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이 익어가는 계절이면 초야는 온통 갈색으로 물든다. 갈색은 진한 그리움이나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색인데 아마도 그건 고택의 빛바랜 고동색을 닮아서가 아닐까. 어린 시절 뜨뜻한 아랫목에 앉아 할머니가 내어주신 군고구마와 시원한 동치미가 그리워 옛 동네를 찾는 꿈을 꾸곤 하지만 대체로 꿈은 꿈에서 끝나기 마련이다. 오래된 흑백사진을 바라보면 어쩐지 흑색보다는 갈색 빛을 띄는 이유도 세월이 흘러서일 것이다. 그러므로 고택을 찾아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절실한 현대인들이 늘어나는 것이리라.
소싸움의 격렬한 몸짓과 성난 콧바람을 뒤로 하고 고즈넉한 여러 고택들이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있는 919번 국도를 타고 내려오면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위치한 선암서원이 나온다. 솔향 짙게 풍기는 곳에 자리한 선암서원은 마치 대감집 문 앞에 서있는 듯 근사한 풍경을 내비친다. 청도 시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만난 풍경은 나무와 흙 그리고 가옥들이 어우러져 색다른 풍경을 만들고 제멋대로 가지를 친 나무들이 대문앞에 그늘을 만들어 전통과 마주하고 있음을 실감나게 한다. 선암서원 전통 고택숙박체험관이라는 나무 푯말을 지나 대문앞에 서면 줄곧 선암서원을 지키고 있는 박향숙 씨가 밝은 웃음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매번 다른 관광객에게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선암서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녀이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선암서원을 소개한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된 선암서원은 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박하담을 배향하던 곳으로 원래는 매전면 동산리에 운수정을 세우고 두 분을 향사하였으나 1577년 황응규의 주선으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이후 중건하며 선암서당으로 바뀌었다 현재는 선암서원으로 불리고 있다. 선암서원은 대문채, 안채, 사랑채와 행랑채, 소요당, 장판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림집과 사랑채, 별당의 각각의 구분된 공간이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서원 곳곳의 아름다운 건물 중에서도 특히 천장에 눈이 가는 이유는 따로 있다. 다른 서원에 비해 선암서원은 화려한 멋이 가미된 천장이 아름답다. 물고기가 박혀있는 천장은 항상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학업에 임하라는 뜻이라 한다. 서원 곳곳 천장을 보면 예술성이 돋보이는 다포식공포로 이루어져 있어 대청마루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예술성과 감수성이 한껏 돋아 오른다. 한옥의 단조롭고 질서 있으며 화려한 예술성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안채와 득월정, 행랑채가 'ㄷ'자 형으로 마당을 메우고 있다. 안채와 득월정 앞에는 낮은 토담을 놓아 사랑채와 안채를 독립된 공간으로 분리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고택 어디에나 그렇듯 안채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세심함이 돋보이는 구조다. 안채와 사랑채인 득월정만 바라보았는데도 마당을 중심으로 한 건물들에게서 풍기는 질서가 어지러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중사랑채 너머 선암서당이 위치해 있는데 강당 역할을 하는 소요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소요당'이라는 현판의 뜻은 박하담의 호를 따 그를 기리는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퇴칸에 방 한 칸씩이 마련되어 있는데 방의 기둥이 고주가 아닌 평주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소요당으로 들어서는 길은 중사랑채를 지나쳐 오거나 담장 옆으로 난 쪽문을 이용할 수 있다. 소요당 뒤편으로 난 장판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배자 예부 운락 판목'과 지방문화재 '해동 속소 한팍목'과 '14의 사록판목'등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문화재의 중요가치 보존으로 현재는 안동 한국진흥원에서 보관하고 있어 빈 공기만 문화재가 있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소요당 정면으로 난 문으로 발을 내딛으면 바로 동창천으로 이어진다. 소나무가 드리워진 강의 경치는 고택의 멋으로 가득 찼던 시선을 잠시나마 분산시킨다. 소요대를 따라 나간 문밖에는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14의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이에 얽힌 이야기까지 듣다보면 어느새 하루가 저물어간다.
선암서원에서 숙박체험이 가능한 공간은 안채와 득월정, 중사랑채 두 곳이다. 4인, 2인 기준의 잠자리가 나뉘어져 있으며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도 즐길 수 있다. 우리의 전통 예절과 향을 익힐 수 있는 전통 다도와 다식 만들기 체험과 계절별 전통음식 만들기, 양파와 황토, 소목 등으로 고택과 어울리는 손수건과 스카프 등을 만드는 천연 염색체험, 우리 고유의 문향과 색으로 전통에 한발 더 다가서는 한지공예 등의 우리의 것이라는 정겹고 푸근한 체험활동을 즐길 수 있다.
고택체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별미 중 하나는 아침상이다. 별도 요금을 지불해야 맛볼 수 있는 아침상은 모두 텃밭에서 직접 기른 재료들로 상을 내어온다. 갖은 채소반찬과 생선, 달걀프라이와 찌개는 소박하지만 정갈하고 단정하다. 조미료를 쓰지 않고 직접 기른 재료로 만든 음식에 정성이 더해져 한상 가득 깊은 풍미가 감돈다. 선현들의 마음과 숨결이 짙게 깔린 공간 곳곳에 숨겨진 아름다움 넓게 펼쳐진 대청마루에 누워 사람들이 남기고 간 훈기 가득한 바람을 마음과 코에 힘껏 담아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한 갈색을 띤 고택으로의 여행의 진가가 아닐까.
*주변관광지
와인터널
청도의 특산품 반시를 이용하여 만든 와인으로 열차터널을 만들어 지방 특색이 가득한 카페로서 색다른 즐거움을 제공하고 있다. 15만병이 넘는 와인을 저장하고 있는 와인터널은 평균 습도를 유지하여 감 와인을 숙성하고 있으며 데이트 코스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운문사
보물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 등이 보존되어 있는 운문사는 진흥왕 21년에 창건된 사찰로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동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일부가 불에 타 훼손되었으며 현재는 대웅보전과 작압전, 미륵전, 오백나한전, 금법당, 만세루 등이 남아 있다.
영담한지미술관
운문사 가는 길목에 위치한 영담한지미술관은 한지로 만든 다양한 작품 2천 여 점과 독특한 질감의 한지도 만나 볼 수 있다. 닥종이로 만든 인형 모형은 우리나라 세시풍속의 모습을 담고 있어 친근한 느낌이 든다.
깊은 역사 속에서 만끽하는 휴식, 선암고택에서라면 실컷 누려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요~
글 트래블투데이 편집국
발행2016년 02월 20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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