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을 찾는 여러 발걸음
곡선의 기와지붕들이 넘실대며 새소리인지 바람소리인지 모를 기분 좋은 울림에 온 신경을 쏟다보니 도시에서의 염증이 절로 치유된다. 담장을 살짝 넘어보아도 눈살을 찌푸리는 이가 없고 밤이 내려앉으면 풀벌레가 정겹게 울어댄다. 황토벽에 짙은 흙내가 풍겨오지만 전혀 낯설지 않다. 조용한 고택에 앉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어지러웠던 마음이 깨끗해지며 제 자리를 찾는다.
치암고택은 퇴계 이황의 11대손 이만현의 옛집으로, 인근 봉정사와 향산고택 등과 함께 둘러보기 좋다.
안동댐 수몰로 1976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치암고택은 어지러웠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조용히 머물다 가기 좋은 장소다. 이미 한옥이라는 장소 자체가 주는 운치나 외형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고택의 당호가 가지는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깨끗한 마음으로 조용히 머물다 가는 집
안동시 안막동에 위치한 치암고택은 독립운동가의 고장답게 일제의 국권 피탈로 멸망한 대한제국에 나라를 망하게끔 내버려 둔 선비 정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낀 이만현의 옛집으로 총 22칸 규모의 고택이다. 이만현은 퇴계선생의 11대손으로 은퇴 후 경술국치를 당함에 분통함을 토로하다 결국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치암(恥巖) 이만현의 호를 따 이름 지은 치암고택의 치암(恥巖)이라는 호는 '부끄러운 바위'라는 뜻으로 나라가 일제에 침탈당함에 대한 부끄러움과 울분이 담겨 스스로를 치암(恥巖)이라 칭하였다. 바위도 저렇게 제 자리를 지키는데 어찌 선비가 나라를 빼앗길 수 있느냐며 바위에게도 부끄럽다는 뜻을 품고 있다. 그의 호에서 당시의 치욕과 울분 그리고 정신만은 빼앗기지 않은 올곧은 선비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솟을대문은 겸손하고 점잖은 선비의 옷자락처럼 땅을 향해있는 듯하다.
1973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된 치암고택은 퇴계 선생의 혼이 대대로 흐르고 있는 곳으로 고택다운 기품과 무게가 느껴진다. 고택은 총 안채 22칸의 'ㅁ'자형 기와집으로 사랑채가 안채보다 높이 솟아있으며 사랑채 우측 누마루가 옆으로 돌출된 구조로 독특한 인상을 남긴다. 단정하게 쪽을 진 할머니의 머리칼처럼 고요하고 아늑한 치암고택에 서면 치암의 정신을 담고 있는 현판이 달린 솟을대문이 객들을 맞는다. 높이 솟아 있다하여 솟을대문이지만 어쩐지 치암고택의 솟을대문은 하늘로 치솟아 있다기보다 겸손하고 점잖은 선비의 옷자락처럼 땅을 향해있는 듯하다. 솟을대문 양 옆의 대문채는 과거 하인들이 머물던 공간이다. 현재는 숙박 객들을 위해 새롭게 단장하였다.
솟을대문을 지나면 사랑채와 마주하게 된다. 사랑채는 사랑방과 중간마루, 누마루, 누마루방, 차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붕모양이 일반가옥과는 다른 모양새다. 누마루가 있는 우측은 팔작지붕으로, 안채로 통하는 좌측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사랑채 벽서를 메운 한자들은 각각 선비로서의 자세와 마음가짐을 뜻하는 한자로 '숙흥야매'는 아침 일찍 일어나 잠들기 전까지 선비들이 지켜야 할 잠언을 말하며 '신독‘은 혼자 있을 때도 잘하라는 심오한 뜻을 품고 있다. 이외에 ’징분질욕‘은 성나기를 경계하고 욕심을 잘 막는다는 뜻이고 ’성경‘은 정성을 다하여 공경하라는 뜻이다.
치암고택의 방과 마루에는 고유의 이름이 붙어있다. 호도재, 낙성당, 경업재 등의 각각의 이름이 있으며 화장실과 욕실에도 이름이 붙어있어 자신이 머물다 간 공간에 대한 애착과 학문과 사상을 잊지 않던 퇴계의 사상으로부터 이어진 것이라 한다.
치암고택 사랑채의 누마루는 '정자' 기능을 하고 있어 사랑채를 높이 들어 올려 누마루를 돌출시켰다. 누마루의 이름을 '청풍헌'이라 짓고 성현의 말씀을 바로 새겨 차를 마시곤 하였다한다. 안채로 들어서자마자 시선은 뒤뜰로 향한다. 바로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때문인데 낯을 가리지 않고 순하나 낯선 이에게는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안채는 주인 부부가 생활하는 생활공간이지만 방문객들의 멋쩍은 웃음에 선뜻 자리를 비켜준다.
한옥스테이로 새롭게 단장한 치암고택
치암고택은 현대적인 편의성을 최소한으로 두고 옛것의 아름다움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물론 에어컨과 텔레비전을 갖추고 있지만 현대적인 느낌이 강하지 않다. 그는 켜켜이 개어있는 침구류와 방을 꾸미고 있는 고가구 때문이 아닐까. 고택 방문 앞에 놓인 고무신도 인상적이다. 댓돌위에 가지런히 놓인 고무신을 보니 방에 들어설 때 뒤를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나 돌아보기 위함이다.
치암고택에 방문하면 꼭 하나씩 받고 돌아오는 선물이 있다. 바로 주인이 묵고 가는 손님들에게 좋은 글귀를 직접 붓으로 써서 전해주는 것으로 심오하면서도 깨끗한 글귀가 담겨있다.
치암고택의 밤은 어둡지 않다. 형광등이나 전등 때문이 아니다. 초저녁부터 어둠이 내려앉는 고택이지만 반가운 손님이 불을 달고 방문 앞을 서성이기 때문이다. 풀벌레 울음소리와 함께 반딧불이가 문을 두드리는 치암고택은 멀리서 보면 별이 흐르는 것 같다.
*주변관광지
봉정사
문무왕 12년(672)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봉정사는 천등산자락에 위치한 사찰이다. 도력으로 종이로 봉을 만들어 날렸는데 봉이 앉은 자리에 절을 지어 봉정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흐르고 있다.
향산고택
경북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된 안동 향산고택은 조선 후기 문신이었던 향산 이만도의 고택으로 'ㅁ'자형 구조를 지녔다. 치암고택 별당채 아래쪽에 위치한 향산고택은 독립운동가문으로 국권이 침탈당하자 단식을 하여 순국하였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수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선비의 고장 안동의 살아있는 유교문화와 저항정신을 배울 수 있는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은 전시와 영상물을 통해 독립운동단체의 활약과 정신을 배울 수 있으며 안동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트래블스테이] 온계종택
5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종갓집, 온계종택! 이곳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우리의 전통문화와 선비정신이 곳곳에 깃들어 있습니다. 퇴계 이황의 형인 온계 이해 선생이 살던 종택으로 온계 12대손이였던 이인화의 의병활동 당시 이곳을 의병소로 사용했다는 이유로 1896년 소실, 2005년 복원된 곳이기도 합니다. 아주 옛스러운 멋은 덜하지만 온계종택만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는 방문한 이에게 특별한 하룻밤을 선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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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트래블투데이 이수민 취재기자
발행2021년 09월 20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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