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시 선산읍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절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의 절반은 선산에서 난다(朝鮮人才 半在嶺南, 嶺南人才 半在善山)고 쓰고 있을 정도로 조선 시대 유교 문화가 번성했던 지역이었다. 이러한 선산의 유교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조선 중기 정치를 이끌었던 사림파의 먼 시조인 야은 길재 선생을 배향한 금오서원이다. 특히 오늘날에는 금오서원을 둘러싼 남산(藍山)을 따라 둘레길도 조성되어 선산 일대를 끼고 도는 낙동강의 전망을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 되었다.
고려 충신의 충절을 기리며 조선과 함께한 금오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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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서원은 고려말 충신으로 꼽히는 선산 출신 문신인 길재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로 시작되는 시조로도 유명한 길재 선생은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벼슬을 거부하고 낙향하였다. 그리고 고향에서 성리학의 이론적 토대를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조선조 유학의 기반을 닦았다. 이후 김종직 등 길재의 후학들이 대거 관직에 진출하여 조선 정치를 이끈 사림파의 원류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1572년, 비록 고려에 충성하였으나 충절의 상징이 된 길재 등 5인의 유학자(5현)을 기리기 위해 금오산 기슭에 금오서원이 세워졌다. 이후 임진왜란 당시 불탄 것을 17세기 초 현재 위치인 구미 선산읍 원리에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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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서원 중 금오서원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더 있다. 서원의 기능이 변질되어 조선 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당시 수많은 서원들이 폐쇄되는 와중에도 중요성을 인정받아 존치된 전국 47개의 서원 중 하나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도 서원의 강당인 정학당에 걸려 있는 금오서원의 규칙인 7조(七條)는 오늘날까지 금오서원이 이어질 수 있었던 기풍을 알려주고 있다. 술이나 음식만 밝히지 말고, 낙서하거나 책을 손상하지 않는 등의 7가지 규칙을 지키지 않을 자는 금오서원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적혀 있어 선조들이 학문에 대해 진지하게 임했음을 느낄 수 있다.
금오서원 녹색길에 올라 낙동강 내려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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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서원이 위치한 원리(서원마을)는 뒤로는 해발 169m의 남산이 있으며, 앞과 옆으로는 감천과 낙동강이 흘러 예로부터 경치 좋은 명당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러한 점을 살려 금오서원 일대에는 총연장 5.6km가량의 녹색길이 조성되어 있다. 총 3개 코스로 구성된 금오서원 녹색길은 금오서원에서 시작하여 남산 정상부의 봉수대와 전망대, 국내 최대 규모 반송(盤松)을 볼 수 있는 독동리를 거쳐 낙동강 구미보에 이르는 주요 볼거리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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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서원 녹색길의 코스 중간중간에는 조선 시대의 유명한 유학자들의 생애가 적힌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여러 유학자의 생애를 통해, 옛날 이 산길을 걸으며 학문을 논했을 선조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산 정상부에서는 남산 봉수대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봉수대는 세종 때 지정된 봉수대 기점 중 하나이며 구미와 해평의 봉수 신호를 받아 김천과 상주를 거쳐 서울 남산까지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금오서원 녹색길의 백미는 전망대에 올라 서원마을을 감돌아 흐르는 감천과 낙동강의 경치를 둘러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서원 중 하나인 금오서원은 고려 시대의 충신을 모시면서 충(忠)으로 대표되는 유교 정신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임과 동시에 낙동강의 자연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녹색관광의 코스로도 안성맞춤이다.
글 트래블투데이 지역 주재기자 이재호
발행2019년 06월 09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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