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에서는 500년이라는 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으로 인해 왕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이며, 그와 관련된 많은 일화는 후대로 하여금 조선의 시대상황을 짐작케 하는 중요한 사료(史料)이다. 그중 왕위에 오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널리 알려진 사도세자의 죽음은 조선왕조에 있어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이다. 역대 최장수, 최장기간 재위를 자랑하는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英祖, 1694~1776년)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년)는 형인 효장세자가 9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한 뒤에 태어난 유일한 아들이었기에 영조에게는 큰 기쁨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명(命)한 죽음
융릉은 사도세자로 유명한 추존왕 장조의 능이다.
“삼종(三宗) 의 혈맥이 장차 끊어지려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지금 다행히 돌아가서 열성조(列聖祖)에 배알(拜謁)할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그 감회 또한 깊다.”
<영조실록 40권, 11년(1735년 1월 21일)>
영조는 원자의 탄생을 하례(賀禮)하는 대신들의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왕비와는 후사를 보지 못하고 후궁에게서만 요절한 효명세자를 포함 2남 12녀를 두었던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이듬해 3월 왕세자로 책봉한다. 조선 역사상 가장 빠른 기록이었다. 사도세자는 어릴 적부터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며 총명함과 재능을 보이며 성장했다. 만 2세 때부터 글자를 알았으며, 글자 또한 금방 읽고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왕세자로 책봉되어 순조롭게 성장한 사도세자는 1743년 10세의 나이로 당시 정9품이었던 홍봉한의 딸과 혼인한다. 그녀가 바로 훗날 제22대 임금 정조를 낳은 혜경궁 홍씨이다.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자전적 소설체로 엮은 《한중록》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며, 그녀 역시 명석하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예의 바른 여인이었다. 사도세자를 옆에서 보필하며 그녀는 지아비와 함께 순조로운 궁궐 생활을 하였다.
고즈넉한 풍경으로도 유명한 융릉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이다.
벌어질 것 같지 않았던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삐걱되기 시작한 것은 세자의 나이 10살 무렵이었다. 어릴 적부터 영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세자는 그것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점차 학문에 대한 싫증을 느끼기 시작하며 영조와의 갈등의 싹을 틔우고야 만다. 사도세자는 뛰어난 신체 조건과 함께 활쏘기를 즐기며 무인의 기질을 보였고 자연스레 글 읽기는 더욱더 멀리했다. 결국 영조는 세자를 불러 타이르기에 이른다.
“내가 동궁으로 있을 때에는 거의 휴식할 겨를이 없었고, 또 두 연강(筵講)을 폐한 적이 없었다. 옛날 황형(皇兄)께서 하루 안에 공사(公事)를 가지고 소대(召對)하는 것이 두세 차례에 이르렀고, 그렇지 않은 날이 없었음은 네가 어찌 들어서 알지 못하겠는가? 오늘날의 조정 신하들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나와 네가 국사를 하지 않는다면 조선(朝鮮)은 어떻게 되겠는가? 《정관정요(貞觀政要)》는 바로 당나라 태종(太宗)이 고종(高宗)을 가르친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마음을 써 읽어야 한다. 오늘 이후에는 매월 초1일에 쓰기 시작하여 그믐날에 이르기까지 어느 날에는 소대(召對)하였고, 어느 날에는 차대(次對)하였으며, 어느 날에는 서연(書筵)하고 어느 날에는 공사(公事)를 보았으며, 어느 날에는 무슨 책 무슨 편(篇)을 읽었으며, 어느 날은 하지 않았는지와 강관(講官) 및 강생(講栍)을 열서(列書)하여 내가 볼 수 있도록 대비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내가 술 마시기를 즐기지 않음은 너 역시 알 것이다. 종묘(宗廟)에 고하고 술을 금한 것은 그 뜻이 있는 바이어서 후일을 위한 계책인 것이다. 너는 모름지기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나중에 주방(酒房)을 다시 설치하려고 할 것인데, 무릇 우리 조정의 신하들이 그때 간쟁(諫爭)하지 않는다면 이는 너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실은 나를 저버리는 것이다. 한림(翰林)·주서(注書)·춘방(春坊)의 여러 연소한 신하들은 내 말을 자세히 기억해 두라.”
<영조실록 85권, 31년(1755년 9월 10일)>
결국, 갈등의 골은 영조의 ‘양위 파동’으로 더욱더 깊어지게 된다. 보통 임금은 신하들의 충심(忠心)을 떠보기 위해 일종의 ‘생떼’를 쓰는데 임금이 왕위를 넘겨주겠다고 발언하면 신하들은 금방 하늘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슬픈 표정으로 “통촉하여주시옵소서”를 수없이 내뱉으며 철회를 애원해야 했다. 5번의 양위 파동 끝에 1749년 1월 세자는 대리청정을 시작하게 되지만 이미 영조의 눈에는 세자의 단점만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형조판서 윤급(尹汲)의 청지기였던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하는 상서는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겪이 되고야 말았다. 화가 난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했지만 따르지 않자 폐서인한 후 뒤주에 가두는 극단의 조치를 한다. 결국, 사도세자는 8일 만에 뒤주 속에서 숨지게 된다. 많은 기록에 따르면 영조는 즉위 기간 비이상적인 행동을 보이고 정신적으로 이상증세를 보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증상으로 치면 공황장애와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아들을 숨지게 한 것을 자책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결국, 남은 건 아들을 애도하기 위해 남긴 ‘사도’라는 시호뿐이었다.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사도세자 장조가 잠들어 있는 융릉(隆陵)은 아들 정조(正祖, 1752~1800년)의 건릉과 경기도 화성시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하나의 봉분에 혼유석(무덤 속 영혼이 나와서 놀도록 설치한 돌) 역시 하나여서 얼핏 사도세자만 잠들어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훗날 헌경의황후로 추존)가 함께 있는 합장릉이다.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무덤은 본래 서울 동대문의 배봉산에 수은묘(垂恩墓)란 이름으로 있었다. 훗날 아들 정조가 즉위한 후 영우원(永祐園), 현융원(顯隆園)이라는 이름을 거쳐 1899년 융릉(隆陵)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융릉을 살펴보기 위해 홍살문 앞에 서면 능침이 한눈에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의 조선왕릉에는 홍살문과 일직선으로 위치한 정자각이 능침을 가리고 있어 참배자나 관람객에게 보이지 않게 되어 있는데 융릉은 홍살문을 중심으로 약간 오른쪽으로 나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한눈에 보이는 융릉을 얼른 보고 싶어 달려가니 능침에는 난간석 없이 병풍석만 설치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병풍석 덮개 부분에는 12지신 상 대신 연꽃 모양의 조각이 12면에 조각되어 있는데 상당히 사실적이며 아름답다. 이는 19세기 무덤 석물 제도의 새로운 표본을 제시한 것이라 한다. 융릉을 살펴보고 참도를 따라 나오는 길, 유난히 탁 트인 느낌을 받는데 다른 능의 참도 보다 옆으로 박석이 더 깔렸다. 좁은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것 같아 다행스럽다.
아버지에게 자결하라는 말을 들었고 아버지의 명으로 죽음을 맞은 사도세자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글 트래블투데이 편집국
발행2015년 07월 17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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