이었다. 땅보다 갯벌이 더 많은 바닷가였던 괭이부리말에는 고양이 섬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섬이 있었다고 한다. 갯벌도, 고양이섬도 바다가 메워지며 흔적을 감췄고, ‘괭이부리말’이라는 이름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고 한다.
책을 넘기며 나는 혼자 눈물을 훔쳤다. 책 속의 명희는 괭이부리말에서의 기억을 모두 잊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는 가난하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명희가 10층짜리 아파트를 떠나 여전히 가난한 동네인 괭이부리말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도 명희는 지금 행복했다. 다 낡아빠진 숙자네 집 문 앞에 선 지금이 엘리베이터 자동문 앞에 섰을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꼈다. 명희는 이제서야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책의 한 구절을 소리 내어 읽으며,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방학 끝물, 다음 학기가 마지막인 친구들끼리 모여 특별한 기억을 만드는 계획을 세우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대학생으로 맞는 마지막 방학인 만큼 정말 특별한 계획이 필요했는데, 바다도 계곡도 지겨울 정도로 다녀왔기에 마땅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야, 정말 이제 해외로 나가지 않는 이상 할 게 없는데?”
맞는 말이었다. 우리처럼 많이 놀러 다닌 대학생들도 없을 것이다. 전국 각지의 명소란 명소, 축제란 축제는 다 돌아다니는 우리들 네 명에게는 이미 국문과 유랑단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우리의 고민은 하루 종일 이어졌다. 마땅히 끌리는 곳이 없어서 애를 먹고 있는데 한 명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 하나 있다. 우리가 안 해 본 거. 자전거 여행은 한 번도 안 해 봤잖아.”
“자전거 여행? 그건 제대로 가려면 한 일주일 잡고 가야 될 텐데, 우리한테는 이번 주말 밖에 시간이 없잖아.”
게다가 학교 근처에서 모두 자취를 하고 있는 터라 자전거를 소지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자전거라는 말에 다들 귀가 솔깃해졌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의 접이식 자전거 이후로, 자전거를 타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자전거 여행은 제치고서라도, 자전거를 빌려서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있는지를 찾아내는 데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고민한 결과 선택한 곳이 소래습지생태공원이었다. 폐염전과 염전 저수지, 그리고 풍차를 함께 볼 수 있는 자전거길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바로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 대학생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은 행동 개시를 서둘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주말은 정말 맑았다. 너무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서 그런지 처음에는 중심을 잡기도 힘들어하는 친구도 있었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네 명 모두 신나게 소래길을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길이라더니, 볼거리가 많았다.
넓은 들판 위에 빨간 풍차 세 대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을 보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전거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 큰 청년 넷이서 풍차 앞에서 포즈를 잡고 있는 모습이 우리 스스로도 우스워 한참을 웃었다. 커플 단위로 사진을 찍으러 나온 사람들도 많았고, 체험학습을 나온 것 같은 어린 애들의 모습도 꽤 많이 보였다. 염전에 파란 하늘이 그대로 비치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는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난 사실 여기 걸어서는 몇 번 와 봤는데, 걸을 때랑은 기분이 완전히 다르네.”
“맞아. 보이는 게 완전히 다른데?”
정말이었다. 나도 새내기 때 즈음에 혼자 소래길을 걸으러 나와 본 적이 있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소래길은 또 느낌이 달랐다. 걸을 때에는 꽃 하나, 풀 하나가 다 특별하게 보였는데, 자전거를 타고 지나니 그 꽃 하나와 풀 하나가 포함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더 넓게, 더 멀리 볼 수 있게 된 것 같은 기분에 왠지 뿌듯해졌다. 좁은 시선으로 보는 풍경도 아름답지만, 넓은 시선으로 보는 풍경도 특별했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다들 말이 없어졌다. 아마 다들 머리가 복잡할 것이다. 사실 어디론가 떠나는 일에 대해 우리의 마음이 급해진 것은, 앞으로 이렇게 추억을 만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압박감 때문일 것이었다.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데에만 열중하던 우리들이었는데 이제는 어느 새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말은 안 하지만 다들 졸업 후에 무엇을 하며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많았고, 이미 고시나 토익 준비 때문에 평소에는 집 밖으로 잘 나오지 못하는 친구들도 몇 있었다.
부인교에 걸린 구름 앞에서 우리는 하나같이 멈춰 섰다. 때마침 패러 글라이드 하나가 바람을 타고 미끄러져왔다. 파란 하늘 위에 노란 패러 글라이드가 미끄러지는 모습에 모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문득, 풍차 근처에서 연을 날리고 있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들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연에 꿈을 매달게 될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도중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한 마디가 흘러 나왔다.
“딱 오 년 뒤에, 다들 남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살고 여기 다시 오자.”
어울리지 않게 웬 진지한 말이냐며 빈축을 샀지만, 친구들 모두 멋쩍게 웃는다. 손을 모아 파이팅을 외치고 돌아오는 길,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주말의 밤은 언제나 시끌시끌하다. 극장 앞은 아직도 오늘 공연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극장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긴장과 환호성, 불빛이 가득한 아름다운 극장의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뒤의 조용한 극장의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입장권을 비롯한 자질구레한 쓰레기들이 나뒹구는 가운데서, 나는 재빨리 다음 공연을 위해 연필을 놀렸다.
“윤 작가님, 벌써 또 시작하셨어.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무대 철거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스탭들 가운데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나도 그 쪽을 보고 씩 웃어 주었다.
내가 이곳에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지도 어느 새 삼 년.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여 순수 예술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던 내 기가 꺾인 지도 삼 년이 지났다.
삼 년 전, 나는 내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을 하던 꽉 막힌 예술인들 중 한 명이었다. 나는 내 손끝에서 탄생한 시나리오가 시처럼 아름답고 고상한 언어들로 가득 차 있길 바랐다. 정작 요즘엔 시인들도 그런 아집에 갇힌 언어들을 사용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알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여하튼, 나는 내가 배워 온 모든 것들이 아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깨 너머로 배운 철학이나 심리학 따위로 내 시나리오의 절반 이상을 채워야 직성이 풀렸고, 어쩌다 한 번씩 내 시나리오로 공연을 올리게 되면 무지한 관중들에 대한 분노로 밤새 술을 마셔야 했다.
“연극에 대해, 시나리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내 공연을 보러 오니 당연히 반응이 시원찮을 수밖에 없지!”
연극계에서 꽤나 입지를 굳힌 선배들이 조언이랍시고 내 놓는 대중성에 대한 문제는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네가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법을 조금만 배운다면 이렇게 힘들어하지 않을 텐데.”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선배들도 똑같다며 테이블을 뒤엎기 십상이었다.
그러던 나를 바꾼 것이 바로 이 극장에서 우연히 보게 된 마임 공연이었다. 선배들이 하나같이 말하던 관객과의 호흡. 그 날도 모니터의 하얗게 빈 화면 위에서 홀로 깜빡이는 커서만을 바라보다가, 내게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그 호흡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찾은 극장이 바로 이 곳. 작은 극장 돌체였다.
처음 보는 마임 공연은 내게 있어 충격 그 자체였다. 무대 위의 피에로와 어릿광대들이 펼치는 공연은 내가 그렇게 집착해 왔던 언어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무시한 공연이었던 것이다. 한껏 무게를 잡은 채 절규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비극의 주인공들 대신에 외발자전거를 타거나 저글링을 하고, 마술을 선보이는 광대들로 채워진 무대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공연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침묵을 지켜야 할 관객들은 여기저기서 손뼉을 치며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뭐 이런 공연이 다 있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풍선을 불던 어릿광대 하나가 다가와 내게 풍선으로 만든 꽃을 하나 건네주었다. 아이들이 부러움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어찌할 줄을 모르고 서 있던 나를 내버려둔 채 어릿광대는 무대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 그게 이 극장과 나의 첫 번째 이야기다.
“아니, 어떻게 그런 곳이 다 있어?”
분노가 섞여 있는 내 물음에 선배가 웃음을 터뜨렸다.
“거긴 원래 장애인이나 다문화 가정이나, 아니면 청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연극도 많이 올라 와. 인천 클라운 마임 축제도 거기서 열리고.”
“대체 비전문가들을 왜 무대에 올려? 전문 연극인들만으로도 어려운데.”
내 물음에 선배는 네가 처음에 왜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는지를 떠올려 보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나는 기이한 풍경을 보게 되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대여섯 명의 고정 멤버가 한 달에 한두 번씩 모이는 그 술자리에서, 나를 뺀 모두가 아주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직 나만이 세상의 모든 걱정 근심을 다 지고 있는 양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쓴 시나리오 한 편을 들고 이 극장을 다시 찾았다. 그 동안 써 온 수십 개의 시나리오를 모두 버렸기에, 나는 이것을 내 첫 번째 시나리오라고 소개했었다.
내 첫 시나리오로 공연이 올라가던 날, 나는 이 극장을 처음 찾았던 날처럼 관객 틈에 앉아 있었다. 이미 정해져 있는 무대 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무대와 관객들이 함께 만드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태어나고 있었다.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재작년에 시집을 간 여동생의 전화였다.
“언니, 주말에 뭐해? 우리 슬비 좀 하루만 봐주면 안 될까? 한번만 더, 응?”
주말에 뭐하냐고 물어보고선 내가 대답을 할 여유도 주지 않은 채 자신이 전화를 건 본 목적을 뒤따라 이야기 하는 동생이었다. 귀여운 조카 봐주는 것에 인색한 이모는 아니었지만 몇 년째 아이를 기다리는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어쩐지 조금 얄미운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렇다고 싫은 내색을 하기에는 어쩐지 조금 치졸한 이모가 될 것 같아 알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슬비는 엄마인 내 동생보다 어쩌면 나를 더 많이 따랐다. 여동생이라고 왜 배 아파 난 자기 자식이 안 예쁠까, 그저 나는 슬비에게 조금 더 약간의 집착이 섞인 행동을 하는 것일 뿐이다. 마치 꼭 저 아이에게서 ‘엄마’라는 단어를 듣고 싶은 사람처럼.
약속된 주말이 왔고 귀엽게 양 갈래를 하고 공주가 그려진 예쁜 원피스를 입은 슬비가 왔다. 이맘때 다른 아이 같으면 엄마랑 떨어지지 않겠다고 울며불며 떼를 쓸 텐데 슬비는 이모인 내 품에 쏙 하고 안겼다. 그리고는 쿨하게 엄마에게 빠이빠이 하며 손을 흔들었다. 여동생은 모처럼 남편과 데이트를 하러 가는 듯했다. 슬비를 내게 맡겨두고는 미안했는지 작은 봉투를 건넸다. 맨입으로 맡겨도 서운했을 텐데 막상 이렇게 돈 봉투를 보니 어쩐지 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슬비 점심부터 좀 먹여줘 라는 말과 함께 동생네 부부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우리 슬비 무슨 반찬 해줄까? 점심 먹고 이모랑 뭐하고 놀지 생각해봐.”
“음, 나 치즈계란말이 먹고 싶어.”
이젠 제법 똑 부러지게 자신의 입장 혹은 의견을 말하는 것을 보고 대견한 마음이 들면서도 약간의 거리감이 들었다. 조만간 이모네 집에 가기 싫다고 똑 부러지게 제 엄마에게 말이라도 하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슬비는 가방에 싸온 몇 가지 장난감을 바닥에 늘어놓은 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조잘조잘 혼자 떠드나 싶더니 이내 조용해져 불안한 마음에 거실 쪽으로 얼른 머리를 쏘옥 내밀어보니 무엇을 보는지 꽤나 집중을 한 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텔레비전에서는 슬비 또래의 아이들이 얼룩소에게 먹이도 주고 치즈로 피자를 만드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슬비야 점심 먹자. 맛있는 돌돌 치즈계란말이가 왔어요~”
슬비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텔레비전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몸도 찌뿌듯해서 집에서 놀다가 잠깐 놀이터나 나갔다올까 했는데 슬비는 저곳에 가고 싶은 눈치였다. 하는 수 없이 점심을 먹이고 차키를 챙겨 계양산자연체험학습장을 네비에 찍고 시동을 걸었다. 이래서 요맘때 아이들이 뭐든 다 들어주는 이모를 엄마보다 더 따르는지도 모르겠다. 멀리서 계양산자연체험학습장 간판이 보였다. 슬비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카시트에서 몸을 들썩였다. 벌써부터 시골냄새가 진하게 풍겨왔고 슬비 또래의 아이들이 보였다. 저 멀리서 체험장 관리하는 선생님이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어머니, 우선 아이 손부터 깨끗이 씻게 하시고 오늘 체험 등록한 아이들과 함께 젖소 젖짜는 체험부터 진행할게요.”
어머니? 물론 이 사람 입장에서는 엄마처럼 보였겠지만 누구의 어머니, 엄마라는 말이 생소한 나는 그만 얼굴이 새빨개졌고 부끄러운 마음에 얼른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이의 손을 씻기는 데 웬일인지 눈물이 고였다. 조카를 데리고 온 것도 좋지만 정말 내 아이와 함께 오면 얼마나 좋을 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아이는 즐거워보였다. 또래 친구들과 젖소 먹이도 주고 쓰다듬기도 하며 도심에서 쉽게 체험하기 힘든 체험들을 하며 정서발달과 신체발달을 고루 키워나갔다. 드디어 오늘 체험의 하이라이트, 직접 만든 치즈로 피자를 만드는 것이다. 사실 내 여동생은 슬비가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피자나 치킨 같은 음식들은 먹이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한 적이 있다. 그 흔한 자장면도 안 먹이고 직접 만들어 준다나. 그런데 오늘 이렇게 하이라이트 순간을 목전에 두고 물러설 슬비가 아니었다. 평소에 떼를 잘 쓰지 않는 성격이지만 꼭 하고 싶다거나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떼를 쓰기에 오늘 하루는 그냥 피자를 먹이기로 하며 체험을 이어나갔다.
우선 앞에서 선생님이 치즈에 대한 성분과 치즈 만드는 법을 간단히 설명했고 뒤따라 아이들과 부모님들도 치즈를 만들었고 자신이 원하는 재료를 받아다 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고소한 포테이토 치즈 피자를 만들었고 오븐에 15분 동안 구워내면 완성이었다. 하나 둘씩 저마다 만든 피자를 오븐 앞으로 가져갔다. 고사리 손으로 피자 위에 치즈를 듬뿍 올리고 피자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모, 난 이모가 정말 좋아.”
대뜸 고백을 해오는 슬비에 웃으며 이모도 그렇노라고 말해주었다.
“난 정말이야. 치즈가 좋은 것처럼 이모도 그만큼 좋아.”
슬비는 자신이 정말 좋을 때 치즈에 비유해서 그 양을 말하곤 했다. 그러니 나는 슬비에게 엄청나게 큰 점수를 딴 것이 분명했다.
“고마워, 이모도 슬비 엄청 많이 좋아해.”
“이모, 나한테 동생이 생기더라도 나 많이 좋아해줘야 해.”
여기서 동생은 내가 낳을 아이를 말하는 듯했다. 내가 미쳐 대답을 하기전에 오븐에서 땡 하는 소리가 울렸고 고소하고 부드러운 치즈피자가 완성됐다. 슬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피자를 보고 흥분하여 방방 뛰었다. 직접 만든 피자를 입속에 넣는 순간 치즈가 사르르 녹았다. 어쩐지 마음에 맺혔던 무언가도 함께 사르르 녹는 기분이 들었다.
체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슬비는 고단했는지 곯아떨어졌다. 우리가 집에 도착하니 뒤이어 여동생내 내외도 도착했다.
“언니, 오늘 슬비가 말썽 안 부렸어? 매번 고마워. 그리고 이거.”
동생의 손에는 인진쑥과 함께 산부인과 진료카드가 들려있었다.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에 마음이 스르르 녹았다.
내 옷깃을 단단히 여며 주시는 할머니의 눈가가 젖어 있었다. 어제의 낙산사에 이어 오늘은 보문사였다. 내일은 또 보리암에 간다고 하셨다. 전국의 유명한 절이란 절은 다 돌아보실 것이라고 하셨다.
엄마는 오랫동안 앓다가 얼마 전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할머니는 엄마가 자꾸 꿈에 나온다며,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서러웠으면 그러겠냐며 자꾸만 우셨다. 할머니는 오늘 기도를 하시며 또 우실 것이다.
할머니가 절을 하시는 동안 나는 몰래 기도하는 곳을 빠져나왔다. 엄마는 재미없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기도하며 우시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 것이다.
할머니는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나를 데리고 절에 가셨다.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가 보았을 때에는 다들 재미있게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절에 오면 너무 조용해서 무서웠다. 할머니는 슬픈 일이 있을 때에만 절에 가셨기 때문에, 내가 조금만 장난을 쳐도 혼을 내셨다. 그래서 나는 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절은 우울한 사람들이 오는 곳일 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엄마가 몸이 아프기 전에, 엄마는 딱 한 번 나를 데리고 가까운 절에 가셨다.
“싫어. 절에 가면 재미 하나도 없단 말이야. 말도 안하고 계속 인사만 하잖아.”
나는 가지 않겠다고 한참을 버텼지만, 엄마의 애교에는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엄마는 절에 도착해서도 기도하러 부처님 앞에 가지 않으셨다. 그냥 마당에 앉아 강아지랑 놀거나 연못을 구경하거나, 나랑 같이 사진을 찍으면서 시간을 보내셨다. 스님이 사탕이랑 과자도 잔뜩 가져다 주셔서 그때는 정말 신이 났었다.
그 때처럼 재미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하고 돌아다니는 중에, 나는 수백 개나 되는 불상이 앉아 있는 곳을 발견했다. 어른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소원을 빌고 있었다. 할머니처럼 모두 슬픈 표정을 하고 있을 것 같아서 선뜻 가까이 가지 않았는데, 다들 웃고 있었다. 대체 불상이 뭐가 재미있어서 웃는 것일까. 자세히 보니 불상들도 웃고 있었다. 머리카락이랑 입술에 알록달록한 색이 칠해진 불상들이 재미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바로 옆에 있는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들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옆에 있는 건물로 달려가 보니, 이번에는 우리 반 교실만큼 커다란 부처님이 옆으로 누워서 자고 계셨다. 지금까지 내가 본 부처님들은 전부 교장선생님 같은 얼굴을 하고 계셨는데 말이다. 쌓여 있는 기와 위에도 작은 부처님들이 앉아 계시고, 여기저기에는 사람들이 만든 돌탑이 있었다.
나는 어느 새 사람들의 소원이 적힌 예쁜 종이가 들어 있는 병들이 매달려 있는 곳에 도착했다. 나보다 조금 더 어린 것 같은 여자애 하나가 아빠 손을 잡고 소원을 병 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여자애가 웃으며 아빠를 올려다보자, 아빠가 그 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두 사람이 가 버린 뒤에 가까이 가서 병 속을 들여다보았다. 사랑한다는 말도 적혀 있고, 보고 싶다는 말도 적혀 있고, 그리고 좋은 곳으로 가라는 말도 적혀 있었다. 아마 나처럼 엄마가 돌아가신 모양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아프지 않으실 때에도, 그리고 아프실 때에도 웃고 계셨다. 할머니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가 불쌍하다고 하셨지만, 내 생각에 나는 불쌍한 아이가 아닌 것 같다. 엄마는 항상 웃고 계셨으니까 아마 하늘나라에 가서도 웃고 계실 것이다. 엄마가 슬프지 않으면 나도 슬프지 않다.
할머니가 나를 찾느라 두리번거리고 계셨다. 할머니는 또 많이 우신 모양이었다. 나뭇가지처럼 까맣고 가느다란 할머니의 몸이 겨울바람에 날려 갈 것 같이 약해 보였다. 할머니가 나를 끌어안으며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우리 손주, 우리 가엾은 현우 불쌍해서 어쩌누. 대체 어쩌누.”
나는 오늘에야말로 할머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할머니, 울지 마. 웃어야 엄마가 기뻐해.”
할머니의 등 뒤로 아까 보았던 누워 있는 부처님이 슬쩍 보였다. 부처님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주말아침부터 남편은 머리가 복잡하다며 아스피린을 찾았다. 얼마 전 이직한 회사에서의 업무스트레스와 잦은 야근 때문인 것 같다며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사실 과도한 피로를 풀지 못한 탓도 어느 정도 있었다. 삶에 쉼표 하나 그리지 못하고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 꼬맹이는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하다는 아빠 다리에 매달려 놀러가자고 성화였다. 남편은 그저 쉬고 싶다며 아이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동화책 하나를 쥐어주었다. 아이는 동화책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꾸만 남편을 귀찮게 했다.
“자기야 그러지 말고 오늘 망우리 공원 다녀오는 거 어때? 자기도 맑은 공기 쐬면서 머리 좀 식히고 우리 집 요 꼬맹이랑 놀아주기도 하고. 응?”
남편은 보나마나 귀찮다고 하겠지만 특기에 없는 콧소리를 내가며 애교를 부렸다. 애교가 먹혔는지 아니면 정말 머리를 식히고 싶어서였는지 남편은 선뜻 그럴까 했다. 남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간편하게 나들이 짐을 꾸렸다.
망우리 공원에는 사람이 많지도 적지도 않게 적당히 분산되어 머무르고 있었다.
“자기야, 여기가 사색의 길이래. 오늘 여기 걸으면서 생각들 좀 정리하고가.”
아이는 모처럼 나온 나들이 길에 신이나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이를 진정시키고자 불러 세웠다.
“도진이 너, 여기가 어딘지 알아?”
“엉, 여기 공원이잖아. 공원!”
“맞아, 공원이야. 그런데 여기 원래는 공동묘지였어. 도진이 공동묘지 알지? 으으으 귀신 나오겠다!”
아이를 골려주니 으악 하면서 아빠 품으로 쏙 숨었다. 아이를 골려주려고 꺼낸 이야기였지만 사실이었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공동묘지라는 이미지를 개선하고 휴식공간으로의 탈바꿈을 거치자 많은 사람들이 찾기 시작한 곳이다. 사실 아이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도진아, 엄마가 여기는 ‘사색의 길’이라고 했지? 사색의 길이 뭐냐면 조용히 생각을 하며 걷는 길이란 뜻이야. 도진이 학교 복도를 걸을 때 조용조용히 걸어야 하지? 도서관에서처럼.”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도 그렇게 걷는 거야. 조용히. 그리고 엄마가 여기가 공동묘지라고 했지? 무서워 할 것 없어. 이곳에는 일제에 항거하신 독립운동가 그리고 만해 한용운 선생님과 소파 방정환 선생과 같은 선생님들이 계신 곳이야.”
언제부턴가 아이와 함께 남편도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남편과도 이곳은 처음이었기에 그럴 것이다. 늘 집근처 공원이나 한강을 찾곤 했는데 오늘은 모처럼 이곳을 오자고 우긴 이유가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내 말을 백프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알아듣겠다는 듯 이마에 힘을 잔뜩 주고 뒤꿈치를 살짝 들며 사뿐사뿐 걸었다. 아마 복도에서 걷듯이 조용히 걸으라고 한 탓이었다. 웃음이 풋 나오려는 걸 참고 나도 사색에 잠겨보려 했다. 오랜만에 남편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이곳이 삶과 죽음이 이어지는 공간이 아닐까. 전혀 무섭지도 오싹하지도 않은 담담하고 경건한 느낌이었다. 공원의 또 다른 모습이자 서울의 또 다른 모습이랄까. 서울의 화려한 겉모습에 이렇게 잠잠한 공간이 있다는 것이 오묘했다.
남편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살짝 눈을 감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 길이 사색의 길인만큼 혼자만의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저 남편이 눈을 떴을 때 모든 근심이 내려놓아지길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