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가 간직한 천혜의 자연 이면에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숨겨진 이야기가 많다. 그 중 제주특별자치도 남서쪽 끝 서귀포에 위치한 모슬포에는 일제에 의해 군용 비행장이 구축되는 등 한의 정서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람이 유난히 많이 불어 마치 아리고 슬픈 역사를 알아봐 달라는 듯한 쓸쓸함이 서린 이곳 ‘알뜨르비행장’은 1937년 일제 치하에서 건립돼 등록문화재 39호로 지정되기 까지의 역사의 현장과 이후 설치된 미술작품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바람 많은 넓은 들판, 알뜨르
'아래 벌판'이라는 뜻의 제주 방언 ‘알뜨르’에 어울리지 않는 ‘비행장’이란 수식어. 비행장이란 명칭과 달리 눈 앞에 펼쳐진 드넓은 알뜨르의 배추밭, 감자밭 사이에는 듬성듬성 아치형 콘크리트 건축물뿐이었다. 외국에서나 볼 법한 몰락한 마을의 잔해처럼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격납고’는 이곳에 대한 생각을 의문투성이로 만들어 버린다.
알뜨르비행장이 있는 곳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대정읍 상모리 아래쪽 너른 벌판에 제주민을 동원해 건설한 군용 비행장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제주도는 일본과 중국, 필리핀과 한반도를 잇는 위치에 있어 한·중·일 3국의 지정학적, 군사적 요충지이다. 지금은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은 예나 지금이나 지리학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제주 곳곳에는 일제의 군사시설 흔적이 남아있다.
알뜨르비행장은 제주도의 북쪽, 지금의 제주국제공항으로 쓰이는 정뜨르비행장과 함께 대표적인 일제 군사시설로 알려져 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알뜨르비행장을 전초기지로 약 700km 떨어진 중국의 난징을 폭격하기 위해 해군 항공대의 많은 전투기를 출격시켰다. 일본에서 알뜨르로 날아온 비행기가 주유를 하면 상하이, 베이징, 난징까지 공습이 가능했으며, 이곳의 격납고는 주로 일본군의 결7호 작전에 동원된 카미카제 전투기 ‘제로센’을 숨길 용도로 조성됐다.
제주도민의 피와 땀, 강제동원의 역사
알뜨르비행장의 격납고는 1945년까지 38기가 지어졌다. 현재는 19기가 원형 그대로 보존, 1기는 잔재만 남아 있으며, 이중 10기는 2002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격납고는 단일 비행장 시설로는 일본 본토에서 가장 많은 격납고를 가진 모바라 항공기지(11기)와 비교해도 약 2배나 많은 것으로 알려져 일본이 제주도를 군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비행장의 규모는 1920년대에 처음 지어졌을 때 약 60만㎡ 였으나 1937년 중일 전면전으로 130㎡로 2배 이상 확대되었고, 이후 남북전쟁 당시 남한의 동맹군인 미 공군의 기지로 쓰이기도 했다.
격납고는 폭격에 견디기 위해 얼마나 단단하게 만들었는지 지금도 웬만한 중장비로도 끄떡하지 않는다. 알뜨르비행장에 격납고가 조성된 지 약 80년이 가까이 됐음에도 아직 건재한 이유는 당시 콘크리트와 자갈 등으로 매우 튼튼하게 지어졌고, 그 위에 나무와 풀을 심어 위장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격납고 안 천정이나 벽면 등에는 당시에 쓰인 거푸집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당시 제주도민은 거친 밭을 걷어내고 콘크리트를 지어 나르며 삶의 터전인 땅에서 강제 노역을 해야만 했다. 동원된 연령은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했다고 전해지며, 알뜨르비행장 건설로 인해 저근개, 골못, 광대원 등의 마을이 사라졌다고 한다.
상처를 보듬는 평화의 상징물
최근 이곳은 일본 전쟁의 광기와 관련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술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또한 ‘2017 제주 비엔날레’를 시작으로 제주의 아픔과 상처의 현장을 찾아 역사적 교훈을 얻는 여행인 ‘다크투어리즘’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알뜨르비행장의 역사는 예술가에게도 큰 영감을 주고 있다. 일제의 태평양전쟁 기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전투기인 제로센을 실물크기로 형상화 한 작품으로 박경훈·강문석이 제작한 ‘알뜨르의 제로센’과 이곳 주차장에서 볼 수 있는 ‘파랑새’ 등이 대표적이다. 최평곤의 작품인 파랑새는 쪼갠 대나무를 엮어 만든 9m 높이의 거대 조각으로 파랑새를 안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작가가 사용한 대나무는 동학농민군이 사용한 죽창에서 영감을 얻은 재료라고 하는데, 작가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만든 조각은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주변을 위협하지 않는다. 파랑새는 주변의 풍경과 바람을 들이고, 내보내면서 살아숨쉬는 듯 꼿꼿한 자세로 평화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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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 작품 옆에 위치한 작가 IVAAIU의 ‘커뮤니티 퍼니처’는 햇빛을 피해 쉴 수 있는 쉼터이자 주민이 소규모 작물을 재배, 수확, 저장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는 작품이다. 바로 옆 황금색 깃발이 무수히 펄럭이고 있는 조형물은 김해곤 작가의 ‘한 알’로 밀알의 탄생을 형상화 한 작품이다. 이는 전쟁의 상흔이 치유되고 이곳에 새로운 한 알의 생명이 잉태됨과 평화의 시작에 대한 메시지를 의미한다.
옛 상처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 알뜨르비행장. 착실히 살아가는 제주민의 삶의 현장이자 예술작품의 홑씨가 싹트는 치유의 현장에서 공감과 희망을 배워보는 것은 어떨까요?
글 트래블투데이 지역 주재기자 박희준
발행2018년 08월 29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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