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래 임금들이 거처한 창덕궁.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대신해 재건된 창덕궁은 명실공히 ‘제2의 법궁’이라 불릴 만 하다. 이곳 창덕궁의 유명한 답사 프로그램인 ‘달빛 기행’ 행사가 올해도 열린다. 개최할 때마다 매진 사태를 보이며 해마다 인기를 더해간 ‘창덕궁 달빛기행’ 행사. 안타깝게도 달빛기행에 참여하려면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 아마 올해도 많은 이들이 다음을 기약했을 것이다. 이에 <트래블투데이>가 달빛 기행 행사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낮에 봐도 아름다운 창덕궁 부용지의 밤 풍경은 어떨까? 고요한 후원 숲길은 밤이면 또 얼마나 호젓할까?
돈화문으로 들어가 낙선재에 이르다
창덕궁 달빛기행은 돈화문에서 시작해 인정전 관람으로 이어진다.
널리 두터운 화평을 도모한다는 뜻의 돈화문(敦化門). 달빛기행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에서 시작한다. 돈화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정전인 인정전이 나온다. 왕의 즉위식을 치르거나 외국 사신을 접견할 때 사용하던 곳이 바로 인정전이다. 인정전은 밖에서 볼 때는 2층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단층으로 돼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인정전을 둘러본 발길은 낙선재로 향한다. 낙선재는 왕실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따라서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 자연 그대로의 나무색과 흰 칠만으로 소박함과 검소함을 나타내는 곳이 낙선재다. 또 이곳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왕녀인 덕혜옹주(고종의 막내 딸)가 불과 몇 십 년 전인 1989년까지 여생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일본인 출신으로서 영친왕의 부인이었던 故이방자 역시 이곳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두 왕실 여성이 이곳에 거주하던 1980년대에 낙선재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창덕궁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노쇠한 몸으로 주변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궁을 산책하던 이들의 모습을 본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이제는 모두 영면한 왕실 여성들의 삶이 달빛 아래 머릿속을 스친다.
부용지 못에 두둥실 떠오른 보름달
밤이 되면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에 달빛과 야경이 서린다.
창덕궁을 이야기하면서 후원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정원의 표본이요 아름다움의 정수라 불리는 창덕궁 후원. 과거엔 ‘비원’이란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 이곳에서 가장 많은 탄사를 받는 곳은 단연 부용지다. 산을 끼고 자리한 창덕궁은 후원이 만들어질 당시 산이 구태여 깎여나가지 않고, 오히려 경사가 있어 자연스러운 정원으로 승화됐다. 이 중 부용지는 후원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만나는 정원이다. 규장각이 있던 주합루 일원과 연꽃 핀 부용지는 가히 한국적 아름다움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대낮에도 이곳은 고요함과 고즈넉함을 간직한 곳으로서, 밤이면 달빛까지 더해 절로 ‘피리 생각’이 나게 한다. 깊은 밤 부용정 아래를 거닐던 역대 임금들의 표정은 어땠을까? 나라 걱정으로 잠 못 이루던 날, 부용지 수면 위에 뜬 보름달을 보며 잠시나마 위안 삼지 않았을까.
부용지 수면 위에 그윽한 눈길을 주었다면 이제 불로문을 둘러볼 차례다. 불로문은 말 그대로 ‘늙지 않게 하는(또는 늙지 않는)’ 문이다. 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만들어진 이 불로문은 오늘날 후원 방문객들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불로문 아래를 지나며 자신의 무병장수를 염원하는 방문객들의 낯에는 설렘이 스친다.
불로문을 지나 연경당을 둘러 본 뒤 숲길을 걷는다. 이름하여 후원 숲길이다. 누구나의 가슴 속엔 자신만의 길이 있기 마련.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도, 가본 길에 대한 후회도 누구나의 가슴에 하나쯤 있을 것이다. 운 좋게도 창덕궁 달빛기행 행사에 참가해 밤중의 후원 숲길을 걷게 된다면, 이곳에 자기만의 명칭을 붙여 보는 건 어떨까. ‘어느 날 설레며 걸은 길’, ‘덕혜옹주를 생각하며 걷는 길’ 등 어떤 것도 좋다. 여인의 가르마처럼 하얀 창덕궁 숲길. 이 길을 걸을 땐 이렇듯, 자신만의 소소한 추억을 만들어 보자.
창덕궁 달빛기행은 약 2시간 동안 진행되는 야간답사 프로그램입니다. 올해를 놓쳤다면 내년을 기약해볼까요?
글 트래블투데이 이나래 취재기자
발행2015년 05월 03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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