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판단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떤 기준과 관념을 갖느냐에 따라 분명 차이가 있기 때문. 그렇다면, ‘무덤’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은 어떠할까. 대개의 사람이 그렇듯 ‘무덤’ 하면 무언가 으스스하고 꺼려지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 달리 해보면 죽음의 이미지라 여겨지는 무덤도, 새로움이 가득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가야의 역사를 알려준다는 의미에서 여기, 경남 창녕 일대에 넓게 펼쳐진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는 새로움이 가득하다.
비화가야의 옛 터전,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밀양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창녕으로 가다 보면 어느새 도로 양옆으로 펼쳐진 고분군들을 만날 수 있다. 이는 바로, 경남 창녕군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이다. 원래 두 고분은 별개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두 고분의 역사적 유사성을 고려해 하나로 통합하여 지금은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이라 칭하고 있다. 모두 일제강점기 때의 도굴과 논으로 개간됨에 따라 대군집 형태였던 창녕의 고분군 일대는 남아있는 무덤이 그리 많지 않다. 송현동 고분군에 16기, 교동 고분군에는 8기 정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가야는 김해의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령의 대가야, 상주 함창의 고령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성의 소가야, 창녕의 비화가야로 나뉘어진다. 그중 비화가야의 옛 터전이라 볼 수 있는 고분군이 바로, 창녕의 교동 고분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고분군 일대가 갖는 의미는 대단하다. 비화가야가 단순히 이름뿐이 아니라 실제 가야에 속한 국가였다는 점. 단지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이 점 말고는 그 외의 문헌 기록이나 근거 중에는 비화가야에 대한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간직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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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에서 1919년, 일본에 의해 창녕 일대 고분군이 발굴조사 되어 유물 대부분이 일본으로 넘어간 아픈 역사가 있는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현재는 유물의 일부만 국내에 전하고 있어 그 안타까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1911년 한 일본인 학자에 의해 처음 알려진 이곳은 당시 조사를 통해 화차 2대가 실을 수 있을 만큼의 많은 토기와 각종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중 대부분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일부는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었으나 아직도 남아있는 많은 유물들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다.
고분군 뒤편으로 이어진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신라의 전성기를 이룩한 진흥왕 행차길이 펼쳐진다. 당시 진흥왕의 역사와 업적을 되새기며 돌아볼 수 있는 일종의 탐방로이다. 또, 송현동 고분군 중에서도 가장 큰 무덤이었던 15호분 무덤 안에는 주인을 끝까지 섬기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했던 16살의 소녀의 유골을 발견하였다. 이를 통해 가야에는 산 사람을 부장품과 함께 묻는 ‘순장’이라는 장례풍습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창녕이 가진 가야와 신라의 전통을 엿볼 수 있다.
고분이 이루어내는 곡선의 아름다움과 그 곡선과 맞닿아 있는 하늘의 조화가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아름답게 느껴진다. 만약, 이곳만 둘러보기 아쉽다면 우포늪이나 창녕박물관, 창녕5일장 등 주변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도 추천한다.
찬란한 가야문화가 꽃피웠던, 비화가야의 터전으로 알려진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이곳에 담긴 의미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창녕으로 떠나보아요!
글 트래블투데이 서덕아 취재기자
발행2016년 02월 09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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