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건릉]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꾼 정조, 국내여행,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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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건릉]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꾼 정조


 문화예술의 재생이라는 뜻으로 통용되는 르네상스는 14세기 후반 서유럽에서 진행된 문학, 미술, 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문화부흥운동이다. 18세기 조선에서는 또 하나의 르네상스를 꿈꾼 개혁군주가 등장한다. 한반도의 역사에서 역대 개혁 군주를 꼽으라면 빠지지 않는 인물, 정조(正祖, 1752~1800년)이다. ‘이산’으로도 익숙한 정조는 장조, 일명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억울한 누명이었지만 죄인의 아들이라는 허물은 정조의 왕위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명분’이었다. 이러한 환경은 즉위 후 정조에게 개혁을 위한 내공을 체득하도록 만들었다. 

                    
                

개혁의 거점에서 잠들다

  • 건릉은 죄인의 아들에서 개혁의 왕으로 살다간 '이산' 정조의 능이다

    건릉은 죄인의 아들에서 개혁의 왕으로 살다간 '이산' 정조의 능이다.

화성에 위치한 정조의 건릉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과 함께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개혁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효심 또한 남달랐던 것 같다. 죄인의 신분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를 정조는 배봉산(현재 동대문구 휘경동) 아래 언덕에 안장되어 있던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격상시키고 1789년 현재의 위치로 옮긴다. 이후 정조는 수시로 능행차를 하면서 아버지를 찾아뵙는다. 한양에서 화성으로 능행차를 할 때는 한강에 배다리를 만들었는데 그 횟수가 10번을 넘었다고 하며, 능 행차와 더불어 백성들의 고충을 직접 듣기 위한 도성 밖 행차 또한 100회 이상이었다고 한다. 정조는 화성을 백성들에게 효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이용한 것이다.
 
이 외에도 정조가 개혁의 거점으로 삼았던 화성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정약용이 연구하여 만든 거중기는 공사기간을 단축하고 부역을 줄임으로써 조선 건축술의 혁신을 가져왔다. 또한, 화성은 군사적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하나로 묶은 평산성(平山城)형태를 기본구조로 하여 성곽의 효율성을 높였다. 이는 농업과 상공업의 고른 발전을 가져왔으며, 실제로 수원화성을 찾아가보면 성벽의 높이가 다른 성곽에 비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인재를 양성하는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을 세워 젊은 학자들이 마음껏 학문을 연마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였다. 실제로 정조 때에는 『경국대전』과 『속대전』 등 조선의 법령을 통합하여 편찬한 『대전통편』, 외교문집인 『동문휘고』, 조세와 공납 등을 담당하는 호조의 사례를 모은 『탁지지』 등의 책을 국가적 사업의 일환으로 편찬하였다.
 
이처럼 정조는 건축, 경제, 사회, 문학 등 여러 분야의 발전을 이룩하여 조선의 르네상스가 꿈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만든 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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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는 수원 화성과 규장각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많은 업적만큼이나 정조와 관련된 일화 또한 다양한데 정조는 평소 이순신 장군을 찬양했다고 한다. “조선에서 문무를 겸비한 진정한 인물은 충무공밖에 없다.”와 “그가 만약 고대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제갈량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일화는 정조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를 통해서도 알려진 일화다. 정조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룩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던 정약용과의 일화도 유명하다. 정약용은 거중기를 고안하여 화성을 축조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천재이지만 말타기나 활쏘기 등 무예에는 재능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정약용에게 정조는 “문장은 아름답게 꾸밀 줄 알면서 활을 쏠 줄 모르는 것은 문무(文武)를 갖춘 재목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매일 활쏘기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활쏘기 시험을 봐서 합격하지 못했을 때에는 남아서 더 연습을 시켰다고 하니 무예에 소질이 없었던 정약용에겐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자신이 아끼던 신하였기에 모든 것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조금은 모질게 밀어붙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남달랐던 정조는 죽어서도 아버지의 곁에 머물기를 원했다. 1800년 6월 28일 정조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유언대로 그해 11월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융릉 옆에 안장되었다. 사실, 정조 무덤인 건릉(健陵)은 처음에 아버지 융릉의 동쪽에 마련되었다. 그러나 훗날 효의왕후가 승하하여 정조와 합장을 할 때 풍수지리상 길지가 아니라는 의견에 따라 지금의 자리인 융릉 서쪽으로 이장하였다. 봉분은 하나이지만 안에 2개의 실을 갖춘 합장릉이다. 능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아버지의 능인 융릉의 모습과 비슷하다. 다만, 융릉은 병풍석이 봉분을 감싸고 있지만 건릉은 난간석이 둘려 있는 것이 다르다.

정조의 건릉과 함께 들리면 좋을 곳이 있다. 바로, 용주사다. 용주사 입구에는 특이하게도 능이나 관아에서 볼 수 있는 홍살문이 있다. 이유는 용주사 호성전에 사도세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용주사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한 원찰로 세웠다. 호성전 앞에는 비록 최근에 세워졌지만, 부모에 대한 효를 되돌아보게 하는 부모은중경이 새겨진 탑이 있으니 건릉과 용주사야말로 효에 대해서 다시금 깨닫게 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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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아버지 곁에 머물기를 원했던 정조.
사도세자의 융릉 옆에 자리 잡은 건릉에서 아버지를 향한 효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트래블투데이 편집국

발행2015년 07월 17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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