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쟁탈전은 끊임없이 벌어져왔다. 정권을 장악한 세력은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한다. 정권을 장악하지 못한 세력은 희생을 감수하고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다음을 기약한다. 이러한 권력구도는 끊임없이 반복되며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를 떠난 후 죽음을 맞이한 단종,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나라를 수습하였지만 인조반정으로 축출당한 광해군 등은 우리가 기억하는 대표적인 조선시대 권력의 희생양이다. 신수근의 딸로 태어나 1499년 진성대군 중종과 혼인한 단경왕후(端敬王后, 1487~1557년) 역시 권력의 희생양 중 한 명이다. 연산군을 몰아내는 반정을 통해 중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단경왕후 역시 왕위에 올랐지만 그녀는 7일 만에 궁을 떠나야 했다.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른 폐위였다.
중종반정, 역적의 딸로 폐위된 왕비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 신수근의 딸로 태어난 단경왕후의 집안은 성종과 연산군 대에 이어 권을 쥐고 있던 대표적인 명문가였다. 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으로 연산군의 원비(元妃) 신씨는 바로 그의 누이였다. 그녀의 조부 신승선 역시 세종 때부터 이조참판과 병조참판,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낸 문신이었다. 13세의 나이에 진성대군 중종과 혼인을 맺은 그녀는 중종반정(1506년)이 일어나기까지 7여 년을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중종 보다 1살 연상이었던 그녀는 남편을 극진히 모셨고 중종 역시 그런 단경왕후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그러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왕위에 있던 제10대 임금 연산군의 폭정은 훈구세력으로 하여금 반정을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성희안과 박원종을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은 궁궐 내 권력을 쥐고 있던 임사홍과 신수근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이고, 성종의 계비이자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위하며 반정을 성공시킨다. 정국의 혼란을 잠재우고 조선의 국정운영을 정상화로 되돌려 놓기 위해 반정세력은 진성대군을 왕위에 추대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단경왕후의 불행은 시작된다. 중종이 왕위에 오름에 따라 단경왕후 역시 왕비의 자리에 앉았으나 그녀는 중종반정을 반대하고 연산군의 편에 섰던 신수근의 딸이었다. 훈구세력은 단경왕후를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단경왕후를 각별히 사랑했던 중종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중종반정 때는 집 밖의 소란한 상황을 보고 이복형이었던 연산군이 반정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자신을 죽이러 온 것이라 생각해 겁에 질린 그를 안심시킨 사람 역시 부인인 단경왕후였다. 하지만 반정세력의 목소리는 점점 거세져 갔다. 실록은 그때의 상황을 ‘신수근의 딸을 궁 밖으로 내치다’라는 제목으로 기록하고 있다.
유순, 김수동, 유자광,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김감, 이손, 권균, 한사문, 송일, 박건, 신준, 정미수 및 육조 참판 등이 같은 말로 아뢰기를, “거사할 때 먼저 신수근을 제거한 것은 큰일을 성취하고자 해서였습니다. 지금 수근의 친딸이 대내(大內)에 있습니다. 만약 궁곤(宮壼)으로 삼는다면 인심이 불안해지고 인심이 불안해지면 종사에 관계됨이 있으니, 은정(恩情)을 끊어 밖으로 내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아뢰는 바가 심히 마땅하지만, 그러나 조강지처(糟糠之妻)인데 어찌하랴?” 하였다. 모두 아뢰기를, “신 등도 이미 요량하였지만, 종사의 대계(大計)로 볼 때 어쩌겠습니까? 머뭇거리지 마시고 쾌히 결단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종사가 지극히 중하니 어찌 사사로운 정을 생각하겠는가. 마땅히 여러 사람 의논을 좇아 밖으로 내치겠다.” 하였다. 얼마 뒤에 전교하기를, “속히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의 집을 수리하고 소제하라. 오늘 저녁에 옮겨 나가게 하리라.” 하였다.
<중종실록 1권, 1년(1506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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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단경왕후는 그날 초저녁 궁 밖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중종은 떠나보낸 부인을 못 잊어 경회루에 올라 매일 같이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며 단경왕후를 그리워했으며, 이를 전해 들은 그녀 역시 중종에 대한 간절함에 경회루가 보이는 바위로 올라가 자신이 입던 치마를 펼쳐놓았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인왕산 치마바위에 대한 전설이다. 하지만 실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단경왕후를 몰아내자는 대신들의 요구에 중종은 크게 고심하지 않는 것으로 보여 치마바위 전설에 대한 신빙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더군다나 반정을 도모하고 단경왕후의 폐위를 주장한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죽은 후에도 그녀를 복위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심은 커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과 함께 7년간 살아온 조강지처는 권력구도에 따라 자신이 왕위에 오른 지 7일 만에 왕비의 자리에서 내쳐졌고, 결국 그녀는 1557년 12월 7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온릉은 비공개릉이라 관람을 위해선 비공개릉으로 관람을 위해선 온릉(溫陵)을 관리하고 있는 서오릉 관리사무소에 허가를 받아야한다. 어렵사리 온릉에 들어서서 단경왕후가 잠든 봉분을 보면 그녀가 폐위된 후 평생 그리움에 사무쳐 지냈을 세월이 묻어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폐위된 지 200여년 만에 복위(영조 15년, 1738년)된 그녀의 봉분에는 병풍석이나 난간석도 없어 단출한 모습이다. 봉분의 모습만으로도 단경왕후의 폐위 이후 중종의 사랑이 변했을 것이란 점이 짐작된다.
추존한 왕비의 능제를 따라 단종의 영월장릉과 정순왕후의 사릉과 같이 무인석이 없고, 석양과 석호 또한 좌우에 두 마리씩만 배치되어 있다. 석호의 표정은 온화하고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하니 홀로 잠들어있는 단경왕후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듯해 온릉에서 돌아오는 길이 조금은 안심되었다.
단경왕후의 삶에 대해 알고 간다면 온릉으로의 여행이 한층 더 알찰 것 같은데요, 비극적인 왕후의 삶 때문에 온릉의 풍경이 조금 쓸쓸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글 트래블투데이 편집국
발행2015년 07월 17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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