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1515년)의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1491년 윤여필의 딸로 태어났다. 본래 중종에게는 원비(元妃)인 단경왕후(端敬王后)가 있었는데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이 중종반정 때 연산군의 편에 서서 반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성희안(成希顔) 등 반정을 추진했던 인물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함께 폐위(廢位)되었다. 중종은 단경왕후를 폐위할 마음이 없었으나 반정추진파의 목소리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결국, 폐위된 단경왕후에 이어 궁에 들어온 장경왕후였지만 그녀는 1515년 세자(인종)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 역시 왕실의 삶을 누릴 운명은 아니었나보다.
중종의 원자를 낳고 세상을 떠나다
중종의 여인이 되면 단명(短命)할 팔자를 물려받는 것일까. 단경왕후에 이어 장경왕후 또한 제대로 된 왕실의 삶은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렇다 보니 그녀가 궁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에 대한 기록이나 일화는 별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실록과 그녀의 지문(誌文)을 통해서나마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좌의정 정광필이 백관을 거느리고 근정전(勤政殿) 뜰에서 진하(陳賀)하고 전(箋)을 올리기를, “이에 그 달이 차서 거룩한 모습이 탄생하시니, 하늘의 복록을 받은 것이며 국가의 큰 경사입니다. 주상전하께서 성신 문무(聖神文武)하시니, 천년의 좋은 운수 받아 큰 이름 무궁토록 밝히소서. 한번 구하여 아들을 얻으시니 아름다운 후사 결함 없이 세웠습니다. 진숙(震夙)의 날5489) 을 당하여 다시 태운(泰運)이 오는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신 등이 외람되게 용렬한 자질(資質)로 요행히도 성대(聖代)를 만나, 본지 백세(本支百世)의 주아(周雅) 시를 화답하려 하옵고, 수복 구주(壽福九疇)했던 화봉(華封)의 축원이 간절합니다.”
이어 사(赦)를 반포하였는데 그 사문(赦文)은 이러하다. “왕은 말하노라.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계승함에는 반드시 제사 주관함을 중히 여기고, 본지(本支)를 번성하게 하는 경사에는 아들 얻음보다 큼이 없다. 보잘것없는 나 후손(後孫)이 외람되게 대위(大位)를 지킨 지 10년이나 되었는데, 웅몽(熊夢)의 상서를 얻지 못하고 연익(燕翼) 의 부탁이 없었다. 사속(嗣續)의 중함을 생각하고 항상 근심하여 마음 편하지 못하였는데, 금년 2월 25일에 정비(正妃) 윤씨(尹氏)가 원자(元子)를 낳았으니, 아래로 신민(臣民)의 바람에 관계될 뿐 아니라 실지로는 종사(宗社)의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니, 어찌 나 한 사람의 경사가 될 뿐이랴! 너희들 만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 하여야 하겠다. 아, 만대의 계획을 굳건히 함이 지금으로부터 시작되니, 사방의 때 묻은 것을 깨끗이 씻고 다 함께 유신에 참여할지어다.” <중종실록 21권, 10년(1515년 2월 26일)>
장경왕후가 원자(인종)를 낳았을 때 정광필이 진하(進賀)한 내용이다. 오랫동안 후사가 없었던 왕실에 큰 웃음꽃이 피었음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장경왕후의 몸이 심상치 않았다. 전교하기를, “중궁(中宮)의 병세가 위급하여 궁외에 피병(避病)하려 하는데, 이어(移御)함이 어떠한가?” 하니, 정원(政院)이 아뢰기를, “이것은 다른 증세가 아니라 산후(産後)에 발생한 것이니, 이어함이 불가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중종실록 21권, 10년(1515년 3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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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장경왕후는 3월 2일 새벽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안타까운 순간이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운 사연은 그녀의 행적을 기록한 지문(誌文)에 절절히 적혀있다. 직제학(直提學) 김안로가 지은 지문의 일부 내용을 천천히 살펴보며 그녀의 안타까움 죽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고자 한다.
바야흐로 큰 복지(福祉)가 흐르는데, 백약이 효험이 없어, 3월 초2일에 경복궁 동궁 별전에서 별세하시니, 상이 애통해하시며 특별히 백의(白衣) 소찬(素饌)을 하기까지 하였다. 탄식하여 이르기를 ‘기쁨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닌데 슬픔이 또 미치었다. 경사가 있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어찌 이렇게 빨리 닥쳐왔는가? 사생이 천명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빨리 나의 어진 내조를 빼앗는가! 슬픔을 참지 못하겠다.’ 하며, 승정원에게 전교하기를 ‘일찍 어진 내조를 잃고 정신이 희미하고 마음이 어지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장례에 대한 일을 품하는 것 외에는 아직 여러 가지 계(啓)함을 정지하라.’ 하니, 안으로 궁액(宮掖)에서부터 밖으로 백료(百僚), 서민에 이르기까지 호곡 애통해하기를 그 어머니를 여읜 것같이 하였다. (중략)
후는 총혜자유(聰慧慈柔)한 천성을 타고났고, 인효(仁孝)와 더불어 살고, 예순(禮順)과 함께 자라났다. 집에 있을 때에는 순여(純如)하였고, 나라에서는 목여(穆如)하였다. 덕스러운 품행은 지임(摯壬)이 하늘로부터 명이 있은 것과 같고, 주(周)나라의 사업을 회복함에는 강후(姜后)가 귀고리를 벗은 도움이 있은 것과 같다. 이미 덕에 후하고 또 공경함을 독실히 하여 성상의 중흥 정치의 복조를 협찬하시니, 거의 사람의 하는 일이 아닌데도 시보(施報)할 것을 아끼어 세상에 계신 지 겨우 춘추 25세에 돌아가셨으니 이것이 무슨 이치인가? 그것이 천명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겠다. 천명이 이렇게도 가혹하고 잔인한가! 아, 애통하도다!“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희릉(禧陵)은 제25대 철종의 예릉과 문효세자의 효창원 등 많은 후궁 및 왕자, 공주의 묘와 함께 서삼릉 경내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인종의 효릉과 같은 경내에 있다고 보기엔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가 효릉은 자율 관람도 쉽지가 않으니 서삼릉이라고 부르기엔 무언가 어색하다. 일제강점기의 영향과 산업화 시절 각종 이권이 개입되어 주변은 소들이 풀 뜯고, 말들이 뛰노는 곳으로 변하니 희릉에 잠든 장경왕후의 사연만큼이나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실 희릉은 본래 헌릉(獻陵, 현 서울 서초)의 서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희릉이 지금의 자리로 오게 된 것은 중종의 부마인 김안로 때문이다. 그는 세자(인종)을 보호할 목적으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희릉 천릉사건’이다. 희릉에 돌이 많고 물이 고인다는 이유를 들며 천릉(遷陵)을 주장하면서 희릉을 조영하는데 관여했던 정적을 처벌한 것이다. 한 나라의 왕비의 능을 조영하는데 그 자리에 돌이 많은지 물이 고이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조영했을 리가 만무하다. 지극히 김안로의 정치적 욕심이 드러난 것이라 볼 수 있다. 희릉의 모습은 비교적 평범하다. 단릉의 형태로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두른 모습이다. 전체적인 규모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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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트래블투데이 편집국
발행2015년 07월 17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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