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졌던 월미도는 연인들의 사랑과 낭만이 가득한 곳이 되었다. 노르망디상륙작전 이후 최대 규모의 상륙 작전이라고 불리는 인천상륙작전.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뒤, 나는 자연스레 다시 이곳을 찾았다.
어머니는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셨던 아버지를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인천상륙작전에서 발생한 여덟 명의 전사자 중 한 분은 아니셨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으셨지만, 전쟁에 대한 후유증으로 힘들어 하시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전쟁이 원망스러울 법도 한데, 전쟁을 회상하시면서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으셨다.
“네가 그 자랑스러운 분의 딸이란다.”
어릴 때부터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때의 어머니는 항상 환하게 웃고 계셨다.
문득 십 년 전,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가 떠올랐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에는 너무 무거운 분위기의 기념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큰애인 미현이도, 작은 애인 미정이도 여기저기에 자리한 총을 든 군인들과 탱크들의 모습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울먹이며 보채는 어린 딸들 때문에 기념관을 자세히 둘러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아이들도 대학생, 고등학생이 되어서 그런지 사뭇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런 딸들을 보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라면, 참전자의 가족들은 이곳에 와서 울음을 터뜨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도, 아이들도 전쟁을 피부로 겪어 본 세대는 아니었다. 나조차도 이곳에 있는 전쟁의 기록들이 어렵기만 한데, 딸들에게는 오죽할까 싶기도 했다.
유월 이십오 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단체로 관람을 온 아이들이 많았다. 원복을 입고 노란 가방을 멘 유치원생들은 전쟁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눈물이 글썽해진 아이도 있고, 친구의 손을 꼭 잡은 아이도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상하기만 한 일인 것 같았다.
“선생님! 전쟁이 또 일어나면 어떻게 해요?”
흑백으로 찍힌 전쟁 사진들을 보고 눈이 동그래져서 질문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스쳐 지났다. 글쎄, 어떻게 해야 할까. 나조차도 전쟁은 먼 나라의 이야기 같게만 느껴지는데 말이다.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 이야기를 하셨지만, 나는 아버지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교과서를 통해, 방송을 통해 전쟁 이야기를 접할 때에도 눈물이 나기는커녕 ‘아, 저런 일이 있었구나. 잊지 말아야지.’하는 단편적인 감상밖에는 들지 않았다. 유월이 될 때마다 여기저기에서 쓰는 말인 ‘호국영령’ 중 한 명이 바로 우리 아버지인데도 말이다. 몇 십 년이 지난 뒤에 내가 죽어 아버지를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이 아픔을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해야 할 텐데 그것이 너무 어려웠다.
야외 전시장을 지나 기념관을 나서려는데 미정이가 나를 불렀다. 딸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는 벽을 오르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을 한 청동상이 있었다.
“엄마, 이것 좀 봐요. 이 중에 할아버지의 모습이 있을까?”
그 말을 들은 순간 어찌 할 수도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는 어머니의 얼굴 대신, 부엌에서 숨을 죽여 우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아픔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아빠, 제발요. 제가 잘못했어요. 딱 한 번만, 네?”
아빠도 엄마도 좀처럼 내 부탁을 들어 주시지 않으셨다. 지난 여행에 대한 실망이 크신 모양이었다. 백령도에 여행을 다녀온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벌써 백령도가 그리워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백령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떠날 걸 그랬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든다.
지난 주말,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백령도를 여행하는 내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부모님이 설명해 주시는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얼굴 모양을 한 바위나 예쁜 조약돌들이 널린 해변 같은 것도 그 순간에만 신기할 뿐 그렇게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주말인데 친구들과 놀러 가지도 못하고, 인터넷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을 이 먼 곳까지 와서 봐야 하다니. 내가 빨리 집에 가자는 말을 하루 종일 입에 달고 있었기에, 1박 2일의 일정이 당일치기로 줄어들며 백령도 여행은 싱겁게 끝나 버렸었다.
그런데 며칠 뒤에 백령도가 뉴스에 나왔다. 인천 아시안 게임의 마스코트로 점박이 물범이 선정되며, 점박이 물범이 사는 백령도가 언급된 것이다.
“엄마, 나한테는 저기 점박이 물범 산다고 얘기 안 했잖아!”
“얘는. 네가 얘기하면 듣기나 했니?”
엄마가 핀잔을 주며 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콩돌 해변을 거닐거나 두무진을 구경하고, 사곶 해수욕장 사진을 찍기만 하는 등 유명한 곳들만 골라서 돌아다니신 엄마랑 아빠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사진 찍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경치가 좋은 곳보다는 재미있는 곳에 가기를 좋아하는 내가 백령도 여행 내내 지루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물범이 산다고 미리 말해 줬으면 나도 그렇게 짜증 안 냈을 거 아니야!”
아쉬운 마음에 괜히 안방을 향해 외쳐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다 내 잘못이지, 뭐.
그러고 보니 정말 신기했다. 물개나 물범 같은 해양 동물들은 외국에나 사는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에도 점박이 물범 서식지가 있다니. 그것도 내가 다녀온 백령도에 물범 서식지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텔레비전 속의 점박이 물범들은 일광욕을 하거나 수면 밖으로 빼꼼 머리를 내밀거나 하며 놀고 있었다. 동물원의 작은 풀장이 아닌, 넓은 바다를 헤엄치고 있는 물범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왠지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당장 인터넷을 켜고 백령도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점박이 물범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었다. 백령도에 살고 있는 점박이 물범의 숫자도 점점 줄고 있어서, 환경단체에서 점박이 물범 보호를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모습들도 꽤 많이 볼 수 있었다.
두무진에 갔던 사람들이 가끔 바위 위에 올라와 휴식을 취하는 점박이 물범을 육안으로 보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점박이 물범의 매력에 푹 빠진 뒤였다. 어린 아기 같은 얼굴의 물범은 야생동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순하고 귀여워 보였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심청이가 몸을 던졌던 인당수도 백령도 앞바다라고 한다. 게다가 심청이를 감싼 연꽃이 걸렸던 바위인 연봉 바위도 있는데 이 바위는 하늘에서 보면 연꽃이 활짝 핀 것처럼 생겼다고 한다. 연봉바위에 걸리기 전에 연꽃에서 떨어진 연밥이 흘러들어 연꽃이 피게 된 마을인 연화마을까지, 백령도는 점박이 물범의 섬이면서 심청이의 섬이기도 했다.
부모님을 일주일 내내 조른 결과, 다음 달에 다시 백령도에 가 보기로 약속했다. 이번에는 심청이의 전설과 신비로운 점박이 물범을 모두 마음속에 담고 올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다. 하얀 날개 섬이라는 뜻인 백령도. 이 섬의 이름에도 아름다운 전설이 있지만, 이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자. 백령도의 진가는 백령도 이야기를 모두 안 뒤에나 마음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륙, 대륙, 그놈의 대륙. 친구들이 인터넷을 보며 웃고 떠드는 소리가 거슬렸다. 중국에서 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나를 겨냥하여 하는 말일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조현아, 너도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봐.”
내 이름은 홍조현. 다른 이름은 훙쭈셴. 주성치는 알지만 저우싱츠는 모르는 것처럼, 아이들도 홍조현이라는 이름만을 알고 있다. 아버지는 한 때 청순 미녀로 이름을 날렸던 한 홍콩의 여배우의 이름을 따서 내 이름을 지으셨다지만, 친구들에게 조현이란 그저 남자 같은 이름일 뿐이었다.
내 어머니의 이름은 이연경이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훙원줘다. 나는 중국인 2세다.
아버지를 본 적은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셨다고만 하시고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으셨지만, 아마 젊은 시절의 어머니는 불법체류자인 중국인과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친척들과 아무런 왕래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했음이 분명하다.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그저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나는 아버지가 미웠다. 어머니를 미혼모로 살게 하고, 나를 아버지 없는 아이로 만든 것이 미웠다.
아니, 이것도 거짓말이다. 나는 아버지를 미워 한 적이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러니까 내 기억이 시작 될 무렵부터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는 다 있는 아버지가 내게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아주 오랜만에 읽어 보게 된 것 뿐이다. 내게 아버지가 없는 이유가 아버지가 중국인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한 달에 한 통 꼴로 도착하는 아버지의 편지를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현관에 들어서서 신발을 벗기가 무섭게 아버지의 편지를 건네는 어머니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어머니 앞으로 온 편지에, 아버지가 다음 달 즈음에 한국에 오신다고 적혀있었다고 했다. 편지를 받아 든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바로 편지를 뜯어보지 못하고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화가 나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그저 얼떨떨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을 뿐이었다.
내가 아직 글을 다 떼지 못했을 무렵에는 항상 어머니가 나를 무릎에 앉히고 편지를 읽어 주셨는데, 이제 보니 아버지는 아직도 한국말이 서툴렀다. 첫머리에 ‘사랑하는 나의 딸, 조현에게’라는 글씨가 삐뚤빼뚤하게 적혀 있었다. 어린애 같은 글씨에 웃음이 나왔다.
문 밖에서 내 반응을 조심스레 살피시던 어머니가 그 동안 모아 두었던 내 몫의 편지들을 가져다 주셨다. 십여 년 어치의 편지들이 상자 안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네가 나중에라도 읽고 싶어질 것 같아 버리지 않고 놔뒀었어.”
나도 모르게 고맙다는 대답이 나와 버렸다. 나는 거의 백 통 가까이 되는 그 편지들을 밤을 새워 읽었다. 단 한 번도 답장을 쓰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이 한 마디 쯤은 섞여 있을 줄 알았는데 백여 통의 편지에는 한결같은 말들이 적혀 있었다.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라고.
그리고 오늘,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차이나타운을 찾았다. 오정희의 유명한 소설 <중국인 거리>의 배경이 되었던 바로 그 거리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중화가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버지의 거리였다.
병실에 들어가기 전엔 항상 ‘후’하고 심호흡을 했다. 마치 일련의 의식 같은 느낌이었다. 벌써 몇 달째 같은 병실에 들어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 앞에 서면 심장이 쿵쿵 뛰었고 손이 떨렸다. 두려움은 언제나 같은 공포를 안겨준다. 익숙해지지 않고 같은 자리에 맴도는 것 같았다.
“예쁜 우리 수진이. 깨어있었네? 엄마가 깜짝 놀래어주려고 했는데. 에이. 실패다!”
“킥킥, 어떻게 놀래 주려고 그랬는데?”
“음. 비밀이야. 다음에 수진이 자고 있을 때 알려줘야겠다. 오늘은 머리 안 아팠어? 속은 안 아파? 토할 것 같으면 엄마한테 말해.”
“엄마가 한꺼번에 물어보니까 어지럽다. 헤헤. 오늘은 의사선생님이 치료 잘 받았다고 칭찬해줘서 별로 안 아픈 것 같아.”
“다행이네. 예쁜 우리 수진이.”
왜 이렇게 예쁘고 착한 아이에게 그런 못된 병이 찾아오는 걸까. 세상에 나쁜 짓 하면서 떵떵 거리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아무 잘못도 없고 저렇게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왜 이런 병이.
수진이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 희귀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의사는 태어나도 세 달을 못 넘길 것이라 단정 지었지만 수진이는 어느새 다섯 번째 생일을 맞이한다. 다행히 수진이는 잘 버텨주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자꾸만 마음이 약해졌다.
병원에 입원하는 횟수가 잦아졌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다고 칭얼거렸다. 그런 수진이를 볼 때마다 대신 아파줄 수 없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큼 슬펐다.
사람들은 미혼모가 낳은 아이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아픈 아이에게 참 모진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젊은 나이에 미혼모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나를 걱정하는 말들이었으나 그저 하나의 시끄러운 가십거리로 여기며 떠들어대는 말들도 많았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라거나 엄마의 발목을 잡은 귀찮은 존재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 수진이의 존재를 알았을 때 두려움이 컸다. 남자친구에게 말해야 할까, 부모님이 아시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점점 배는 불러올 텐데.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지워야 하나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럴 때면 수진이에게 더욱 미안했다. 수진이도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생면부지인 사람들에게 그런 못된 말들을 듣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건강한 몸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며칠 뒤면 수진이의 다섯 번째 생일이다. 무슨 선물을 해주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어떤 선물이 받고 싶냐고 하면 자전거라고 할까봐 물어보지 못한 적도 있다. 작년 생일에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아이에게 다섯 살이 되면 사준다고 말해버렸기 때문이다. 수진이는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기 때문에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
잠에서 깬 수진이의 컨디션이 좋아보였다. 다행이다.
“수진아, 우리 수진이 곧 생일이지? 엄마가 무슨 선물 사줄까? 자전거 빼고.”
“치, 작년에 자전거 사준다고 했으면서. 그런데 나 이제 자전거 안 갖고 싶어. 시시해졌어.”
“그래? 시시해졌어? 그럼?”
“음. 의사선생님한테 나 하루만 나갔다 온다고 허락 맡아줘. 그게 내 소원이고 선물이야.”
“나갔다 오고 싶어? 수진이 많이 답답했구나. 그런데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 아직은 많이 움직이면 위험하니까.”
“어려울 것 같으니까 소원이라고 이야기 하지. 엄마도 참, 의사선생님한테 부탁해봐. 응?”
차라리 자전거를 사달라고 조르지. 어디를 가려고 그러는 것일까?
“알겠어, 엄마가 한 번 말해볼게. 그런데 의사선생님이 안된다고 하면 엄마도 몰라!”
“치. 알겠어.”
결국 의사선생님께 허락을 받은 건 수진이었다. 아직은 안 된다고 하는 선생님을 조르고 졸라 받은 일종의 휴가였다. 우리가 떠난 곳은 아주 커다란 우체통이 있는 곳이었다. 수진이는 편지를 보내고 싶다고 했다. 그것도 비밀편지였다. 누구한테 쓰는지 뭐라고 썼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오랜만에 수진이는 활짝 웃었다. 편지가 언제 도착할지 궁금하다며 기대에 부푼 표정을 보였다.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아이에겐 큰 희망인 듯했다.
수진이는 생일 이틀 뒤 하늘나라로 떠났다. 사랑스럽던 아이가 엄마보다 더 어른스러웠던 아이가 이제는 아프지 않은 곳에서 엄마를 지켜주겠다며 먼저 떠났다. 병실에서 수진이의 물건을 챙기고 나서는데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꼬박 시간이 지났다. 어느 날 수진이가 입원했었던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모르는 주소로 편지가 도착했다는 것이다. 편지?
병원에서 보니 수진이가 우체통에 넣은 편지였다.
‘엄마, 생일 축하드려요! 엄마랑 나랑 생일 똑같은 거 사실 나 알고 있었어. 엄마는 나 챙겨주느라 아무에게도 축하받지 못했지? 엄마랑 여기 오니까 너무 좋다. 이 편지가 내가 엄마한테 주는 선물이야. 어때? 좋아?
엄마, 내가 얼른 씩씩해져서 엄마가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퇴원하면 소풍도 가고 싶어. 내가 좋아하는 솜사탕도 사줘야 해! 이 편지가 언제 도착할까? 궁금하다. 사랑하는 엄마, 다시 한 번 생일축하해요. 엄마랑 똑 닮은 예쁜 수진이가.‘
천사 같은 수진이에게 편지가 왔다. 눈에서는 눈물이 한 없이 흘렀지만 더 이상 슬프지는 않았다. 수진이에게 답장을 보내야겠다.
언제까지 계속 알바만 하고 다닐 거니? 친구들은 취업하지 않았어? 학교는 그러게 끝까지 다니라니까 아무튼 너만 보면 한숨만 나온다. 한숨만.
아침 일찍 어디라도 나가지 않으면 엄마의 잔소리로 하루를 맞이해야 한다. 사실 엄마가 이런 잔소리를 하는 것도 아주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다. 학교는 중퇴하고 친구들은 이제 직장에서 자리 잡으며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는데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서 단기 알바자리 있나 어슬렁어슬렁 거릴 뿐이었다.
내 삶을 돌아보면 나는 어쩌면 녹슨 못처럼 쓸모없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쩔때보면 숨만 쉬고 있는 집안의 가구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 때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야 뭐하냐? 집에서 뒹굴고 있을 것 같아서 전화했다. 좋은 단기 알바자리 있는데 할래?”
“뭐하는 건데?”
“칠석에 있을 전통놀이 행사라는데 그냥 가서 사극에서 나오는 옷 입고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어려운 건 아니라니까 해봐. 시급도 괜찮다고 들었어. 할거지? 한다고 한다!”
“야, 야 잠깐만.”
끊겼다. 칠석에 있을 전통놀이 행사? 그런걸 아직도 한단 말이야? 뭐 노인네들 잔치 하나보다 생각했다. 이 녀석은 언제까지 어디로 가면 되는지는 알려줘야지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었다.
행사 당일이 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 행사 관계자들 틈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는 나를 불러 세운 사람이 있었다.
“영기씨 맞나요?”
세련된 외모에 서구적인 체형을 가진 여자였다.
“네. 오늘 단기알바로 신청한 사람인데요.”
“네, 알고 있어요. 이쪽으로 와서 이 옷으로 갈아입고 고싸움이 시작하면 신나게 줄만 당겨주면 되요. 어렵지 않죠? 그리고 고싸움이 끝나면 나랑 같이 사람들 통제하면 되고요. 뭐 일종의 경호와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쉽죠.”
“아. 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무슨 면접 본 후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도 아닌데 왜 그런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저 여자와 함께 한다는 말 때문이리라.
행사는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머슴 옷과 같은 흰색 위아래 한복을 입고 있는 힘껏 줄을 당겼다. 여자는 남사당패들 사이에 있었다. 줄을 당기고 있는 그 순간에도 시선은 여자에게로 향했다. 있는 힘껏 줄을 당기며 아까 여자가 한말을 곱씹어 봤다.
‘나랑 같이 사람들 통제하면 되고요.’
나랑 같이 라고 했지? 분명. 그랬지?
줄 당기는 일이 끝나고 달집 태우는 순서가 오자 사람들이 불 가까이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람들을 통제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검은 양복으로 갈아입은 뒤 사람들이 불 가까이로 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여자도 사람들을 막고 서 있었다.
불길 옆에 있어서 일까 남자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히 더 열심히 사람들을 통제했다. 마치 정말 경호원이 된 것처럼.
달집태우기도 끝나고 준비된 모든 행사가 끝이 났다. 옷을 반납하고 돌아서려는데 여자가 나를 불러 세웠다.
“오늘 멋지던데요? 수고 많았어요. 단기 알바라고 하면 다들 그냥 자리만 채우다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거든요. 그런데 영기씨는 좀 다르더라고요.”
나보고 오늘 멋지다고 했다. 잔뜩 녹이 슬어 쓸모없어 하는 내게 누군가 처음으로 멋지다고 했다.
엄마는 시든 꽃처럼 좀체 기운을 차리지 못하셨다. 얼마 전 다니던 직장에서 정년퇴임이라는 이름으로 등 떠밀려 퇴사를 하시고는 집에서 가사일 만하는 전업주부의 삶에 좀처럼 적응을 하지 못하셨다. 나와 언니, 오빠는 이제 그만 집에서 쉬시라고 그만큼 자식들 뒷바라지 하며 사셨으면 됐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일에 매진 하냐고 했더니 엄마는 그런 게 아니라고 하신다.
“자식들 뒷바라지 때문이 아니야. 니들은 니들이 알아서 사는 거고 나는 내 알아서 사는 거지. 자고로 사람은 밖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인데.”
“그럼 엄마 잘하는 그거 있잖아. 비즈공예랑 뜨개질. 그거 예쁘게 만들어서 저기 예술의 거리에서 가게 하나 얻어서 그거 파는 건 어때?”
일찍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 홀로 우리 삼남매를 키워야 했다. 엄마는 자식들 뒷바라지를 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홀로 삼남매의 의식주와 교육까지 책임져야 했던 엄마의 인생에서는 쉼표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열심히 뛰어야 했다. 아주 잠깐 쉰다고 하면 우리 오빠랑 언니가 고3 수험생일 때 밤늦게까지 공부한다고 해서 같이 밤을 새며 뜨개질이랑 비즈공예를 하며 본의 아닌 취미를 만들어 나가신 것 빼고는 없었다. 사실 엄마의 인생에서 봄이 있었을 까 싶을 정도로 엄마는 참 힘들고 바쁘게 사셨다. 그런 엄마보고 이젠 좀 쉬시라고 해보아도 소용이 없다. 어찌 지난 25년간의 삶의 패턴이 쉽게 바뀌기야 하겠느냐며. 그러던 중 언니는 나름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엄마가 손재주가 좋다는 것을 이용하여 퇴직금으로 받은 돈과 우리 삼남매가 돈을 보태어 작은 공방 아닌 공방을 차려드리는 것이다.
“예술의 거리? 내가 뭐 예술가도 아니고 이건 그냥 취미라 누가 사가는 사람도 없을 텐데. 잘 될까?”
“그러니까 공방에서 아줌마들 모아서 만드는 법도 알려주면서 팔찌나 목걸이 뭐 그런 거 파는 거지.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꽤 잘 되던데? 엄마 실력 정도면 충분해. 그리고 요즘 젊은 사람들 트렌드가 요런 복고거든. 그래서 딱 좋은 것 같은데?”엄마는 이렇게 나누는 말 뿐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생기를 되찾으신 듯 했다. 엄마의 억척스러움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진취적인 결정으로 일을 밀어붙일 때이다. 엄마는 약 일주일간 이곳저곳을 알아보시며 신중히 고민을 하신 끝에 우리 삼남매를 불러 앉혀놓고 마음의 결정을 내리셨다고 하셨다.
엄마는 예술의 거리에 10평 남짓한 공간에 세를 받아 가게를 차렸다. 작은 평수임에도 아기자기한 물건들로 꾸며 놓으니 제법 괜찮아보였다. 옆에는 작은 소극장들이 있어서 공연을 기다리는 젊은이들이 구경하며 몇 개씩 구입하기도 하여 목도 괜찮았다.
한 4개월 쯤 되니 차차 단고로 생기고 옆 가게 아주머니들과도 친목을 쌓았다. 엄마는 완전히 만개한 꽃처럼 생기를 되찾으셨다.
“어서오세요. 아, 정선생님 오셨어요?”
엄마가 정선생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엄마 가게 앞 소극장에서 공연을 하시는 늦깎이 남자 배우이시다. 정선생님도 회사 정년퇴임을 하시고는 소싯적 꿈을 펼치시고자 공연장에서 배우로 활동하게 되셨다고 했다. 마침 공연장에서는 노년의 삶에 대한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고 당당히 오디션도 합격한 엄연한 배우이시라며 엄마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정선생님께서는 공연 준비 한 두 시간 전에 엄마 가게에 놀러 오신다고 했다. 두 분은 가끔 차를 마시며 담소도 나누시며 가깝게 지내시는 것 같았다. 나와 언니도 엄마 가게에서 정선생님을 한 번 뵌적이 있었는데 중후한 외모에 인품도 좋은 신 것 같고 무엇보다 정선생님도 몇 해 전에 아내와 사별하여 혼자라고 하셨기에 슬쩍 엄마에게 잘해보라는 말을 건넨적이 있다. 물론 농담 반 진담 반이었지만.
“아, 박여사님. 저기, 오늘 혹시 시간되시면 제 공연 보러 오시지 않을래요? 오늘이 제가 주인공으로 서는 마지막 공연이 될 것 같아서요.”
“아, 그러세요? 그렇담 가야지요. 8시 반 공연이라고 하셨나요? 늦지 않게 가겠습니다.”
엄마는 8시에 근처 꽃가게로 가셨다. 아마 정선생님께 드릴 꽃다발을 사시는 것 같았다. 엄마는 밝게 웃으셨고 왠지 엄마에게 여러모로 두 번째 봄이 온 것 같았다.
지구상에서 공룡이 자취를 감추고 나서 사람들은 공룡에 대한 호기심과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공룡 발자국이나 작은 흔적조차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한반도를 샅샅이 뒤졌다. 서양 박물관에 있을 법한 공룡의 큰 등뼈라도 발견하는 날이면 큰 경사가 난 것처럼 기뻐할 것이다.
엄마는 등이 굽어 마치 공룡의 뼈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다리는 홍학 모가지처럼 가늘었으며 흰 살갗은 점점 핑크빛으로 물들어 앙상한 가시나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엄마는 등산을 즐겼다. 엄마말로는 얇아지는 다리에 힘을 기르기 위해서라고 했고 굽어가는 등을 펴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엄마의 다리는 점점 더 가늘어졌고 등은 점점 굽어 척추 뼈가 훤히 들어날 정도였다.
엄마의 목소리만큼은 공룡의 소리처럼 우렁찼다. 마치 큰 화산이 분출하며 용암을 쏟아 내는 것과 같았다. 다 키운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겠다며 무등산 자락 아래에서 보리밥을 파신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수다를 떨고 있으면 다 먹었으면 그만 가라고 손님들을 매몰차게 내 보낼 때도 있었고 반찬 좀 더 달라고 하면 손이랑 발이 없냐며 직접 가져다 먹으라고 호통이었다. 손님들은 그런 엄마를 노여워하지 않았다. 그저 친근한 옆집 이모쯤으로 생각했다.
엄마는 무등산을 즐겨 탔다. 나도 엄마를 따라 무등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쩍쩍하고 갈라진 돌병풍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엄마가 떠올랐다. 네모나게 갈라진 돌들이 엄마의 굽은 등 사이로 보이는 뼈와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의 식당을 찾는 사람들도 이 돌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를 보았을 것이다. 이 사람들도 엄마를 보고 공룡과 같다고 생각했을까? 무등산의 주상절리와 같다고 신기해하는 것일까? 그래서 엄마의 호통을 기분나빠하지 않고 웃어넘기는 것일까?
엄마에게 식당일을 그만두라고 한 적이 있다. 그것도 주방일과 서빙, 카운터까지 일하는 아줌마도 두지 않은 채 혼자 운영하신다. 반찬으로 나가는 나물이나 김치, 음식부터 막걸리와 동동주까지 직접 담그시기 때문에 하나하나 따지자면 엄마는 1인 기업자나 다름없었다. 자식들이 용돈도 섭섭지 않게 주고 생일이나 어버이날, 명절 등 때가 되면 특급 수당인 양 용돈도 특별히 더 챙겨 드리는데 왜 힘든 일을 고집해서 해야 하는 것이냐고 따져 물은 적이 있다. 돈이 그렇게 좋으냐며 공룡이 발톱을 세우듯 날을 세워 엄마에게 말한 적도 있다. 그럴 때면 엄마는 소리소리 지르며 노여워했다.
어느 날은 엄마가 먼저 산에 오르자고 말한 적이 있다. 함께 오르자고 해놓고 저만치 혼자 걷고 있다. 저렇게 얇고 가녀린 다리로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매일 무등산 정기를 받아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저만치 떨어져 걷는 엄마에게 가까이 다가가 같이 가자고 말을 꺼냈다. 엄마도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엄마는 산이 그렇게 좋아? 그래서 그렇게 억척스럽게 산 아래 삶을 고집하느냐고. 그냥 산책 겸 올라갔다 내려오면 좀 좋아?”
“그런 말 마. 공룡이 왜 사라진 줄 알어? 그게 다 퇴화돼서 그러는 거야.”
“퇴화가 되었다고? 공룡이? 엄마는 무슨.”
“진짜래도? 퇴화돼서 쓸모없이 사라지기 싫어. 쓸 수 있을 때 열심히 쓰는 거지. 이 몸뚱이도 그렇고.”
엄마 자신도 얇아져가는 다리와 굽어가는 등이 못내 신경이 쓰였나보다. 당신의 몸이 점차 사라져가고 굳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으리라는 발버둥이었다. 그것을 헤아리지 못한 나는 엄마의 굽은 등을 말없이 매만질 뿐이었다.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는 내게 너는 놀아달라며 짓궂게 내 품에 파고든다. 읽던 책은 마저 읽고 나가자고 해보아도 이내 무릎을 베고 눕더니 무슨 내용을 읽느냐며 귀찮게 군다. 취미로 플로리스트 과정을 배우고 있던 차라 책을 고를 때에도 이런 장르로만 손이 간다.
꽃말에 관한 책을 읽고 있던 중이다. 꽃말이라고 하면 10대의 여린 감수성에 내게 맞는 꽃말은 어떤 것일까 찾아본 것 이외에는 없었다.
“음~ 장미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아마 빨간 장미가 아닐까 싶어! 빨간 장미는 사랑, 절정, 기쁨, 아름다움이고 하얀 장미는 순진, 존경, 순결이래. 노란 장미는 질투라네!”
“너는 질투가 많으니까 노란 장미가 딱 잘 어울리겠다.”
그러고 보니 너는 장미꽃 한번을 사준 적이 없다. 그 흔한 장미꽃 한 송이도.
“꽃꽂이 하면서 예쁜 꽃들도 많이 봤겠다. 그치? 그럼 넌 어떤 꽃이 제일 좋아?”
“글쎄. 꽃은 다 너무 예쁘고 각자가 가진 매력이 다 달라서. 근데 오늘은 장미!”
“오늘은 장미? 뭐가 그래. 그럼 내일은 또 다른 꽃으로 바뀐단 말이야?”
“그럴 수도 있지 뭘. 어차피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들도 다른데 사시사철 같은 꽃만 좋아하라는 법 있어? 오늘은 수요일이니까 빨간 장미!”알아들었을까? 이렇게까지 빨간 장미를 받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내는 데 못 알아 듣는다면 정말 미련 곰탱이라고 불러줄 것이다.
이야기가 금세 또 싫증이 났는지 내가 보고 있는 책을 뺏어가더니 나가자고 성화다. 나가면 어차피 밥, 커피, 영화. 영화, 밥, 커피의 반복일거면서 굳이 왜 나가서 시간을 보내야 하냐고 물으려다 그만 둔다.
“어디 갈 건데?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그래서 이렇게 보채는 거야?”
“그냥. 네가 가면 좋아할 만한 곳이 생각이 나서.”
남자친구의 손에 이끌려 온 곳은 풍암호수 수변공원이었다. 그곳은 때마침 장미축제가 한창이었다. 공원 곳곳을 아름답게 수놓은 장미꽃들의 지릿한 향기에 금세 매료되었다. 그곳에는 연인, 가족, 친구 등 다양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더 다양한 종류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장미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문득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가 떠올랐다.
“여기 있는 장미를 다 모으면 백만 송이가 될까?”
“백만 송이? 글쎄. 감이 안 잡히네. 그런데 아니지 않을까? 수백만 송이면 그게 다 얼마야?”
백만 송이 장미의 노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고 했다. 한 여자를 향한 구애의 도구로 전 재산을 털어 백만 송이 장미를 선물한 남자. 여자는 백만 송이 장미가 주는 아름다움만큼 황홀했을까?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포토존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생각에서 일까 포즈를 취해가며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확실히 꽃이 예쁜 곳에는 사람이 많았고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차례가 돌아왔다.
색색 깔의 장미로 둘러싸인 터널 같은 곳에서 브이자를 그렸다.
천천히 장미꽃을 둘러보는데 장미의 종류가 이렇게 많았나 싶기도 하고 장미처럼 생기지 않은 장미꽃도 많았다. 프린세스 오브 모나코, 코사이, 람피온과 같이 이름들도 모두 귀족적이었다.
“이름들이 하나같이 다 멋있네. 마치 공주님 이름 같아.”
“그럼 얘한테도 예쁜 이름 하나 지어줘봐.”하며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뭐야. 갑자기?”
“뭐긴, 네가 오늘은 빨간 장미가 좋다며. 그래서 준비한 거지. 얼른 이름이나 지어줘.”
“쳇, 둔감한 척 하더니만.”
그렇다면 이 장미의 이름은 빨간 장미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