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 활짝 핀 동백꽃
이웃한 크고 작은 섬들을 벗하며 오롯이 제 자리를 지켜온 증도는 지난 2007년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에 선정되며 새로운 섬 관광지로 떠오른다. 이후 지도읍의 사옥도와 연결하는 연륙교가 놓이면서 전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혹자는 다리가 놓이면서 섬으로서의 매력을 얼마간 잃었다고 말하지만, 증도는 여전히 거기 홀로 떠 있는 ‘섬’이다.
프롤로그. 가장 빠른 도시에서 가장 느린 마을로
서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르고 바쁜 도시다. 아침 예닐곱 시에 나가도, 버스며 전철이 모두 끊긴 한밤중 집을 나서도 거리가 비워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증도로 떠나던 날도 그랬다. 평소보다 두 시간은 일찍 집을 나섰는데도 전철 안엔 사람이 가득했다. 언젠가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 하나가 출근 전 영어 학원에 다닌다는 말을 듣고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있다. 새벽 전철을 탄 이들 중 몇 사람은 실제로 영어니 중국어니 하는 외국어 교재를 손에 들고 있었다. ‘참 열심히들 산다.’ 증도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느낀 서울에 대한 단상은 그런 것이었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멀리 동녘에만 머물러 있던 붉은 기운이 온 하늘을 감싼다. 아침 7시 30분. 약간은 졸음이 가시지 않은 상태로, 또 약간은 긴장한 상태로 서울에서 지도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이제 다섯 시간 후면 눈앞에 다른 세상이 펼쳐질 터다.
Scene #1. 낯선 듯 익숙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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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여객자동차터미널의 매표소(좌)와 매점(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무안쯤 이르러서일까. 도로 양옆으로 드넓은 논과 밭이 펼쳐지기 시작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설마한들 이만큼 시골일 줄은 몰랐다. 지도여객자동차터미널에 도착한 뒤 들어선 대합실은 시골 출신 기자를 당황스럽게 할 만큼 시골스러웠다. 유년 시절 할머니 댁 근처에서나 봤을 법한 매표소. 대여섯 살 아이들도 스마트폰을 쥐고 다니는 시대에 ‘전화카드’를 판매한다는 표지. 공중전화 박스에 늘 걸려 있었지만 어느 순간 사라진 전화번호부. 화이트보드에 손글씨로 쓰인 버스 시간표. 그래도 제법 구색을 갖춘 터미널 표 매점. 익숙했지만 자라면서 어느샌가 희미해져 버린 그 기억들이 신안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Scene #2. 시루섬 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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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 3일 간 묵었던 '시루섬 민박'의 전경. 증동리 소재.2
객식구에게 내밀던 따스한 밥상.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으라'는 말은 전국 공통이다.3
숭어를 말리고 있는 마당 풍경이 친근하다.증도에서 이틀 동안 묵게 될 숙소는 문화관광해설사인 이종화 씨 내외가 운영하는 ‘시루섬 민박’. ‘시루섬’이라는 명칭은 증도의 옛 이름을 따 왔다. 증도는 예부터 물이 귀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하나의 큰 섬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앞시루섬과 뒷시루섬, 그리고 우전도 등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 섬 사이로 물이 밑 빠진 시루처럼 스르르 새어 나간다고 하여 ‘시루섬’이라 불렀다. 이때만 해도 ‘시루 증(甑)’ 자를 써서 ‘증도(甑島)’라 하였는데, 이후 간척으로 인해 세 개의 섬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더한 섬, 늘어난 섬’이라는 뜻으로 ‘증도(曾島)’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 이 자그마한 섬에도 이처럼 숱한 사연이 담겨 있다. 이제 갓 대학생이 된 자녀를 광주로 ‘유학’ 보냈다는 내외가 따뜻한 점심을 대접해주셨다.
Scene #3. 염부의 삶을 들여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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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면적의 2배이자 국내 최대 규모의 단일염전인 태평염전의 모습. 첫째날 날이 흐려 다음날 다시 찾았다.2
'소금밭 낙조전망대'에 오르면 망원경을 통해 멀리까지 살펴볼 수 있다.증도에 가면 가장 먼저 보고 싶었던 곳이 ‘태평염전’이었다. 태평염전은 여의도의 2배 규모, 국내 최대 규모의 단일염전으로 이름난 곳이다.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 사막만큼은 못할지라도, 푸른 하늘이 염전에 비춘 장관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증도에서의 첫날은 흐렸고 또 추웠다. 특히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서웠다. 서울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왔건만, 야속하단 생각이 들었다. 칼바람을 뚫고 소금밭 낙조 전망대까지 올랐다. 눈 아래로 광활한 염전이 펼쳐졌다. 두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그 크기를 모두 실감할 순 없었다. 일렬로 도열해 있는 소금 창고들은 추운 날씨에도 제 위용을 떨치고 있었다. 염부의 모습을 볼 순 없었으나, 염부의 삶은 거기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날씨 때문이었을까, 유난히 크고 넓었던 염전 때문이었을까. 코끝이 잠시 찡했다.
Scene #4. 고요한 섬의 하루
3월 초면 증도는 비수기다. 염전 일이 시작되는 3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사람이 북적이기 시작한다. 모르고 간 것은 아니지만, 어딜 가나 사람이 없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살짝 외로운 기분이 밀려온다. 증도에는 모두 8백여 가구, 2천여 명의 사람이 산다. 그러나 학생 등 섬을 떠나 지내는 사람도 적지 않아,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은 천여 명에 불과하다. 게다가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드신 어르신들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어르신들은 동네를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관광객이 드문 비수기에는 버스를 타도, 식당에 가도, 박물관에 가도 사람의 그림자를 보기 어렵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사는 도시에 있었던 이에게 증도라는 섬은 전연 딴 세상이다.
섬의 하루는 해와 함께 어스러진다. 서쪽 하늘에서 머뭇거리던 해가 마침내 꼴깍 넘어가고 나면 온 동네가 고요해진다. 도시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 새벽 알람을 맞춰두었지만 이틀 내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날 일은 없었다. 이름 모를 새들이 아침 댓바람부터 민박집 마당 어딘가 걸터앉아 쉼 없이 지저귄 까닭이었다. 증도의 시간은 온전히 자연의 섭리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어부들은 ‘물때’를 맞춰 갯벌로 나갔고, 물이 차오르면 다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으며, 마을 사람들은 해가 지면 당연하다는 듯 하루를 마무리했다. 장거리 여행과 찬바람으로 몹시 노곤해진 몸을 따뜻한 온돌방에 맡긴다.
Scene #5. 증도의 명물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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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뚱어다리'는 갯벌 위에 세워진 길이 470m의 목교다.2
물이 빠지면 갯벌과 갯골이 훤히 드러난다.둘째 날 첫 목적지는 짱뚱어다리였다. 민박집이 있는 증동리에서는 걸어서 10분이면 닿는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낮고 넓은 지붕들을 지나 어지럽게 휘어 있는 골목길을 걷는다. 서울에 있었다면 출근을 준비하고 있었을 시간이니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닌데, 동네 어른들은 진즉 하루를 시작하신 모양이다. 골목길을 지나면 시멘트가 깔린 포장길이, 그 길을 걸으면 다시 넓고 깨끗한 아스팔트 길이 나타난다. 가로에 동백이 보이는가 싶더니 이윽고 짱뚱어다리가 보인다. 짱뚱어다리는 갯벌 위에 세워진 길이 470m의 목교다. 마침 물이 빠져 다리 아래로 드넓은 갯벌이 드러났다. 증도의 갯벌은 종류가 다양하고 깨끗해, 숱한 바다 생명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친가가 서해에 있는 마을이라 갯벌은 제법 친숙한데도, 증도의 갯골은 유난히 깊어 보였다. 꽤 오랜 시간 들여다보았지만, 날이 덜 풀린 탓인지 짱뚱어는 볼 수 없었다.
Scene #6. 이웃사람
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가는 증도 아낙의 모습.
“아따, 뭐더러 혼자와 그라고 있대.”
짱뚱어다리를 지나던 아낙 하나가 사진을 찍고 있던 내게 말을 붙인다. 동시에 내 입에선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도 안부 인사 건네기가 쉽지 않은 요즘, 모르는 사람에게 이토록 허물없이 말을 건넬 수 있는 것은 필시 시골만이 지닌 정취 때문일 것이다. 머리 위에 소쿠리를 인 그녀에게 ‘안에 뭐가 담겼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별 시답잖은 물음을 다 듣겠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쿨한 대답을 남기고 유유히 제 갈 길을 떠난다.
“뭐시긴 뭐시여. 맛이여!”
Scene #7. 천천히 달리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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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도에는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자전거를 타기 용이하다.2
흡사 해외 휴양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우전해변의 모습.증도에서의 둘째 날은 대부분 자전거로 이동했다. 짱뚱어다리를 건너면 지척에 자전거대여소가 있다. 자전거대여소를 관리하는 문경오 씨의 말에 따르면, 군수가 바뀔 때마다 자전거 삯을 받았다가 말았다가 했다고 한다. 이번 군수는 후자를 택했다. 덕분에 값을 치르지 않고 성능 좋은 자전거를 빌려다가 마음껏 증도를 누빌 수 있었다. 자전거를 빌린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필자가 무면허이기 때문이요, 둘째는 증도에 버스가 없어도 너무 없기 때문이다. 증도에서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은 군에서 운영하는 공영버스와 모 버스업체에서 운영하는 고속버스가 전부인데 편수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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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전해변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 수록 은빛에서 금빛으로 물들어 간다.자전거는 그리하여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최상의 선택이 됐다. 달리는 동안 증도 곳곳의 풍경들이 두 눈에 한가득 들어와 안겼다. 힘들면 잠시 쉬었다 다시 달렸다. 천천히 달리면, 빨리 달릴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보인다. 자전거 여행의 종착역은 소나무가 우거진 우전해변이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만 해도 은빛으로 반짝이던 물결이, 해가 서녘으로 넘어가면서 점차 금빛으로 물들어 갔다. 거짓말 같은 풍경에 한참을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뉘엿뉘엿 떨어져 가는 해와 함께 증도에서의 둘째 날이 저물어 갔다.
Scene #8. 다시 길을 떠나야 할 때
'상정봉 전망대'에서 바라 본 증도 전경. 우측으로 한반도 모양을 한 해송 숲이 보인다.
증도에서의 마지막 날,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르기 전에 상정봉에 오르기로 한다. 상정봉은 증도에서 가장 높지만, 높이는 127m밖에 안 되는 야트막한 산이다. 넉넉잡아 40분 정도면 충분히 산 정상까지 올랐다 내려올 수 있다. 증도에는 유난히 해송이 많다. 상정봉으로 오르는 길에도 온통 소나무 천지다. 마침내 상정봉에 오르고 나면 25만 평을 자랑하는 해송 숲도 내려다볼 수 있다. 증도는 늘 푸른 소나무가 곁에 있어 한겨울에도 외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날은 증도에서 머물렀던 사흘 중 볕이 가장 따뜻했다.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하니, 조심히 돌아가라는 무언의 메시지처럼 들렸다. 고작 사흘, 그마저도 이동 시간을 빼면 겨우 이틀 남짓한 시간인데, 증도에 참 오랫동안 머물러 있던 듯 느껴졌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에필로그. 서울보담 여그가 낫쟤!
둘째 날 일이다. 자전거를 타고 섬 반 바퀴를 돌고 나서 허기가 지기에 시계를 꺼내 보았다. 이미 점심때를 훌쩍 넘겼겠거니 했는데 웬걸, 시계는 이제 막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다. ‘슬로시티’에 왔다고 시간이 절로 느려진 것인지, 도시의 시간이 유독 빠르게 흐르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턱이 없다. 많은 일을 해내야 하는 삶, 바삐 사는 삶에 익숙해져 귀중한 시간을 오히려 허무하게 흘려보내고 있었던 건 아닌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본다. 그러다 괜히 심술이 나, 길을 지나던 마을 어르신을 붙잡고 증도 살이 불편하지 않으냐 묻는다. “뭔 소리데. 거시기 슈퍼도 있고 약국도 있고 쏘주방 있으믄 됐쟤. 서울은 복잡스러버서 못 살어. 여그가 낫쟤!”
[여행상자] 슬로시티 증도, 별이 빛나는 밤에
전남 신안군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담고 있는 증도와 만날 수 있는 ‘슬로시트 증도, 별이 빛나는 밤에 투어’! 갯벌 힐링여행과 화도마을 노두길 걷기, 다양한 소금 체험, 그리고 모래해변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의 별을 세는 경험까지! 증도의 자연을 추억으로 품고 싶은 트래블피플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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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트래블투데이 엄은솔 취재기자
발행2016년 01월 18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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