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정읍이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라면, 고창은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이다. 1894년 3월 무장에 모인 4천여 명의 농민군은 동학농민혁명의 최초 봉기선언문인 창의문을 발표한다. 고부 군수의 횡포에 항거하며 시작된 작은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후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중항쟁으로 기록된다. 지금도 고창군 곳곳에는 동학농민혁명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공간들이 남아 있다.
동학농민군의 역사적인 무장읍성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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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에 남아 있는 동학농민군 진격로.2
동학농민군이 점령했던 무장읍성은 대부분 흙으로 덮어 만든 토성의 형태를 띠고 있다.무장읍성은 현존하는 읍성 중 드물게 축조 연대가 명확하게 밝혀진 읍성으로, 학술적․역사적으로 그 가치가 큰 문화재다. 무장읍성이 세워진 것은 태종 17년인 1417년의 일.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이 일대는 각각 무송과 장사라는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왜적의 침입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두 고을을 합치고 읍성과 관아를 세우게 됐다. ‘무장’이라는 이름은 본래 이 곳에 있었던 두 고을의 앞 자를 따 붙인 것이다. 무장읍성은 대부분 흙으로 만들어진 토성의 형태를 띠고 있다. 진무루 주변만 석축 성곽 형태다. 성의 총 둘레는 약 1.4km이며, 현재 사적 제346호로 지정돼 있다. 무장읍성 주변에는 아직도 조선시대 때 세워진 객사와 동헌이 자리 잡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축조 당시 2만여 명의 인력이 동원될 만큼 규모가 큰 공사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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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읍성과 관아 주변 전경. 옛 건축물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이처럼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만큼, 무장읍성에는 지역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온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이야기다. 조선 말, 고부 군수의 횡포에 항거하며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정읍에서 고창으로 확대된다. 정읍이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었다면, 고창은 동학농민혁명이 크게 확대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소다. 정읍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고창으로 남하한 동학농민군은 무장읍성에 입성한다. 이들은 곧바로 억울하게 갇혀 있는 동학교인을 석방시켰고, 이곳에서 사흘 간 머무르며 전열을 재정비했다고 한다.
전봉준 장군이 태어난 고장
복원된 전봉준 장군의 생가 전경. 소박하지만 우직한 기품이 서려 있다.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전봉준 장군은 고창의 당촌 마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행정구역 상 현재 고창읍 죽림리 일대다. 고을의 서당 훈장의 아들로 태어난 전봉준은 이곳에서 열세 살 무렵까지 살았다고 전한다. 본래 서당과 안채, 사랑채 등이 있었으나 동학농민혁명을 거치며 모두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초가 형태의 생가는 새롭게 복원된 것인데, 다른 지역에 세워진 위인들의 생가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다. 소박한 듯 정갈하게 서 있는 초가 옆에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로 시작하는 민요의 가사가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다. 전봉준 장군은 동학농민혁명의 핵심인물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뒤, 교수형에 처해 안타깝게 운명을 달리 하고 말았다.
전북 고창에는 동학농민혁명의 기포지인 무장기포지 유적지, 무장읍성, 전봉준 생가 등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다양한 명소들이 자리 잡고 있답니다.
글 트래블투데이 박선영 취재기자
발행2020년 04월 29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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