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이 생각나는 계절이 돌아왔다. 어린 시절, 팥죽은 동짓날이 되면 학교 급식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골 메뉴였다. 팥죽이 나오는 날이면, 팥죽이 나온 영문도 모르는 채 마냥 설렜다. 겨울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쫀득쫀득한 새알심을 잘게 씹어 먹으며, 아이들은 저마다 제 겨울 방학 계획을 털어놓기에 바빴다. 겨울철 팥에 대한 추억은 이뿐만이 아니다. 숨을 내쉬면 하얀 입김이 눈앞에 서릴 정도로 몹시 추운 날, 버스 정류장 한쪽 구석에서 친구와 함께 나눠 먹었던 따끈따끈한 호빵, 천 원어치만 사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노점의 붕어빵에도 달콤한 팥 앙금은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팥은 사계절 인기가 많은 곡물이지만, 특히 음기가 강한 겨울철에 영양을 보충하는 곡물로서 인기가 높다. 또 단팥빵, 팥시루떡, 팥양갱 등 팥이 들어가는 간식거리는 무궁무진하다. 겨울철 따뜻한 온기를 지켜주는 팥을 만나보자.
겨울철 건강 지킴이, 팥
팥은 우리 몸의 부족한 영양을 보충하고 피부미용에도 좋은 곡물이다
팥은 우리가 보통 ‘콩’이라고 말하는 대두와는 다르게 그 크기가 작고 붉다 하여 소두(小豆) 또는 적두(赤豆)라고 부른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붉은색이 귀신을 쫓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팥은 선명한 붉은 빛을 띠고 있어 잡귀를 몰아내는데 탁월한 곡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유독 세시풍속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동지팥죽을 비롯해 시루떡 등 명절 때나 제사 때 팥이 들어간 음식을 흔히 볼 수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팥은 영양을 보충하는 곡물로서 뛰어난 효능을 지니고 있다. 옛 문헌에 따르면 임금의 수라상에도 수시로 올라갔다고 한다. 팥에는 단백질과 당질을 비롯하여 탄수화물, 비타민, 미네랄 등 다양한 영양소가 풍부하게 포함돼 있다. 특히 식이섬유소가 풍부하여 소화를 촉진시켜주고 변비에도 효과적이다. 또 팥은 이뇨 작용이 뛰어나 체내의 불필요한 노폐물들을 배출시켜 준다. 지방이 축적되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에 다이어트 식품으로서도 각광받고 있다.
한편, 팥에는 다른 곡물에 비해 칼륨이 10배 이상 많이 들어 있어 혈압 조절에도 효과적이다. 이 밖에도 항산화 물질인 폴리페놀과 비타민B의 복합체인 콜린이 포함되어 있어 노화를 방지해주고, 췌장과 신장의 기능을 개선하여 암과 당뇨병을 예방한다. 뿐만 아니라 팥은 피부미용에도 효과적이다. 팥에 들어 있는 사포닌은 피부와 모공에 있는 오염물질을 없애주는 역할을 하여 아토피 피부염과 기미, 주근깨 등을 치료해준다. 조선시대 때 여인들은 피부를 관리하기 위해 팥가루를 이용하여 세안을 했다고 하는데, 오늘날로 치자면 팥가루가 스크럽제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팥은 혈액순환을 촉진시켜 피부를 촉촉하고 부드럽게 만들며 탈모에도 도움이 된다. 이만하면 겨울철 건강을 지키는 데 손색이 없다고 할 만하지 않겠는가!
한 해의 무사안일을 기원하는 날, 동지와 팥죽
우리 민족은 예부터 한 해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동지팥죽을 쑤어 먹었다
동지는 24절기 중 스물두 번째 절기로 일 년 중에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로 알려져 있다. 음력으로는 11월 중기(中氣)이고 양력으로는 12월 22일경이 절기의 시작일이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동지를 ‘다음 해가 되는 날’이라는 뜻을 지닌 ‘아세(亞歲)’ 또는 ‘작은 설’이라 부르며,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만큼이나 중요한 날로 여겨왔다.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거나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은 동짓날이면 귀신이 성한다고 생각했다. 동지는 해가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어서 다른 날보다 음(陰)의 기운이 강하다고 여겨졌다.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양(陽)의 기운이 필요했는데, 붉은색은 양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색깔이었다. 동짓날 붉은 팥죽을 쑤어 조상께 제사 지내고, 대문이나 벽에 팥죽을 뿌리는 풍습은 모두 음의 기운, 즉 귀신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다. 동지는 이처럼 잡귀를 물리치고 새해의 무사안일을 기원하던 날이었다.
동지 팥죽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슬로우 푸드다. 팥을 삶은 뒤 굵은 체를 이용해 팥의 껍질을 걸러 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체를 이용해 겉껍질을 모두 걸러 내면 아래쪽엔 고운 앙금이 생긴다. 여기에 쌀을 함께 넣고 죽을 쑤다가 죽이 잘 퍼질 때쯤 다시 새알심을 넣는다. 새알심은 찹쌀을 뭉쳐 경단처럼 만든 것으로 ‘옹심이’라고도 한다. 동지 팥죽에 새알심을 넣을 때에는 가족의 나이 수대로 넣는다는 풍습도 있다. 새알심까지 들어간 팥죽을 다시 정성 들여 쑤면 완성이다. 팥죽의 맛을 살리려면 소금으로 심심하게 간을 하되 설탕은 넣지 않는 것이 좋다. 팥이 지닌 본연의 단맛이 은은하게 배어나기 때문이다.
십수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쑤어 친척이나 이웃 간에 나눠 먹는 풍습이 남아 있었다. 가족과 이웃의 한 해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며 동지팥죽을 나눠 먹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런 풍경을 보기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올해 동지에는 온 가족 다 함께 모여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며 팥죽을 한 그릇 쑤어 먹어보는 것이 어떨까.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과 함께 나눠 먹는다면 더욱 훈훈한 겨울을 날 수 있을 것이다.
추위를 잊게 만드는 달콤함, 팥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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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의 호두과자는 팥 앙금을 넣고 호두 모양으로 찍어낸 간식거리다2
경주의 황남빵은 7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전통 있는 팥빵이다3
안흥찐빵은 가난했던 시절 배를 불리기 위해 먹기 시작해 국민 간식으로 자리 잡았다최근 들어 팥이 들어간 간식거리는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 팥이 지닌 은은한 단맛과 영양 때문이다. 겨울철 대표 간식인 호빵과 붕어빵을 비롯하여, 천안 호두과자, 경주 황남빵, 안흥 찐빵, 통영 꿀빵, 제주 오메기떡 등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지역의 명물 속에는 팥 앙금이 빠지지 않고 들어간다.
천안의 호두과자는 호두와 팥소, 밀가루를 주원료로 호두 모양으로 구워서 찍어내는 간식이다. 호두 한쪽이 들어가 호두과자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그 맛은 팥소에 따라 달라진다. 호두과자는 팥의 껍질을 여러 번 벗겨내고 가루를 낸 뒤 고운 것만 걸러내어 앙금을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다 구워낸 호두과자는 한지에 한 알씩 싸서 포장을 하는데, 한입에 먹기 좋아 기차역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다.
경주의 황남빵은 탄생한 지 70년이나 된 전통 있는 팥빵이다. 여전히 손저울을 사용하고 물과 밀가루의 비율을 엄격히 지킨다. 황남빵은 팥소를 넣은 둥글납작한 반죽 위에 빗살무늬를 새겨 멋을 낸다. 인공 감미료나 방부제가 전혀 들어가지 않아 건강한 간식으로 손꼽히며, 찌거나 삶지 않고 굽기 때문에 팥 고유의 향이 은은하게 살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황남빵은 팥소와 반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70퍼센트를 팥소가 차지한다.
강원 횡성의 명물인 안흥 찐빵은 한국전쟁 직후 먹거리가 부족했던 시절 탄생했다. 미국에서 밀가루를 원조받던 당시, 밀가루를 이용한 간식거리로 찐빵만 한 것이 없었다. 마을에서 나는 팥을 넣고 밀가루 반죽에 넣고 찌기만 하면 되니 만드는 법이 간단했고, 또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므로 인기가 높았다. 현재 안흥의 찐빵마을은 강원도를 찾는 많은 이들이 꼭 한 번 들러 가는 명소가 됐다. 똑같은 팥이 들어가지만 그 모양과 맛은 가지각색인 지역 곳곳의 팥빵들. 갓 구워져 나온 빵을 한 입 베어 먹으면, 그 따뜻한 온기와 달콤함이 온몸에 스며든다. 추위는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고 없다.
팥이 들어간 음식에는 유독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따스한 온기 가득한 팥죽과 팥빵으로 몸도 녹이고, 지친 마음도 녹여보는 건 어떨까요?
글 트래블투데이 박선영 취재기자
발행2019년 01월 10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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