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치열했던 전장, 인천상륙작전기념관
한국전쟁에서 인민군에게 반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전투가 다부동 전투라면, 승기를 잡고 전황을 뒤바꾼 계기로는 인천상륙작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낙동강 전선에서 고착화되었던 전시상황에서 인민군의 보급로를 끊고 그 병력을 포위할 수 있도록 근거지를 마련한 작전이었다. 결코 상륙하기 쉽지 않았던 인천의 지형을 뛰어넘었던 연합군의 용기를 기리고 그 당시를 짐작해보게끔 만드는 전시관이 있다. 연수구에 위치한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다.
인천상륙작전. 성공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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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기념관으로 처음 들어가면 야외에 조성되어 있는 그 당시의 장비들이 사람들을 반긴다. 실제로 상륙작전 당시에 사용되고 했던 전투기며 정찰기, 탱크, 그리고 북한이 사용했던 고사기관총 등이 그 당시를 증언하는 듯 생생하다. 한편 인천을 탈환해낸 사람들을 형상화 한 자유수호의 탑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머물곤 하는 명소다. 이 외에도 현재 인천자유공원으로 조성된 응봉산의 기상대를 탈환한 뒤 환호하는 미 해병대의 모습과 같은 조형물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실상 이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하는 것이 당연한’ 작전은 아니었다. 낙동강을 저지선 삼아 싸우고 있었을 정도로 수세에 몰렸던 상황에 인천까지 육로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해로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천의 자연조건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조수간만의 차가 최소한 7m는 나는 만큼 한번 배가 상륙하면 밀물이 다시 들어오기 전까지는 항해를 나설 수도, 보급을 받을 수도 없었다. 또한 인천항은 이전부터 교역의 중심거점이었던 만큼 방파제나 축대와 같은 방어시설들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그나마 장점이 있다면 이러한 자연적 방벽을 이용하던 만큼 인민군이 그리 많이 주둔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인천을 차지해야 인민군의 후방을 포위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참모진들 사이에서는 성공 가능성이 1퍼센트도 없다고 평가되던 작전이 시작된 것은 전적으로 사령관인 맥아더의 추진에 달려있었다. 그런 만큼 작전이 성공했을 때 미쳤던 파급력도 컸다.
인천상륙작전, 계획부터 서울 수복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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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의 1 전시실로 들어가면 인천상륙작전이 제시되었던 계획서에 대해 볼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코드명이었던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는 사실 한국전쟁에서 처음 제시된 계획은 아니었다. 이미 1950년에도 북한군이 남침할 것을 가정했을 때에도 낙동강으로 후퇴해 전선을 안정화한 뒤, 인천 주변에서 서울로 진격한다는 작전이 제시된 바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을 실현하는데는 상륙지역으로 인천 외에는 방법이 없다던 맥아더의 강경함이 많이 반영되었다. 어려운 작전을 성공시킨 이들의 얼굴도 함께 볼 수 있다. 이 작전을 수행하는데 큰 의지를 보였던 맥아더 사령관을 비롯해 타국에서 위험한 전쟁을 수행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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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 전시관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이 어떤 진형으로 진행되었는지 디오라마를 통해 볼 수 있다. 9월 15일 200 척이 넘는 함정이 인천 앞바다 근처에 집결한 것을 시작으로 그 다음날 아침에 인천이 완전히 해방된 것이니 그야말로 1박 2일 사이에 서울을 수복할 수 있는 기반을 얻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생긴 여러 유물을 비롯해 이후 서울로 진격하는 과정까지 아울러 볼 수 있어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전까지의 상황을 접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그 이름만 들으면 한반도에서 일어난 국지적인 전쟁으로 들린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국을 비롯해 영국, 터키, 프랑스, 에티오피아 등 총 17개국이 참전한 대형 전쟁이었다. 여기에 의료서비스나 물자 등을 대한민국에 지원한 국가도 67개국에 달한다. 인천상륙작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미군과 한국군이 인천을 탈환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 UN군 사령관이 맥아더였을 뿐,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은 어려운 시절, 대한민국의 재기의 발판을 만들어준 세계 이웃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