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재작년에 시집을 간 여동생의 전화였다.
“언니, 주말에 뭐해? 우리 슬비 좀 하루만 봐주면 안 될까? 한번만 더, 응?”
주말에 뭐하냐고 물어보고선 내가 대답을 할 여유도 주지 않은 채 자신이 전화를 건 본 목적을 뒤따라 이야기 하는 동생이었다. 귀여운 조카 봐주는 것에 인색한 이모는 아니었지만 몇 년째 아이를 기다리는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어쩐지 조금 얄미운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렇다고 싫은 내색을 하기에는 어쩐지 조금 치졸한 이모가 될 것 같아 알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슬비는 엄마인 내 동생보다 어쩌면 나를 더 많이 따랐다. 여동생이라고 왜 배 아파 난 자기 자식이 안 예쁠까, 그저 나는 슬비에게 조금 더 약간의 집착이 섞인 행동을 하는 것일 뿐이다. 마치 꼭 저 아이에게서 ‘엄마’라는 단어를 듣고 싶은 사람처럼.
약속된 주말이 왔고 귀엽게 양 갈래를 하고 공주가 그려진 예쁜 원피스를 입은 슬비가 왔다. 이맘때 다른 아이 같으면 엄마랑 떨어지지 않겠다고 울며불며 떼를 쓸 텐데 슬비는 이모인 내 품에 쏙 하고 안겼다. 그리고는 쿨하게 엄마에게 빠이빠이 하며 손을 흔들었다. 여동생은 모처럼 남편과 데이트를 하러 가는 듯했다. 슬비를 내게 맡겨두고는 미안했는지 작은 봉투를 건넸다. 맨입으로 맡겨도 서운했을 텐데 막상 이렇게 돈 봉투를 보니 어쩐지 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슬비 점심부터 좀 먹여줘 라는 말과 함께 동생네 부부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우리 슬비 무슨 반찬 해줄까? 점심 먹고 이모랑 뭐하고 놀지 생각해봐.”
“음, 나 치즈계란말이 먹고 싶어.”
이젠 제법 똑 부러지게 자신의 입장 혹은 의견을 말하는 것을 보고 대견한 마음이 들면서도 약간의 거리감이 들었다. 조만간 이모네 집에 가기 싫다고 똑 부러지게 제 엄마에게 말이라도 하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슬비는 가방에 싸온 몇 가지 장난감을 바닥에 늘어놓은 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조잘조잘 혼자 떠드나 싶더니 이내 조용해져 불안한 마음에 거실 쪽으로 얼른 머리를 쏘옥 내밀어보니 무엇을 보는지 꽤나 집중을 한 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텔레비전에서는 슬비 또래의 아이들이 얼룩소에게 먹이도 주고 치즈로 피자를 만드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슬비야 점심 먹자. 맛있는 돌돌 치즈계란말이가 왔어요~”
슬비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텔레비전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몸도 찌뿌듯해서 집에서 놀다가 잠깐 놀이터나 나갔다올까 했는데 슬비는 저곳에 가고 싶은 눈치였다. 하는 수 없이 점심을 먹이고 차키를 챙겨 계양산자연체험학습장을 네비에 찍고 시동을 걸었다. 이래서 요맘때 아이들이 뭐든 다 들어주는 이모를 엄마보다 더 따르는지도 모르겠다. 멀리서 계양산자연체험학습장 간판이 보였다. 슬비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카시트에서 몸을 들썩였다. 벌써부터 시골냄새가 진하게 풍겨왔고 슬비 또래의 아이들이 보였다. 저 멀리서 체험장 관리하는 선생님이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어머니, 우선 아이 손부터 깨끗이 씻게 하시고 오늘 체험 등록한 아이들과 함께 젖소 젖짜는 체험부터 진행할게요.”
어머니? 물론 이 사람 입장에서는 엄마처럼 보였겠지만 누구의 어머니, 엄마라는 말이 생소한 나는 그만 얼굴이 새빨개졌고 부끄러운 마음에 얼른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이의 손을 씻기는 데 웬일인지 눈물이 고였다. 조카를 데리고 온 것도 좋지만 정말 내 아이와 함께 오면 얼마나 좋을 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아이는 즐거워보였다. 또래 친구들과 젖소 먹이도 주고 쓰다듬기도 하며 도심에서 쉽게 체험하기 힘든 체험들을 하며 정서발달과 신체발달을 고루 키워나갔다. 드디어 오늘 체험의 하이라이트, 직접 만든 치즈로 피자를 만드는 것이다. 사실 내 여동생은 슬비가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피자나 치킨 같은 음식들은 먹이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한 적이 있다. 그 흔한 자장면도 안 먹이고 직접 만들어 준다나. 그런데 오늘 이렇게 하이라이트 순간을 목전에 두고 물러설 슬비가 아니었다. 평소에 떼를 잘 쓰지 않는 성격이지만 꼭 하고 싶다거나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떼를 쓰기에 오늘 하루는 그냥 피자를 먹이기로 하며 체험을 이어나갔다.
우선 앞에서 선생님이 치즈에 대한 성분과 치즈 만드는 법을 간단히 설명했고 뒤따라 아이들과 부모님들도 치즈를 만들었고 자신이 원하는 재료를 받아다 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고소한 포테이토 치즈 피자를 만들었고 오븐에 15분 동안 구워내면 완성이었다. 하나 둘씩 저마다 만든 피자를 오븐 앞으로 가져갔다. 고사리 손으로 피자 위에 치즈를 듬뿍 올리고 피자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모, 난 이모가 정말 좋아.”
대뜸 고백을 해오는 슬비에 웃으며 이모도 그렇노라고 말해주었다.
“난 정말이야. 치즈가 좋은 것처럼 이모도 그만큼 좋아.”
슬비는 자신이 정말 좋을 때 치즈에 비유해서 그 양을 말하곤 했다. 그러니 나는 슬비에게 엄청나게 큰 점수를 딴 것이 분명했다.
“고마워, 이모도 슬비 엄청 많이 좋아해.”
“이모, 나한테 동생이 생기더라도 나 많이 좋아해줘야 해.”
여기서 동생은 내가 낳을 아이를 말하는 듯했다. 내가 미쳐 대답을 하기전에 오븐에서 땡 하는 소리가 울렸고 고소하고 부드러운 치즈피자가 완성됐다. 슬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피자를 보고 흥분하여 방방 뛰었다. 직접 만든 피자를 입속에 넣는 순간 치즈가 사르르 녹았다. 어쩐지 마음에 맺혔던 무언가도 함께 사르르 녹는 기분이 들었다.
체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슬비는 고단했는지 곯아떨어졌다. 우리가 집에 도착하니 뒤이어 여동생내 내외도 도착했다.
“언니, 오늘 슬비가 말썽 안 부렸어? 매번 고마워. 그리고 이거.”
동생의 손에는 인진쑥과 함께 산부인과 진료카드가 들려있었다.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에 마음이 스르르 녹았다.
“당신, 그것 좀 내려놓을 수 없어요?”
한 달 전, 오랜 직장 생활을 마치고 쉬게 되신 아버지는 저녁을 먹자마자 또 통기타를 잡으셨다. 퇴직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얼큰하게 취하셔서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의 등에 난데없이 업혀 있던 바로 그 기타다.
“기억 안 나? 내가 왕년엔 기타로 아주 날렸잖어, 민정이 엄마!”
“그건 왕년 얘기고!”
어머니의 반격에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 말 그대로였다. 예전엔 아주 잘 치셨다지만,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기타를 연주한 적이 없는 아버지의 솜씨는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랜만에 기타를 잡았다는 사실이 마냥 좋으신 모양이었다. 내게 부탁하셔서 MP3에 가곡들을 잔뜩 다운로드 받으신 것은 물론이고, 7080 콘서트 프로그램 시간을 미리 적어두었다가 꼬박꼬박 챙겨보시기도 하셨다.
“어휴, 얘. 난 네 아빠 기타 소리 때문에 죽겠어, 아주.”
말씀은 항상 그렇게 하시지만, 나는 어머니는 아버지가 기타 치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것을 은근히 좋아하신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는 대학 캠퍼스의 잔디밭에서 기타를 치고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에 반했다고 하셨다. 옛날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 상징처럼 등장하는 바로 그 모습, 바로 흰 티에 청바지를 입고 장발을 한 채로 잔디밭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모습 말이다. 문학소녀였던 어머니는 소설처럼 아버지에게 첫 눈에 반했고, 매일 먼 발치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존재를 눈치 챈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거셨다고 했다.
“왜, 낭만적이고 좋은데.”
“다 늙어가지고 낭만은 무슨. 예전처럼 잘 치는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저걸 듣고 있자니 고역이다, 야. 저 양반, 내일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것도 까먹은 건 아닌지 몰라.”
어머니의 말에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독립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맞는 부모님의 기념일인 만큼, 올해는 꼭 내 손으로 챙겨드리고자 다짐했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여보, 민정이 엄마. 이리 좀 와 봐. 티비에 지금 누군 나오는지 알아?”
나는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지만, 어머니에게도 익숙한 이름인 듯 어머니가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가셨다. 서로 어깨를 기대고 앉아 노래를 따라 부르시는 모습이 정겨워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대체 어딜 가는 거냐?”
“가 보시면 다 알아요.”
저녁 식사 때 자르실 요량으로 아버지께서 사 오신 케이크를 그대로 조수석에 싣고,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미사리로 향했다. 서울 근교에 라이브 카페촌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 기억 나 어제 부랴부랴 검색을 해 보았더니, 꽤나 유명한 곳인데다가 생각보다 가까웠다.
서두른다는 것이 예약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버렸기에, 조정 경기장에 차를 세웠다. 운이 좋으면 모터보트 경기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데, 오늘은 시간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잔디밭과 꽃나무로 꾸며진 경정공원과 산책로, 솟대가 데이트코스로는 아주 그만이었다.
나는 아버지 몰래 어머니에게 예약된 카페의 전화번호와 약도를 건네 드렸다. 어머니는 초대 가수의 이름을 듣고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셨다.
“네 아버지 알면 아마 여기서 춤을 추실 거다.”
“그럼, 방해꾼은 이만 빠질게요. 한 삼십 분 있다가 이 길 따라서 쭉 걸어가시면 돼요.”
공연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카페 앞으로 두 분을 모시러 갈 것을 약속한 나는 혼자 자전거를 빌렸다. 공도교까지 이어지는 자전거 도로를 따라 갔다 오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한강변을 따라 자전거로 달리는 동안 종종 팔짱을 꼭 끼고 걷는 어르신들이 보였다.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는 노래 가사처럼, 추억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엄마는 오늘도 추억에 젖어든다. 엄마는 서재에 들어가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나올 줄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종종 엄마가 서재에 들어간 시간을 알차게 이용한 적도 있다. 엄마가 서재에 들어가서 무엇을 보는지 살그머니 다가가 빼꼼 열린 문을 통해 본적이 있는데 아마도 사진첩을 보는 듯했다.
흑백사진은 지나간 추억을 곱씹는데 유난히 적절함을 선물한다. 똑같은 장면임에도 그것이 아주 선명한 컬러사진이었다면 가슴으로 느껴지는 아날로그적 감성은 아주 현저히 떨어졌으리라 생각한다.
엄마는 오늘도 똑같은 그 사진이다. 나는 언젠가 엄마에게 그 사진이 도대체 무엇인데 그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냐고 물은 적이 있다. 엄마는 내 머리를 톡 치면서 쪼끄만 넌 몰라도 된다고 하셨다. 엄마는 정확히 이야기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왠지 알 것 같았다. 그 사진속의 주인공이 엄마의 첫사랑이라는 것을.
엄마가 집에 없을 때 몰래 서재에 들어가 그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촘촘히 돌로 쌓은 긴 다리에 엄마로 추정되는 소녀와 엄마의 첫사랑으로 생각되는 소년이 서로를 향해 걸어오는 장면이었다. 엄마는 행복해보였다. 단정하게 양 갈래로 땋은 머리와 나풀거리는 치마는 엄마에게도 좋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적절했다.
따사로운 햇볕이 눈부시게 내리쬐고 바람이 나뭇가지를 못살게 구는 오후다.
우리가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이렇게 글을 적어 내려가는 이 시간에도 나는 네가 그립구나. 물에 참방참방 돌을 던지던 너.
너는 그날의 햇살보다 더욱 눈이 부셨어. 그런 네가 돌다리 너머에서 내게로 뛰어오고 있노라면 심장이 콩닥거려 너도 몰래 뒤를 돌아 숨을 고른 적이 있단다.
이름만큼 아름다운 너. 우리가 다시 만날 때 내가 이 편지를 건네면 너는 두 볼이 발그레 질까?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구나.
지금도 네가 그리운 -가.
손발이 오그라드는 연애편지다. 엄마의 연애편지를 훔쳐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진과 함께 꼬깃꼬깃하게 접어둔 누런 종이는 엄마의 주름살만큼이나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밖에 인기척이 들리는 것을 보니 엄마가 오셨나보다.
“너 왜 거기서 나와?”
“응? 아니, 책 좀 볼게 있어서. 근데 엄마, 엄마 오늘 좀 예쁘다.”
“간지럽게 왜 이래? 용돈 떨어졌어?”
“치, 엄마는~ 그냥 엄마에게도 햇살 같은 날이 있었던 것 같아서.”
“무슨 소리야? 당최 알아듣질 못하겠다. 싱거운 소리 그만하고 어서 손 씻고 와. 음식 준비해야지.”
엄마는 아빠가 그리울까? 아빠는 엄마를 그렇게 그리워했는데.
사진 속의 아빠는 웃고 있었다. 그 옛날 다리 위에서 엄마를 바라보고 있던 아빠는 엄마만큼이나 행복한 웃음을 띠고 있다.
지금 아빠가 생전에 좋아하던 전과 나물 그리고 밥을 앞에 두고 또 다른 사진 속 아빠는 웃고 있다.
제사가 끝나고 나는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우리 진천갈까? 그 다리 나도 걸어보고 싶어.”
오늘 아침은 유난히 몸이 무거웠다. 간밤에 누군가에게 솜방망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삭신이 쑤셨다. 의도하지 않은 무거운 신음이 입 밖으로 슬며시 흘러나왔다. 겨우 팔과 다리를 뻗어 자다 깬 그대로 기지개를 켰다.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현기증이 났다. 한번 휘청거리며 선반 모서리를 손으로 짚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걷는데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빛 때문에 다시금 현기증이 났다.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앉았는데 몇 개의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공지사항. 어제 연락드린 외국인을 위한 맞춤 프로그램에 대한 문서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확인 바랍니다.
클라이언트는 도무지 주말과 휴일의 개념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회사에 나오라는 말만 안 했을 뿐이지 자신이 보낸 메일을 확인하라는 것 자체가 일의 연장선임을 진정 모르는 것일까 생각했다. 미지근한 물 한잔을 마시고 메일을 확인해보려는데 입사동기 성연의 전화가 왔다.
“어, 성연씨. 무슨 일이야?”
“어! 웬일이야. 매번 여보세요 하고 딱딱하게 받더니. 다른 게 아니고 메일 받았냐고.”
“응, 지금 열어보려던 참이야. 뭐 급한 거야? 이렇게 전화를 다 주고.”
“급한 거라기보단 외국인 협업 프로젝트라나 그런 건데 자기랑 나랑 하게 되었더라고. 그래서 연락해봤어. 무슨 주말이 이러냐. 아무튼 메일 확인하고 시간 잡아서 기획 좀 짜보자고.”
이렇게 정신없는 아침도 없을 거라며 눈을 한번 지그시 감았다 떠보니 클라이언트가 보낸 메일이 와있었다. 내용인즉슨 관광을 통한 지역의 문화 익히기라는 주제의 행사를 맡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그리 기획만 탄탄히 짜면 그리 어렵지 않은 프로젝트였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프로젝트 담당자가 자신과 성연이라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민주와 입사동기인 성연은 늘 비슷한 업무를 맡았기에 항상 비교, 평가의 대상이었다. 물론 민주의 자격지심이라면 자격지심이었겠지만 민주는 이번 프로젝트 담당이 외국인인 것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성연은 화려한 어학연수 스펙을 가지고 있었으나 민주는 비행기라고 타본 것은 제주도를 갔다 온 것뿐이었다. 민주는 쓴 한숨을 내뱉었다. 어쩐지 성연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전화한 것이 참 얄미웠다.
민주와 성연은 각자 관광 지역을 선정하고 지역의 문화에 대해 조사하기로 했다. 민주는 강진청자를 떠올렸다. 우연히 들렀던 강진에서 외국인들의 청자 만들어보기 체험을 본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강진청자 만들기 체험? 무슨 애들도 아니고. 외국인들이라고 해서 어린이들이 아니야. 이게 뭐니?”
참. 말 한마디도 얄밉다. 청자 만들기 체험이 무슨 어린이들만 해야 하는 대표 프로그램도 아닌데 저렇게 길길이 날뛴다.
그렇게 두 파트로 나누어 각각 10명의 외국인들과 함께 자신이 기획한 일정대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민주는 말이 좀 어색했지만 그만큼 외국인들의 말을 들으려 노력했고 더 세심한 준비를 했다.
흙을 만져본 느낌, 청자에 대한 첫 생각 등을 참 편안하게 나누었다. 그리고는 각자가 만든 도자기에 자신이 새기고 싶은 문구나 기억하고 싶은 문구를 새기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외국인들은 흥미로워했고 꽤 진지하게 문구를 생각했다.
프러포즈 내용을 쓰기도 하고 자신의 다짐을 쓰기도 했다.
그새 정이 들었는지 외국인 한명 한명에게 좋은 추억이 되었을까 진심어린 걱정이 되었다. 고맙게도 외국인들은 이번 체험에 만족했고 즐거운 추억을 안고 돌아간다며 고마워했다. 그렇게 프로젝트는 성공리에 마쳤다.
그날 아침은 생각보다 상쾌했다.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도 산뜻했고 햇볕도 그다지 따갑지 않았다.
‘택배요’
택배? 주문한 게 없는데.
손에 안겨진 것은 다름 아닌 서툰 글씨가 새겨진 청자였다.
‘보고 싶은 사람에게.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정말이지 추억은 국경을 넘어선다.
우리 셋이 모이게 된 것은 청년창업지원센터에서였다. 청년창업지원센터는 지속적인 청년실업의 돌파구를 찾아 남들과 다른 차별화 전략으로 개인 사업을 벌이는 청년들이나 초보창업자들을 위한 지원을 해주는 곳이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포장마차, 치킨 집, 카페 등 개인마다 꿈꾸는 창업 아이템도 달랐다.
사실 말이 좋아 청년CEO지 사업을 벌이는 것에서부터 경영, 재무관리, 물품관리까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1인 창업보다는 두세 명이 동업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나는 유기농 채소가게를 준비했고 나와 동갑인 현우는 정육식당을 우리보다 두 살 어린 성호는 퓨전음식점을 준비했다. 우연히 같은 설명회를 듣고나온 우리는 나이가 비슷했고 동지라는 느낌이 들어서인지 급격히 가까워졌고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공유했다. 우연인지 우리는 음식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시장조사나 원재료에 대한 생각들을 공유하며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현우는 장흥으로 재료조사를 가야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친목도모도 다지고 창업성공을 위한 자축쯤으로 셀프 엠티를 다녀오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우리는 모두 그러마했고 든든한 동지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에 한층 마음이 가벼워졌다. 혼자서는 막막하던 일이 누군가와 함께 걷고, 어울려 걷는 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외롭지 않았다.
각자 시장조사와 재료공수에 대한 일정을 마친 우리는 슬슬 몰려오는 피로감을 느꼈다. 숙소로 돌아가려 차에 오르는데, 성호가 이왕 여기 까지 왔으니 관광 온 셈치고 장흥삼합에 소주한잔 걸치고 가자는 제안을 했다. 다들 배도 고프고 알코올 생각도 있던 차라 성호의 제안대로 장흥삼합집으로 갔다.
음식점 앞에는 대문짝만하게 TV 프로그램에 나온 맛집이라고 쓰여 있었다, 장흥에 온 사람이라면 꼭 먹고 간다는 장흥삼합은 장흥의 3대 특산물인 한우, 표고버섯, 키조개를 함께 구워 깻잎 등에 싸먹는 요리였다. 셋이 둘러앉은 자리에 세 가지의 대표 음식들이 있었다. 한우나 표고버섯, 키조개는 각각의 재료만으로도 큰 개성과 맛을 가지고 있지만 이 세 가지를 함께 먹으면 최고의 맛궁합을 내기 때문에 에 세 가지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리라.
각자 한손에는 삼합쌈을 다른 한손에는 소주잔을 들며 축복을 비는 건배를 했다.
“캬. 좋다. 이런 날도 있어야 숨통이 트이지. 안 그래?”“맞아요. 사실 창업지원강의 들으면서도 막막했거든요. 집에서는 젊은 놈이 무슨 장사냐며 다른 사람들처럼 안정적인 직장 가지면 좀 좋냐고 그러고. 근데 이렇게 든든한 형님들과 함께 하니까 두려울 게 없어요.”
“자식. 네 말이 맞다. 두려울 게 없다는 말. 사실 혼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참 두려운 일이잖아. 그런데 이렇게 우리 셋이 똘똘 뭉쳐있으니 세상 뭐가 무서울 게 있겠어.”
“그런 의미에서 자~ 잔채우시고 짠!”
“야야. 천천히 마셔라. 이것도 좀 먹고.”
“어! 그러고 보니까 얘네도 셋, 우리도 셋이네요.”
“한우랑 키조개랑 버섯 말하는 거야?”
“네! 잘 보세요. 이 각자의 원재료들 하나만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이렇게 세 개를 하나로 어울려 먹으니까 더 큰 시너지를 만들어내잖아요. 우리가 이렇게 모여 있는 것처럼.”
“자식, 취했냐? 자자 마시자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한참을 익어가는 불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내가 침묵을 깨는 건배제의를 했다.
“자자. 뜨거운 불판은 그만 보시고. 잔을 들어주세요.”
최고의 궁합을 위해서 건배!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우연히 만난 음식들은 참 묵직한 추억을 안겼다. 기분 좋게 취한 우리는 역시 좋은 사람과 좋은 음식은 기분 좋은 시너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올 여름이 몇 십 년 만에 온 폭염이라더니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이마에 땀이 맺혔다. 시원한 빗줄기라도 내리면 좋으련만 하늘을 구름한 점 없이 맑고 태양은 지글거리며 만물을 비추었다. 장마가 왔어도 두 번은 왔을 시기인데 뉴스에서는 마른장마라며 비는 내리지 않고 습하기만 한 날씨가 당분간은 더 지속될 전망이라고 했다.
하릴없이 모여 있는 남자 둘이라니. 누가 보면 한심하다며 혀를 끌끌 차고 갔겠지만 이 남자들의 공통점은 솔로라는 것이다. 현기는 일병 말에 여자친구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상병이 현욱은 자그마치 삼일 전에 커플지옥에서 솔로천국으로 들어온 따끈따끈한 복학생이다. 간만에 쉬는 날짜가 겹친 남자 셋은 딱히 만날 사람도 갈 곳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현기는 목뒤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아! 이럴 땐 그저 마루에 시원한 대나무 자리 하나 깔고 대 자로 드러누워 낮잠 한 숨 자면 그만인데.”
“맞아, 죽부인 하나 껴안고 자면 며칠 못 잔 잠 몰아서 잘 수 있을 텐데. 크큭”
“으이구, 죽부인도 여자로 보이냐? 한심한 자식. 그나저나 우리 이렇게 쉬는 날도 겹쳤는데 방에서 할 일없이 뒹구는 것 밖에 할 게 없냐? 어디라도 갈까?”
“대나무 죽부인 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담양 대나무 숲에나 놀러갈까? 거기 영화 촬영도 많이 했잖아, 대나무 밭에서 무림 고수들의 싸움이랄까. 한판 할래?”
원래 여행은 갑작스럽게 가는 것이 제 맛이다. 어디로 갈 것인지 장소가 정해지고 함께 갈 사람만 있으면 그뿐이다. 배낭하나 둘러메고 출발한 담양 여행길에 들뜬 둘은 연신 종알대었다. 귓가가 따갑도록 수다를 떨다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다.
숨을 한번 들이 쉬어 마시니 공기가 시원하고 차가운 것이 청량감이 돌았다. 담양하면 떠오르는 대숲에 들어서니 빼곡히 서있는 대나무들로 인해 뜨겁게 내리쬐던 햇볕이 잠시 누그러졌다. 바람이 불때마다 대나무들은 스스스 하며 울어댔다. 눈을 감고 들어보니 빗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현욱의 말에 차분하게 명상하는 것도 잠시였다.
“이야. 대나무 죽이네. 판다가 있을 것만 같아.”
“저기 있네. 판다.”
현기가 가리키는 곳에는 모형으로 만들어놓은 판다 조형물이었다.
“사진이나 찍을래?”
“남자 둘이? 미쳤냐? 사람들이 보면 욕해.”
“뭐 어때, 이것도 기념인데 찍자 찍어.”
친절해 보이는 아주머니께 사진 좀 찍어달라고 부탁 한 뒤 대나무 숲에서 포즈를 취해보았다. 앞에는 아기자기한 판다 모형이 있었고 지나가던 여자들의 시선이 조금 따가웠지만 상관없었다. 남자들이라고 다정하게 사진 못 찍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나.
자 하나, 둘, 셋! 찰칵!
푸른빛으로 가득한 대나무들 사이로 한 줄기 햇볕이 새어 들어오니 아늑함과 함께 비밀스런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무더운 여름의 더위는 잠시나마 사라지고 답답하기만 한 가슴은 뻥 뚫렸다.
또 한 번 바람이 불었다. 스스스스.
“눈 감고 팔은 딱 벌리고 소리를 들어봐.”
“눈 감고 팔을 딱 벌리고? 소리를 들어?”
현욱은 현기의 말대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스스스스. 마치 대나무 잎 하나하나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렸다.
“비가 오는 것 같아.”
“그렇지! 시원한 초록비가 내리는 것 같지?”
“짜식. 초록비는 무슨, 배고프다 국수나 한 그릇 먹으러 가자.”
“낭만이라고는 국수처럼 말아먹고 온 자식. 같이 가!”
달려 나가는 현욱의 뒤로 현기는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대나무 소리와 바람 그리고 초록빛이 가득한 곳에 현욱의 모습이 담겨있다.
사진 제목은 초록비가 내리던 날.
부스스 바람이 떨려옵니다. 바람이 떨리니 비자나무숲도 함께 떨립니다. 살림이 가지런히 정리되어있고 마당에는 은행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져 손님들을 먼저 맞이합니다.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고택에서 마른기침 한번 나더니 새하얀 버선을 신은 고산 윤선도선생이 걸어 나왔습니다. 크게 한숨을 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몸종을 불러 앞 강가에 나가자고 말했습니다.
“바람이 잔잔히 부는구나. 고기를 잡을까. 그냥 낚싯대만 드리울까.”
한손에는 부채를 들고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봅니다. 숨 한번 쉬고 시조 한번 읊으며 한가로이 시상을 떠올리고 있었지요.
그 때 고산의 증손인 윤두서 선생이 멀찌감치 고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윤두서 선생은 윤선도 선생께 가볍게 인사를 올린 뒤 가만히 윤선도 선생이 시조를 읊는 것을 듣고 있었지요. 그러다 어렵게 말 한마디를 붙였습니다.
“한양의 소식은 이제 궁금하시지 않으신가봅니다.”
“그래. 이렇게 강과 바람과 흙과 함께하는 데 한양인들 벼슬인들 그 무엇이 이보다 더 좋겠느냐.”
“예. 저도 외조부를 따라 여기서 시를 짓고 자연과 벗 삼아 지내는 삶이 더 좋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윤두서 선생은 자리에 앉아 오늘 강가에서 바라본 갈대와 물결 그리고 바람의 존재를 알려주는 작은 꽃들의 움직임을 시로 표현하기 위해 짧게 그림을 그려놓았습니다.
윤두서 선생은 즐겨 쓰던 붓이 닳아 새로운 붓을 사기위해 화방에 들렀다가 우연히 중국의 한 화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순간 화책에 매료된 선생은 곧바로 화책을 사들고 집으로 왔지요.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림을 보는 순간 시조를 읊고 시를 완성해나가는 것만큼의 감동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윤두서 선생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바라본 강, 바람, 풍경들을 쉼 없이 그려나갔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는 줄도 모른 채 붓을 계속 휘둘렀지요.
날이 밝았으나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한 나머지 매일 문안인사를 드리는 시간을 놓쳐버렸습니다. 큰일이라도 난 줄 안 윤선도 선생이 윤두서 선생의 집에 찾아왔지요. 그런데 방안에는 수없이 그려놓은 그림들과 화선지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윤두서 선생은 조부인 윤선도 선생에게 어젯밤 있었던 일을 말했습니다.
“두서야.. 그렇게도 그림이 좋으냐.”
“예. 그림은 글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강한 인상을 주고 더 깊은 여운을 남기기에 좋습니다.”
“그래도 난 네가 나와 같은 길을 걸었으면 좋겠구나.”
할아버지 윤선도의 만류에도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은 윤두서 선생은 자연풍경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은 풍속화를 그리는 데 열심을 다했습니다. 비록 유배지에서의 생활이었지만 이로서 더욱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요.
윤두서 선생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본 윤선도 선생도 끝내 그 고집을 꺾을 순 없었습니다.
며칠 뒤 윤선도 선생과 윤두서 선생은 예전의 그 강가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윤선도 선생과 윤두서 선생은 각자 먹 그리고 화선지를 앞에 두고 말없이 붓을 들었습니다.
윤선도 선생은 해남의 물과 달, 바위와 소나무, 대나무의 덕성을 종이 한 장에 담았고 윤두서 선생은 화선지 한 장에 얇은 붓이지만 정확한 필치로 강하고 힘 있게 해남의 정경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내었습니다.
윤선도 선생의 한 장의 시조와 윤두서 선생의 한 장의 그림이 어우러져 초록비가 내리는 해남에 하얀 불꽃을 만들어냈습니다.
“까똑”
이른 아침부터 머리맡에서 경박한 소리가 울렸다. 부스스 일어나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단풍 보러 가자.’
시계를 살펴보니 새벽 여섯시. 간만에 월차내고 늦잠 좀 자려는데 감히 내 단잠을 깨워? 무시하고 자는 게 상책이다. 그래서 휴대폰을 발치에 던져놓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오 분도 채 되지 않아 사정없이 벨소리가 울리고…….
“야, 새벽부터 왜 이래? 나랑 절교하고 싶냐?”
그때 전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흑흑흑, 정아야. 나 백현이랑 헤어졌어. 알고 보니 딴 여자 있더라. 죽여 버릴까?”
세상에서 제일 거추장스러운 동물이 ‘결별한 인간’이라더니……. 황금 같은 휴가 첫 날, 나는 결별한 인간 때문에 아침부터 백암산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백양사까지 가야해? 그냥 덕수궁 이런데서 단풍 보면 안 되냐?”
내 질문에 희진이는 액셀러레이터를 지그시 밟으며 말했다.
“기분도 개판인데, 이왕 볼 거면 진풍경을 봐야지. 내가 백양사 단풍 싹 다 긁어모아다가 쌍계루 앞 연못에 뿌려버릴 거야. 이렇게라도 해야 속이 풀리겠어.”
그렇게 우리는 아침부터 정신없이 백양사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16번 국도를 달렸다.
사실 현진이는 이미 작년에 백현과 백양사에 와 본적이 있다고 한다. 사진 좀 찍는다는 남자들이 11월만 되면 단풍 찍으러 이곳에 몰려든다는데……. 백현은 현진이를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데려다 놓고, 자신은 이곳저곳에 렌즈를 들이밀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다고 한다.
“백현이 사진 찍는 동안 넌 뭐했어?” 라고 물으니, 현진이가 뒷좌석에 있는 쇼핑백을 가리켰다. 쇼핑백 안에는 단풍잎을 붙여 만든 압화 액자가 들어 있었다. 연못에 비친 쌍계루와 단풍나무를 표현한듯했다. 단풍 빛깔이 좀 죽긴 했지만 봐줄만했다. 하지만 백현이 내버려둔 사이, 혼자 압화를 만들었을 현진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현진아, 잘 만들었네! 단풍축제에선 이런 것도 하는구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진이 말했다.
“그거, 백양사 화장실에 버리고 올 거야.”
나는 백양사에 들어서자마자 할 말을 잃었다. 백양사 대웅전 뒤로 보이는 백암산이 절경이었다. 전체적으로 단풍이 붉게 타오르는 가운데, 이따금 보이는 노란빛, 푸른빛이 정말 다채롭고 아름다웠다. 백양사 단풍은 아기 손 마냥 크기가 작아 아기단풍이라 부른다던데, 작지만 새빨갛게 물든 단풍잎이 촘촘히 모여 있어 밀도가 상당했다. 그래서 더욱 붉게 보이는 게 아닐까?
현진이는 백양사에 도착하면서부터 말이 없어졌다. 어딘가 불안한 모습이었다. 압화가 든 쇼핑백을 든 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한참을 걸었다. 나는 천천히 구경하고 싶었지만, 현진이 걸음에 맞춰 걷다보니 구경할 새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현진이 걸음을 멈췄다. 현진이의 압화 그림에서 보던 쌍계루 연못 앞이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연못에 비친 쌍계루의 고즈넉한 모습과, 화려한 레이스처럼 쌍계루를 둘러싼 단풍들. 그리고 그 뒤에 물처럼 흐르는 백암산의 능선이 어우러져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수면에 비친 그 모습이 더더욱 몽환적이었다. 수면 위에 별처럼 떠오른 단풍과 연못에 비친 풍경이 겹쳐 이색적인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모네의 ‘수련 연못’ 그림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쌍계루의 모습을 찍기 보다는, 수면에 렌즈를 들이대고 있었다. 모두 뭐에 홀린 듯 집중한 모습이었다. 나 역시 카메라를 챙겨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연못에 휴대폰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었다.
한참이나 침묵으로 일관하던 현진이 입을 열었다.
“저 사람들 중에 백현씨 있는 것 같지 않아?”
현진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사진 찍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백현은 보이지 않았다. 현진의 착각이었다. 현진은 백현을 잊고 싶은 게 아니라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정아야. 나 작년에 왔을 땐 단풍 보이지도 않았어. 같이 오긴 했었어도 계속 나 혼자였고, 눈으로 계속 백현이를 쫓느라 단풍을 볼 여유가 없었거든. 그런데 오늘 너랑 와서 보니까 백양사 단풍이 예쁜 걸 이제야 알겠어.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같이 와줘서 고마워.”
나는 현진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뺏었다.
“야, 이거 버릴 거면 나 줘. 멋있으니까 내가 가질게. 구질한 추억, 내가 처리해 주지 뭐. 여기 화장실에 버리면 단풍들도 슬퍼하지 않겠냐? 우리 연못 한 바퀴 돌고 단풍빵 먹으러 가자.”
“현진아. 흑흑흑…….”
새벽부터 피곤하긴 했어도, 현진이 때문에 좋은 구경 했다. 그나저나 이 단풍 압화는 내 방 어디에 걸지? 원빈 포스터 하나를 떼야 하나? 거 참. 좋은 친구 노릇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