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교육을 담당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던 장소뿐만 아니라, 성현들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던 서원. 선비들의 고결한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전국의 많은 서원 중에서 이 기사에서는 물계서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물계서원의 다양한 면모를 함께 알아보자.
조선 중기 이후 서원이 설립되다
서원은 학문을 연구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이면서, 동시에 지방의 자치운영기구의 기능도 담당했다. 주로 한적한 곳에 자리 잡아 학문을 갈고닦으며 후진 교육에 힘을 쏟았다. 현시대와 비교했을 때, 서원을 사립지방대학이라고 비유하는 경우도 있는 만큼 국립교육기관과는 반대의 경우로 존재하기도 했다.
서원은 국가에서 직접 관여할 필요 없이, 지방의 유림에 의해 사적으로 운영되던 곳이었다. 하지만, 서원이 지닌 교육 기능과 제사를 지내는 역할로 인하여 조정에서 서원의 명칭이 들어간 현판과 서적 · 노비 등을 하사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특권을 받은 국가공인 사원을 ‘사액서원’이라 칭했다.
초창기 서원은 지방관의 적극적인 도움을 통해 설립되었다. 지방의 유지를 중심으로 현물 조달체계를 갖춤으로써 안정적인 재정기반을 마련하였다. 사림계가 정치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원이 발전하게 되었다.
서원 중의 으뜸, 물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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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계서원은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에 있다. 1710년(숙종26) 창효사(彰孝祠)로 창건된 이후, 세덕사(世德祠)로 개칭되었다. 이후, 1729년(영조 5) 지역 유림의 건의로 인해 물계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역 유림의 학문과 덕을 드높이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지게 되면서 폐지되었다. 하지만 1989년 서원을 복원하여 1997에는 과거 영의정이었던 선비들을 모시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현재에는 매월 음력 2월, 춘향제를 지내며 일반인들에게도 개방하고 있다.
물계서원에서 원정비를 빼놓을 수 없다. 물계서원의 유래가 쓰여 있는 이 비석에는 제사를 모시는 배향 인물 19명의 내력도 함께 쓰여져 있다. 비석은 18세기 후기에 많이 보이는 형태를 띠고 있다. 비석에 남길 글을 작성한 조윤형(曺允亨)은 당시 글을 잘 쓰기로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이로 인해 원정비의 격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현재, 물계서원 원정비는 경남문화재자료 제3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원 탐방은 역사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갈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날씨 좋은 날, 서원에 가서 주위를 둘러보자. 우리의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질 것이다. 지금 조선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며 주변을 돌아본다면 색다른 기억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시대를 떠올리다 보면 빼놓을 수 없는 유적지가 아닐 수 없는데요. 조선 시대의 교육상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물계서원! 교육뿐만 아니라 지방의 자치기구의 역할도 수행했답니다. 언젠가 꼭 한 번 들러보시길 바랄게요.
글 트래블투데이 박선영 취재기자
발행2018년 03월 27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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