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마다 특색이 있어도, 집집마다 조금씩 달라도 한국의 설 분위기는 대체로 비슷하다. 떡국을 비롯한 설 음식 몇 가지, 반듯한 설빔에 다소곳한 세배와 덕담, 윷 혹은 화투장으로 함께 불거지는 웃음들. 세상은 많이 바뀌었는데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우리 풍속들이다. 쭉 뻗은 고속도로까지 주차장으로 만드는 귀향행렬도 마찬가지. 단순히 그 수고가 부담스러워 가족을 만나러 가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고 보면 명절은 조상들의 옛 모습이 굉장히 많이 남아있는 부분이다. 비록 떡은 떡집에서 만들고, 양복 차림에 세배도 하지만 명절을 즐기는 일만은 구닥다리라 깎아내리지 않고 간직하니 다행이구나 싶다. 하지만 그 와중에 이제는 결코 일상일 수 없게 돼버린 옛 모습이 있다. 생활의 3대 요소, 의식주 중 집. 한옥양식은 온돌을 제외하면 지금은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일부러 한옥 체험을 하지 않는 이상, 기와나 초가 아래 한복을 입고 윷을 던져 올리는 풍경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새해 첫날 높게 솟은 아파트와 투박한 건물들 사이에서 정다운 우리네 옛집이 그리워 써내려가는 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양동마을, 영락없는 옛 고을의 모습이다.
고택, 존재의 의미
'집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집이 삶에 큰 역할을 하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서 고택은 말 그대로 오래된 집, 오래전 사람들이 살았던 집으로 그 의미가 크다. 낡은 아궁이와 가마솥, 고른 흙 마당과 넓은 마루에서 울고 웃었던 조상들의 삶이 진하게 배어 있다. 집을 어떻게 지었는지부터 이유는 뭔지, 어떻게 이런 식으로 살게 됐는지까지 학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후손들에게는 조상들의 얼을 느끼고 또 감탄하게 한다. 타임캡슐처럼 과거의 삶을 재현하는 고택이 뿌리에 대한 존경과 긍지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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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골 한옥마을에는 어린아이들에게는 생소한 옛날 식기들도 전시돼있다.2
안동 하회마을 고택에 들어서는 담장과 문, 조상들의 생활과 숨결을 느끼러 가는 문이다.어떤 이는 오래된 것이 곧 낡은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고택은 세월만큼 낡은 것이 아니라 옛 삶을 간직하고 있었던 만큼, 그 가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진귀하다. 사람은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어도 집은 남아 오늘에 열려있으니, 걸어 들어가 보자. 마당과 사랑채, 안채에 이르면, 뛰어다니는 누렁이와 비질하는 남정네, 사랑방의 갓 쓴 사내와 안채에서 방석 수를 놓는 부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서울 필동 남산 아래 서울 곳곳에 흩어져있던 순수혈통의 양반 가옥 다섯 채를 옮겨 복원하고 정원과 연못 등으로 꾸민 남산골 한옥마을이 있다. 명절뿐 아니라 일 년 내내 체험 행사가 다양한 데다 가옥의 복원 상태가 워낙 훌륭해 가까이에서 옛 숨결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고택, 아름다움의 의미
한옥의 아름다움은 이미 말하기가 새삼스럽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북 경주, 안동에는 세월이 무색하게 그 옛날 마을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후손들이 집을 지키며 아끼고 보듬어 온 결과다.
한옥의 미를 만드는 큰 요소 중 하나를 꼽으면 지붕이다. 먼저 양반댁 기와집은 팔작지붕이 대표적으로 각 모서리가 새초롬한 곡선으로 뻗어 올라간 것이 특징으로 장식적이지만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고 근엄하기도 하다. 서민들이 많이 살던 초가집에서는 푸근함이 느껴진다. 짚단으로 만들어 추위와 더위에 모두 강하다. 산골에서 볼 수 있는 너와집은 나무나 돌을 쪼개 지붕을 만들기 때문에 비가 새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색다른 외양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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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지붕과 소나무의 조화가 아름답다.2
안동 민속촌, 초가지붕의 소박한 모습도 자연과 하나 된 듯 정답다.한옥의 지붕은 소재가 무엇이든 기능적, 미적으로 훌륭한 데다, 한옥을 주변 환경과 기가 막히게 어우러지도록 한다. 산과 나무 강과 들판 어디에 있든 한옥은 풍경과 하나가 되고 다른 집들과 따로 놀지 않는다. 한옥이 있는 풍경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즘 생겨나는 멋들어진 건물들의 주인공 행세가 한옥에는 없다. 그래서 한옥은 마을 전체가 하나의 문화재가 된다. 검은 기와지붕이 비스듬히 떨어지고 초가지붕이 넉넉하게 얹혀 있는 모습은 참으로 흐뭇하다. 아름다운 산세가 한옥에, 아름다운 한옥에 산세가 서로 어울려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절경을 만든다.
고택, 그리움의 의미
한옥마을을 찾을 때 마다 꼭 한 번씩 하는 생각, 여전히 고래 등 같은 기와가 총총히 덮인 한국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이다. 한옥에 대한 갈증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전부터. 특히 서울은 충분히 아름다운 도시임에도 종로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현대식 건물로 가득 차있다는 점은 아쉽다. 때문인지 서울 종로구의 고궁과 한옥마을은 늘 인기 있는 나들이 명소로, 아이들이 방학을 맞은 가족, 걷기 좋아하는 연인, 커다란 사진기를 든 작가도 오래된 조상들의 집을 찾아 일상과 다른 풍경을 접한다. 이제 한국의 전통 가옥은 ‘체험’만이 가능하다는 서글픈 현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최근엔 한옥을 편리함과 현대 기술과는 상반된 의미로 받아들이던 과거의 인식이 많이 사라져, 한옥의 미적, 기능적 장점을 살려 현대식 건축에 적용하기도 한다. 건물 배치와 기둥이 한옥에서 가져온 구조로 세워진 서울 세종문화회관이 한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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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과 기둥 등에 한옥의 특징을 접목한 서울 세종문화회관2
서울 종로 북촌한옥마을, 검푸른 지붕과 산봉우리가 천생연분이다.오래된 것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유럽인들 사이에 ‘Oldies but goodies’라는 말이 있다. 전통은 오래될수록 커지는 가치에 반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사라지기 쉽다는 것을 그들도 오랜 역사 속에서 배운 것일 테다. 우리 한옥은 이미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지킬 수 있는 고택이 충분히 많이 남아있다. 지켜야 할 것을 힘껏 지키는 것, 그리고 새로움에도 신구의 조화를 꾀하는 것이 우리 전통을 지킬 수 있는 기본 정신이 아닐까?
우리는 ‘Oldies but goodies' 대신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하고 외칠 수 있다. 전통은 거창한 무엇이기 이전에 잠시 맡아뒀다 물려줘야 하는 민족의 재산. 지금은 그리워하다 이따금 찾아가 만지고 느끼면 될 일이지만, 언젠가 그것을 막연히 상상만 해야 할 날은 부디 오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번 설에는 아침에 떡국 한 그릇을 든든히 비우고 전국 곳곳에 고택, 고궁을 찾아가 보자. 기대해도 좋다. 서까래, 아궁이, 솟을대문 등 한옥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려 할아버지, 할머니 곁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손자, 손녀 덕분에, 분명 삼대가 다 행복한 명절이 될 테니까.
설에는 삼대가 손잡고 고택, 고궁 산책, 어느 때보다도 기억에 남는 명절이 될 거예요!
글 트래블투데이 황은비 취재기자
발행2015년 02월 19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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