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성과 같은 사대문과 객사, 동헌 등을 고루 갖춘 전라도의 대표 도시, 나주는 예로부터 ‘작은 한양’으로 불렸을 만큼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관찰사가 관할 구역을 수행할 때 업무를 보던 곳이자 중앙의 사신이 머무르던 곳인 ‘객사’의 역할이 더욱 크지 않았을까. 그래서 준비한 오늘의 여행지!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나주 금성관이다.
나주의 위엄을 보여주는 금성관
금성관은 나주시 과원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조선 성조 때 나주모가 이유인이 세운 관아로 일제강점기 때는 잠시 청사로 사용했으나 후에 원래 모습에 가깝도록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는 전라남도를 상징하는 유형문화재 제 2호로 지정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의 지붕은 여덟 팔(八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을 취하고 있다. 또한 목조건축 양식 중 가장 간결한 형식인 익공형의 구조를 취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내부는 모두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고, 우물마루를 깔았다. 공포구조가 마치 나주향교의 대성전과 비슷하여 조선 중기 나주지역의 건축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의의가 있다.
1
2
금성관에는 총 세 개의 문이 있다. 처음 금성관 안을 들어서기 전, 가장 바깥에 있는 외삼문을 기점으로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의 중삼문, 그리고 가장 안쪽에 있는 출입문인 내삼문을 말하는데 내삼문의 경우에는 문은 소실되어 없고, 현재는 터만 남은 상태이다. 그리고 금성관 뒤편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650여 년 된 오래된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있다니 참고해두자.
전남 지역에서도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 그 규모가 웅장하다는 점에서 더욱 눈여겨 볼만한 나주 객사, 금성관! 그래서 그런지 이 곳은 특별하게도 한 달에 두 번 정도 임금의 무사안녕을 위한 제를 올리던 곳이자 금성관 중심으로 좌우에 있는 동익헌과 서익헌에서 외국이나 중앙에서 출장 온 사신 혹은 관리들이 머물던 곳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으뜸 호텔 정도가 아니었을까. 뿐만 아니라 금성관은 역사적으로도 경외감을 표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던 곳이자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 명성황후의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드높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1
2
그래서 그런지 금성관 곳곳에는 화려하진 않지만 소담한, 그래서 더 전통적으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보인다. 이를테면 금성관 앞의 펼쳐진 길 아래 옹기종기 박힌 돌들이며 한쪽에 정갈하게 마련되어 있는 작은 우물 등 소소한 볼거리들이 가득해서 더욱 시선을 뗄 수 없게 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왜 이곳이 많은 사신들이나 관리들을 접대하고 편안히 묵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명쾌해질 것이다. 더불어 나주의 용맹한 기상을 우리 민족의 담대한 정신까지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더 아름다운 가치가 있다.
나주를 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객사 중의 객사, 웅장함 속의 소박함이 있는 나주 금성관으로 역사 여행 어떠신가요?
글 트래블투데이 심성자 취재기자
발행2022년 01월 26 일자
해당 콘텐츠에 대한 기여도 기사+사진 기사 사진 오류수정
참여한 트래블파트너가 없습니다.
참여한 주재기자가 없습니다.
참여한 파워리포터가 없습니다.
참여한 한줄리포터가 없습니다.
테마리스트 페이지 버튼 테마별 기사리스트 페이지로 이동
테마리스트 해당기사와 같은 테마기사 리스트
테마리스트 바로가기 버튼 테마별 리스트 정보제공
핫마크 콘텐츠에 대한 중요도 정보
콘텐츠호감도
콘텐츠들에 대한
트래블피플의 반응도
사용방법 안내버튼 설명 페이지 활성화
함께하는 트래블피플
트래블파트너, 슈퍼라이터,
파워리포터, 한줄리포터로 구성된 트래블피플
스크랩
마이페이지
스크랩 내역에 저장
해당기사에 대한 참여
추가정보나 사진제공,
오탈자 등 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