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20대 임금인 경종의 첫째 부인이었던 단의왕후 심씨(端懿王后, 1686~1718년)는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딸로 1686년(병인년)에 태어났다.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1688년 10월 경종이 태어났으니 단의왕후가 경종보다 2살 더 많다. 11살 때 세자빈의 자리에 오른 단의왕후는 자신보다 어린 경종을 극진히 보필했다고 한다. 어머니와는 달리 심성이 착했던 경종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서인들의 당파싸움에서 실증을 느끼고, 심한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숙종의 계비)가 죽자 숙빈 최씨는 장희빈이 자신의 거처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했기 때문이라고 밀고를 하면서 결국 장희빈은 사약을 받고 죽는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심신이 약해진 어린 경종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단의왕후뿐 이었을 것이다.
살아서는 왕비가 되지 못한 여인
단의왕후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총명했으며 특히 효성이 지극했다고 전해진다. 간택을 받았을 때 부모의 곁을 떠난다는 것에 몹시 슬퍼하며 하루 종일 눈물을 흘렸으며 3세 때 할머니를 공양함에 있어 정성과 효도가 돈독하고 지극했다고 한다. 타고난 총명함으로 첫 돌이 지나기도 전에 말을 했다는 기록은 과장(誇張)여부를 떠나 그녀가 얼마나 슬기로웠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세자빈 시절 문약한 경종을 정성을 다해 보필했던 단의왕후는 안타깝게도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경종(재위1720~1724년)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1718년 그녀는 병으로 3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숙종 또한 세자빈의 죽음에 매우 애통해했으며, 경종은 그 슬픔에 한없이 통곡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매우 안타까운 죽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단의’라 시호 역시 숙종이 내린 것으로 그녀의 죽음이 절대 가볍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경종은 즉위 후 ‘단의 빈’에서 ‘단의왕후’로 추봉하고 능호 역시 혜릉으로 고친다.
경종과 단의왕후 사이에는 원자(元子, 아직 왕세자에 책봉되지 아니한 임금의 맏아들) 또한 생산하지 못하고 떠난 터라 사실 그녀에 대한 그녀의 후사나 다른 기록에 대해 남겨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그녀가 경종을 극진히 보필했고 숙종 또한 세자빈의 정성을 높게 평가한 시책문(제왕이나 후비의 시호를 임금께 아뢸 때, 그 생전의 덕행을 칭송하여 지은 글)이 있어 소개한다.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신임(申銋)을 보내어 세자빈(世子嬪)에게 시책(諡冊)을 내렸는데, 시책문에 이르기를, “동궁[承華]이 내조(內助)의 상을 당하니 애도하는 마음 바야흐로 간절하고, 절혜(節惠)의 은전은 옛날부터 있었던 떳떳한 전장(典章)이니 의당 속히 표창하여 드러내야 한다. 이에 시책(諡冊)을 드러내는 일을 거행하여 아름다운 칭호(稱號)를 내린다. 생각건대 그대 세자빈은 타고난 성품이 아름다워 일찍이 세자의 빈(嬪)이 되었다. 일문(一門)에서 양후(兩后)의 성대한 덕을 이어받으니 휘음(徽音)을 잘 계승하였고, 큰 혼인[大婚]은 만복의 근원이니 진실로 아름다운 부인[佳婦]에 걸맞도다. 궁궐에 들어온 이후로부터 더욱 예절을 따르는 데 어김이 없음을 알았다. 가정에서 어버이를 섬기던 정성을 미루어 삼가 양전(兩殿)을 봉양하였고, 군자(君子)가 처음 시작할 때 조심하는 뜻을 몸 받아 삼가 한 몸을 신칙하였다. 덕행을 숨기고 바깥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았으나 아름다운 행동이 저절로 평상시에 드러났다. 자화(慈化)를 도와서 숙옹(肅雍)의 아름다움에 이르게 했고, 음교(陰敎)를 도와서 절검(節儉)하는 기풍을 밝혔도다. 효도는 어버이의 안색을 살피는 데 돈독하니 사랑이 용색(容色)에 나타났고, 시탕(侍湯)하면서 깊이 근심하니 정성이 또한 궁정(宮庭)에 미더웠도다. 중한 병을 여러 해동안 앓았으나 주야로 조심하여 해이한 적이 없었다. 은혜가 아래에까지 미쳤으나 아직 사알(私謁)을 행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아름다운 덕이 마음속에 있으니 어찌 내전(內殿)을 바르게 다스리기가 어려웠겠는가? 종사(宗事)를 훌륭하게 돕기를 바라고 복리(福履)를 끝까지 누리기를 기대하였더니, 어찌 상천(上天)은 믿기가 어려운 것이어서 갑자기 숙질(淑質)18714) 이 서거(逝去)할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루 저녁 창황한 가운데 유명(幽明)을 달리하여 세 번 이름 불러 초혼[皐復]하니 마치 꿈속인 것처럼 아련하도다. 목숨이 길고 짧은 것은 운수가 정해져 있는 것이니, 어찌 의원의 기술이 좋지 아니한 탓이겠는가? 빈렴(殯斂)하는 데에 친림(親臨)하지 못하니, 더욱 병든 마음의 아픔을 억제하기 어려움을 깨닫도다. 더구나 종사(螽斯)의 경사(慶事)18715)를 거두기를 바랐으니, 동궁[鶴禁]이 그 슬픔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목숨을 맡은 권한을 누가 주관하는가? 선한 사람에게 복주는 이치를 헤아리기가 어렵도다. 아침저녁으로 침전에 문안하는 번화하고 성대한 의절(儀節)을 다신 보지 못하겠는데, 시일이 정해졌으므로 어언 광중[窀穸]에 하관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진실로 역명(易名)18716) 하여 사실을 기록하지 아니한다면 어찌 유택(幽宅)을 꾸미고 방명(芳名)을 전할 수 있겠는가? 행실을 말한다면 예의(禮義)로 스스로를 부지했고 덕을 말한다면 온유(溫柔)함을 근본으로 삼았다. 이에 의정부 우참찬 신임을 보내어 그대의 시호(諡號)를 ‘단의(端懿)’라고 내리노라. 아아! 비록 의형(儀形)은 이미 없어져 천경(泉扃)에까지 따라갈 수 없지만 징거할 수 있는 행적은 길이 간책(簡策)에 남으리로다. 정령(精靈)이 앎이 있거든 총명(寵命)을 흠향하도록 하라. 아아! 슬프도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잘 알지어다.” 하였다.
<숙종실록 61권, 44년 (1718년 4월 10일)에서 발췌>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세자빈의 대우에 따라 원의 규모로 조성된 능이기 때문일까. 혜릉(惠陵)은 동구릉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다. 아마 전체 조선왕릉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작은 축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비교적 낮은 언덕과 좁은 형태로 구성된 능역으로 혜릉의 초입에 들어서면 아담하다는 느낌이 가장 먼저 든다.
안타깝게도 혜릉은 한국전쟁 때 집중포화를 받아 홍살문과 정자각이 모두 불타고 주춧돌만 남아있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1995년에 새로 복원한 모습이다. 왕릉을 관리와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머물렀던 수복방은 아직도 그 흔적만 남아있으며 그 자리에 위태롭게 기울어진 소나무는 아직도 전쟁의 흉터가 가시지 않은 듯한 혜릉의 모습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한국전쟁 때 함께 없어진 것일까? 봉분에 다가서니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드는데 장명등이 보이지 않는다. 한국전쟁 때 함께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원래 장명등을 세우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조선왕릉에는 버티고 서 있는 장명등이 보이질 않는다. 여러모로 슬픈 혜릉이다.
그 규모는 작지만 능에 잠들어 있는 이야기는 결코 작은 것 같지 않은데요? 혜릉 또한 찬찬히 둘러보아야 할 조선왕릉 중 하나!
글 트래블투데이 편집국
발행2015년 07월 17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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