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왕후(神德王后, ?~1396년)는 태조 이성계의 계비로 황해도 곡산 출신의 성산부원군 강윤성의 딸로 1356년 태어났다. 고려 말 귀족세력인 권문세가 출신으로 그녀의 친가는 이성계가 권력을 집중시키고 조선을 개국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신덕왕후는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이지만 태조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가 조선건국 1년 전인 1391년 사망하면서 조선의 첫 번째 왕비가 되었다. 신덕왕후와 태조는 방번(태조의 7남), 방석(태조의 8남)과 경순공주(태조의 3녀) 등 2남 1녀를 낳았다.
태조의 사랑을 받은 신덕왕후
서울 성북구에는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그를 미화시키기 위해 후대에 많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태조와 신덕왕후의 만남을 바탕으로 한 설화는 신덕왕후를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들으면 ‘아, 그 이야기구나!’ 할 정도로 유명하다. 어느 날 태조 이성계는 호랑이를 사냥하기 위해서 산속을 누비고 있었는데 목이 말라 한 마을의 집에 다다르니 우물이 있어 급히 물을 청했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한 여인은 바가지에 물을 뜨고 난 후 버들잎 한 줌을 물 위에 띄워 태조에게 건넸는데 태조는 이것이 무슨 고약한 짓이냐며 나무랐다. 그러자 여인은 갈증이 심해 급히 냉수를 마시면 탈이 날 것 같아 버들잎을 불며 천천히 마시라고 일부러 그리하였다고 수줍게 대답하니 태조는 그 마음씨에 감동하여 여인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 여인은 마음씨만큼이나 미모 또한 빼어나 태조가 한눈에 반하니 그가 바로 신덕왕후다.
이 설화는 사실 고려 태조 왕건과 그의 둘째 부인이었던 나주 오다련의 딸 장화왕후와의 만남을 다룬 설화와 똑같다. 신라 말 곳곳에서 강한 기반을 다지고 있던 지방호족의 딸과 혼인을 통해 효과적으로 지방을 통치했던 왕건의 국정운영이 조선에도 적용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슷한 설화가 생겨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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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으로 가는 길은 나무가 울창하여 산책로로 이용하기 좋다.하지만 실제로도 태조 이성계보다 21살이나 연하였던 신덕왕후는 그 미모가 상당히 아름다워 태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조선을 개국하는 과정에서도 그녀는 빼어난 미모만큼이나 결단력 있는 행동으로 이성계를 도왔다. 이방원이 고여(高呂) 등을 보내어 고려 충신 정몽주를 죽였을 때,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忠孝)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大臣)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감히 불효(不孝)한 짓을 이렇게 하니,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라며 불같이 화를 내며 태종을 나무라는 태조를 진정시킨 것 또한 신덕왕후였다.
하지만 1392년 조선 개국 이후 그해 8월 현비(顯妣)로 책봉되며 영원한 조선의 국모로 천수(天壽)를 누릴 것만 같았던 신덕왕후의 말년과 사후는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정도전, 조준 등 개국 공신과 함께 자기 아들 방석(태조의 8남)을 왕세자로 책봉하였으나(7남 방번은 행실이 경솔하고 볼품없다 하여 제외) 본처 신의왕후의 아들이었던 태종 이방원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신의왕후의 장성한 아들들과 그녀는 후계 문제로 다툼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건강까지 나빠진 그녀는 1396년 8월 13일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2년 뒤인 1398년 8월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신덕왕후의 아들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태조는 자신이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음에도 극진히 사랑했던 부인의 아들들을 무참히 제거하는 태종의 모습에 노여움을 가라앉힐 수 없었는데, 세상을 떠났지만, 신덕왕후의 마음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생전에 서로 남다른 애정을 과시했던 신덕왕후와 태조는 어찌 된 일인지 서로 떨어져 잠들어있다. 본래 태조는 신덕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도성 안의 현재 덕수궁 뒤편에 능역을 조성하고 자신의 자리 또한 함께 마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신덕왕후의 아들을 죽이며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그녀의 무덤까지 욕보였다. 잘 조성된 정릉(貞陵)을 파헤쳐 봉분을 깎고 무덤의 흔적을 없애도록 명했으며 심지어는 능 주변에 소나무를 베어서 집을 짓도록 허락을 하기도 했다. 결국, 도성 안에 있던 무덤은 1409년 2월 도성 밖 사을한(沙乙閑)의 산기슭으로 천장(遷葬)하고 무덤에 쓰였던 돌은 광통교를 돌다리로 개축하는 데 쓰도록 했다. 지금과 같은 능역이 조성된 것은 그로부터 260여 년이 지난 1669년 헌종 때다.
태종에 의해 철저히 푸대접을 받아서일까. 태종에 의해 평민으로 강등되었던 그녀의 무덤은 수백 년간 주인 없는 무덤처럼 방치되었다. 거기에 정릉은 왕릉제에 따라 있어야 할 병풍석이나 난간석이 봉분에 남아있지 않아 왕비의 능이라고 보기엔 초라한 모습이다. 전체적인 능제는 고려왕릉의 기본제도를 약간 변화시켜 만든 것이다. 능 앞에 있는 사각으로 조각된 장명등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능 양식을 따른 것으로 능역 조성 당시 원래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는 길. 이것이 조선왕조 최초로 만들어진 왕비의 무덤이라고 하니 더욱더 쓸쓸하게 느껴진다.
신덕왕후에게 태종 이방원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뛰어나게 아름다웠다는 왕후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 또한 정릉을 돌아보는 재미 중 하나가 될 수 있겠어요!
글 트래블투데이 편집국
발행2015년 07월 17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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