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해방의 기쁨을 누리고 있을 즈음 푸른 눈을 가진 젊은이 하나,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가 한국 땅에 발을 붙였다. 그가 어느 산사의 스님에게 배운 우리말 중에는 나무와 풀, 꽃들의 이름이 유독 많았고, 십여 년이 지난 뒤에는 자연스레 자신의 나무와 풀, 꽃들을 심게 되었다 한다. 그는 곧 동여 민병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동여(東旅). ‘동쪽으로 여행 온 나그네’란다.
푸른 눈의 나무 할아버지
‘나무 할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 민병갈 선생. 그가 나무를 심기 시작한 곳은 황무지에 가까웠던 척박한 땅, 천리포였다. 천리포수목원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 함께 자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수목원이다. 그는 자식처럼 가꿔 온 나무를 길을 넓히거나 건물을 짓는 일들로부터 지켜내려 무던히 애를 써야 했고, 한 편으로는 그 위기의 순간이야말로 나무를 더 많이 심을 때라는 생각을 했다.
노후를 보낼 작은 농원을 꾸밀 요량이었던 민병갈 선생의 정원은 점점 넓어져 처음 면적의 30여 배에 달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천리포수목원이다. 지금 천리포수목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수종을 보유하고 있는 식물원이며, 아시아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의 타이틀을 얻기도 했던 공익법인 식물원이다.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 ‘어울림’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푸른 눈의 나무 할아버지가 한평생을 바쳐 일구어 놓은 나무들은 여행자들에게 예상보다 더 많은 울림을 준다.
비밀의 정원에서의 꽃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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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포수목원은 ‘비밀의 정원’이라 불렸다. 나무를 위한 수목원이었기에 입장객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천리포수목원이 일반인에게 개방된 것은 민병갈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도 7년 뒤의 일이다. 그동안 온전히 가꾸어 낸 나무야 셀 수 있으랴. 일찍부터 꽃망울을 터뜨린 수종부터 이제야 조심스레 열리기 시작한 늦깎이들까지, 천리포수목원은 그야말로 ‘꽃밭’이다. 그래서일까. 이곳에는 매우 다양한 수종의 꽃이 피어있지만, 특히 목련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봄철 한 번쯤은 반드시 천리포수목원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민병갈 선생이 사랑했던 꽃나무였기 때문일까, 천리포수목원이 보유한 목련의 수종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천리포수목원은 묵어갈 수 있는 수목원이기도 하니, 이를 미리 알고 간다면 보다 알찬 수목원 여행을 꾸릴 수 있을 것이다. 나무들의 이름을 가진 가든하우스와 에코힐링센터까지 선택의 폭 또한 다양하다. 일부 가든하우스는 절기에 따라 운영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방문하기 전 미리 문의하고 가는 것이 좋다.
수목원, 더불어 자라다
소개하지 않고서는 큰 아쉬움이 남을 것 같은 이야기를 덧붙여 소개한다. 이 이야기는 뜻밖에도 강원 춘천시의 남이섬과 관련되어 있는데, 남이섬의 초대 회장인 민병도 선생과 천리포수목원의 설립자인 민병갈 선생이 의형제 사이였다는 것을 미리 말해두면 이해가 조금 더 쉽겠다. ‘민병갈’이라는 이름 또한 민병도 선생과 같은 성, 같은 돌림자를 쓴 것.
두 사람의 공통분모는 역시 나무였다. 민병갈 선생이 천리포에 나무를 심은 지 3년째 되었을 때, 민병도 선생은 남이섬에 나무를 심었다. 민병갈 선생은 천리포에서 심은 나무를 남이섬에 전해주었고, 민병도 선생은 20여 년간 천리포수목원의 이사를 지냈다. 2011년, 남이섬과 천리포수목원은 형제 확인서를 교환하며 두 선생의 생전 인연을 그대로 이어가게 되었다. 두 선생은 각각 자신이 평생을 가꿔 온 나무 아래 잠들게 되었으니, 천리포수목원을, 혹은 남이섬을 찾았을 때 그 이름들을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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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트래블투데이 심성자 취재기자
발행2021년 09월 25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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