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유릉] 한반도 역사상 최후의 군주, 순종, 국내여행,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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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유릉] 한반도 역사상 최후의 군주, 순종


순종(純宗, 1874~1926년)은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매듭짓는 마지막 왕이었다. 한반도에 존재한 많은 왕조의 마지막이 그러했듯이 조선의 마지막 순간 또한 애통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 순종은 자신의 어머니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고, 아버지 고종은 강제로 퇴위를 당하는 혼란 속에서 일제의 꼭두각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인물이다. ‘짐이 곧 국가다’라는 루이 14세의 말처럼 군주의 힘과 국가의 힘이 비례하는 체제 속에서 허상이 되어버린 순종의 모습은 곧 조선의 몰락을 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마지막 왕릉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제에 의해 아버지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하면서 왕위에 오른 순종은 한 나라의 군주였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더욱이 그의 재위 기간(1907년 7월 20일~1910년 8월 22일) 중 1909년 7월 12일에는 기유각서를 통해 사법권과 행정권이 일제로 넘어가면서 그의 실권은 사실상 박탈되었고, 1910년 5월부터 퇴위할 때까지는 통감부의 데라우치 총독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그는 가장 굴욕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즉위한 1907년 실록에는 아버지 고종이 보낸 헤이그 특사를 아들 순종이 처벌하는 내용의 기록이 보인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라를 위해 몸 바친 특사를 처벌해야 하는 순종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種), 이준(李儁)의 무리들은 어떤 흉악한 성품을 부여받았으며 어떤 음모를 품고 있었기에 몰래 해외에 달려가 거짓으로 밀사(密使)라고 칭하고 방자하게 행동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킴으로써 나라의 외교를 망치게 하였는가? 그들의 소행을 궁구(窮究)하면 중형[重辟]에 합치(合致)되니 법부(法部)에서 법률대로 엄히 처결하라.” 하였다. 
<순종실록 1권, 즉위년(1907년 7월 20일)>
 

파란만장했던 삶과 달리 고요해보이는 순종의 릉.

1910년 일제는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을사5적의 한 명이었던 매국노 이완용은 헤이그 특사사건 때 고종의 책임을 추궁하여 양위(讓位)할 것을 강요한 것도 모자라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의 서명을 강요했다. 끝까지 서명을 거부했던 순종 대신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는 문서에 서명했다. 결국, 조선에서 이어진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유구했던 조선왕조의 문을 닫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마지막 부분은 뼈아픈 역사를 반드시 잊지 말아야하며 왜 나라의 강한 경쟁력이 필요한지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臨御)한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정령을 유신(維新)하는 것에 관하여 누차 도모하고 갖추어 시험하여 힘씀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시일 간에 만회할 시책을 행할 가망이 없으니 한밤중에 우려함에 선후책(善後策)이 망연하다. 이를 맡아서 지리(支離)함이 더욱 심해지면 끝내는 저절로 수습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할 공효(功效)를 얻게 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짐의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순종실록 4권, 3년(1910년 8월 29일)>
 

일제의 앞에서 무력했던 조선의 마지막 군주.

순종은 이후 창덕궁에 거처하며 자신의 마음대로는 궁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던 답답한 삶을 살다 1926년 4월 5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이러한 굴욕은 순종의 동생인 영친왕 이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친왕은 순종이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상황에서 황태자가 되었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1920년에는 일본 왕족인 마사코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며, 순종이 죽은 후에는 일본에서 본에서 육군 장교로 복무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까지 하니 이는 성리학의 질서와 왕족의 혈통을 중시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철저히 훼손시킨 일제의 의도된 만행이라 볼 수 있다.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아버지 고종과 어머니 명성황후가 잠들어 있는 홍릉(洪陵)의 바로 옆에 위치한 유릉(裕陵)은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다. 순종과 두 왕비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가 하나의 봉분에 잠들어 있는 조선왕릉 중 유일한 동봉삼실형 합장릉이다. 얼핏 단릉으로 보일 수 있으나 하나의 능침에 세 명이 모셔진 것이다. 홍릉(洪陵)과 같이 황제릉 양식으로 조성되어 정자각 대신에 침전이 자리 잡고 있으며, 능역에는 낙타, 코끼리, 해태, 기린 등 이전의 조선왕릉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석물이 있다. 무석인과 문석인은 상당히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문석인은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전의 왕릉과 비교해 기존에 없었던 형태의 석물과 참도 등이 보여 약간 이질적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이 왠지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면서 역대 조선 왕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던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한 편으로 측은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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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6년 06월 10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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