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中宗, 1488~1544년)은 세조, 인조와 함께 반정(反正). 이른바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중종반정이 일어나던 시점의 조선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 4년)와 갑자사화(1504년, 연산군 10년)를 통해 왕권과 신권의 조화는 깨졌고, 왕의 일탈은 점점 심해졌다. 임금과 신하가 함께 학문과 기술을 연마하는 경연은 아예 폐지되었으며,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인해 국정운영은 이미 파탄이 난 지 오래였다. 결국, 박원종과 성희안 등 훈구세력은 미친 군주를 몰아내기 위해 입을 모으기 시작했고, 연산군을 대신할 새로운 인물은 그의 이복동생 진성대군(晉城大君) 중종이었다.
중종반정, 이상을 좇는 임금
거사를 치르기 하루 전, 성희안과 박원종, 유순정 등은 건장한 무사와 장수들을 모으고 때를 엿보고 있었다. 거사의 소문을 듣고 영의정 유순과 우의정 김수동 등이 명망이 높았던 대신들까지 합류하자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의 사유를 전달한 후 군사로 호위하였다. 진성대군의 생모인 대비 윤씨(정현왕후, 성종의 계비)의 허락까지 받아내자 거사는 시작되었다. 반정 세력은 신수근, 신수영, 임사홍 등 연산군의 측근을 제거하고 단숨에 궁궐을 장악했다. 반정 세력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중종은 갑작스러운 왕위에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새로운 왕도정치에 대한 포부를 밝힌다.
“덕이 없는 내가 종실의 우두머리 자리에 있으면서, 오직 겸손하게 몸을 단속하여 삼가 종저(宗邸)를 지킬 뿐이었다. 근년에 임금이 그 도리를 잃어 형정(刑政)이 번거롭고 가혹해졌으며 민심이 궁축(窮蹙)하여도 구제할 바를 알지 못하였는데, 다행히도 종척(宗戚)과 문무의 신료들이 종사와 백성들에 대한 중책을 생각하여 대비의 분부를 받들고 같은 말로 추대해서 나에게 즉위할 것을 권하므로, 사양하여도 되지 않아 금월 초2일에 경복궁에 대위에 나아갔노라. 경사가 종방(宗祊)에 관계되어 마땅히 관전(寬典)을 반포하여야 할 것이다. 금월 초2일 새벽 이전까지의 모반 대역(謀叛大逆)과 고독(蠱毒) ·염매(魘魅)와 고의로 사람을 죽이려고 모의했거나 죽인 죄, 처첩(妻妾)으로서 남편을 죽였거나 노비로서 주인을 모살(謀殺)했거나 자손으로서 부모·조부모를 모살했거나 현행 강도이거나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도류(徒流)·부처(付處)되었거나 충군(充軍)·정속(定屬)·안치(安置)되었거나 갑자 이후에 귀양갔거나 갇힌 사람은 이미 발각되었든 아직 발각되지 않았든, 이미 판결되었든 아직 판결되지 않았든 모두 석방하여 면제하노라. 감히 사면령 이전의 일을 가지고 고발하는 자는 그 고발한 죄로 죄줄 것이다. 벼슬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을 올려주고, 자궁자(資窮者)는 대가(代加)하여 주노라. 근년에 옛 법도를 마주 고쳐서 새로운 조항을 만든 것은 아울러 모두 탕제(蕩除)하고, 한결같이 조종이 이루어놓은 법을 준수할 것이다. 아! 무강(無彊)한 아름다움을 맞았으니 다시 무강한 근심을 생각하게 되고, 비상(非常)한 경사가 있으니 마땅히 비상한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마땅히 잘 알지어다.” 정신(廷臣)이 모두 만세(萬歲)를 부르니 환성이 우레같이 끓어올랐다.
<중종실록 1권, 1년(1506년 9월 2일)>
왕위에 대한 개인적 욕심으로 반정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던 세조와 후대의 인조와는 달리 추대를 통해 왕위에 오른 중종은 그동안 무너져버린 정치적 기틀과 새로운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조광조의 강력한 건의로 진행된 왕도정치는 인(仁)과 덕(德)을 중시하며 부정을 척결하는 등 오로지 백성만을 위한 개혁정치였다. 훈구세력은 개혁의 바람을 몰고 오며 중종의 총애를 받던 조광조가 점점 눈엣가시처럼 느껴졌으며, 중종마저 지나친 개혁정책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훈구파의 계략으로 조광조는 기묘사화(조광조가 왕이 될 것이라는 역모로 그를 비롯한 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를 통해 사형을 당하면서 개혁의 바람은 잦아들었다.
조광조를 비롯한 개혁세력이 몰락한 뒤 반정을 도모했던 공신 세력이 부활의 조짐을 보이자 중종은 그들의 권력집중을 차단하기 위해 윤여필, 김안로 등 외척세력을 등용한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권력집중으로 인한 폐단의 시작이었다. ‘여인천하’로 유명한 문정왕후가 활동하며 윤원형과 함께 궁궐 내를 혼란에 빠뜨렸던 시기가 바로 이때다. 결국, 외척과 반정 세력 간의 권력다툼으로 정국은 불안해졌고 설상가상으로 남쪽의 왜구들은 삼포왜란(1510년 4월, 제포, 부산포, 염포의 삼포에 거주하고 있던 왜인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왜변)을 일으켜 경상도 해안 지방에 피해를 줬으며, 북쪽의 여진족은 세종 때 개척한 4군 6진 지역에서 끊임없는 노략질로 혼란을 가중했다.
재위 전기에는 공신세력, 후기에는 외척 세력에게 휘둘리며 즉위 당시 밝힌 야심 찬 포부에 비해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이상만 좇은 꼴이 되어버린 중종이지만 왕권 자문기구인 홍문관의 기능 강화, 신하들을 위한 사가독서(젊은 인재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 제도)제 시행, 비변사 실시 등 간간이 눈여겨볼 만한 업적을 남기며 38년의 재위기간을 허투루 보내지는 않았으니 너무 무능력한 왕이라 생각지는 않아야겠다.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서울 강남의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정릉(靖陵)은 아버지 성종의 선릉, 어머니 정현왕후릉과 함께 있다. 중종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신수근의 딸로 궁에서 쫓겨난 단경왕후를 비롯해 인종을 낳은 장경왕후, 명종을 낳은 문정왕후 등 후궁을 포함해 12명의 부인을 두었지만, 그는 홀로 쓸쓸히 잠들어 있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비롯해 왕릉 중 몇 안 되는 단릉이다.
넓은 능에서 허전하게 홀로 잠들어 있는 것도 서러울 텐데 임진왜란 당시 정릉은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능을 지키고 서 있는 커다란 문석인, 무석인의 얼굴이 약간 거뭇하고 코는 으스러진 것이 임진왜란의 수난을 짐작케 한다. 살아있을 땐 삼포왜란으로 골머리를 썩게 하더니, 죽어서 잠들어 있을 땐 임진왜란으로 무덤까지 파헤쳐지다니. 드라마 속에서 매번 무능한 왕으로 그려지던 그의 무덤이기에 더 측은한 마음이 든다.
정릉과 함께 있는 선릉, 정현왕후릉을 돌아보는 것도 빼 놓을 수 없겠죠? 한임진왜란 때 수난을 겪었던 정릉, 이제는 오래도록 제 모습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네요~
글 트래블투데이 편집국
발행2015년 10월 05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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