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시. 기세 좋고 아름다운 전경의 성주산의 자락에는 넓은 터가 있다. 이곳에는 석탑 네 개가 곧게 세워져 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네 개의 석탑일 뿐이지만, 절터가 머금고 있는 깊숙한 역사 이야기를 듣는다면 트래블피플의 눈에 거대한 무언가가 아른하게 비칠 수 있으니, 궁금하다면 충남 보령시 ‘성주사지’로 떠나보자.
남은 온기가 전해주는 성주사의 역사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넓은 터에 세워진 네 개의 석탑으로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 성주사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규모의 큰 절이었다면 믿겨지는가? 그만큼 많은 이야기가 숨 쉬고 있기 때문일까. 아직 그 온기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만 같다.
성주사의 역사는 백제 시대부터 시작된다. 616년, 백제 법왕의 명으로 인해 오합사(烏合寺)의 이름으로 절이 세워지게 된다. 이 절의 쓰임은 삼국전쟁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호국 사찰이었다. 하지만 백제의 멸망과 함께 오합사도 폐사가 되고 만다. 여기에 놀라운 전설이 하나 숨겨져 있는데, 백제의 멸망 직전, 적마(赤馬)가 밤낮으로 절을 돌아다니며 멸망을 예시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신라 시대 문성왕 때, 무염국사(낭혜화상)가 당나라에서 귀국하며 이 절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비로소 이 절은 다시 활기를 띠며 왕으로부터 ‘성주사’라는 이름을 새로 받게 된다. ‘승암산 성주사 사적’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성주사는 전체 1,000여 칸에 이를 만큼 거대한 규모에, 이곳에서 도를 닦던 수도승의 수는 2,500명가량이라고 한다. 절에서 쌀을 씻은 물이 성주천을 뽀얗게 물들였다는 말이 있으니 그 규모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정도일 것이다.
이렇게 번창했던 성주사는 임진왜란을 겪고 쇠퇴하기 시작해서 17세기 말, 결국 역사 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하지만 1960년부터 기와나 비석의 파편들이 발견되기 시작하며 성주사의 이야기는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남아 있는 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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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에 들어가면 오 층 석탑과 일렬로 늘어선 3개의 삼 층 석탑이 눈에 띌 것이다. 이 석탑들은 전형적인 통일 신라 말기의 양식을 띠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맨 앞 보물 19호인 성주사지 오층 석탑의 뒤로 터를 가로질러 걸으면 삼층 석탑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데 이 기세가 남다른 이유는 성주사 뒷산의 약한 산세를 대신하여 세워 놓았기 때문일까. 성주산의 기운에 견줄만한 삼층석탑의 기운을 느껴보자.
한쪽에는 큰 비각이 보일 것이다. 트래블피플도 잘 알고 있을 ‘고운 최치원’이 성주산문을 중창한 ‘낭혜화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산비문이다. 이 비석의 내용에는 낭혜화상의 업적과 성주사를 일으킨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 ‘낭혜화상탑비’는 훼손이 거의 되지 않은 깨끗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성주사의 역사를 지키려는 듯이. 이 탑비는 통일신라 말기의 고승 탑비 중 최고로 여겨지고 있다.
이처럼 깊은 성주사의 옛이야기를 알고 본다면 지금은 텅 비어 있는 절터일 뿐이지만, 아른하게 성주사의 모습이 눈에 스칠 것이다. 한때 2,500여 명의 승려들이 수도했다고 전해질만큼 거대한 그 모습 그대로.
비어있는 절터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보령 성주사지’. 이곳에 아직 남겨진 온기가 전해주는 그때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글 트래블투데이 편집국
발행2018년 03월 25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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